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지금 요한복음 1장을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영원히 아버지의 품속에 계셨다가 때가 되자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참 빛과 생명이신 그분이 아기 예수로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과 똑같은 삶을 사셨습니다. 어린 아기 시절,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지나 청년이 되셨고, 마침내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을 드러내실 때가 왔습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그 장면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처음 나타나신 대목은 바로 그분의 세례였습니다. 세례 요한이 그분에게 세례를 주었고, 성령께서는 비둘기의 모습으로 그 위에 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에 처음으로 하신 일은 바로 제자들을 부르신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을 만나신 장면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함께 4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튿날”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요한복음 1장에는 특이하게도 “이튿날”이라는 표현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이는 요한이 예수님의 사역이 얼마나 긴급하고 계획적으로 잘 진행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려는 의도인 것 같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소개한 그 이튿날,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십니다. 그 이튿날, 예수님은 안드레와 베드로를 만나십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이튿날”이 바로 그다음 날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사역이 주님의 계획 가운데 착착 진행된다는 느낌을 줍니다. 또한 다르게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루도 허투루 낭비하지 않으시고 매일매일을 알차게 사용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예비하셨던 일들이 매일 잘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는 유대 베다니입니다.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푸는 장소는 유대 지방 남쪽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에 계시다가 굳이 그곳까지 내려오신 것입니다. 유대 지방까지 먼 길을 여행하여 세례를 받으시고 며칠을 지내신 뒤, 이제 다시 북쪽 지방인 갈릴리로 돌아가려 하시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걸어서 다녔으니 며칠이 걸리는 상당한 여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갈릴리로 돌아가려고 길을 나선 그 과정에서 빌립을 만나신 것입니다.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Follow me)”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에는 간단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더 자세한 대화가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뒷부분에서 빌립이 예수님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더 깊은 대화가 오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주신 메시지는 분명했습니다. “나를 따르라.” 그러자 빌립은 바로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방식은 대개 이와 같습니다. 길게 설득하지 않으십니다. “나를 따라오면 좋은 일이 있을 거야”라거나 “이렇게 하면 어떨까?” 하고 권고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주 단호하고 확실하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고, 제자들은 그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제자들의 위대한 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인간적으로 능력이 뛰어나거나 대단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 하실 때 즉시 순종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모두 뒤로하고, 심지어 생업이나 학업, 가족 등 자신의 삶을 이루던 모든 부분을 내려놓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자들이 훌륭한 점입니다. 빌립도 그와 같이 예수님을 따라 첫 제자들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44절에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입니다. 오늘 읽지는 않았지만 바로 앞선 본문에서 안드레와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데, 그 과정이 오늘 본문과 비슷합니다. 안드레가 베드로를 초청했듯이, 오늘 본문에서도 빌립이 나다나엘을 초청합니다. 안드레는 형제인 베드로에게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말했고, 베드로는 그 말을 듣고 선뜻 따라나섰습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에서도 빌립이 나다나엘을 초청합니다.
그들이 모두 갈릴리 사람이라는 점에 대해, 예수님께서 자기 마을 사람들을 우대하신 것은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꼭 그렇다기보다는, 예수님께서는 함께 생활하며 동역할 수 있는 사람들을 제자로 뽑으신 것입니다. 그들은 원래 갈릴리 지방 출신이었고, 예수님께서 첫 사역을 시작하신 곳도 바로 갈릴리였습니다. 갈릴리 지방을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시다가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예루살렘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렇기에 첫 사역은 갈릴리 지방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갈릴리 출신 사람들을 제자로 많이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예루살렘과 같이 모두가 아는 중심지가 아니라, 사람들이 멀리하고 멸시하던 ‘갈릴리 촌’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갈릴리 출신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조금 얕잡아보는 경향이 있는 지역에서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셨다는 사실은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여기는 세상적인 조건이나 능력에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적으로는 대단치 않게 여겨지고 무언가 부족해 보이는 사람들, 그러한 배경을 하나님께서는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누구라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순종’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 하실 때, “주님, 비록 제가 부족하지만 주님께서 저를 불러주시니 따르겠습니다”라고 응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유, 제가 뭐라고요” 하며 겸손을 표하지만, 실제로는 순종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실 그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하나님, 저는 안 돼요. 