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게시판

오늘은 부활절 후 50일째인 오순절이며 성령강림 주일 입니다. 제자들이 한 곳에 모여서 기도하고 있었는데 성령님이 오십니다. 그 집을 가득 채워서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소리가 들렸고 불의 혀와 같이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의 머리 위에 임하였습니다. 그들이 성령님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서 각기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오순절 명절이었기 때문에 세계 각처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이 자기 지역의 언어로 말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이 갈릴리 사람들이 내가 쓰는 언어를 말할 수 있는가 깜짝 놀랐고 어떤 사람들은 술 취했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각 언어로 말하는 내용은 하나님의 크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며, 하나님이 구원해 주시는 놀라운 일들을 제자들은 각기 다른 언어로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일어나서 소리를 높여서 말합니다. 때가 제 3시, 아침 9시니 술 취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선지자 요엘을 인용합니다. 성령님이 지혜를 주셔서 예언서의 내용을 알게 하시고, 그것을 담대히 전할 수 있는 믿음과 용기도 주십니다.
17절에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마지막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이때가 2000년 전인데 어떻게 벌써 마지막 때라고 하는 것입니까?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종말은 모든 인간의 역사, 심지어 우주와 모든 피조물의 역사가 끝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피조물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에는 시작이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나는 때도 있습니다. 그것이 종말의 때입니다. 사람들은 종말에 관심이 많아서, 마지막 떄를 다룬 영화들도 많습니다. 인류 문명이 언젠가 어떤 이유로 끝날 것이다. 그것은 엄청난 재앙의 날이 될 터인데 그런 것을 영화로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재앙의 원인도 다양합니다. 옛날에는 가장 많았던 것이 핵전쟁이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하늘에서 소행성이 떨어져서 모든 생물이 멸망하는 시나리오도 있습니다. 바이러스가 퍼져서 인류가 멸종하기도 하고 기후변화로 환경이 변해서 지구에 더이상 살 수 없게 되기도 합니다. AI가 발전해서 모든 인류는 다 멸망하고 컴퓨터와 로봇만 살아남는 그런 미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이 종말에 대해서 생각하기를 좋아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종말은 하나님께서 가져오시는 날입니다. 그 날은 하나님의 모든 계획과 구원과 심판이 완성되는 날입니다. 하나님의세상을 향하신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고 계시되며,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심판과 상급을 받는 날입니다. 그 마지막 때는 인간의 시간으로 예상할 수 없습니다.우리의 달력으로는 오늘 본문은 2000년 전의 일이기 때문에 마지막 때가 아니라고 하겠지만, 성경의 종말은 인간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에서 일어납니다. 하나님께는 1000년이 하루 같아서, 인간의 시간에 얽매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시간을 초월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달력의 시간으로는 2000년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이미 그때가 마지막 때입니다.
종말론은 성경의 핵심적인 주제입니다. 2000년 전이 아니라 사실은 창세기 6장에서 이미 마지막 때입니다. 창세기 6장은 노아의 홍수에 대한 말씀인데, 성경의 창세기에서 불과 몇 페이지 넘기지 않아서 이미 하나님은 6:13에서 “끝날이 이르렀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노아의 때가 마지막 때인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의 죄악이 가득 찼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노아 때에 있었던 죄는 “포악함”이라고 불립니다. 폭력, violence 라고 되어 있습니다. 폭력으로 서로를 죽이고 헤치고 빼앗는 죄악이 너무나 이 땅에 가득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땅을 정결하게 하기 위해서 거의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멸하십니다. 그러므로 이미 저 옛날 노아 때부터 하나님은 피조물의 마지막 때를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베드로는 지금이 마지막 때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서도, 베드로 전후서도 예수님이 오신 그 때가 마지막 때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때가 이미 마지막 때입니다.
왜 그것이 마지막 때이고 종말입니까?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대면하면 그것이 마지막 때입니다. 완전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 그분의 전능하심 앞에서 부족하고 죄 많은 우리 인간은 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태양도 지으셨습니다. 우리는 태양도 너무나 눈부시고 강렬해서 똑바로 쳐다보지 못합니다. 하물며 그 태양을 만드신 하나님은 얼마나 능력이 많고 강력하시겠습니까? 만약에 우리가 그분의 영광 앞에 선다면 즉시로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바로 앞에 서서 그분의 능력에 직접 노출된다면 그것이 우리의 종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마지막 날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시간으로 언제인가에 관계없습니다. 하나님의 현존에 직접 들어가는 것이 바로 마지막 날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선다면 더 이상 시간의 흐름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에 요셉이 마리아와 가는데 신기한 경험을 합니다. 예수님을 가진 마리아와 함께 어떤 마을에 들어가는데 갑자기 모든 시간이 정지해 버립니다. 그래서 밥을 먹던 사람은 그 자세로 가만히 있고 동물들도 물을 마시다가 가만히 있습니다. 시간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태아로서 그 마을에 들어갔을 때 시간마저 그분 앞에 정지해버린다고 하는 그런 신기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처럼 우리들이 흘러가는 인간의 시간과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 선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신다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영광으로 침투해서 들어오신다면, 그 시간이 곧 모든 피조물의 종말입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의 은혜가 완전히 드러나는 날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 앞에 모든 피조물이 무력하게 노출됩니다. 그분 앞에서 인간의 시간은 정지되어 버립니다. 모든 인간에게 그것은 마지막 종말의 때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 바로 그러한 날입니다.
그 마지막 날에 하나님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자녀들은 예언하고 젊은이는 환상을 보고 늙은이는 꿈을 꾸리라. 자녀들이 예언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하고 들을 것입니다. 그리고 청년들은 환상을 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위대한 일에 대해서 눈으로 볼 것입니다. 그리고 꿈도 꿀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서 꿈꿀 것입니다. 여기에서 누가 뭘 하냐? 자녀들은 예언하고. 젊은이는 환상을 보고 늙은이는 꿈을 꾸고 이렇게 꼭 매치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결국 모든 세대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할 것이고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예언도 하고 환상도 보고 꿈도 꿀 것입니다.
19절에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 즉 표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sign 이 되겠습니다. 그와 같은 기사와 징조가 베풀어지는데 피와 불과 연기입니다. 뭔가 무서운 그리고 엄청난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피와 불과 연기에 해당되는 장면이 3개 있습니다 첫번째 번제입니다. 저 옛날 구약 시대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제사 드릴 때 번제는 소를 자릅니다. 피가 흐르죠 그것을 모두 완전히 하나님께 불태워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러므로 불이 있고 연기가 있습니다. 그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면서 온전히 하나님께 바친다고 하는 아주 특별한 제사입니다. 왜 그런 제사를 드립니까? 인간은 죄가 많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그 바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죄의 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래서 피를 흘려야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리고 육체의 생명은 피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피를 흘림으로 그 생명을 하나님께 값으로 드림으로 죄의 삯을 그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동물의 제사를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번제입니다. 번제를 라틴어로 holocaustum이라고 말합니다. 2차 대전 때 유대인들 대학살을 holocaust라고 말합니다. Museum 이 바로 옆에 DC에도 있습니다. 본래 뜻이 번제입니다.
피와 불과 연기 여기에 대한 성경의 장면의 두 번째는 예루살렘의 멸망입니다. 예루살렘에 바벨론 군대가 쳐들어와서 많이 죽이고 포로로 사로잡았습니다. 그 궁전과 성전을 다 파괴하고 불태웠습니다. 끔찍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해방시키시고 나라를 세우셔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만들어 주셨는데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의 신들과 이방의 불의를 쫓았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사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이 세상의 물질과 돈과 쾌락을 사랑해서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이 여러 차례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경고하시고 말씀하셔서 돌아오라 회개하라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수없이 말씀하셨습니다. 그 귀한 기록들이 우리의 예언서에 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수백 년 동안 기다리셨습니다. 그러나 그 죄가 점점 더해갑니다. 그래도 그들은 우리는 괜찮을 거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고 우리 성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의 성전이 있다. 전 세계에 단 하나밖에 없는 성전입니다. 그 성전에서만 온전히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이 성전이 우리 도시에 있는 한 우리 도시는 무사할 거야, 적들이 아무리 쳐들어와도 우리는. 괜찮을 거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은 그 도시도 버리시고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건축물에 계시지 않습니다. 아무리 웅장한 성전이라도 하나님은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바벨론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그 모든 성전과 도시를 불태워버렸습니다. 그래서 피와 불과 연기 기둥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그것은 엄청난 트라우마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섬기는 성전, 그들의 사랑이요 정체성이었던 성전이 불타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그야말로 지옥과 같은 반경이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유대인들의 믿음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은 손으로 지금 성전에 계시지 않는다. 인간의 죄악은 너무나 커서 하나님께서 완전히 그분의 한 집도 불태워 없애고 있을 만큼 인간의 죄악은 엄청난 것이다. 이 주위에서 용서받고 구원받을 길은 오로직 하나님의 은혜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그들은 철저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피와 불과 연기의 기사와 징조에 대해 성경에 나오는 세 번째 장면은 바로 이 불타는 도시에서 배우고 영감을 받은 것입니다. 바로 다름 아닌 지옥입니다. 지옥이야말로 불과 피와 불과 연기의 끝판왕입니다. 사람들은 지옥을 싫어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지옥 얘기는 싫어합니다. 지옥은 그야말로 모든 것이 영원히 불타는, 말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곳입니다. 그래서 지옥에 가라는 것이 가장 큰 욕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옥을 선입견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지옥 어떤 공간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그 공간은 하나님도 안 계시고, 영원한 고통과 치욕과 불타오르는 것만 있는 끔찍한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 그런 곳을 만드실 수 있느냐고 하면서 그런 하나님은 믿지 않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지옥이라는 말은 일단 신약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구약에는 그렇게 많이 나오지 않다가 신약에 있어서 갑자기 나온 많이 나오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중요한 단어들입니다. 예를 들어서 성령이라는 단어가 그렇습니다. 부활이라는 단어도 신약에 갑자기 많이 나옵니다. 마귀 귀신 이런 단어들도 신약에 갑자기 많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오시자 그런 영적인 악한 세력들도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신약에서 갑자기 많이 나오는 단어가 지옥입니다 사람들은 지옥을 싫어합니다. 버트런트 러셀 같은 유명한 무신론 철학자는 예수님이 지옥을 말씀하시기 때문에 기독교를 못 믿겠다고 합니다.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안 믿겠다고 하니 교만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실 지옥에게 대해서 가장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지옥은 그저 영원히 불타오르는 고통만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지옥도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뜨거운 마음이 있는 곳이 지옥입니다.
하나님은 하나이십니다. 그 말은 하나님이 둘 셋 여럿이 아닌 하나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 되고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을 섬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나라고 할 때에는 또 하나님이 2 분의 1, 3분의 1이 아닌 하나라는 뜻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2분의 1, 3분의 1로 나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반으로 딱 잘라서 반은 사랑이고 반은 진노고 그렇게 나눌 수 없습니다. 반은 천국 반은 지옥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곳에서 온전하십니다. 천국은 당연히 하나님이 온전히 계시는 곳입니다. 그런데 지옥도 하나님을 떠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옥에서도 다스리십니다. 지옥은 하나님의 진노의 장소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사랑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하면 그저 온유하고 친절하고 품어주는 것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진노가 함께 갈 수 있습니다.
혹성탈출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Planet of Apes 입니다. 옛날 버전도 있고 2011년에 reboot 된 버전에는 침팬지가 인간과 같은 지능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침팬지가 좋은 사람들과 같이 집에서 가족으로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가족의 할아버지가 치매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깥에 나갔다가 실수를 해서 이웃집이랑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이웃집의 아저씨가 그 할아버지를 막 밀칩니다. 그런데 그 집안에서 창밖으로 내다보고 있던 그 침팬지가, 사랑하는 할아버지가 폭력을 당하는 것을 보고 갑자기 진노하면서 집 밖으로 튀어나갑니다. 그래서 그 이웃을 공격하고 결국 수용소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저는 사랑과 진노가 함께 갈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사랑은 물론 온유하고 친절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 해를 당한다면 진노로 바뀝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하나님의 진노와 같이 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에 대해서 진노하십니다. 진노하시지만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결과가 하나님의. 불타오르는 질투입니다. 아가 8:6,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불타오르는 진노와 사랑이 지옥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지옥은 하나님이 안 계시는 곳이 아닙니다. 지옥도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심장 한복판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지옥은 하나님의 사랑에 불타오르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정결하게 됩니다. 그렇게 불타오르는 것이 하나님께는 홀로코스트, 번제입니다. 비록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끔찍한 광경이지만 그것은 하나님께 바쳐지는 번제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십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진 번제를 하나님은 다시 살리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죽어야만 살아납니다 하나님 앞에서 대충 살아나려고 도망가는 것이 죽음의 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우리의 생명까지도 주님께 드려서 주님께 모든 것을 바치는 번제물로 드릴 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고 부활시키시므로 새 생명을 주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노와 지옥불의 본래 의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하늘의 기사와 땅의 징조인 피와 불과 연기입니다.
20절에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나옵니다. 주의 날, 여호와의 날입니다.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중요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오는 날이 언제입니까? 구약에서는 그날을 여호와의 날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신약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해당되는 구약의 표현이 여호와의 날입니다. 여호와의 날 때로는 그냥 그 날이라고 말씀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날은 크고 영화로운 날이 됩니다. 그런데 그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됩니다. 땅에서 불과 연기 기둥이 하늘로 오르면 그것이 하늘을 가리어서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이 될 수 있습니다. 또는 심지어 하나님께서 직접 그 천체들을 치셔서 해와 달이 어두워지고 피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하늘의 권능이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인간 세계만 종말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저 하늘과 우주 모든 피조물이 모든 권세가 땅에 떨어집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이 새롭게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새하늘과 새 땅이 올 것입니다.
21절이 가장 중요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누구든지”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메시지입니다. 자녀들은 예언하고 젊은이는 환상을 보고 늙은이는 꿈을 꾸리라. 무엇을 예언하고 무엇을 보며 무슨 꿈을 꿉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이 환란과 심판과 진노 가운데서도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주의 이름이 구약에서는 여호와의 이름입니다. 신약에서는 예수의 이름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진노, 피와 불과 연기에서 구원받는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비교적 경건하게 의롭게 정의롭게 산다고 노력해도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은 온전히 은혜로만 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상대적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대충 비교해서 내가 저 사람보다는 낫지, 저 사람보다는 내가 의롭고 선하지 하는 식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친노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고 심판을 받아 멸망합니다. 그러므로 그 안에서 구원받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방법은. 오직 하나입니다 주의 이름,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 끔찍한 심판과 환란과 진노를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당하셨습니다 우리가 당해야 할 것들을 예수님께서 대신 당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을 그것에서 풀어주십니다. 그래서 예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을 어디로부터 받습니까? 죄, 죽음, 마귀, 지옥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그러나 가장 본질적으로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우리는 구원받아야 합니다. 우리를 가장 무섭게 멸망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마귀나 지옥보다 더 두려운 분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진노 앞에 서면 우리들은 즉시 불 앞에 있는 지푸라기처럼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멸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넉넉히 구원하실 수 있고 우리를 구원하기 원하십니다. 그 방법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입니다. 예수 이름을 불러서,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무엇으로부터 구원받습니까?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한 맞습니다. 왜 하나님의 진노인가? 인간의 죄악 때문입니다. 인간은 서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죽이고 파괴하고 전쟁하는 것이 일상입니다. 지금까지의 인간 역사가 다 그렸습니다. 문명의 옷을 입고 있어도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 인간의 죄성은 하나님 앞에 멸망당해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피와 불과 연기가 있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살아날 길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외에는 없습니다. 오직 추의 이름을 부르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습니다.
