지금은 대강절입니다. 대강절은 대림절이라고도 하는데 강림이라는 단어가 안에 있습니다. 그것은 오심, 즉 예수님이 오신다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Advent 라고 하는데 같은 뜻입니다. 그래서 전례적 색깔도 보라색, 왕이나 황제를 상징하는 색입니다. 12월은 성탄절에 예수님이 아기의 몸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친구가 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을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성탄절을 잘 알고 기다리지만, 예수님 당시의 성도들도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알고 기다렸습니다. 어떻게 알았을까요? 구약성경에 메시야가 오실 것이 자세히 예언되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헨델의 유명한 오라토리오 메시야에는, 구약과 신약에 나오는 메시야 예수에 대한 성경말씀이 아름다운 노래로 들어 있습니다. 메시야의 가사들만 묵상해도 예수님에 대해서 아주 잘 알게 됩니다. 메시야의 가사는 구약에 나오는 예수님에 대한 예언들,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예수님의 왕권과 통치를 모두 다룹니다. 그 가운데 오늘의 본문인 이사야 9장도 아주 유명한 노래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9장 1절에는 전에 고통받던 자들에게 흑암이 없습니다. 2절, 흑암과 사망의 그늘진 땅에 빛이 비취었습니다. 스불론과 납달리, 이방의 갈릴리는 모두 사람들이 무시하던 땅입니다. 중심지인 유다의 예루살렘에서 보면 아주 먼 북쪽, 변두리이기 때문에 이무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셨고 이 지역에서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래서 갈릴리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며 그가 그리스도이신 것을 안믿는 사람도 있었고, 베드로는 그의 말투가 갈릴리 방언인 것이 드러나서 예수님의 제자인 것이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참된 가치, 하나님이 지어주신 복된 정체성을 알지 못하고 그의 배경, 출신, 외적인 것, 소유, 경력 등으로 판단합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업그레이드 하기 위해 얼마나 애쓰는지 모릅니다. 만일 그런 것이 중요했다면 예수님은 로마에서 태어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변두리, 이방의 갈릴리에서 자라셨고, 집으로 삼으셨습니다.
3절 주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즐거움을 주십니다. 구체적으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누는 즐거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복을 주시기에, 우리가 받아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고 우리는 그에게 감사합니다. 구약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기쁨이 구체적으로 음식과 관련되어 묘사되곤 합니다. 우리는 영적인 것만 생각하기 쉬운데,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과 육신을 모두 창조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먹을 것이 필요한 것을 아시고 주십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내리시고, 예수님은 사람들과 자주 식사를 하셨습니다. 마치 잔치하는 것처럼 보여서 바리새인들은 먹고 마시기를 좋아한다고 욕했습니다. 자기들이 금식하는 것을 자랑하면서요.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 안에서 기뻐하는 성도들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과 세례요한의 차이를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그분들의 메시지는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한 데서 비슷하지만, 세례요한은 그것이 심판을 의미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이고, 불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면서 많이 금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기쁨과 은혜를 강조하십니다.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말씀하시면서, 사회에서 미움받고 소외된 사람들, 세리, 죄인, 병자들과 어울리셨습니다. 그들과 잔치를 베푸시며 함께 먹고 마시면서 즐거워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천국잔치를 나타내는데 바로 3절에 나오는 추수하는 즐거움과 같습니다.
특별히 탈취물을 나누는 즐거움이라고 되어 있는데, 흔히 전쟁에서 승리하면 전리품을 빼앗아서 승리자들끼리 나눕니다. 이것은 인류 역사의 모든 시기에 있었던 일이고 하나님 앞에 범죄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는 6, 8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탈취물은 유대인들이 다른 나라를 침략해서 빼앗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사야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36-37장에 나오는 앗수르의 침략입니다. 히스기야 왕 때의 일인데, 거대하고 무자비한 앗수르 제국이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킵니다. 그리고 남왕국 유다로 쳐들어와서 모든 도시들이 무너지고 예루살렘만 남았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구원하셔서 적군이 멸망하고 나라가 구원받은 사건이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사야 36-37장 외에도 열왕기하 18-19장, 역대하 32장에도 반복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천사들이 적군을 치시므로 그들이 도망가고, 그 자리에 그들이 남긴 재물들이 있어서 나누는 것입니다. 온 나라가 멸망할 것같은 극심한 위기에서 구원해 주시고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이, 탈취물을 나누는 즐거움입니다.
4절, 하나님은 무거운 멍에, 어깨의 채찍,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십니다. 미디안의 날은 사사기에 나오는데, 미디안이 괴롭힐 때 하나님이 기드온을 보내셔서 구원하십니다. 더 옛날로 가면,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노예로 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괴로움과 탄식, 눈물을 보시고 모세와 아론을 보내셔서 그들을 압제와 노예생활로부터 해방하십니다. 메시야 예수님이 오시는 것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5절 군인들의 신, 즉 군화와 피묻은 겉옷이 불에 지푸라기처럼 탈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시면 모든 전쟁이 끝나고, 전쟁에 썼던 군복이나 무기들이 불타서 없어질 것입니다. 이사야 2:4에는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쟁기를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 영감을 받은 조각상이 UN 본부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이 땅의 전쟁을 없애고 다시는 서로를 죽이지 않고 영원한 평화를 가져오시기 위해서였습니다.
