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게시판

요한복음 20:24-29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부활의 아침에 무덤으로부터 살아나셨습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그 분은 죄와 사망의 감옥에 갇혀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능력으로 그를 살리셔서 만유의 주님으로 드러내시고 만왕의 왕으로 높이셨습니다.
안식일을 지낸 주일 아침에, 하늘로부터 천사가 번개처럼 내려왔습니다. 그의 능력에, 무덤을 지키던 군인들은 도망갔습니다. 천사는 무덤을 막았던 돌을 굴렸고, 그 위에 앉았습니다. 저는 이 광경이 상상하면 재미있습니다. 성경에 천사가 앉아 있는 모습은 유일합니다. 아마도 여인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렸을텐데, 앉아서 기다리자 하는 것 같아서 왠지 유쾌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제일 먼저 알게 된 것은, 모든 복음서에서 알려 주듯이 여인들이었습니다. 여인들은 당시 풍습대로 예수님의 몸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 무덤으로 향했습니다. 아마도 빨리 가기 위해서, 그리고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이른 새벽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염려는, 돌을 어떻게 옮길까였습니다. 그런데 가 보니 돌은 이미 굴러져 있고, 지키던 군인들은 안 보이고, 천사가 있습니다. 천사가 전해주는 놀라운 말을 듣습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정말로 예수님은 안 계시고 세마포만 개어져 있었습니다. 여인들은 깜짝 놀라 달려서 내려왔고,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들은 것을 말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후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나타나십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은 더이상 우리와 같은 육체가 아니라 신령한 몸, 영광스럽게 변화된 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얼른 알아보지 못했고, 문이 잠겨 있어도 쓱 들어오십니다. 제자들에게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보여주시면서, 정말로 살아나셨다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그 자리에 10명의 제자들이 있었고, 어쩐 일로 도마는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도마에게 가서 그 놀라운 소식을 말합니다. 주님이 살아나셔서 우리에게 나타나셨고, 우리와 대화하셨다고 말하는데 도마는 믿지 않습니다. 10명이나 같은 말을 하면 믿을 법도 한데, 도마는 자기 눈과 귀로 보고 듣지 않으면 못 믿겠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보고 의심한다고 부정적으로 말할 수도 있지만, 저는 그렇게 직접 확인하고자 하는 그의 태도가 바람직하다고 여겨집니다. 예수님은 전쟁에 나가는 왕이 먼저 계산한다는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계산해 보고 전쟁에 승리할 것인지 미리 판단하는 것은 불신앙이 아닙니다. 심지어 하나님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려는 사람은 그 전에 내가 정말로 그렇게 하는 것이 맞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주님으로 모시는 결정은 영생을 거는 모험인데, 남의 말만 듣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나 자신의 인격적인 확신과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8일 후에 모두에게 다시 나타나시는데, 이번에는 도마도 있었습니다. 도마에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손가락을 못자국에, 손을 창자국에 넣어보라 하십니다. 그의 옆구리에 난 창자국은 어른의 손이 들어갈 수 있을만큼 크고 깊습니다. 그 상처만으로도 죽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도마는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미 내 눈앞에 나타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들으니, 더이상 확실할 수 없습니다. 그는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영원부터 계신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께서 육신을 입고 인간이 되셔서 오신 것이 성탄절입니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십니다.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면 아무리 잘 해도 기독교 교회가 아닙니다. 그런데 도마는 이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요? 엄밀히 말하면, 예수님의 부활은 너무나 놀라운 기적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그의 신성을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위대하신 하나님의 사람이요 예언자인 예수님을 하나님이 다시 살리시고 영화롭게 하셨다고 고백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훌륭한 고백이 됩니다. 그러나 도마는 예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어떤 생각이나 논리의 결과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몸을 보고 그의 음성을 듣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특별한 계시를 주셔서 고백하게 하신 것입니다. 로마서 1:4 에는 성결의 영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영어번역에는 지명되셨다는 번역이 있는데 (appoint) 그것은 그 때 임명되셨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신성이 부활로 인해 확실하게 사람들에게 알려졌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그 분이 의학적으로 사망 상태에서 소생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참으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세상에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은총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그분의 부활을 목격하면서 외치듯 고백하는 도마의 말에는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면, 불과 며칠 전에 십자가를 지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죄짐을 지고 불의한 형벌을 받으시며 십자가에서 고통과 수치를 당하신 그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자신이 창조하신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 백성을 만나셨지만, 그들에게 거부당하고 정죄되어서 사형판결을 당하신 분이 성자 하나님이셨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이 얼마나 큰 죄악 가운데 있는가를 명백히 드러냅니다. 적극적으로 예수님께 폭력을 휘두른 로마제국, 그들과 협력한 유대교 지도자들, 그 분을 버리고 부인한 제자들, 멀리서 눈물만 흘릴 뿐 아무 것도 하지 못한 힘없는 백성들 모두가 죄인입니다. 