로마사 10:13에서 이 말씀을 다시 인용합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고, 주님은 모든 사람을 위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오늘 성령님이 임할 때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이것이 예언이요 환상이요 꿈의 내용입니다. 베드로가 전하는 소식이 이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쁜 구원이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이루어졌고 이제는 성령님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 전해질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구원의 소식을 믿고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기 바랍니다. 이 세상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습니다. 거기에서 오직 주의 이름, 예수 이름을 부르는 자만이 받을 수 있는 이 구원을 세상에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부활절 후 6째 주일입니다. 다음 주가 오순절, 성령강림 주일입니다. 지난 목요일이 예수님이 승천하신 날이 됩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마지막 제자들과 나누신 대화를 살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1장 1 절 입니다. “데오빌로여”라고 시작합니다. 데오빌로 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 입니다. 사도행전은 데오빌로에게 보낸 편지의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데오빌로라는 이름을 라틴어로 그대로 옮기면 아마데우스입니다. 모차르트의 미들 네임입니다. 모차르트의 원래 세례명이 볼프강구스. 데오필루스 모짜르투스입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이것은 누가 복음입니다. 누가복음도 데오빌로에게 보낸 편지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과 사도 행자는 둘 다 누가의 저작이고 두 편이 이어져서 하나의 왕 작품으로 완성되는 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행하시고 가르치시는 것을 시작하심부터 보도합니다.
2 절에는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셨습니다. 사도라는 말이 사도행전에서 매우 많이 나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단 한 번씩만 나오는데 누가복음 그리고 사도행전에는 사도라는 말이 갑자기 매우 많이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라는 말은 보내심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가서 아이스크림을 사와라 하면 그 사람은 아이스크림 사기 위해서 보냄 받은 사람입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12 제자라고 많이 불렸습니다. 제자들은 배우는 사람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는 그들은 사도가 됩니다.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나 바울은 어느 곳에 갈 때 자기들의 이름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 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고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원래 교육을 많이 받은 엘리트입니다. 자기 유대 사회에서 높은 지위로 잘 살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나는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그가 미쳤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후서 5:13에서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위한 삶, 나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서 사는 삶을 주위 사람들은 미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헌신하는 삶의 올바른 모습입니다.
3절에는 예수님이 고난받으신 후에 확실한 많은 증거로 살아계심을 나타내서 40일 동안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 예수님께서 복음을 통해서 전하신 가장 귀한 소식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사도행전의 맨 마지막 부분인 28:31에 바울이 생의 마지막을 로마에서 보내고 곧 순교하게 될 것인데 그가 한 것도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사도행전의 맨 첫 부분부터 끝 부분까지가 모두 하나님의 나라로 시작하고 끝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 복음의 중심이고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도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한 것입니다. 이것은 킹덤, 하나님의 왕국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왕으로서 다스리시는 나라를 전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왕으로서 다스리실 때 하나님은 그분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다스리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결국 예수님이 왕이신.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도 40일 동안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실 때 그것은 하나님이 왕이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으로서 다스리시는 나라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4절에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말이 매우 중요합니다. 누가 복음 끝부분에서도 예수님은 이 성에 머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마태, 마가, 그리고 요한복음과 차이가 있는 부분입니다. 다른 세 복음서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자들이 갈릴리에서 뵙습니다. 그들은 갈릴리로 일단 돌아갑니다. 예루살렘으로 큰 꿈을 가지고 예수님의 왕이 되시는 것을 보기 위해서 왔다가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크게 실망하고 혼돈에 빠졌고 일단 그들의 본래 출신지인 갈릴리로 돌아갑니다. 갈릴리는 그들이 처음 예수님을 만났던 곳입니다. 처음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 나라에 대해 듣고 가슴이 뛰었던 곳입니다. 처음 예수님께 제자로서 헌신했던 곳입니다. 그 곳으로 돌아가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곳에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우리에게 예루살렘을 강조해줍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누가는 수많은 성경의 저자들 가운데 거의 유일한 이방인입니다. 유대인이 아닙니다 이방인의 입장에서 유대인들이 전해주는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믿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누가에게는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전 세계로 전파되는 복음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사도 행전은 처음에 예루살렘에서 유대인 중심으로 교회가 시작되었다가 점차 모든 헬라 지역으로 복음에 전파되면서 이방인에게로 차츰 교회의 무게 중심이 옮겨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전반부는 예루살렘 중심, 유대인 중심이었다면 후반부에서는 이방 헬라 문화권 중심이 됩니다 그러나 이방인의 사도였던 바울도 마음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 마음은 늘 예루살렘을 향해 있고 결국 그 생의 마지막에 예루살렘을 찾아갔다가 거기에서 붙잡혀서 로마로 이동하게 됩니다.
이방인 지역에서 예수님을 받은 이방인들도 예루살렘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결정은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예를 들어서 처음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은 모두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유대인의 율법과 전통을 지켰습니다. 안식일을 지켰고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면서 이방인들도 안식일을 지켜야 하나? 음식 율법을 지켜야 하나? 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하나? 하는 이런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구체적으로 이방인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나 하는 실용적인 문제일 뿐 아니라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란 과연 율법을 지키는 공동체인가 아니면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가 하는 아주 근본적인 문제를 담고 있었습니다.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서 모였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기둥 같았던 야고보 베드로 이런 분들이 주도가 되어서 결국 교회는 율법이 아니라 은혜 중심이라고 하는 중요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승천하신 후에 한 세대, 사십 년 동안은 예루살렘이 세계 교회의 중심이었고 거기서 중요한 결정이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전 세계 교회가 하나였을 때를 보여줍니다. 지금 생각하면 꿈 같은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교회들이 너무나 갈라져 있고 교단들도 많고 각 개교회도 사실상 자기들 위주로만 움직이기 때문에 우리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교회가 한 몸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교회 원래는 원래 교회는 예수님의 한 몸입니다. 그래서 전 세계 교회가 하나로 마음을 모으고 하나가 되어 하나 메시지를 전파하는 이것이 사실은 본래 본래의 교회입니다. 이 첫 세대 교회 초대 교회는 이것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전 세계의 교회가 하나가 되어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어 마음을 모았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꿈 같은 일이지만 이것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5절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이 중요한 시점,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이제는 교회가 시작되어야 하는 이 시점에 예수님께서 다시금 강조하십니다. 이 모든 것의 시작에 요한이 있다 세례 요한이 모든 복음서를 시작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도 되는데 굳이 꼭 요한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푼 사람입니다. 이 물은 죄의 사함을 상징합니다. 물에 들어갔다가 나올 때 물이 죄를 씻기는 것을 상징하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사람이 죄사함을 받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죄사함의 복음입니다. 부활은 죄사함에 부활입니다. 누가복음 24:47에 그의 이름으로 최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은 죄사함과 관계가 있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예수님의 부활을 본 사람들은 자기의 죄가 사함받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예수님의 부활과 나의 죄사함은 논리적으로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님의 계시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는다면 그 안에서 와, 대단하다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나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복음의 신비입니다. 요한은 처음에 물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예고요 상징이었을 뿐 실제로 죄사함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그리고 살아나심으로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참으로 내 죄를 대신 지셨고 또 살아나심으로 내 죄가 용서받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이것이 요한이 준 물 세례의 완성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입니다. 이것은 죄사함을 받은 사람들이 예수님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되기 위해 하늘로부터 능력을 받는 것입니다. 구약에는 별로 나오지 않는데 신약에서 갑자기 나오는 많이 나오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당연히 중요한 단어들입니다. 예를 들어서 부활이라는 단어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스도, 메시아라는 단어도 중요합니다. 신약에서 갑자기 나옵니다.세례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성령이라는 단어는 구약에 별로 많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보다 여호와의 영이라는 표현이 많습니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영이 사람에게 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드문 일이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왕이 되는 사람에게 성령이 임합니다. 사울왕에게 여호와의 영이 임할 때 그가 예언을 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구약에서는 몇몇 택한 사람들에게 임했습니다. 그런데 신약 시대에는 성령으로 우리에게 세례를 주십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상위일체의 세 위격 가운데 한 분이십니다. 영어로는 person인데 우리말로 인격이라고 하지만 하나님에게 인격이라고 하면 이상하기 때문에 위격이라고 번역합니다. 하나님은 세 person이 계십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십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한 위격으로서 예수님 승천하신 후에 우리에게 오십니다. 성령님이 하시는 모든 것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은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셔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시고 성령을 세계 모든 곳에 보내셔서 각 사람에게 친히 예수님의 은혜를 친밀하게 주십니다. 사도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입니다.
6절, 그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입니까? 여기서 이스라엘 나라는 킹덤, 즉 왕국입니다. 이스라엘 왕국을 회복하신다는 말은 결국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심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질문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시는 날이 지금입니까라고 물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셨는데 이 하나님의 나라는 결국 예수님이 왕이 되시는 나라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이 왕이 되실 것이냐고 묻지 않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다만 지금이 그 때이냐고 물은 것입니다. 사도들의 이 질문은 이상한 질문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뭐 그런 걸 묻냐고 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예수님은 그 때는 아버지의 권한이니 너희는 알 바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하 너희가 권능을 받고” 권능은 뒤나미스입니다. 다이나마이트 할 때 그 단어입니다. 너희가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여기서도 예루살렘에서 시작합니다.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점점 크레센도처럼 범위가 커져나서 땅끝까지 이를 것입니다. “내 증인이 되리라” 말씀하십니다. 증인은 헬라어로는 martyr, 순교자입니다. 순교의 원래 의미가 증인입니다. 순교하는 이유는 내가 목숨을 버려도 내가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을 부인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증인이 하는 일은 간단합니다. 증인은 설득시킬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해야 되는지 궁리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기가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을 그대로 말하면 됩니다, 예수님의 증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내가 그분을 보았고 대화하였고, 함께 식사하였고 그분을 만졌습니다. 그것이 나의 부활의 체험입니다. 그대로 전하면 됩니다 그것이 증인입니다. 만약에 사람들이 나를 위협한다고 해서 나의 체험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너희가 예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한다. 그러자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말했습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떻게 내 체험이 있는데 양심적으로 내가 체험한 것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말합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증인이 되는 것은 그러므로 사실 매우 쉽습니다. 그러나 아무나 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했어도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증인은 오직 그 자리 그때에 그 일을 경험한 사람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법정에서도 어 증언을 하는 사람은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우리도 예수의 증인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을 육신으로 보진 않았습니다. 다만 믿고 복음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것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이 체험이 애매하다면 다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나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기한 경험이고 사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제가 설명을 잘하고 설득을 한다고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일대일 관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 꿇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그리고 살아나신 예수님을 바라본다면, 말로는 설명되지 않아도 그 예수님이 나를 한없이 사랑하신다는 것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내 죄가 용서받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을 바꾸는 경험입니다. 이 고백이 있어야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이 체험이 없이 교회만 들락거리면 문제가 생깁니다. 여러 사람이 힘들어집니다 우리들은 참된 예수님의 부활에 체험이 있기에, 내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확신하기에 예수의 증인이 됩니다. 나가서 증언할 수 있습니다.
9절 이 말씀을 마치시고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구름이 그분을 가리었습니다. 우리가 이날의 정확한 날짜는 모르지만 이날의 날씨는 알고 있습니다. 하늘에 구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납니다. 천사였을 것입니다. 천사들의 때로는 이렇게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납니다.
11절에 갈릴리 사람들이라 부릅니다. 누가는 사도들이 갈릴리로 돌아가는 것은 얘기하지 않았지만, 그들을 갈릴리 사람이라 부르면서 그들이 본래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처음 만났던 것을 이렇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지금은 하늘을 쳐다볼때가 아니라 복음을 전할 때 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예수님이 그대로 오십니다. 하늘로 올라가셨던 것처럼 하늘에서 다시 내려오십니다. 구름이 그분을 가리었습니다. 다시 오실 때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구름은 매우 중요합니다. 구약성경에서 구름은 하나님의 인재를 상징합니다. 출애굽 때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지키시고 인도하셨습니다. 성막이 완성되면 거기에 구름이 내려갔습니다. 솔로몬 성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구름은 하나님의 인재를 상징합니다. 다니엘 7장에서 인자가 구름을 타고 하나님 앞으로 인도되십니다. 그것처럼 예수님이 구름 타고 오십니다. 예수님에 대한 영화들이 있는데, 마지막에는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가시는 모습이 반드시 나와야 합니다. 이게 멋있다는 차원이 아니라 성경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구름을 타고 오실 것입니다. 예수님 재림하시는 날짜도 우리는 모르지만 그날의 날씨는 구름이 낄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체험하고 그의 증인이 되리라는 말을 들은 사도들에게 이제 곧 성령님이 임하시면 능력 있게, 진실되게 예수님을 전함으로써 첫 번째 교회가 세워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새찬송가 머리말에는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찬송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최고의 선물이며 은혜이다.” 참으로 맞습니다. 찬송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신앙을 고백하며, 믿음을 더 굳게 세우고 서로를 축복하며 복음을 전합니다. 찬양의 가사도 중요하지만 음악이 있어서 더 큰 감동과 능력을 경험합니다. 저도 예수님을 처음 믿었을 때 찬양을 부르는 것이 너무 좋았고 찬양을 통해 믿음이 삶에 깊이 뿌리내리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오늘은 찬송가의 가사를 따라서 말씀을 생각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라는 찬송의 1절 가사에 보시면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자 그 맘에 평강이 찾아옴은"입니다. 우리 주님의 마음을 가장 잘 말씀해 주시는 본문 중 하나는 빌립보서 2:5-8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의 마음은 우리를 위하여 낮아지신 마음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되시고 참으로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우리 주님의 마음을 생각하면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하셨습니다. 우리들도 그와 같이 우리 주님처럼 낮아지고 겸손한 마음을 품으면 주님께서 주시는 그 평강이 임하게 됩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마음 속이 평강이 아닐 때가 있습니다. 마음 속에 여러 가지 감정이 요동칠 때도 있고 힘들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 주님의 마음, 정말로 모든 것을 다 내어 주신 주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평강을 주십니다.