6절 한 아이가 났고 한 아들을 주셨습니다. 아기보다는 아이라는 단어가 더 좋은데,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이라고 부르는 표현이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부르는 대목들이 있는데, 종보다는 아이라는 표현이 좋습니다. 하나님의 아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복된 표현이지 않습니까? 그 어깨에는 정사, 즉 주권, 권세, 능력을 메었습니다. 이 아이는 하나님의 권세를 가졌는데, 예수님은 그 권세를 자신이 아니라 남을 위해 쓰셨습니다. 그래서 병과 악령에 시달리는 사람을 구해주시고, 사회에서 멸시받는 사람들을 도와주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주십니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 Wonderful, 놀라운 분입니다. 온 세상을 강력히 영원히 다스리실 왕이 어린 아기로 우리 곁에 오시니 얼마나 놀라운지 모릅니다.
모사, Counsel은 역사 드라마에서 왕 곁에서 조언하는 책사같은 인물을 가리킵니다. 이사야에는 하나님이 하늘의 영들을 소집하시고 어전 회의를 여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사야가 소명을 받는 6장이 대표적인 장면입니다. 하나님이 “누가 우리를 위해 갈까”하고 물으십니다. 하나님이 지혜가 부족해서 조언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권능, 완전한 지혜, 그리고 심사숙고하시는 결정을 가리키는 장면입니다. 모사라는 단어는 이 회의에서 결정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 계획과도 연결됩니다. 특별히 이사야에는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인간 역사에서 이루시는 모든 것은 그 분의 뜻과 계획에 의해 일어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그의 메시야, 놀라운 모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메시야께서 오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에서 전능하심은 용맹하심, 강하심, 승리하심의 뜻입니다. 즉 강한 용사, 하나님의 전사와 같은 표현입니다. 이것도 세상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으로 용감하게 싸워 승리하시는 메시야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름입니다.
평강의 왕 - 메시야는 이 세상을 하늘의 권세로 제압하시고 전쟁을 끝내시고 불의한 자를 벌하시고 영원한 평화를 가져오십니다. 그래서 군화와 군복은 타버리고, 사람을 죽이는 칼과 창은 사람을 위하는 쟁기와 낫이 되고, 영원히 풍요롭고 즐거우며 평화로운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십니다.
7절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합니다. 그분의 다스리심과 평강이 끝없이 더할 것입니다. 다윗의 보좌와 나라에 영원히 군림하십니다. 그런데 그 왕권은 무력과 군사력으로 지탱되지 않습니다. 세상의 많은 권력자들이 강제력을 동원해서 자기 권력을 굳건히 하고 평화를 선전했지만, 예수님의 왕권은 그런 무력으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것은 영원히 정의(justice)와 공의(righteousness)로 보존됩니다. 여기서 정의와 공의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가리키는 중요한 두 원리입니다. 시편과 이사야에 정의과 공의라는 표현이 나란히 나오는 곳이 많습니다. 시편에는 정의와 공의가 하나님의 보좌의 기초입니다 (시 89:14, 97:2).
정의는 법적이고 사회적인 용어입니다. 이전 성경에는 공평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율법에 의거한 사회 정의와 배려에 근거합니다. 이 정의가 지켜지는 곳에서는 누구도 약하다고 해서 피해를 당하지 않습니다. 만일 힘있는 누군가가 약한 자를 착취하고 고통을 주면 하나님의 정의에 의해 징계를 받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가난한 자, 고아, 과부, 이방인에 대한 배려를 늘 이야기합니다. 다니엘에서 악한 왕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의 자비를 입는 비결도 가난한 자를 돌보는 것입니다.
공의(righteousness) 는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할 때 그 의로움입니다. 그 단어의 본래 뜻은 올바른 관계이며, 매우 인격적이고 관계적인 단어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올바르게 있는 것이 언약의 백성에게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약속하셨습니다. 이 언역이 지켜지기 위해 하나님은 늘 신실하십니다. 문제는 인간인데, 인간이 이 언약을 버려도 하나님은 버리시지 않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십니다. 여호와의 열심은 질투라고 번역되기도 합니다. 아가 8:6에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열심, 그의 질투는 불과 같아서 아무도 끌 수 없습니다. 그가 뜻하시면 이루어지는데, 그런 열심과 질투를 가지시면 누가 막겠습니까?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 주님의 열심으로 메시야를 통한 구원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복된 대강절, 예수님의 강림을 기다리면서 더룩 그분을 가까이 하고 경건하게 지내는 복된 절기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