로마제국에 속한 모든 사람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로마제국은 그 당시 2대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하에서 가장 번영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누구나 로마의 영광을 부러워하고, 로마가 주는 안정과 풍요를 받아 누리기 원했습니다. 그 전에는 늘 전쟁이 끊이지 않던 지중해 세계에 승리와 평화를 가져다준 로마 황제를 칭찬했습니다. 그러나 그 평화는, 피지배민족을 군대와 무력으로 억압하고 십자가로 처형하는 공포 분위기 속에서 지탱되는 평화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로마의 번영을 위해 그 작은 민족과 그들의 하나님이 당하는 폭력은 문제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최고의 문명 생활을 하는 로마인들에게 이러한 어두운 죄악이 있다는 것을 아무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렇게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지배하는 로마인이나, 지배당하는 유대인이나, 그 가운데 이득을 취하는 계층 모두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데 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그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고백은, 이렇게 악한 세상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곧 당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제는 심판과 형벌의 시간이 너희에게 닥쳤다고 선언하셔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할 시간도 주시지 않고서, 예수님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라고 인사하십니다. 예수님은 불안해 하는 제자들을 즉시 안심시키시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심판이 아니라 화해를, 치유를, 구원을 가져다 주는 분이심을 선포하십니다. 온 세상이 힘을 합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기 때문에, 오직 예수님만이 세상을 용서하실 수 있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버렸던 제자들을 용서하시고 안심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나쁜 소식이 아니라, 정말로 좋은 소식인 복음이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 중 하나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말을 듣기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내가 죄인이라는 말을 들을 때 본능적으로 나의 행동, 생각, 말 등을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내가 또 무엇을 잘못했는지 자꾸 생각해야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나의 생각과 언행에서 나의 죄의 근원을 찾으려면, 아무리 회개해도 부족합니다. 이만하면 나는 충분히 회개했어, 이제 죄가 없어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나의 언행과 생각을 문제삼는 것보다 훨씬 중대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안하고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로마인들처럼, 유대인들처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기 때문에 죄인입니다. 적극적으로 행동했든, 대부분의 로마인들처럼 소극적으로 침묵하고 세상이 주는 풍요를 더 좋아했든, 우리는 다 예수님을 죽인 죄인들입니다. 이 죄성은 인간이 아무리 해도 스스로는 알 수 없습니다. 아무리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사람도 자신이 이만큼 엄청난 죄인이라는 것을 알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영리는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에 대해 제대로 알려주지 못합니다. 질문하겠습니다. 여러분 중에, 어느날 생각해 보니까 내가 너무 죄인이더라, 그래서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 있습니까?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양심적이고 종교적이라도, 내가 하나님의 아들을 죽게 할 만큼 엄청난 죄인이라는 것을 자기 힘으로 알아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저 상대적으로 조금 크고 작은 죄로 인해 고민하니까 율법주의에 빠집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모두 죄인이라는 것,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죄인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로 인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도마가 나의 하나님이라고 외쳤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죽었구나 예수님이 하나님이었어 라고 절망할 시간도 주시지 않고서, 예수님은 평강이 있을 지어다 라고 말합니다. 이미 은혜가 임했습니다. 이미 우리는 구원받았습니다. 이미 죄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서 돌아보니, 과거의 나는 그만큼 엄청난 죄인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입니다. 내가 정말로 큰일날뻔 했구나, 그런데 너무나 놀라운 은혜를 받았구나 하고 가슴을 쓸어내릴 수는 있어도, 내가 그렇게 큰 죄인이니 이 일을 어쩌면 좋으냐 지옥에 가겠구나 하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죄에 대해 먼저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죄로부터 용서받기 위해 예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참된 순서는 반대입니다. 은혜가 먼저입니다. 은혜를 받기 전에는 내가 죄인이라는 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저 인간적인 율법으로 나의 허물들을 인식할 수는 있지만,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핏값이 필요한 죄인이라는 것은 생각하지 못합니다. 개혁자 마틴 루터는 말합니다. 복음이 없을 때 이 세상에는 지혜롭고 정직하고 경건한 사람들이 가득하다. 그러나 예수님의 복음이 전파되면, 거룩한 자가 최악의 죄인이고, 지혜자가 가장 큰 바보이며, 정직한 자가 가장 피에 굶주린 살인자들이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해 나를 구원하소서 라는 기도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성경에 대해 대충 알 수는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고, 죄인은 지옥에 간다는 개념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죄를, 자신의 행동이라고 생각한다면 결코 자기가 충분히 용서받았다고 믿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를 구원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죄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모르면, 그런 죄의식 자체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안다면, 그는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누구에게나 자비롭고 평화의 인사를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미 자기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것을 압니다.