그렇게 될 때에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우리들이 주님처럼 겸손해지려고 아무리 인간의 노력으로 해도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그렇게 해도 되지 않고 정말 우리들이 낮아지고 겸손해질 수 있는 비결은 사실은 우리들이 얼마나 존귀한가를 깨닫는 데 있습니다. 결국 우리들의 본 모습 참 모습이 얼마나 존귀한가를 생각하면 우리들이 진정 겸손해질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우주의 왕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가장 큰 영광 중에 계시는 왕중의 왕이시기 때문에 도리어 모든 것을 내어 주시는 낮은 종의 모습으로 십자가까지 순종을 하셨습니다. 우리들도 이 세상에서 세상적인 것을 가지고 내가 높다 낮다 이렇게 생각하면 겸손해져도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정말 우리 하나님의 자녀다, 그렇게 내가 존귀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알아 주신다는 믿음이 있으면 이 세상에서 우리들을 어떻게 하더라도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정말로 종 취급을 하더라도 우리들이 마음속에 전혀 요동하지 않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는 남을 섬기고 종노릇하는 걸 누가 정말 좋아하겠습니까? 다른 사람이 나를 무시한다 할 때 어떻게 마음 속이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세상이 우리들을 어떻게 하더라도, 내가 어떤 존재인데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귀하게 보시는데 내가 이 정도에 요동하지 않는다는 굳은 믿음이 있을 때에 참으로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잘 아시는 왕자와 거지 이야기에 보면 어떤 왕자가 어떻게 하다보니까 거지 행색을 하게 되었지만 전혀 마음속에 정말로 비굴해 지지 않고 당당합니다. 자기 자신의 정체성이 확실하니까, 나는 왕자다 우리 아버지가 왕이다 하니까 비록 겉으로는 후줄근한 옷을 입고 사람들이 자기를 몰라보고 뭐라뭐라 해도 전혀 슬퍼하지 않습니다. 좌절하지 않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 사는가 하고 실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내가 정말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마음이 있을때 도리어 이렇게 낮아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요한일서 3:1입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NIV 로는 lavish라고 했습니다. 완전히 사랑을 쏟아부어 주셨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그런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놀라운 사랑을 쏟아 부어 주셔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주님의 아들 딸로 삼아 주셨습니다. 이런 존귀한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이 세상에서 낮아져도 전혀 비굴해질 필요가 없고 슬퍼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럴 때 우리들에게 하늘로부터 오시는 힘이 임하게 됩니다.
영어 가사를 잠시 보시면 약간 의미가 다릅니다. 영어로는 첫 마디가 "We shall be like Him," 이 첫 문장이 이 찬송 전체의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와 같이 될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다고 하지만 이 세상에서 육신으로 사는 동안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주님을 본받으려고 하지만 안 됩니다. 그래도 소망이 있는 것은 결국은 그와 같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됩니다. 비록 지금 내 모습을 볼 때는 아닌것 같아도, 주님의 약속의 말씀은 확실합니다. 우리들은 주님과 같이 될 것입니다. "We shall be like him O wonderful thought" 정말로 놀랍고 감격적인 말씀입니다.
"Blessed the hope the assurance hath wrought" 우리에게 확신이 있으므로 이 복된 소망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복된 소망은 디도서 2:13의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즉 복된 소망은 예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소망을 가져다주는 것은 결국 우리의 확신입니다. 우리들의 믿음의 확신, 구원의 확신, 천국의 확신입니다. 이 확신은 누가 보여줘서 아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우리의 주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천지는 다 없어질지언정 주님의 말씀은 전혀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확실한 주님의 말씀의 약속을 해 주셨으니 우리는 그 약속을 믿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 천국과 거룩함의 확신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이런 확신이 있기 때문에 복된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소망이라 할 때 천국에 가고 예수님을 만나는 것도 있지만, 특별히 나 같은 사람도 주님처럼 될 수 있다는 놀라운 소망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세번째 줄 "Changed from the sorrow and trials of years" 이 세상 살면서 슬픔도 있고, 또 세월이 주는 여러가지 시험도 있습니다. 여러 어려움이 있는 것이 인생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아 정말로 어렵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나만 겪는 괴로움이다 하는 경험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슬픔과 시험들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들은 그것들로 인해 변화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런 모든 슬픔과 고난들도 예수님께서 다 지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변화된다는 이 말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서 온 것입니다. 우리가 다 변화하리라. 예수님 다시 오시는 그날에는 우리들이 주님처럼 거룩하게 변합니다. 이 세상에서 인생을 살면서 여러가지 일들이 있을지라도 결국은 변화가 될 것이다. 이것이 복된 소망입니다.
마지막 줄 "We shall be like Him, when Jesus appears!"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예수님이 저 하늘에서 나타나시는 그날에는 주님과 같이 될 것입니다. 오늘 요한일서 3:2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라" 예수님이 나타나시면 우리들이 그와 같이 될 것입니다. 오늘 약속의 말씀이 확실하게 증거해 주십니다.
2절의 가사입니다 "주 모습 내 눈에 안 보이며 그 음성 내 귀에 안 들려도"입니다. 우리들이 주님의 얼굴을 직접 보지는 못했고, 음성을 듣지는 못했습니다. 우리는 사실 주님이 어떻게 생기셨는지 모릅니다. 천국에 가면 예수님을 실제로 볼 것이고, 너무나 기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할 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우리 주님의 마음입니다 우리 주님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시고 주님의 뜻이 뭐라는 걸 우리들이 알고 따르는 것이 진짜입니다. 우리 주님의 속마음을 우리들이 닮아야 되는데,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우리가 갖고 있는 성경책에 다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마음은 성경 책만 보면 다 압니다. 그래서 "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라고 합니다. 어떻게 우리들이 날마다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신령한 말씀 늘 배우도다." 우리에게 주시는 성경 말씀을 매일 매일 읽을 때에 그 속에서 우리 주님의 마음을, 주님이 무엇을 원하셨는지 알게 됩니다. 우리 주님이 이 세상에서 오셔서 그렇게 3년 반 동안 뜨겁게 일하셨을 때 도대체 무엇을 원하셨길래 우리를 이렇게 불러 주셨는지 다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신령한 말씀을 늘 배울 때 주님의 마음을 닮아 갑니다.
영어로 보시면 "Eye hath not seen, nor hath ear ev­er heard." 눈으로 보지도 못하였고 귀로 듣지도 못하였다. 이사야 64:4 "주 외에는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을 옛부터 들은 자도 없고 귀로 들은 자도 없고 눈으로 본 자도 없었나이다." 그 당시 유대의 그 주변 나라들은 우상들을 만들어서 신은 이렇게 생겼다 하면서 눈으로 본다고 했지만 눈으로 보이는 그런 우상이 아니라 참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앙망하는 백성을 이렇게 구원해 주시는 놀라우신 이런 하나님은 눈으로도 보지 못했고 귀로도 듣지도 못했다고, 놀라우신 하나님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오늘 가사에는 눈으로 보지 못했고 귀로 듣지도 못했다, "What we shall be"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나 자신도 상상을 못합니다. 내가 곧 눈이나 귀로 보고 듣지 못할 뿐 아니라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습니다.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but a voice from his word whispers" 우리 주님께서 속삭여 주신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나와 같이 될 거야 하고 속삭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왜 속삭인다고 했을까요? 아마도 속삭여 주시니까 귀를 기울여야 들릴 것입니다. 우리들이 분주하거나 이런저런 생각으로 사로잡혀 있으면 이런 생각들이 잘 안 납니다. 조금 우리들의 마음을 집중하고 주님 앞에 겸손하게 나아가서 잠잠하게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 속삭이는 음성이 들립니다. 주님께서 속삭여 주시는 음성이 무엇입니까? 비록 지금은 여러 가지 고난도 있고 너 자신에게 실망할 때도 많이 있지만, 불평하고 화낼 때도 있지만 그러나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분처럼 될거라고 속삭여 주십니다. "whispers a message that charms all our fears"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두려움 있을지라도 그런 것들을 다 몰아내 주시는 속삭임을 이 시간에도 듣기 바랍니다. "We shall be like him when Jesus appears" 주님 나타나실 때 그처럼 될 것입니다
3절 가사를 보시겠습니다 "가는길 거칠고 험하여도 내맘에 불평이 없어짐은"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들의 가는 길이 거칠고 험합니다. 그러나 내 마음의 불평이 없어진다고 했습니다. 어떨 떄는 불평도 나오고 할 때가 있을지라도 그러나 이런 불평이 없어진다고 했습니다. 왜냐 하면 십자가 고난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살면서 정말 불평 정도가 아니라 너무 힘들다, 아무리 인생이지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할 때에도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 이길 수가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의 말씀처럼 종처럼 되신 주님, 그래서 십자가 죽기까지 날 위해서 순종하신 그 죽음의 고난을 생각하고 그 종의 마음을 본받으면 불평이 없어집니다.
영어로는 "Why then repine when the roadway is rough?" 길이 험하더라도 왜 불평하십니까? 아주 강하게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왜 불평하느냐? 둘째 줄 "Are not his words and promise enough" 그분의 말씀과 그분의 약속이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은 우리들이 세상을 이기는 데 겨우겨우 이기는 게 아닙니다. 이 세상 살다 보면 기가 막힌 일들이 많이 있어서 매일매일 살아 가는 것이 믿음의 경주이고 싸움이지만, 우리들이 겨우 이기는 것이 아니라 넉넉히 이긴다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시는 자들을 이 세상에서 넉넉하게 이기게 해 주십니다. 주님은 하늘의 권세를 갖고 계십니다. 아무리 땅의 권세가 우리들을 힘들게 한다 할지라도 주님의 하늘의 권세가 있으시면 그걸 넉넉히 이깁니다. 우리들이 살 때 이 세상을 바라보면 지금 당면한 문제가 너무 커서 골리앗 거인 같을지라도, 그 분의 말씀과 약속을 생각해보면 충분하지 않느냐, 넉넉히 이길 수 있지 않느냐고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믿음을 더 크게 가져야 합니다.
세째줄 가사는 "Rainbows of love span the valley of tears" 눈물 골짜기를 더듬으면서 간다는 표현이 있지요. 가는 길이 높은데가 아니라 저 밑에 밑바닥에 골짜기, 뱀이나 전갈이 나오는 그런 눈물의 골짜기를 울면서 간다 할지라도,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면 그 위에는 사랑의 무지개가 있습니다. 하늘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놀라운 무지개입니다. 성경에서 무지개는 약속의 상징입니다. 노아 홍수가 끝나고 나서 주님께서 하늘의 무지개를 보여주시면서 약속하십니다.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에게 약속하시기를 다시는 물로 세상을 변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무지개가 있을 때마다 주님께서 무지개를 보시고 그 언약을 기억하십니다. 주님께서 잊으실 리는 없고, 우리 인간이 기억하도록 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무지개를 볼 때마다, 옛날 노아 때 주셨던 주님의 변치 않는 약속을 지금도 잊지 않고 약속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1절에서 확신이 소망을 준다고 했던 것처럼 우리들에게 확신이 있고 예수님처럼 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이 있을 때 무지개를 바라보면서 힘들지라도 불평 없이 가게 됩니다 We shall be like him
끝으로 4절의 가사를 보시면 "주 예수 세상에 다시 오실 그날엔 뭇 성도 변화하여" 이것이 주제입니다.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 또는 우리들이 그 전에 이제 천국에 가는 그 날입니다. 이 세상 사는 동안은 우리가 아무리 해도 주님처럼 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래서 또 넘어진다 할지라도, 결국은 우리 주님 세상에 다시 오시는 그 날에는 변화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변화하여서 1절 가사에서 changed 라고 했던 것처럼 우리들이 다 변화할 것입니다.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을 이룰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하신 그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하는 것처럼 우리들이 변화하여 "주님의 빛나는 그 형상을 다 함께 보며 주 찬양하리" 이것이 인생의 최종 목표입니다.
영어로는 "We shall be like Him, the hope of the soul" 우리 영혼의 소망입니다. 우리 영혼이 아무리 어떤 고난과 시험이 있을지라도 우리 영혼의 소망은 주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We shall be like him made perfectly whole" 우리는 완전해질 것입니다. 주님 만나서 주님처럼 되면 우리 영혼이 완전해집니다. 그리고 평강이 찾아온다고 했는데 히브리 말로 살롬이라는 말은 온전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 주시는 온전해진, 조금도 손상되지 않은 그런 영혼의 모습으로 다시 변화되면 마음 속에 평강과 주님 닮은 그런 거룩한 모습이 될 것입니다. 3절의 말씀입니다 요한일서 3: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크리스천들의 소망 가운데에 거룩함에 대한 소망이 뜨거워야 합니다. 거룩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예수님을 믿고 주님 만나는 그날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지만 우리들의 마음 속에 성결에 대한 뜨거운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어떻게 주님처럼 거룩해지나? 인간적으로는 절대로 안됩니다. 그러나 십자가 옆에 있던 강도가 인간적으로 볼 때는 강도고 죄인이고 사형수이지만 주님 곁에 동산에 같이 들어갈 때 거룩해지고 온전해졌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님 곁에 붙어 있으면 온전해집니다. 거룩함이 우리의 소망이 되기 바랍니다. 이 세상 살면서 주님의 마음을 본받아서 오늘 하루라도 나의 삶과 주위 사람들에게 이 주님의 성품을 보여주고 싶다는 소망은 교만이 아니라 진정한 마음 속에 주님 주시는 소망, 내가 주님처럼 정말 거룩해 지고 싶다는 뜨거운 마음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셋째 줄 "Caught up with saints, as the firmament clears" 이것은 데살로니가전서 1장 5절입니다 주님 오실 때 주님 안에서 축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주님 앞에 끌어올려져서 구름 속에서 주님을 영접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구름 타고 오십니다. 주님 오실 때 그 날이 언젠지 우리들은 알지 못하지만 주님 오시는 날 날씨는 압니다. 그 날은 구름이 있습니다. 구름타고 우리 주님 오실 때 우리 성도들이 만일 살아있다면 그렇게 될 것이고, 만일 무덤 속에 있으면 더 빨리 올라갈 것입니다. "Caught up," 주님께서 우리를 다 잡아서 하늘로 올리셔서 구름 속에서 만나십니다. "firmament clears," 하늘이 열리면서 그 모든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구름 속으로 올라가서 주님 뵈면 구름은 다 아래에 있고 파란 하늘이 열리는 광경입니다. 이 깨끗하게 맑은 하늘이 열리고 우리 주님의 영광을 완전하게 보는 그 광경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we shall be like him when Jesus appears." 우리는 그와 같아질 것입니다.

제가 아리조나주 피닉스에 간 적이 있습니다. 10월이었는데, 밖에 산책을 해 보려고 나갔습니다. 5분만에, 아 이 땡볕에 계속 걷다가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피닉스는 광야 한가운데 세운 도시입니다. 피닉스가 불새인데, 왜 도시 이름이 그런지 이해가 되었습니다. 본문에는 광야를 지나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어머니와 아들입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고, 이미 물은 떨어졌습니다. 많이 지친 모습입니다. 이 두 사람은 어쩌다가 이렇게 광야를 해메게 되었을까요?