저는 그럴 수 없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겸손이라기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부족한 사람이라도 사용하실 수 있고, 변화시키실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의 빌립처럼 주님을 따르면, 비록 부족한 갈릴리 사람이라도 주님은 사용하십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벳새다, 즉 ‘촌에서 온 사람들’이라 불리던 지역의 사람들로부터 그분의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45절에서 빌립은 나다나엘을 찾아가 이릅니다. 친구를 초청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초청받았듯, 빌립도 그렇게 합니다. 빌립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며, 취미로 할 일도 아니고, 자신의 삶 전체를 드려야 하는 일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온전히 다스리시는 것이 분명히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지난날의 삶을 그치고 변화되어 새 삶을 살아야 하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나 자신의 삶을 드려야 합니다. 빌립은 이 길을 나서면서 ‘누구와 함께 갈까?’ 생각하다가 나다나엘을 찾아간 것입니다. 본문에 따르면 그는 굳이 나다나엘을 찾아갔습니다. 평소 나다나엘이라면 자신과 함께 이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뒷부분을 보면 그 점이 더 명확해지는데, 나다나엘은 평소에도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고 말하며 기대했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 역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빌립은 자기가 아는 나다나엘이 그런 사람임을 알았기에, ‘이 친구라면 분명히 나처럼 예수님을 따라나설 거야.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고 초청했습니다. 나다나엘은 바돌로매와 동일 인물일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의 이름, 나다나엘(Nathanael)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좋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엘(El)은 하나님을, 나단(nathan)은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잠시 언어유희를 섞자면, ‘하나님이 나다’라는 뜻은 아닙니다.) 영어 이름 시어도어(Theodore)나 여자 이름 도로시(Dorothy)도 같은 뜻입니다. 이 ‘하나님의 선물’ 나다나엘에게 빌립이 가서 예수님을 소개한 말이 이렇습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 성경 전체를 요약하는 당시의 관용적인 표현이었습니다. 모세는 신명기 18장에서 하나님께서 또 다른 선지자를 일으키실 것이라고 기록했고, 그 외에도 수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공의와 자비, 그리고 ‘여호와의 날’이 이 세상에 펼쳐질 것을 예언했습니다. 빌립은 바로 그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율법과 선지자에 기록된 그분이 우리 앞에 나타나셨다고 소개한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안드레는 베드로에게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말했습니다. 메시아와 그리스도는 같은 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특별히 보내주시는 왕이자 구원자를 의미합니다. 안드레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표현한 것을, 빌립은 “율법과 선지자에 기록된 그분을 만났다”고 전한 것입니다. 그리고 덧붙여 말합니다.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나사렛에서 왔다는 말을 듣자 나다나엘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사람들이 그만큼 나사렛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작고 보잘것없어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마을 출신이라는 말에, 나다나엘 역시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출신과 배경, 교육 같은 것이 어느 정도 괜찮아야 무슨 역할을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처음에는 반문했습니다. 이것이 아마 예수님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인 선입견이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대단한 배경을 가진 곳에서 나신 것이 아니라 나사렛 출신이라는 사실 때문에 처음에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나다나엘도 그러했습니다.
그러자 빌립이 말합니다. “와서 보라(Come and see).” 이 말은 바로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입니다. 오늘 읽지 않은 앞선 본문에서 안드레와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께 “어디 계십니까?” 하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와서 보라”고 하셨습니다. 아마 제자들도 예수님의 그 말씀을 보고 배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도 똑같이 말합니다. “내가 이것저것 설명하는 것보다 네가 직접 와서 보면 알게 될 거야.”
빌립도, 안드레도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초청하고 인도했습니다. 길게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메시아이시다.” “그게 무슨 뜻인데?” “와서 보라.” 이처럼 자기가 체험하고 본 것을 나누었습니다. 이것이 사실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교회가 하는 수많은 봉사, 교육, 선교 등 많은 사역이 있지만, 결국 이 모든 것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고 초청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세상적인 조건이나 프로그램이 아니라, 오롯이 예수님만을 소개하기를 원합니다. “와서 보십시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이 어떻게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시고 새 생명을 주시는지,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우리에게 전해주시는지 직접 와서 당신의 눈으로, 당신의 삶으로 확인해 보십시오.”
그렇게 말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먼저 보아야 합니다. 내가 보지 못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알고, 감사하며, 마음에 만족과 기쁨이 가득한 복된 자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내가 먼저 영접한 예수님이 이렇게 좋은 분입니다”라고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으로 우리의 역할은 충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대단히 큰일이라기보다, 그저 각자의 자리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신실하고 정직하게, 정성을 다해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살며 그 모습을 보여주어, 사람들에게 “와서 보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우리의 삶이 될 것입니다.