오늘은 어머니 주일입니다. 성경에는 여러 어머니들이 나와서 자식들을 위해 사랑과 헌신을 하는 대목들이 많이 나와서 우리에게 감동을 줍니다. 그 어머니들 가운데 특별히 오늘은 하갈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하갈은 창세기에서 여러 이유로 약자입니다. 여성이고 종이며 이방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세상에서 멸시받는 여성을 돌보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큰 나라의 조상이 되리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러려면 자녀가 많이 있어야 하는데, 86세가 되기까지 아이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흔들리는 것이 아닌가 걱정도 되고, 현실적으로 아브라함의 재산에 위협이 됩니다. 이미 나이가 많고, 그에게는 300명이 넘는 종을 거느릴 만큼 큰 재산이 있습니다. 그와 사라가 죽으면 그것들은 어떻게 될지, 종들 사이에 싸움도 날 것입니다. 사라가 제안합니다. 나에게 애굽 출신의 여종 하갈이 있는데 당신에게 아이를 낳게 합시다. 그 아이를 후계자로 삼읍시다. 아브라함이 동의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다가도, 시간이 지나면서 의심을 하게 됩니다. 내가 정말 그 말씀을 들었나? 그리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해석하게 됩니다. 그래 하나님이 자손을 주신다는 건 아마 여종을 통해 주신다는 뜻이었을 거야 하면서 합리화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아무도 하갈의 의사를 묻지 않았습니다. 하갈에게는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하갈도 젊은 여성으로서 비록 종이지만 계획도 있고 꿈도 있었을 것입니다. 혹시 만나는 사람이 있었을지 누가 압니까? 그런데 하갈에게 물어보았다는 언급은 없습니다. 하갈이 마치 이것을 당연히 붙잡을 기회라고 생각했다 하는 것은 큰 오해일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여성의 권리와 지위는 매우 위태롭습니다. 고대에는 전쟁이 생존의 중요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전쟁에서 싸우는 남성들의 권리가 강했습니다. 여성들은 거기에 종속되어 살아왔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주요 여인들이 한결같이,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남성들 앞에 가야 하는 처지를 당했습니다. 오늘날에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라는 애굽과 가나안에서, 리브가는 비슷하게 가나안에서 어떤 왕의 후궁이 될 뻔 했습니다. 야곱의 아내인 레아와 라헬은 자기들의 결혼에 대해 친정 아버지가 마음대로 했습니다. 사라도 그런 부당한 일을 당했으면서도 하갈에게 비슷하게 대했다는 것이 인간의 죄와 부족함을 드러냅니다.
그렇게 하갈은 아브라함의 아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꼭 아침 드라마같은 상황이 되었습니다. 하갈과 사라의 사이가 좋지 못했던 것은 당연했을 것입니다. 16장에 보면 하갈이 여주인을 멸시했고, 덕분에 학대를 받아 도망갔습니다. 천사가 나타나 돌아가라고 해서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을 아이를 위해 받았는데 “하나님이 들으심”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하갈의 고통을 들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세부적인 인간사에도 함께 하셔서, 이 이방인 여종의 고통소리에도 귀를 기울이십니다. 하갈은 그 이야기를 아브라함에게 하였고, 아브라함은 그 아들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습니다.
약 13년동안 그 아이는 아브라함의 후계자였습니다. 수백명의 종들도 그 아이를 주목했을 것입니다. 비록 여종의 아들이지만 주인의 유일한 아들이니, 그 재산을 물려받을 것이고, 자기들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와 어머니를 잘 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어머니가 여종이기 때문에 애매한 위치에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인 아브라함과도 가까이 지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모든 것이 갑자기 변하였습니다. 사라가 아들 이삭을 낳았습니다. 이스마엘의 나이는 14살인데, 한참 예민한 사춘기인데 갑자가 사람들의 눈길이 달라집니다. 이제 아무도 이 어머니와 아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갑자기 모두가 성가시게 여기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누군가는 드러내 놓고 멸시했을지도 모릅니다. 너는 이제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가 사람의 인정을 바라고 살면 언젠가 실망합니다. 그동안은 나를 인정하고 칭찬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돌아서는 일이 있습니다. 오해가 있거나, 무슨 이유로든, 세상에 나 홀로 버려진듯한 처지가 되면,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이 얼마나 소용없는지를 알게 됩니다.
9절에 보면, 세월이 흘러,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는 것을 사라가 보았습니다. 왜인지 본문에는 이스마엘이라는 이름도 나오지 않고,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라고 나옵니다. 그의 나이는 알 수 없지만 아직 사춘기 틴에이져였을 것입니다. 여기서 원문에는 이삭이라는 목적어가 없습니다. 여기서 놀리다는 단어는 이삭, 웃음이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즐기다, 놀다, 비웃다 등의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사실 이스마엘은 혼자 놀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번역들을 보면 그냥 그 아이가 mocking, laughing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본문의 앞뒤를 보면 이삭을 놀리고 있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얼마나 심했는지는 모르지만 그것 때문에 모자가 빈손으로 쫓겨나야 할 정도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10절, 그러나 사라는 그것을 볼 수가 없었고, 아브라함에게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그것은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나중에 그 부부가 죽고 나면 이복형제 사이에 싸움이 일어날 수 있기에 미리 쫓아내는 것이 지혜로울 수 있지만, 인간적인 생각입니다. 나중에 아브라함은 사라가 죽은 다음에 후처와 아들들을 더 갖는데, 각자 재산을 주어서 멀리 보냅니다. 이스마엘에게도 그래야 했습니다. 성경은 과부와 고아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갖습니다. 하나님은 당시 사회 경제적으로 약한 사람들을 늘 보호해야 할 의무를 자기 백성들에게 요구하십니다.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지 말라고 하시며, 엘리야 때에는 사르밧 과부와 아이를 돌보십니다.
14절, 아브라함은 결국 아내 사라의 뜻대로 따릅니다. 하갈과 아들을 내쫓습니다. 하루 아침에 집을 잃어버린 그들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하갈에게는 지난 20여년동안 정들었던 집입니다. 인생에 가장 기뻤던 추억이 있는 곳입니다. 아이에게는 당연히 이 곳이 삶의 전부였습니다. 여기서 태어나 자라고 멀리서나마 아버지의 존재를 알았습니다. 이제는 나가야 합니다. 나그네 인생, 이방인의 삶입니다. 사실은 이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집으로 삼지 않습니다.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라는 복음성가 가사도 있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 정들수 없도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이 세상에 정들려 합니다. 그러나 언제라도 떠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그 어머니와 아들을 아침 일찍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지워서 그냥 보냅니다. 물은 매우 무거워서 많이 못 듭니다. 하다못해 나귀 한마디라도 주어서 짊어지게 할 수도 있을텐데 그러지 않습니다.
15절, 광야에서 해메다가 물이 다 떨어지고, 아들을 관목덤불 아래에 눕혀 놓습니다. 관목덤불은 예전에는 떨기나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나무 그늘도 없는 아주 보잘것 없는 덤불 아래 눕혔습니다.
16절, 그리고 화살 한 바탕의 거리에 가서, 약 50미터, 소리내어 웁니다. 아이가 죽는 것을 보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누군가가 우는 장면이 처음 나오는 것이 여기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 아벨의 피는 땅에서 호소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폭력으로 신음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의 울음이 있었는데, 하갈의 울음을 하나님이 보십니다. 이렇게 우는 사람들을 위해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사랑하는 나사로를 잃고 슬퍼하는 사람들을 보며 예수님도 우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러 끌려가실 때 여자들이 가슴을 치며 슬피 울었습니다. (누가 23:27). 예수님은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인간이 죄악으로 인해 맞이해야 할 고난과 슬픔, 심판으로 인해 울라고 하십니다. 시편 56:8에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라는 기도가 있습니다. 우리가 죄와 욕심 때문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괴로움을 당함으로 인해 흘리는 눈물은 하나님이 보시고 병에 담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흘리는 눈물을 주님은 헛되이 보시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울음에 대해 마지막으로 나오는 대목은 요한계시록 21:4 “모든 눈물을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애통이나 울음이나 아픔이 있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사람에게 버림받고 사회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약한 어머니의 눈물을 보십니다.
17절,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 하갈을 부릅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하늘에서 부르시는 장면은 많지 않은데 22장에서 아브라함을 그렇게 부르실 것입니다. 하늘에서 부르심은, 하늘과 땅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입니다. 천사는 하갈에게, 너의 소리를 들으셨다고 하지 않고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다고 합니다. 아마도 아이가 깨어서 엄마를 불렀거나 무슨 소리를 내었을 것이고, 하나님은 그 소리를 들으시고 천사를 어머니에게 보내십니다. 나의 기도 소리를 들으시고 천사를 다른 사람에게 보내실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기도로 인해 천사를 나에게 보내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서로 사랑하는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기도의 응답을 성도들을 통해 주십니다.
19절은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셔서 샘물을 보게 하십니다. 샘물이 거기 있었는데 못 보다가 눈이 열려서 보았든, 아니면 그 순간에 샘물을 광야에 내셨든, 그 전에는 없던 샘물이 기적적으로 생겨난 것입니다. 하갈은 즉시 물을 가져다 아들에게 마시게 합니다. 그런데 21장과 바로 다음의 22장은 매우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둘다 두 사람만 나옵니다. 광야를 걷는 어머니와 아들, 또 산 위를 올라가는 아버지와 아들입니다. 어머니의 어깨에는 물 부대가, 아버지의 손에는 불과 칼이 있습니다. 두 아이들은 모두 하나밖에 없는 아들입니다. 그리고 둘다 죽음의 위기 앞에 있습니다. 한 아이는 물이 없어서, 다른 아이는 제물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두 아이 모두 눕혀집니다. 덤불 아래, 또는 제단 위에, 죽음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늘에서 부르십니다. 두 장면 다, 이름을 부르십니다. 하갈아, 아브라함아. 하갈에게는 아이를 네 손으로 붙들어라, 아브라함에게는 아이에게 손대지 말라고 하십니다. 행동은 정반대이지만 목적은 같습니다. 그 아이를 살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눈이 열려서 샘물을, 그리고 숫양을 발견합니다. 두 아이는 살아납니다.
19절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히브리어는 동사가 중요하고 여러 동사들을 연속적으로 나열해서 매우 역동적인 동작들을 나타내는 강점이 있습니다.그런데 19절에서 하갈에 대한 동사들은 눈을 밝히셨다, 보고, 가서, 물을 채워서, 마시게 하였다 입니다. 이것을 아브라함과 이삭에 대한 22:13과 비교해 보겠습니다. 22:13에서 아브라함의 동사들은 눈을 들었다, 보았다, 가서, 가져다가, 번제로 드렸다 입니다. 두 문장의 구조가 똑같습니다. 동사들도 5개로 같고, 심지어 동사들의 내용도 거의 같습니다. 두 문장들의 구조가 거의 동일합니다. 아들을 살리기 위한 하갈과 아브라함의 동작들이, 비록 시간도, 상황도 다르고 인물도 다르지만, 그 동작과 심리상태가 매우 비슷하다는 것을 이 두 문장의 유사성으로부터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얻는 교훈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의 사랑과 하갈의 어머니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아이를 살리기 위해 재빨리 그리고 기뻐하면서 움직였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존경하고 하갈은 대개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종이고 이방인이고, 성경에 더이상 나오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중요한 사람들을 좋아하고 약자들에게는 관심을 덜 갖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외면하는 사람들의 마음도 중하게 보십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이며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가 소홀히 하는 사람들의 마음도 하나님은 소중하게 생각하십니다. 우리가 귀하게 여기든 천하게 여기든, 우리가 가까이 하든 멀리 하든,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부모의 사랑의 마음은 동일하게 귀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뿐 아니라 하갈도 기억하시고 돌보십니다. 그 아이의 소리를 들으십니다. 본문에는 아이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데,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이 “하나님이 들으심”입니다. 아이의 이름이 스포일러입니다. 우리가 무관심하고 멸시해도, 하나님은 그들을 돌보십니다.
부모의 사랑, 아마도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것 중에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닮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연인과 부부의 사랑도 소중하지만, 부모와 자식 사이의 사랑은 세상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부모님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분은 부모님이 떠나셨고, 어떤 분은 아직 살아계실 것입니다. 오늘은 부모님께 감사하고, 또 부모님을 주셔서 나를 이 땅에 있게 하시고 성장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그리고 자녀가 있으신 분들은 나에게 귀한 자녀를 허락하셔서 부모의 마음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희생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알게 하신 주님께 감사합시다. 어떤 악인이라도, 대개는, 자기 자식은 사랑합니다. 인간에게 주신 최소 한계인 사랑의 마음, 그러나 어쩌면 가장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 있는 부모님의 사랑, 이 사랑이 지금도 세상을 살리고 있습니다. 결국 모든 것을 이기는 것은 사랑입니다. 저는 오페라 라보엠의 한 대사가 생각났습니다. O tu sol comandi, amore! 오직 사랑만이 다스립니다. 세상이 모두 버려도, 광야에서 해메다 죽음이 임박하여도, 하나님은 이 어머니와 아들을 기억하시고 그들의 소리를 들으시고 살리십니다. 그 사랑의 마음이 우리에게도 더 넘쳐나서, 세상의 소망이 되기를 위해 기도합시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때는 지금부터 약 3000년 전, 예수님 오시기 약 1000년 전이 되겠습니다. 그 때는 이스라엘 역사의 큰 전환점입니다. 이 때까지는 이스라엘에 아직 왕이 없었는데, 이제 곧 왕들이 다스리는 왕국이 될 것입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이 왕국이 되기 전의 마지막 지도자이며, 사울과 다윗에게 기름부어 왕으로 삼게 될 사람입니다. 또 그 때는 아직 성전이라는 건물이 없었고, 모세 때부터 있던 텐트라고 할 수 있는 회막이라는 곳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1절, 아이 사무엘이 나옵니다. 이 때 나이는 정확히는 모르지만 전통에 의하면 12살이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사무엘은 어머니 한나가 기도하면서 낳은 아들입니다. 사무엘이라는 이름이 “하나님께 구했다”는 뜻입니다. 어머니는 그 아들을 하나님께 드렸고, 그래서 사무엘은 제사장 엘리를 섬기면서 하나님의 전에서 생활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영적으로 아주 어두운 떄였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고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원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셔서 하나님의 나라로 세우실 때에는, 백성들이 그 분의 말씀을 늘 듣고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사는 나라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나 여호수아의 때에는 하나님이 늘 그들에게 말씀하시고, 그들은 그 말씀을 듣고 지키고 백성들을 인도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멀리하고, 세상의 다른 신들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점차 덜 말씀하시게 된 것도 있고, 또는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듣지 못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지, 그 분의 음성을 듣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물론 인터넷에는 설교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많다고 해서 모두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아닙니다. 그 중에는 사람의 귀에 듣기 좋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도 있습니다.
2절, 제사장 엘리는 눈이 어두워졌습니다. 단지 연세가 많아서가 아니라, 영적으로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나 자기 아들들이 잘못된 길에 있어도, 알지도 못하고 신경도 안 씁니다. 그래서 온 이스라엘이 어두움 가운데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새롭게 말씀을 주기 원하시는데, 어른들이 아니라 아이 사무엘을 주목하십니다. 이 장면을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넓은 세상, 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관심은 아주 작은 공간, 여호와의 전과, 그 안에서 누워 있는 어린 아이를 향하십니다. 때는 밤입니다. 낮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변함없이 말씀하셔도, 세상의 소음, 사람들의 말소리에 묻힙니다. 조용한 밤에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밤에 나신 것과 같습니다.
3절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가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습니다.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습니다. 사실 성소 안의 등불은 늘 꺼지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회막 안을 밝혀야 합니다. 그런데 아마도 제사장들은 점점 율법을 소홀히 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등불이 꺼지는 일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등불이 아직은 꺼지지 않았지만, 언제 꺼질지 모르는 연약한 불빛이었습니다. 그 곳에는 하나님의 궤가 있습니다. 그 안에는 십계명의 두 돌판이 있습니다. 그 언약궤는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고,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장소, 그 곳에서 아이 사무엘이 흐릿한 불빛 아래 홀로 누워 있습니다.
4-5절, 그 조용한 가운데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십니다. 헬라어 번역을 보면 두 번 부르십니다. 그런데 아마도 사람의 음성처럼 들렸는지, 사무엘은 엘리가 불렀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때로 생생하게 들리지만, 모두가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다마스커스에 가다가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오직 당사자에게만 들리는, 인격적이고 신비로운 음성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거의 모든 경우에 오직 한 사람에게 직접 말씀하십니다. 모세와 아론에게도, 모세에게 말씀하시면 모세가 아론에게 전합니다. 유일한 예외는 민수기 12장에서 아론과 미리암을 함께 부르실 때입니다.
이 대목에서 특별히 많이 나오는 단어는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여러번 이름으로 부르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를 인격적으로 이미 아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군중이 아니라 인격으로 부르십니다. 우리는 그 부르심을 받았기에 이 자리에 하나님의 자녀로 있습니다. 로마서 8장에 하나님은 미리 정한 사람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의롭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십니다.
사무엘은 엘리에게 가서 “부르셔서 왔습니다”라고 했지만 엘리는 “안 불렀다, 가서 자라”고 합니다. 이 일이 두번 반복되는데, 7절은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그에게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물론 그는 하나님에 대해 듣고 알았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에 대해 들었고, 율법을 배워서 제사드리는 것을 도왔습니다. 그러나 아직 하나님과 만나지 않았고 그의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8절, 세번째 갔을 때 엘리는 여호와께서 그를 부르시는 것을 깨닫습니다. 엘리 자신이 하나님의 음성을 그렇게 들은 적이 있었을까요? 아마도 없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랬다면 하나님께 더 순종하는 삶을 살았겠지요. 그는 직접 체험하지는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해 오신다는 것이 가능한 것은 조상들에게 배워서 알았습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 것도 결국 이러한 전통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훈련할 수 있습니까? 물론 우리는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을 갖습니다. 그렇지 않고 나만 일방적으로 말하고 끝내면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조용히 귀기울이면 나를 향하신 지혜와 믿음의 말씀을 주십니다. 때로 영감을 주셔서 문제가 풀리게 하시고, 두려워서 피하던 상황도 마주할 수 있는 용기도 주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개인의 능력이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이 말씀해 오셔야 합니다. 오직 그 분의 은혜로 됩니다. 또한 우리는 그 음성을 듣는 훈련을 교회 공동체를 통해 하게 됩니다. 아무도 본을 보여 주지 않았는데 혼자서 참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엘리는 자기가 배운 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사무엘에게 가르쳤고, 사무엘은 그렇게 했습니다.
9절, 그래서 사무엘에게 그 일이 일어난 것을 알고 말합니다. 그 분이 부르시면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말하라 합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말 중에 가장 위대한 말입니다. 인간은 원래 이 말을 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부르십니다. 그는 응답합니다. 주님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고 있나이다. 사무엘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그대로 엘리에게 전하게 됩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이 귀하게 쓰시는 예언자가 됩니다. 예언이란 미래 일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맡겨주신 말을 하는 것입니다. 마치 돈을 은행에 맡겨 놓으면 예금한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언자가 하는 일은 그러므로 매우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전하면 됩니다. 다만 사람들이 그 말씀을 듣기 싫어한다면 핍박과 미움, 조롱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존재 이유입니다. 교회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예배를 드리고, 교육을 합니다. 친교를 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가장 본질적으로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먼저 교회는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그 말씀을 먼저 들어야 합니다. 듣지 않고 말하면 헛된 인간의 말이 됩니다. 또한 듣고서 말하지 않으면 사명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교회는 늘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선포한 말씀이 하나님이 들려주신 말씀에 비추어 맞는지 끊임없이 점검해야 합니다.
또한 교회는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공동체입니다. 여러 형식으로 하나님에 대해 말합니다. 예배 때가 대표적입니다. 기도와 찬양의 가사, 신앙 고백, 특히 설교 때에 하나님에 대해 말합니다. 그리고 성례와, 세상을 향한 봉사와 선교를 통해서도 하나님에 대해 말합니다. 이 말들이 하나님이 말씀인지 늘 점검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말들은 인간의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시험과 위험이 늘 있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성경 말씀에 비추어 합당한지 늘 점검해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에 하는 말들을 통해 세상은 하나님에 대해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나올 수 있게 됩니다. 오직 교회만이 그 일을 합니다. 교회가 아니면 세상은 예수님에 대해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이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교회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선포라는 형식을 갖습니다. 선포라는 말은 좀 딱딱하게 들리지만, 그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은 설득이나 설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고 이해를 시켜서 데려오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능력과 권위로 주어집니다. 그것을 듣고 보는 사람은 그 선포를 믿도록 요구됩니다. 그러한 선포에는 두 형식이 있는데 설교와 성례입니다. 그리고 성례에는 세례와 성찬이 있습니다.
특별히 설교는 성경공부가 아닙니다. 물론 성경공부가 필요하고, 성경의 내용이나 배경에 대해 많이 익히는 것이 매우 유익합니다. 그러나 설교 시간은 성경을 공부하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다시 선포하고 기억하는 시간입니다. 그 말씀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사실 매우 명백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 오셨습니다. 그의 십자가로 우리의 죄가 용서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교회는 이 말을 계속 하는 것입니다.이 선포를 통해서 교회는 세상의 소망이 됩니다. 죄와 어두움 속에서 절망과 두려움 뿐인 세상에 빛이 됩니다.
세상은 오직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교회에서 하는 말들이 흘러넘쳐서 세상에 퍼져나갑니다. 이 말들이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과 일치해야 합니다. 교회는 자기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와 평화의 말을 세상에 늘 전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미국 교회와, 그 영향을 많이 받은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 사유화하고, 개인의 형통을 위하는 말을 전해 왔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자비와 평화의 말씀이 세상에서 잘 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시금 하나님의 말씀 앞에, 그리고 말씀 자신이신 예수님 앞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다시 그 분의 사랑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그대로 전해야 합니다.
2012년 코네티컷주의 초등학교에서 총기사건이 있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그 가족들을 위로하면서 시편 147:3을 인용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자들을 위로하시고 상처를 싸매십니다. 마음이 상했다는 것은 broken-hearted, 마음이 부서졌다는 것입니다. 그 부모들의 마음이 유리처럼 부서져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성경 말씀으로 위로했습니다. 각자 정치적 견해가 다르지만, 그 큰 불행 가운데서도 대통령이 성경 말씀으로 위로하는 나라는 희망이 있습니다. 한편 올해 1월에는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 때 성공회 Mariann Budde 주교님의 설교가 있었습니다. 그 설교는 대통령에게 자비를 구했습니다. 대부분의 서류미비자들은 선량하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라며 그들과 가족들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같은 설교자로서, 그녀가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처럼 전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트럼프는 그렇게 느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형편없는 설교였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판단하실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먼저 그 진리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이신 말씀을 겸손히 듣습니다. 그리고 들은 그대로 세상에 전합니다.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와, 우리의 죄사함, 하나님과 화목됨을 쉬지 않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이 험한 세상에 유일한 빛과 소망이 됩니다. 이 귀한 사명에 쓰임받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은 무덤으로부터 살아나셨습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그 분은 죄와 사망의 감옥에 갇혀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능력으로 그를 살리셔서 만유의 주님으로 드러내시고 만왕의 왕으로 높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후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나타나십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은 더이상 우리와 같은 육체가 아니라 신령한 몸, 영광스럽게 변화된 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얼른 알아보지 못했고, 문이 잠겨 있어도 쓱 들어오십니다. 제자들에게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보여주시면서, 정말로 살아나셨다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그 자리에 10명의 제자들이 있었고, 어쩐 일로 도마는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도마에게 가서 그 놀라운 소식을 말합니다. 주님이 살아나셔서 우리에게 나타나셨고, 우리와 대화하셨다고 말하는데 도마는 믿지 않습니다. 10명이나 같은 말을 하면 믿을 법도 한데, 도마는 자기 눈과 귀로 보고 듣지 않으면 못 믿겠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보고 의심한다고 부정적으로 말할 수도 있지만, 저는 그렇게 직접 확인하고자 하는 그의 태도가 바람직하다고 여겨집니다. 예수님은 전쟁에 나가는 왕이 먼저 계산한다는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계산해 보고 전쟁에 승리할 것인지 미리 판단하는 것은 불신앙이 아닙니다. 심지어 하나님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려는 사람은 그 전에 내가 정말로 그렇게 하는 것이 맞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주님으로 모시는 결정은 영생을 거는 모험인데, 남의 말만 듣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나 자신의 인격적인 확신과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8일 후에 모두에게 다시 나타나시는데, 이번에는 도마도 있었습니다. 도마에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손가락을 못자국에, 손을 창자국에 넣어보라 하십니다. 그의 옆구리에 난 창자국은 어른의 손이 들어갈 수 있을만큼 크고 깊습니다. 그 상처만으로도 죽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도마는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미 내 눈앞에 나타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들으니, 더이상 확실할 수 없습니다. 그는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영원부터 계신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께서 육신을 입고 인간이 되셔서 오신 것이 성탄절입니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십니다.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면 아무리 잘 해도 기독교 교회가 아닙니다. 그런데 도마는 이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요? 엄밀히 말하면, 예수님의 부활은 너무나 놀라운 기적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그의 신성을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위대하신 하나님의 사람이요 예언자인 예수님을 하나님이 다시 살리시고 영화롭게 하셨다고 고백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훌륭한 고백이 됩니다. 그러나 도마는 예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어떤 생각이나 논리의 결과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몸을 보고 그의 음성을 듣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특별한 계시를 주셔서 고백하게 하신 것입니다. 로마서 1:4 에는 성결의 영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영어번역에는 지명되셨다는 번역이 있는데 (appoint) 그것은 그 때 임명되셨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신성이 부활로 인해 확실하게 사람들에게 알려졌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그 분이 의학적으로 사망 상태에서 소생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참으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세상에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은총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그분의 부활을 목격하면서 외치듯 고백하는 도마의 말에는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면, 불과 며칠 전에 십자가를 지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죄짐을 지고 불의한 형벌을 받으시며 십자가에서 고통과 수치를 당하신 그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자신이 창조하신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 백성을 만나셨지만, 그들에게 거부당하고 정죄되어서 사형판결을 당하신 분이 성자 하나님이셨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이 얼마나 큰 죄악 가운데 있는가를 명백히 드러냅니다. 적극적으로 예수님께 폭력을 휘두른 로마제국, 그들과 협력한 유대교 지도자들, 그 분을 버리고 부인한 제자들, 멀리서 눈물만 흘릴 뿐 아무 것도 하지 못한 힘없는 백성들 모두가 죄인입니다. 로마제국에 속한 모든 사람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로마제국은 그 당시 2대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하에서 가장 번영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누구나 로마의 영광을 부러워하고, 로마가 주는 안정과 풍요를 받아 누리기 원했습니다. 그 전에는 늘 전쟁이 끊이지 않던 지중해 세계에 승리와 평화를 가져다준 로마 황제를 칭찬했습니다. 그러나 그 평화는, 피지배민족을 군대와 무력으로 억압하고 십자가로 처형하는 공포 분위기 속에서 지탱되는 평화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로마의 번영을 위해 그 작은 민족과 그들의 하나님이 당하는 폭력은 문제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최고의 문명 생활을 하는 로마인들에게 이러한 어두운 죄악이 있다는 것을 아무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렇게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지배하는 로마인이나, 지배당하는 유대인이나, 그 가운데 이득을 취하는 계층 모두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데 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그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고백은, 이렇게 악한 세상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곧 당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제는 심판과 형벌의 시간이 너희에게 닥쳤다고 선언하셔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할 시간도 주시지 않고서, 예수님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라고 인사하십니다. 예수님은 불안해 하는 제자들을 즉시 안심시키시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심판이 아니라 화해를, 치유를, 구원을 가져다 주는 분이심을 선포하십니다. 온 세상이 힘을 합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기 때문에, 오직 예수님만이 세상을 용서하실 수 있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버렸던 제자들을 용서하시고 안심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나쁜 소식이 아니라, 정말로 좋은 소식인 복음이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 중 하나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말을 듣기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내가 죄인이라는 말을 들을 때 본능적으로 나의 행동, 생각, 말 등을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내가 또 무엇을 잘못했는지 자꾸 생각해야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나의 생각과 언행에서 나의 죄의 근원을 찾으려면, 아무리 회개해도 부족합니다. 이만하면 나는 충분히 회개했어, 이제 죄가 없어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나의 언행과 생각을 문제삼는 것보다 훨씬 중대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안하고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로마인들처럼, 유대인들처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기 때문에 죄인입니다. 적극적으로 행동했든, 대부분의 로마인들처럼 소극적으로 침묵하고 세상이 주는 풍요를 더 좋아했든, 우리는 다 예수님을 죽인 죄인들입니다. 이 죄성은 인간이 아무리 해도 스스로는 알 수 없습니다. 아무리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사람도 자신이 이만큼 엄청난 죄인이라는 것을 알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영리는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에 대해 제대로 알려주지 못합니다. 질문하겠습니다. 여러분 중에, 어느날 생각해 보니까 내가 너무 죄인이더라, 그래서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 있습니까?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양심적이고 종교적이라도, 내가 하나님의 아들을 죽게 할 만큼 엄청난 죄인이라는 것을 자기 힘으로 알아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저 상대적으로 조금 크고 작은 죄로 인해 고민하니까 율법주의에 빠집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모두 죄인이라는 것,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죄인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로 인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도마가 나의 하나님이라고 외쳤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죽었구나 예수님이 하나님이었어 라고 절망할 시간도 주시지 않고서, 예수님은 평강이 있을 지어다 라고 말합니다. 이미 은혜가 임했습니다. 이미 우리는 구원받았습니다. 이미 죄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서 돌아보니, 과거의 나는 그만큼 엄청난 죄인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입니다. 내가 정말로 큰일날뻔 했구나, 그런데 너무나 놀라운 은혜를 받았구나 하고 가슴을 쓸어내릴 수는 있어도, 내가 그렇게 큰 죄인이니 이 일을 어쩌면 좋으냐 지옥에 가겠구나 하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죄에 대해 먼저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죄로부터 용서받기 위해 예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참된 순서는 반대입니다. 은혜가 먼저입니다. 은혜를 받기 전에는 내가 죄인이라는 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저 인간적인 율법으로 나의 허물들을 인식할 수는 있지만,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핏값이 필요한 죄인이라는 것은 생각하지 못합니다. 개혁자 마틴 루터는 말합니다. 복음이 없을 때 이 세상에는 지혜롭고 정직하고 경건한 사람들이 가득하다. 그러나 예수님의 복음이 전파되면, 거룩한 자가 최악의 죄인이고, 지혜자가 가장 큰 바보이며, 정직한 자가 가장 피에 굶주린 살인자들이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해 나를 구원하소서 라는 기도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성경에 대해 대충 알 수는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고, 죄인은 지옥에 간다는 개념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죄를, 자신의 행동이라고 생각한다면 결코 자기가 충분히 용서받았다고 믿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를 구원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죄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모르면, 그런 죄의식 자체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안다면, 그는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누구에게나 자비롭고 평화의 인사를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미 자기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것을 압니다.