47절에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말씀하십니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대단히 좋은 칭찬의 말씀입니다. 나다나엘을 처음 만나시는 순간이었지만, 그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신약성경에서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킵니다. 정치적, 지리적으로는 유대 땅, 유대인이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민족을 일컬을 때는 ‘이스라엘’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 “이는 참 이스라엘이다”라는 말은 최고의 칭찬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시고 구약 성경에서 약속하신 주님의 뜻이 펼쳐질 대상이 바로 이스라엘인데, 이 사람이 바로 그 ‘참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 여기서 ‘간사하다’는 말은 ‘속임수’를 뜻합니다. “그 속에 속이는 것이 없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칭찬을 해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 마음속에도 사람들을 대할 때 순전하고, 어떻게 보면 단순하고 소박하게, 속이지 않고,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으며, 앞뒤가 다르지 않게 대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실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매우 간단한 일이고 어린아이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기도 모르게 마음속에 속이는 마음이나 간사함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꼭 그 정도는 아닐지라도, 사람들을 순전하고 솔직하게 대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환경이나 조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럴 때도 분명히 있습니다. 사회생활과 직장 생활을 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도 모르게 관계가 솔직해지지 못하고 닫힐 때가 많지만, 그렇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원래 야곱의 다른 이름인데, 야곱은 속이는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형도 속이고, 아버지도 속이고, 외삼촌과도 속고 속이는 관계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변화되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런 배경을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하신 이 말씀이 더욱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48절에 나다나엘이 묻습니다.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처음 만났는데 자신을 다 아는 것처럼 말씀하시니 나다나엘이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예수님께서 그를 보셨다는 것은 분명 그분의 영적인 능력을 보여줍니다. 물리적인 거리상 도저히 볼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예수님은 이미 다 보고 계셨습니다. 실제로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아마 나다나엘은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며 성경 말씀을 가까이했고, 그렇게 무화과나무 아래 있기를 즐겼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모습을 보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나다나엘은 깜짝 놀라 49절에서 고백합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는 그 한마디 말씀에 이처럼 뜨겁고 담대한 고백을 합니다. 물론 그 사이에 더 자세한 내용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알아가고, 그분의 메시지와 진심, 백성을 향한 뜨거운 마음,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 온전히 자신의 삶을 드리는 그 메시아의 모습을 보면서, 또한 그분과 함께 생활하는 제자의 삶에 자신을 헌신하면서 나온 온전한 고백일 것입니다. 이 고백은 그 순간의 고백이었을 수도 있고, 그의 삶 전체를 통해 지속된 고백이었을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당신은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참으로 확실하고 정확한 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을 만나시고 병을 고치시며 하나님 나라를 전하신 것은, 단순히 랍비(선생님)로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참된 왕으로서 하신 일입니다.
그분을 처음부터 알아보고 그분의 초청을 받아 첫 번째 제자가 되었으니, 나다나엘과 안드레, 베드로와 빌립은 참으로 복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첫 헌신된 친구들이 되어 그분과 함께 생활했던 이분들은 참으로 귀하며, 우리도 그들을 조금이나마 닮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50절에서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그리고 51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진실로 진실로’는 ‘아멘, 아멘’이라는 뜻입니다.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이 말씀은 참으로 귀합니다.
먼저, 하늘이 열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이 땅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아버지의 품, 그 높은 보좌에서 이 낮은 땅으로 내려오셨기에 하늘은 이미 열렸습니다. 하늘이 닫히면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애가에는 우리의 죄가 하나님으로 하여금 구름으로 자신을 가리게 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죄의 문제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와 화목하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이 하늘을 여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늘이 열린다’는 표현은 단순히 문을 여는 것이 아니라, 장막을 찢었다는 강력한 표현입니다. 본래는 열리지 않는 것을 하나님께서 힘으로 찢어 여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만큼 불가능한 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셨기에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셨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늘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갈 수 있는 길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할 것이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사람의 아들(인자)”이라고 칭하십니다. 나다나엘이 말한 “하나님의 아들”은 세상의 왕이라는 표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신 것은, 역설적으로 그분이 참 하나님이심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 한정하여 “당신은 인간의 아들입니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곧 “당신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십니다”라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참된 모습이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사람의 아들, 인자 위에 천사들이 오르내릴 것이라는 말씀은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의 꿈을 떠올리게 합니다. 외삼촌 집으로 가는 외로운 여정길에서, 앞날이 캄캄했던 청년 야곱은 걱정거리를 안고 돌을 베개 삼아 잠이 들었습니다. 꿈에 그는 하늘이 열리고 사닥다리가 땅에서 하늘까지 닿아 있는 것을 보았고, 그 위로 천사들이 오르내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복과 꿈과 인도하심이라는 좋은 선물을 가지고 이 땅의 야곱에게 주기 위해 천사들이 사다리를 오르내린 것입니다. 바로 그 광경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사닥다리가 아니라 ‘인자’, 즉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 자신이 그 역할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연결되는 우리의 다리가 되시고 사다리가 되십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께로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그분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다른 이름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인도하려 할 때, “세상에 다른 종교도 많고 철학도 많은데 왜 꼭 예수님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받곤 합니다. 그 이유는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께로 인도할 수 있는 유일한 사다리요, 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 아무리 노력하고, 경건과 기도와 선행을 많이 쌓아도 인간의 본성으로는 하나님께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과 영원히 단절된 관계가 되었지만, 이 사이를 이어주시는 유일한 사다리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초청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에게, 지금은 다 모르겠지만 앞으로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 사다리이신 자신에 대해 보여주실 것이기에 이와 같은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첫 번째 제자들의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우리도 이 제자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그들을 본받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부족했지만, 오로지 예수님께 헌신하고 순종함으로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 순종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왕이심을 알게 되었고, 나아가 그분이 하늘과 연결하는 사다리가 되어 그 위로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도 이 시간 함께 기도할 때, 예수님의 초청을 받아들인 것을 감사하고 기뻐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