방금 드린 말씀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다시 반복하겠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인이라는 것을 아예 모르거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즉 부활하신 예수님의 은혜가 먼저이고 그 다음에 죄의식이 따라옵니다. 은혜가 죄의식에 선행합니다. 그러나 그 죄의식은 나를 지옥의 절망과 공포 속에 내모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의 은혜 안에서 과거가 되어 버린, 이미 소멸된 죄의식입니다.이 복음을 아는 사람은 그러므로, 죄로 인해 괴로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죄도 용서해 주시는 예수님에 대한 감사와 감격만이 남은 사람입니다.
이 시간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나에게는 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고백이 있습니까? 그 분을 인격적으로 만나서, 나에게 주시는 다정한 평안과 은혜의 음성을 듣습니까? 그것을 통해 그 분이 진정 하나님이심을 고백합니까? 그리고 비로소, 그 분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인이 나라는 것을 인정합니까? 그러나 그 죄로 인해 슬퍼할 겨를도 없이, 예수님이 나에게 사랑과 은혜를 베푸셨다는 것을 고백합니까? 나는 이미 이 놀라운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지옥의 심판으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이 믿어지십니까? 이 고백이 있는 분들은 가장 복된 사람들입니다. 아직 잘 모르겠다고 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활하셔서 나에게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 분을 깊이 생각하시고, 부활하셔서 나에게 오시는 그 분을 그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분이 들려주시는 음성에 귀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 분은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우리가 행여라도 지옥불을 두려워할까봐 재빨리 우리를 불러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평화와 은혜가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그 분과의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 안에 들어가는 것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부활의 아침에 무덤으로부터 살아나셨습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그 분은 죄와 사망의 감옥에 갇혀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능력으로 그를 살리셔서 만유의 주님으로 드러내시고 만왕의 왕으로 높이셨습니다.
1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모든 복음서가 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은, 부활의 첫 증인은 여성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모두 남성들인 11제자들은 어느 장소에 숨어 있는데, 여성들이 아침 일찍 향유를 가지고 무덤을 찾았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의 눈을 피하려고 했을 수 있고, 무엇보다 조금이라도 빨리 예수님께 가고 싶은 사랑의 마음으로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당시 풍습대로 시신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 가고 있었는데, 걱정거리가 있습니다. 무덤의 입구를 막은 무거운 돌을 어떻게 옮겨야 하나 하는 걱정입니다. 그렇게 가다가, 보니 돌이 이미 굴러져 있고 입구가 열려 있었습니다. 깜짝 놀라서 다가가보니 예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복음서들이 공통적으로 알려주는 부활의 첫 증언인데, 마태복음만이 천사에 대한 디테일을 전해 줍니다. 무덤의 돌을 옮긴 것은 힘센 천사였습니다.
2절을 보겠습니다. 먼저 큰 지진이 있었고, 주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왔습니다. 마태복음은 특별히 하늘을 좋아합니다. 다른 복음서가 하나님의 나라라고 부를 때 마태는 하늘 나라, 즉 천국이라고 합니다. 즉 천국은 우리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말합니다. 그리고 마태와 누가복음에 주기도문이 나오는데, 마태복음에만 하늘에 대한 대목이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리고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는 대목들은 마태에만 나옵니다. 성경에서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입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면서 땅을 내려다보고 살피십니다. 하늘은 우리 손을 아무리 높이 뻗어도 만질 수 없는 초월적인 공간이지만, 또 누구에게나 펼쳐져 있고 올려다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처럼 우리의 능력을 벗어나시는 초월자이시지만, 누구에게나 늘 그 자리에 계셔서 우리를 살피십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선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생명을 주듯이, 하나님의 자비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그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오는 것은, 하나님이 멀리 계시지 않고 직접 인간세상으로 내려오시고 개입하시고 심판과 구원을 베푸신다는 의미입니다.
이 광경은 예수님께서 24장에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재림 장면과 매우 비슷합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도 도처에 지진이 있을 것이고, 하늘에서 내려 오실 것이며, 번개가 번쩍임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하늘이 어두워진 것도 예수님의 재림 직전과 비슷합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재림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온전히 이루어지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능력으로 우리의 주님과 구원자로 드러나는 사건이고,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세상의 창조와 구원의 완성이 되는 종말의 사건이고, 부활은 그 종말을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시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종말론적인 두 사건, 예수님의 부활과 재림이 비슷한 양상을 보이는 것은 매우 당연합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그 천사의 형상은 번개와 같았습니다. 천사가 하늘에서 번쩍 하며 내려왔다는 것만이 아니라, 땅에 내려와 있는 천사의 모습이 계속해서 번개와도 같았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강렬한 빛 가운데 있었다는 말일 수도 있고, 번개처럼 계속해서 번쩍번쩍했다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어쩄든 인간이 상상할 수도 없고 감당할 수도 없는 능력을 가진 천사입니다. 여기서 형상이라는 것은 이데아, form 입니다. 이데아는 만물의 변하지 않는 본성을 말합니다. 그런데 번개는 그야말로 순식간에 번쩍하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0.1초만에 사라지는 것이 천사의 형상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시간도 붙드신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의 눈에는 번쩍 하고 사라지는 것이, 하나님의 시간에서는 그대로 있습니다. 마태의 유아복음 (infancy gospel)이라는 문서가 있는데, 물론 성경처럼 중요한 문서는 아니지만, 거기에 보면 예수님의 아버지인 요셉이 마리아와 뱃속의 아기 예수와 함께 여행하다가 갑자기 시간이 멈춰 버린 세상을 목격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만물의 창조주이시고 심지어 시간의 주님이시기에, 어머니 뱃속의 예수님이 도착하시자 마을 사람들의 시간이 정지되어 버립니다. 그것처럼 하나님의 능력을 가진 천사는 영원에서 시간으로 들어온 것이기에, 순간적인 번개의 형상을 지속적으로 가집니다.
천사의 옷은 눈처럼 희었습니다. 천사가 옷을 입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장에 보면 천사는 하나님이 부리시는 영인데, 영이라고 해서 공기같은 것이 아니라 영적인 몸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부활하면 천사와 같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공기처럼 형체 없이 떠다니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몸이 있는 존재입니다. 다만 신령한 몸이고 영원한 몸이라서 병들거나 죽지 않는 영광스러운 몸입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영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만져 보라고 하시며 영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셨기에, 사람들이 얼른 알아보지 못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나,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은 예수님을 금방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무엇인가 변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신령한 몸으로 예수님은 문이 잠겨 있는데도 쓱 들어오십니다. 그러면서도 생선같은 음식을 드십니다.
4절에는 지키는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자들과 같이 되었습니다. 이 대목도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디테일인데, 지키는 군사들이 도망간 것이 아닙니다. 도망갔으면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것을 알지 못했겠지요. 단지 그 자리에 있고 천사들과 여인들의 대화를 다 보고 들었을텐데, 단지 죽은 것처럼 완전히 얼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이 모든 사실을 보고하니까, 대제사장들이 돈을 주면서,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갔다고 말하라고 시켰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번개처럼 나타나서 돌을 굴리는 모습을 누가 보았을까요? 누가 말했기에 그 기록이 마태복음에 있을까요? 여자들은 아닙니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 여자들은 돌이 이미 굴려진 빈 무덤을 발견했습니다. 본문으로 보아 그 경비병들이 천사들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죽은 것처럼 있다가, 대제사장들에게 돈을 받고 아무 말도 안했지만, 언젠가는 자기들의 신기한 경험을 말한 것입니다.
5절입니다. 천사가 여자들에게 부활의 소식을 전합니다. 신기하게도 무덤에서 나오시는 예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고, 성경에도 그 광경은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무덤에 계시는 동안 음부에 내려가시고, 부활의 아침에 완전히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어서 나타나십니다. 아마도 그 순간은 너무나 영광스럽고 강렬한 능력으로 차 있기 때문에 인간이 보기에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대목은 하나님만이 보실 수 있는 신비로운 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을 본 경비병들도 예수님은 보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광이 너무나 강렬해서 아마 그것을 보았다면 죽었을 것입니다 .천사를 보았어도 죽은 것처럼 되었던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오시는 장면은 아마도 신적인 신비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영광을 아무도 보고 살아날 수 없기에 예수님은 경비병들에게 나타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천사가 말합니다.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안다. 6절 그가 여기 계시지 않는다. 다른 복음서에는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고 합니다.
7절에는 사명을 줍니다. 빨리 가서 제자들에게 알리라고 합니다.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입니다. 부활을 경험하는 성도들에게는 즉시 사명이 주어집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알리라, 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은, 그저 아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고 돌아서서 자기 일을 계속할 수 있는 종류의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나 자신의 인생의 의미와 목적도 완전히 바꾸어 놓는 일입니다. 이전에는 이 세상의 것만 좋아하고 추구했습니다. 세상의 인정을 받고 거기서 목표를 이루어서 성공적이고 안정적인 삶을 사는 것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그리고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이 믿어지면, 이 세상의 삶이 전부가 아니고, 세상적인 물질과 인정을 갖는 것이 인생의 가치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하나님이 나의 삶을 모두 주관하시고 살펴보시며, 인생을 마친 후에는 그 분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에 합당한 사람은 예수님처럼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그 몸은 더이상 병들고 죽는 몸이 아니라 신적이고 영광스러운 몸, 영생하기에 합당한 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께 속한 사람들에게 그러한 부활의 몸으로 변화되는 놀라운 영광을 주십니다. 이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자기 삶의 주인이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이심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단하게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는 삶,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삶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식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기쁨과 감사와 평화를 누리는 삶을 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천사는 또한, 예수님이 갈릴리로 먼저 가실 것이니 거기로 가서 예수님을 뵐 것이라고 전하게 합니다. 갈릴리는 제자들의 대부분의 집이 있는 곳입니다. 거기서 처음으로 예수님을 만났고, 그 분의 매력에 빠졌습니다. 그 분의 사역을 보면서 놀랐고, 그의 교훈을 듣고 감탄했으며, 그 분이 심어주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갖고 가슴이 뛰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삶이 바뀐 곳이 갈릴리입니다. 이제 모든 것이 지나서 실망하고 혼란에 빠진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갈릴리로 오라고 하십니다. 갈릴리에서 다시 시작할 것입니다. 마치 맨 처음으로 돌아간 것 같지만, 지난 3년동안 했던 것이 꿈과 같지만, 그 곳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나면 모든 것은 새롭게 될 것입니다. 이제 완전히 새로운 삶이 시작될 것입니다. 그들의 삶은 이제 더이상 세상의 권세나 나라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참된 삶과 가치와, 그 사명으로 부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비전과, 그것을 능히 감당하도록 도와주시는 성령님의 능력을 경험할 것입니다. 갈릴리에서 처음에 가졌던 겸손한 마음과 첫 사랑을 가지고, 예수 부활의 복음 능력으로, 그들은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인간 세상과 모든 자연과 우주의 새로운 창조와 구원의 날이 시작되는 이 때, 제자들이 온전히 새로운 자리에서 시작하도록 하려고, 주님은 그들을 갈릴리로 부르십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승리와 영광을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그 분으로 인해 새 생명과 사명과 소망을 갖게 됨을 기뻐합시다. 예수님은 자녀들에게 그의 부활의 복음을 가서 전하라는 사명을 주시는데 그것에 순종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내가 예수님의 부활을 온전히 확신하고 나 자신의 고백으로 만들 수 있도록, 그래서 나도 예수님의 부활을 사람들에게 담대히 또 기쁘게 전할 수 있게 되도록 기도합시다. 어려움이 있을때 다시 갈릴리로 불러서 새 시작을 하게 하시는 주님을 생각하며, 나도 삶이 변화되어서 예수님께 다시 드려지는 삶이 될 수 있도록 헌신의 기도를 합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두 행악자들도 함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양쪽 옆에서 못박혔습니다. 갈보리 언덕에 세 개의 십자가가 섰습니다. 얼른 보기에는 똑같이 생긴 세 십자가들입니다. 그러나 거기 달린 사람들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습니다. 가운데 달리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이사야 53:12의 말씀처럼 그는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받았습니다. 그러나 명패에 쓰인 대로 그는 유대인의 왕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왕이신 나라,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는 사람의 마음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우리가 마음 속으로, 내 마음에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하면 오는 나라가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에 제자들과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말할 때에는, 하나님이 현실적으로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진짜 나라를 의미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결국 예수님이 왕이신 나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결국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예루살렘이야말로 수도요, 로마 총독과 유대 관원들과 제사장들이 불의하게 다스리고 있는, 되찾아야 할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자신들도 그 좌우편에 앉기를 기대했고, 누가 더 큰지 다투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잘못된 것이었지만, 제자들은 그만큼 예수님이 정말 왕이 되실 것이라고 정말로 믿은 것입니다.

그들의 기대의 절정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들어가신 장면이었습니다. 바로 오늘, 종려주일에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성 안으로 들어가신 것은 정말 정답고, 유쾌하고, 즐거운 장면이지만, 그것의 의미를 사람들은 모두 압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시온의 왕이 겸손하여서 나귀새끼를 탄다고 예언했습니다.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것은, 바로 자신이 구약성경이 예언하는 메시야, 왕이시라는 것을 온 세상에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광경을 본제자들과 사람들은, 이제 로마와 종교가들의 압제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이 보내신 참된 왕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크게 환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세우시는 나라는 세상의 권세와 군대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0:25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의 나라는 섬기는 나라, 그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심으로 세워지는 나라입니다. 바로 그것을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의 양편 옆에 두 사람이 또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 행악자들을 다른 본문에서는 강도라고 부릅니다. 본문을 보면 아마도 서로 잘 아는 사이, 동지와 같은 사이였을 것입니다. 아마도 폭력으로 해치고 약탈하는 악한 강도나 산적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바라바라는 사람이 있는데 예수님 대신 풀려난 자입니다. 그는 요한복음에서 강도라고 불리는데 마가 누가복음에서는 성중에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붙들린 자입니다. 민란이라는 것은 아마도 로마인들을 대상으로 일어난 저항운동 같은 것일 테니, 두 행악자도 어쩌면 그렇게 로마에 항거하여 싸웠던 사람들일지도 모릅니다. 십자가는 로마인들이 정치범이나 반역자들, 특별히 죄질이 나쁜 사람들을 본보기로 삼기 위하여 처형하던 형틀입니다. 그러니 이 행악자들도 매우 나쁜 강도들이거나, 로마에 반역하여 난리를 일으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은 예수님을 비방하면서,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말합니다. 사실 이 말만 본다면 괜찮은 말일지도 모릅니다. 한국말에는 존대말과 반말이 있어서 성경 번역에도 어려운 문제가 됩니다. 예수님은 늘 반말을 하시고 제자들은 존댓말을 합니다. 그래서 마치 예수님이 큰 어른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사실은 헬라어에는 영어처럼 존대말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친구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이 강도의 말도 한국말로 반말로 번역했는데 만약에 존대말로 한다면 “당신이 그리스도가 아닙니까? 당신과 우리를 구원하소서”가 됩니다. 본문은 그가 비방했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 말투와 태도에서 예수님을 모욕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한 말은 본문 앞부분에서 지도자들과 군인들의 말, 네가 그리스도면 자신을 구원하라, 네가 유대인의 왕이면 자신을 구원하라는 말과 일관적입니다. 아마도 그는 예수가 누구인지 알았고, 사람들의 조롱도 들었기에, 십자가에 달린 고통 속에서도 예수님의 비방에 참여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면 숨도 쉬기 어렵습니다. 그 힘든 상황에서 굳이 예수님을 비방했을까요? 어쩌면, 이 말에는 그의 진심이 조금이라도 담겨 있었을지 모릅니다. 예수님, 당신은 그리스도가 아닙니까? 왜 자신을 구원하지 않습니까? 자신도, 우리도 좀 구원해 주소서 라고 말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편의 강도는 그를 꾸짖습니다. 네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 그는 목숨이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두려울 것이 없지 않습니까? 앞에 왕이나 황제가 와도 그 앞에 겁먹을 필요가 있습니까? 어차피 죽을 텐데요.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육신 뿐 아니라 우리 영혼도 영원한 지옥불에 던지실 수 있습니다. 육신의 죽음으로 그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계수할 날이 올 것이며 마땅히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이 사람과 동일한 정죄를 받기 때문에 두려워하라고 합니다. 자신이 보기에 그와 동료는 마땅히 죽을 죄를 지었기에 이렇게 십자가에 달리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이 예수라는 분은 조금도 잘못한 것이 없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신 의로우신 분인데, 이 분과 자신들이 동일한 형벌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정확히 왜 그럴까요? 이 강도는 지금 십자가의 극심한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정상적인 사고는 불가능합니다. 또 이 강도가 예수님에 대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에 대해서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었을 가능성은 낮을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 고난을 당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았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도리어 그의 말은 아마도, 본능적이고 직관적인 깨달음이나 느낌이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저 그는 한 인간으로서의 양심, 하나님 앞에 솔직히 선 영혼, 그리고 그가 이해하고 있던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심판에 기반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이고 형벌을 당해야 하는지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럴 수 없습니다. 그는 지극히 존귀하고 거룩하신 분입니다. 의로운 선생님이요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알리신 분입니다. 그 분과 자신이 똑같은 처지에 놓인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왕자와 거지라는 소설에 보면 거지가 왕자와 똑같이 생겼습니다. 사람들이 왕자인줄 알고 시중을 드니까 거지가 폼잡는 것이 아니라 너무 불안해 합니다. 자기에게 그럴 자격이 없기 때문에 나중에 발각되면 큰 벌을 받을 것입니다. 그것처럼 이 강도도, 예수님과 같은 처분을 받는다니 크게 잘못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이러한 형벌을 당하시니, 그 분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이 악한 자신과 동료는 얼마나 더한 심판과 정죄를 받아야 할 것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같은 정죄를 받고 있으니, 아직도 더 당해야 할 심판과 형벌이 훨씬 많을 것입니다. 혹시 천사가 나타나서 네가 어떻게 예수님과 같은 형벌을 받는단 말이냐 너는 더 큰 벌을 받아라 하며 지옥불에 던질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가 보기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이 세상이 얼마나 끔찍한 죄악 가운데 있는지를 드러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 의로우신 분을 이렇게 비참하게 처형시킬 수 있는 인간세상, 유대인과 로마인을 막론하고 모두가 죄악과 불의 가운데 타락해 버린 끔찍한 세상의 현실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본 것입니다. 자신들이 벌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더라도, 이 의로우신 분을 이렇게 죽일 수는 없다. 이 세상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심판과 정죄 아래 있고 하나님이 반드시 곧 이 세상에 벌을 내리실 것이라는 것을 그는 십자가에 달린 고통 가운데서도 직관적으로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은 그저 죽었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자신의 동료를 꾸짖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말한 또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은 앞의 것과는 매우 다른 이유입니다. 이 강도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어서 그가 누군지 알았고, 예수님이 얼마나 위대한지, 그의 사랑과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았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았고, 그가 사람들을 사랑하며 그들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전하신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존경하며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동료에게, 이 분은 옳지 않은 것을 하신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예수님은 너무 멀리 계십니다. 늘 사람들이 둘러싸서 다가갈 수도 없고, 설사 곁에 계셔도 자신같은 죄인과는 너무나 차이가 나서 거리감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수님이 바로 곁에 계십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자기를 버려도, 심지어 부모형제도 멀리 있어도, 예수님이 바로 곁의 십자가에서 그의 곁에 계십니다. 심지어 같은 십자가, 같은 고통, 같은 죽음을 당하십니다. 그 강도는 바로 곁에서 숨을 몰아쉬는 예수님에게서, 바로 곁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느낍니다. 우리가 죽으면 모든 원수는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어도 하나님은 피할 수 없습니다. 시 139: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무덤까지 찾아오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리면, 그 바로 옆에까지 오셔서 같이 매달리셔서 숨을 몰아쉬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두렵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결코 떠나서 도망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두려운 사랑입니다. 아가 8:6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이 사랑이 그 강도를 변화시킵니다. 내가 전에는 그 분과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큰 죄인이었는데, 이제 그 분이 내 곁에 오셔서 나와 같이 되셨습니다. 이제는 그 분이 어디를 가시더라도, 내가 그 분을 따라갈 수도 있겠다는 소망이 생깁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말합니다.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이것은 매우 놀라운 고백입니다. 그가 죽어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예수님이 죽으셔도 그의 나라는 끝나지 않습니다.

그 강도는 예수님이 전하던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메시지를 들었으니, 그도 듣고 알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는 것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셨습니다. 킹덤, 하나님의 왕국, 하나님이 왕으로 등극하시고 다스리시는 나라가 곧 올 것이며 그 때가 찼다는 메시지를 그도 듣고, 믿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이 대목에서는 예수님은 실패자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실 것을 열렬히 기대했지만, 그 분도 결국 로마군인들에게 잡혀 십자가에 죽임당하시니, 그 분이 전하신 하나님 나라도 결국 실패라고 하며 절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강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지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시리라 말합니다. 이 나라가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나라임은 그에게 명백합니다. 하나님의 왕권은 우리의 육신이 죽어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죽어서 영혼이 가는 천국이 아니라, 살든 죽든 어떤 상황에서도 변치 않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의 왕국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의 실패나 패배가 아닙니다. 그는 끝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예수는 영광받고 하나님 나라의 통치자로 인정받으실 것입니다. 이 강도는 놀랍게도 이 사실을 알아서 예수님이 그의 나라에 들어가실 것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아주 겸손히 또 담대히 부탁합니다.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여기서 나를 기억해 달라는 말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도 그 중에 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대답하십니다. 낙원이라는 단어는 파라다이스인데 성경에 많이 나오지 않습니다. 바울이 낙원에 올라가서 말할 수 없는 것을 보았다고 할 때 나옵니다. 낙원은 일차적인 의미는 나무와 물이 있는 정원과 같은 곳입니다. 계시록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묘사할 때 생명나무와 생명수 강물이 나옵니다. 십자가의 나무는 죽었습니다. 그 위에 달린 사람에게도 죽음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나무는 과일을 먹는 이에게 생명을 줍니다. 그 잎사귀는 만국을 소생시킵니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숨을 몰아쉬기에 금방 목이 마릅니다. 그래서 신 포도주로 갈증을 채우려 합니다. 그러나 생명수의 강물은 누구나 값없이 마실 수 있으며 영원히 목마르지 않습니다. 이 강도는 예수님과 함께 그 날 이 낙원에 들어갈 약속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이 강도가 가장 운좋게 구원받은 사람이라 말합니다. 죽기 직전에 예수님을 믿어서, 아무 선행이나 공로가 없지만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강도가 운좋게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이 강도와 같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압니다. 영원한 하늘 영광과 신성을 가지신 분이 우리와 같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당할 죄와 사망의 저주를 대신 지시고 형벌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심지어 그 강도처럼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지지도 않았습니다. 우리가 질 십자가는 예수님이 오롯이 지셨습니다. 이 사실 앞에 두려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강도가 예수님과 같은 형벌을 받는 것을 두려워했다면, 그 형벌을 완전히 예수님께 넘긴 우리는 더 두려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강도가 십자가에 나란히 못박히신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포기하지 않는 사랑을 경험했다면, 우리는 우리를 끝까지 쫓아오시는 불길같은 하나님의 사랑에 더 감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강도들과 같은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이 얼마나 악하고 불의한지 보여줍니다. 십자가 양쪽의 강도들은 우리 인간 전체를 대표합니다. 죄악 속에 죽어가면서도 예수님을 비방하고 자신의 안위만 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편 강도처럼, 예수님이 내가 받아 마땅한 형벌을 받으시고 그만큼 내 곁에 다가오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주신다는 사실에 감격하는 죄인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할 저주를 대신 받으시며 우리에게 낙원을, 구원을 약속해 주십니다. 이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가까이 동행하는 고난주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고난받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마지막 주에 있었던 일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신 예수님은 시장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베다니에서 좋은 대접을 받으셨다고 생각하기에, 예수님이 배고프셨다는 것은 조금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예수님은 멀리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일부러 가까이 가셨습니다. 그랬더니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나무에게 말씀하십니다. 더이상 영원히 아무도 네게서 열매를 먹지 못하리라. 우선 나무에게 말씀하셨다는 것도 이상하지요. 누가 보면 농담하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만유의 주님으로서 말씀하시고, 바람과 파도에게도 말씀하시지요. 제자들이 그 말을 들었는데, 다음날 아침에 와보니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라 있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 있습니다. 마가에만 나오는 디테일인데, 이 무화과나무가 열매가 없었던 것은, 그것의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열매가 나는 것은 늦여름인데, 지금 이 시기는 딱 지금인 봄이거든요. 그러니 열매가 없는 것이 당연한데, 예수님이 왜 이렇게 하셔서 나무가 뿌리째 마르도록 하셨는지 참 이상합니다. 나무의 입장에서는 너무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 우리는 먼저 한가지 커다란 전제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먼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셨고 다스리시기에, 마땅히 모든 것을 그 분의 뜻대로 하실 수 있습니다. 무화과 나무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 의해 말라죽었다 해도, 그 분의 뜻이기에 불평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토기장이와 진흙에 비유합니다. 토기장이가 자기 뜻대로 그릇을 만드는데, 진흙이 왜 나를 귀한 그릇으로 만들지 않았냐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이 모든 것을 뜻대로 하신다는 것은, 그 분이 자기 마음대로 하는 독재자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가 이유도 없이, 자비심도 없이 그저 기분에 따라 일하시는 분이라면 , 그가 다스리시는 피조물인 우리는 늘 불안할 것입니다. 무화과나무가 때가 아닌데 열매가 없어서 말라죽으면, 억울할 뿐 아무에게도 호소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의롭다, 즉 옳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와 만물을 의롭게 다스리십니다. 그가 하는 모든 일은 정의롭습니다. 우리는 워낙 좁은 안목과 이기적인 관점을 갖고 있어서 하나님의 일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아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결국 모든 것이 선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믿지도 않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들인 우리들은, 내가 이해하지 못해도 하나님은 분명히 뜻이 있으셔서, 사랑하셔서 그렇게 하셨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무화과나무가 마른 것도,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질문은 남습니다. 봄에 열매가 없는 것은 무화과나무의 잘못이 아닌데, 왜 말라야 했을까요? 이 질문에 대답을 줄 수 있는 중요한 표현이 본문에 있습니다. 그것은 13절 끝에 나오는데, “무화과의 때가 아니었다” 여기서 때라는 단어는 대개 season 이라고 번역하는데 KJV 에는 time시간이라고 정확히 번역했습니다. “무화과의 시간이 아니었다” 이것과 정확히 반대되는 표현이 마가복음 첫부분, 예수님의 첫번째 선포의 말씀에 나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많이 들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 선포의 맨 처음에 나오고 가장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어로 kingdom, 즉 왕국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다는 것은 하나님의 왕권, 하나님의 통치가 가까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맨 처음에 외치신 말씀이,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다, 즉 하나님 나라의 때가 찼다는 것입니다.
시간 time 이라는 헬라어 단어가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크로노스입니다. 크로노스의 시간은, 우리가 시계나 달력으로 잴 수 있는 시간입니다. 며칠 몇 시간 몇 분 하고 양적으로 잴 수 있는 시간, 언제나 일정하게 흘러가는 시간입니다. 여러분 군대에서 흔히 듣는 말이 있지요? 국방부 시계는 느리게 가냐? 하지만 국방부 시계도 똑같이 갑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때가 찼다, 시간이 찼다고 할 때 이 의미이겠습니까? 지금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나라는 즉 예수님의 재림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래서 온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완성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의 다시 오시는 때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언제 오실지, 몇날 몇시에 오실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 다시 오시는 때가, 달력이나 시계로 잴 수 있는 크로노스의 시간이겠습니까? 그런 시간으로 하나님 나라의 시간이 찼다면, 대체 얼마나 찼다는 말입니까? 예를 들어서 예수님이 바로 내일 오신다고 해 봅시다. 그럼 정말 얼마 안 남은 겁니다. 오 주님, 내가 주님 맞이할 준비가 하나도 안 되었어요 하고 당황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예수님이 내일 오신다면, 그것은 오늘은 안 오신다는 뜻입니다. 적어도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안 오시는 하루를 보내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이 언제라도 오실 수 있다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때는 달력이나 시계로 잴 수 있는 양적 시간이 아닙니다.
헬라어에는 크로노스라는 양적 시간이 아니라 질적 시간을 나타내는 단어가 있습니다. 즉 카이로스입니다. 카이로스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는 때를 가리킵니다. 내가 태어난 때, 내가 예수님을 믿은 때, 내가 죽는 때 그것들은 나에게 가장 중요한 시간입니다. 그저 시계바늘이 돌아가는 일상적인 시간이 아닙니다. 그런 질적인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는 시간이 카이로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때가 찼다고 하시는 때, 시간이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저 시간이 흘러간다고 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 구원의 엄청난 일이 발생해야 비로소 일상을 뚫고 들어오는 카이로스의 시간에 임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카이로스가 찼다는 말씀은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일상적 시간 안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가 평소처럼 살다가, 조금 노력하고 기대하고, 생활패턴을 조금 바꾸지만 근본적 개혁은 없는 인생과 사회에서 그저 때가 되면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계획이나 노력, 바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과 은혜로만 일어납니다. 인간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에 그 분의 뜻을 온전히 이루면서 일어납니다. 이 때가 찼다고 예수님은 복음전도 맨 처음에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무화과나무의 때가 아니었다고 말씀합니다. 무화과나무의 시간, 카이로스가 차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때가 찼다고 외치셨는데, 무화과나무는 나의 때는 오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 나무는, 세상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외면하는 모든 사람들을 대표합니다. 예수님은 불과 며칠 후면 십자가에 못박히실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때가 찼다고 외치시는데, 사람들은 무지하고 악해서 아직도 그 때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복음서 전체에서, 기회만 있으면 때가 찼다고 말씀하십니다. 그저 기회만 있으면 천국이 가까왔다고 외치시고, 제자들에게도 그러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을 2명씩 마을마다 보내시면서, 사람들에게 전할 소식은 단 하나, 천국이 가까왔다고 외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말 그대로 자나깨나, 밥먹을때나 걸을 때나 언제나 하나님 나라만 생각하십니다. 그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다는 것을 늘 사람들에게 알리십니다. 그런데 이날 아침에, 때가 차지 않았다고 말하는 무화과나무를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마도 이 나무를 통해, 제자들에게 또다시 교훈을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만일 너희가 때가 찼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이 때를 놓치면, 천국에서 멀어지고 이 나무처럼 심판받을 것이다. 이 교훈을 주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마르게 하신 이유와 교훈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질문은 남습니다. 무화과나무를 희생해서 우리에게 교훈하신 것은 좋으나, 무화과나무의 입장에서는 그래도 억울하지 않은가입니다. 때가 되지 않아서 열매가 없었고, 늦여름이 되면 당연히 무화과를 많이 내었을 것인데, 공연히 예수님의 눈에 띄어서 말라죽게 되었으니 얼마나 억울합니까? 그 옆에는 다른 나무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 나무들은 오래 살다가 죽었습니다. 아무 흔적도 남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무화과나무는 예수님께 적어도 쓰임받았습니다. 그 쓰임받은 결과가 말라죽음이었습니다. 나무 뿐 아니라 그 옆에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눈에 띄지 않았다면 그저 오래 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 여럿은 어부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않았다면 더 오래, 더 편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고 의미가 없는 일생을 마쳤을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묻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눈에 띄지 않아서 편하고 오래 살고 싶습니까? 아니면 주님 눈에 띄어서, 쓰임받고, 그 대신에 고난받고 싶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인생의 의미와 목적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분을 믿기 전에는 세상에서 잘 사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고난당하신 그 분을 내 주님으로 모시면, 잘 살고 오래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고난받아도, 이 나무처럼 말라죽어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임받다가 죽는 것이 소원이 되어야 합니다. 이 무화과나무는 예수님께 쓰임받았습니다. 그것이 가장 귀한 것 아닙니까? 이 나무는 정말로 복받은 나무 아닙니까? 우리도 그런 삶을 사모해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예수님도 믿고 세상에서도 잘 되기 바랍니다. 그런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해 달라고 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고난받기 위해 들어오셨습니다. 불과 며칠 후면 십자가를 지셔야 합니다. 그 고난당하시는 예수님 곁에 함께 있고자 하는 사람이 었습니다. 심지어 제자들도 도망갔습니다. 예수님처럼 그 분의 고난을 나도 지고 함께 그 분처럼 멸시와 죽음을 당하고자 하는 피조물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무화과나무는 그렇게 했습니다. 이 넓은 우주, 수많은 피조물들 중에 오직 이 무화과나무만 예수님과 함께 고난당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가장 영광스런 일이 아닙니까? 그리고 우리는 압니다. 우리가 그와
롬 8:17b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 하늘의 영광을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을 위해 받을 고난이 있습니다. 이 고난을 피하시겠습니까? 고난이 왔다고 원망하시겠습니까? 도리어 기뻐하고 감사할 일이 아닙니까?
벧전 4:12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 뵐때 우리에게는 세상이 상상도 못하는 기쁨과 감격을 누릴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면. 이 무화과나무는 그렇게 했습니다. 우리가 정말 부러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사순절을 지내고 있습니다. 다음 주일은 종려주일이고 고난주간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평안이나 풍요를 바랄 것이 아니고, 고난받을 때 원망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을 생각하며, 나의 고난이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되기를 위해 기도해야겠습니다. 그리할 때 주님은 우리에게 상상도 못했던 영광으로 베풀어주시고, 그분의 나라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인간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그 때를 위해 부름받았습니다. 언제라고 준비되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나라를 위해 고난받아고 기쁨으로 여기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오늘은 3월 16일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16을 외어보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제 요한일서 3:16을 읽어보겠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말씀도 우리가 꼭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요한복음 3:16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받는 영생에 대해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주님, 하나님의 아들로 믿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목되고, 우리는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믿음은 소망과 사랑과 함께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이 같이 갑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참 소망을 갖게 됩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 우리는 연약하고 넘어지지만, 주님 앞에 서면 우리는 완전해지고 영화로와질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죄악으로 인해 고난과 슬픔이 있지만, 그 날에는 모든 눈물이 씻기고 영원한 복락이 있을 것입니다. 믿는 성도들은 그렇게 산 소망을 갖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듯이, 소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8:24는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니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한편, 믿음은 사랑과 함께 갑니다. 예수님은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으면 그 계명을 따라 서로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으로 구원받는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요한일서 3:14는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갔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는 것으로 인해 구원받았습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어떻게 알게 됩니까? 16절에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것을 통해 우리가 사랑을 안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 주님의 사랑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사람이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면 그보다 더한 사랑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목숨을 버린다고 할 때 목숨은 프쉬케, 즉 영혼이라고도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이 흙으로 아담을 지으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 즉 살아있는 영혼이 되었다고 하는 대목에서 나옵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이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주셨기에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사람이 대단한 것 같아도, 이 호흡이 잠시 끊어지면 살 수 없습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 삶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 앞에서 인생은 그렇게 연약합니다. 하나님이 늘 우리의 생명을 붙들고 계셔야 합니다. 사무엘상 25:29에는 여호와께서 다윗의 생명을 생명싸개 속에 싸 두신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귀하게 싸서 지켜 주시기에 우리의 생명이 보존됩니다. 그러나 이 호흡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때가 되면 주님은 이 숨을 거두어 가실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의 삶은 끝날 것입니다. 이사야 40:7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풀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아는 백성이 복됩니다. 교만하지 않고 주님 앞에 겸손한 백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다고 하는 말씀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렇게 호흡에 의지하는 육신으로 오신 분임을 상기시킵니다.

요한복음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확실히 증거합니다. 그는 영원부터 아버지 하나님의 품에 계신 독생자 말씀이십니다. 그런데 때가 차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잠시 겉옷을 걸치듯이 육신을 입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 신화에는 신들이 필요에 따라 인간의 육신의 모습을 잠시 입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볼일 끝나면 다시 신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것은 그런 외형만이 아니라, 실제로 인간의 몸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갓난 아기로 태어나시고 먹고 자고 자라시고, 30년의 세월이 걸려서 청년이 되신 것입니다. 참된 인간의 육신을 가지신 참 인간이십니다. 그런데 육신은 몸과 의미가 좀 다릅니다. 고린도전서 15:44 몸body은 육의 몸이 있고 영적인 몸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몸은 영화로운 몸입니다. 그 몸으로 제자들에게 오셨고 지금도 아버지 우편에 앉아계시며 다시 오실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 오실 때에는 신령한 몸을 입을 것입니다. 그런데 육신flesh은, 인간의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있는 존재입니다. 율법의 정죄 아래 있고 심판을 받을 육신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르고 육체는 성령을 거스른다고 하십니다. 요한복음이 말씀이 단지 몸이 된 것이 아니라, 육신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신 것은 아담으로 인한 온 인류의 죄와 형벌, 고난, 심판을 받을 육신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 육신 가운에 연약한 호흡으로 매 순간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연은 필연의 반대입니다. 필연은 반드시 일어나야 되는 일입니다. 우연은 일어날 수도 있고 안 일어날 수도 있는 일입니다. 지금 우리가 미국에 사는 것은 우연입니다. 우리는 한국이나 다른 나라에 살 수도 있는데 미국에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었는데,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육신이 되신 것일까요? 예수님이 내려다보시며, 어디 보자, 아담이 선악과를 먹나 안먹나 … 아이고 먹었네 내가 육신으로 가야 되겠네 … 이게 아닙니다. 만일 그랬다면 예수님이 입으신 육신은 예수님 자신의 인격 자체가 아니라 단지 상황에 따라 입으신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추우면 입는 겉옷에 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이 단지 겉옷이었다면, 예수님이 육신으로 십자가를 지신 것은 마치 겉옷이 못에 걸려 약간 찢어진 것과 같을 것입니다. 우리의 겉옷이 상하면 속은 상하지만, 우리 자신이 상처를 입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입으신 육신은 그런 겉옷이 아니라, 그 육신을 통해 참으로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시고, 그 육신과 함께 살고 죽는 참된 자신의 인격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영원하신 참 하나님이시기에, 육신을 입는 이 사건은 영원부터 결정된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영원 속에서 자신을 육신을 입고 인간이 되실 성자 하나님으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도 영원 속의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결정된 사건입니다. 요한계시록 13:8에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된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 문장은 어순이 애매해서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창세 전부터 죽임을 당하시는가? 아담이 죄를 짓고, 그 후에 예수님이 성육신하시고, 그 다음에 죽으시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것이 영원하신 아들 하나님께 일어나기에, 시간적인 순서가 먼저가 아니라 예수님의 희생이 먼저이고 인간의 죄는 부수적입니다. 죄가 먼저이고 은혜가 부차적으로 따라오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가 먼저 있고 죄는 그림자로 따라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창세로부터 죽임당하신 어린양이시며, 그 손과 발의 못자국은 영원히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에 가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너무 기뻐하면서, 예수님 물 위를 걸으시는 모습을 꼭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오케이 하시고 물 위를 걸어셨습니다. 그리고 빠지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발에 못자국 때문에 물이 새서.

그러므로 예수님이 육신을 입으신 것은 분명한 목적이 있으셨습니다. 십자가에 죽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인간은 죽을 존재들입니다. 영어로 mortal 이라고 합니다. 반드시 죽을 존재, 그것이 인간의 존재를 규정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을 존재인 육신으로 오셨을 뿐 아니라, 죽기 위해 오셨습니다. 세상에 죽는 것을 목적으로 태어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전쟁에 나가는 군인은 죽을 각오를 하고 갑니다.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죽는 것을 임무로 전쟁에 나가는 군인이 있겠습니까? 만일 포로로 잡혔다가 나오면 국민적 영웅이 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포로로 잡히는 것을 목표로 하고 전쟁에 나가는 군인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려고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먼저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마치 유월절 저녁에 죽임을 당함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출하는 어린양처럼, 우리를 위해 죽임당하십니다. 히브리서에는 예수님이 자신을 제사로 드리신 것이 나옵니다.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또한 자신을 완전하고 영원한 제물로 드리셨습니다. 완전한 제사이기에 더이상의 제사가 필요없고 완전히 효력이 있어서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심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의 육신이 죄의 법에 붙잡혀 연약하여서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으니, 예수님은 죄 있는 육신으로 오셔서 육신으로 죄의 법을 멸하셨습니다. 육신이 죽으면 죄의 법에서 해방되듯이, 우리 육신이 예수님과 하나되어 함께 십자가에 죽으면 죄와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어 새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바울에게는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세례받고 죽은 것이 중요합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을 강조하며, 내가 날마다 죽노라 라고 합니다. 이렇게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아나는 것을 통해 새 사람이 되도록 하신다는 뜻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의 의미를 다양하게 알려주십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것을 또 다르게 설명합니다. 요한은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특별히 예수님이 목숨을 버리셨다고 표현합니다. 그것은 요한에게 특유합니다. 이 표현이 처음 나오는 곳은 요한복음 10장입니다. 예수님이, 나는 선한 목자라 나의 양들을 위해 내 목숨을 버리노라 라고 하십니다. 늑대가 양을 해치기 위해 오면, 선한 목자는 목숨을 걸고 싸웁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는 양떼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은 문자 그대로 악한 세력의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시기 위해 죽으심을 말합니다. 똑같은 표현을 베드로가 쓰게 됩니다. 예수님이 곧 제자들을 떠나가신다고 하자 베드로는 내가 주를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예언처럼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번 부인하게 됩니다. 이것은 밤에 예수님을 잡으러 온 군병들이 예수님의 일행과 부딪치는 장면입니다. 군인들은 무기를 들었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칼을 적어도 두 자루 가졌습니다. 충돌하면 많이 다치거나 죽을 수 있는 상황입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은 직접 군인들을 대하시고 잡혀 가십니다. 그런데 오직 요한복음만이, 예수님이 직접 제자들을 보호하시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군인들에게, 너희들이 찾는 나사렛 예수가 나이니, 이 사람들은 가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그 위험한 상황에서 제자들을 물리적으로 보호하시고 그 대신 예수님 자신이 잡혀 가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일이고, 또 우리를 위해 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대신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셨습니다. 지금 우리들도, 당시 제자들에게 닥쳤던 생명의 위협 앞에 있습니다. 그 때 제자들과 군인들의 충돌은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의 충돌이었고, 예수님 당시에도 그것은 언제 위험한 일이 닥쳐도 이상하지 않은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 이후 한 세대가 지난 주후 70년에, 로마군은 예루살렘을 완전히 파괴하고 유대인들을 죽이고 흩을 것입니다. 서로 다른 민족들이 미워하고 싸우고 해치는 이러한 인간의 죄악은 그 때 이후 한번도 그치지 않고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지난 2차대전의 피해가 너무나 커서 한동안은 인간들이 자제하면서 우리 세대가 지나갔습니다. 이제는 2차대전을 친히 겪은 세대가 지나면서, 그 비극을 잊어버린 인간들은 다시 서로를 위협하고 자기 이득만 취하면서 서로 돌보지 않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죄악을 요한은 마귀의 일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시기 위함입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입니다. 우리도 형제를 미워하면 살인자가 됩니다. 여기서 살인자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요한만 쓰는 특이한 형태인데 말 그대로 사람을 죽이는 자입니다. 마귀가 처음부터 살인했다는 것은 가인을 가리킵니다. 가인은 아담과 하와의 아들이면서 인류 첫 살인자로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자 가인은 내가 알지 못합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하고 반문합니다. 원어에서는 “내가” 가 강조됩니다. 내 형제를 지키는 자입니까, 내가? 라는 느낌입니다. 너무나 당당히 말하기에 속을 지경입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다 형제자매를 지키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에서는 원래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는 분입니다. 시편 121편에 우리를 지키시며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 분의 형상으로 지으신 것은, 하나님처럼 우리도 형제자매를 지키는 자가 되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지금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라마다 자기 이익만 내세우며 다른 민족과 국민의 고통은 외면합니다. 나라들마다 자기 이익만 챙기느라 세상에서 고통받는 백성들을 돌보지 않습니다.

바로 이러한 죄악과 위험의 세상에서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위협에 맞서 혼자 당하심으로 제자들을 살려 주시고 보호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너무 어렵게 느껴집니다. 도대체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상황이란 어떤 것입니까? 먼저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사랑의 모습임을 고백합니다. 우리가 서로 나누어야 할 사랑은 단지 일상적인 것만이 아니라, 이 정도까지 되는 것을 바라보는 그런 사랑입니다. 물론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은혜 주시고 능력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다만 그 능력이 무엇인지는 우리가 배웁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사랑으로 군인들을, 자기를 해치려는 악한 무리들을 담대히 맞서셨습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고 참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마귀의 세력에 맞서 이기는 것, 형제자매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결국 사랑입니다.

교회에는 워낙 다양한 성격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는다는 공통점 외에는 하나도 같은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오해하거나 얼굴을 붉히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럴 때 먼저 이해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소한 일로 오해가 일어나더라도, 저 사람은 아닐거야 라고 일단 믿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 신뢰합니다. 혹시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 와도 일단 믿어주고 시작합니다. 그리고 내가 오해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주님처럼 목숨을 바치지는 못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순종하면서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