방금 드린 말씀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다시 반복하겠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인이라는 것을 아예 모르거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즉 부활하신 예수님의 은혜가 먼저이고 그 다음에 죄의식이 따라옵니다. 은혜가 죄의식에 선행합니다. 그러나 그 죄의식은 나를 지옥의 절망과 공포 속에 내모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의 은혜 안에서 과거가 되어 버린, 이미 소멸된 죄의식입니다.이 복음을 아는 사람은 그러므로, 죄로 인해 괴로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죄도 용서해 주시는 예수님에 대한 감사와 감격만이 남은 사람입니다.
이 시간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나에게는 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고백이 있습니까? 그 분을 인격적으로 만나서, 나에게 주시는 다정한 평안과 은혜의 음성을 듣습니까? 그것을 통해 그 분이 진정 하나님이심을 고백합니까? 그리고 비로소, 그 분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인이 나라는 것을 인정합니까? 그러나 그 죄로 인해 슬퍼할 겨를도 없이, 예수님이 나에게 사랑과 은혜를 베푸셨다는 것을 고백합니까? 나는 이미 이 놀라운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지옥의 심판으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이 믿어지십니까? 이 고백이 있는 분들은 가장 복된 사람들입니다. 아직 잘 모르겠다고 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활하셔서 나에게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 분을 깊이 생각하시고, 부활하셔서 나에게 오시는 그 분을 그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분이 들려주시는 음성에 귀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 분은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우리가 행여라도 지옥불을 두려워할까봐 재빨리 우리를 불러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평화와 은혜가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그 분과의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 안에 들어가는 것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두 행악자들도 함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양쪽 옆에서 못박혔습니다. 갈보리 언덕에 세 개의 십자가가 섰습니다. 얼른 보기에는 똑같이 생긴 세 십자가들입니다. 그러나 거기 달린 사람들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습니다. 가운데 달리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이사야 53:12의 말씀처럼 그는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받았습니다. 그러나 명패에 쓰인 대로 그는 유대인의 왕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왕이신 나라,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는 사람의 마음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우리가 마음 속으로, 내 마음에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하면 오는 나라가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에 제자들과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말할 때에는, 하나님이 현실적으로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진짜 나라를 의미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결국 예수님이 왕이신 나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결국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예루살렘이야말로 수도요, 로마 총독과 유대 관원들과 제사장들이 불의하게 다스리고 있는, 되찾아야 할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자신들도 그 좌우편에 앉기를 기대했고, 누가 더 큰지 다투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잘못된 것이었지만, 제자들은 그만큼 예수님이 정말 왕이 되실 것이라고 정말로 믿은 것입니다.

그들의 기대의 절정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들어가신 장면이었습니다. 바로 오늘, 종려주일에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성 안으로 들어가신 것은 정말 정답고, 유쾌하고, 즐거운 장면이지만, 그것의 의미를 사람들은 모두 압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시온의 왕이 겸손하여서 나귀새끼를 탄다고 예언했습니다.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것은, 바로 자신이 구약성경이 예언하는 메시야, 왕이시라는 것을 온 세상에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광경을 본제자들과 사람들은, 이제 로마와 종교가들의 압제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이 보내신 참된 왕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크게 환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세우시는 나라는 세상의 권세와 군대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0:25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의 나라는 섬기는 나라, 그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심으로 세워지는 나라입니다. 바로 그것을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의 양편 옆에 두 사람이 또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 행악자들을 다른 본문에서는 강도라고 부릅니다. 본문을 보면 아마도 서로 잘 아는 사이, 동지와 같은 사이였을 것입니다. 아마도 폭력으로 해치고 약탈하는 악한 강도나 산적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바라바라는 사람이 있는데 예수님 대신 풀려난 자입니다. 그는 요한복음에서 강도라고 불리는데 마가 누가복음에서는 성중에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붙들린 자입니다. 민란이라는 것은 아마도 로마인들을 대상으로 일어난 저항운동 같은 것일 테니, 두 행악자도 어쩌면 그렇게 로마에 항거하여 싸웠던 사람들일지도 모릅니다. 십자가는 로마인들이 정치범이나 반역자들, 특별히 죄질이 나쁜 사람들을 본보기로 삼기 위하여 처형하던 형틀입니다. 그러니 이 행악자들도 매우 나쁜 강도들이거나, 로마에 반역하여 난리를 일으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은 예수님을 비방하면서,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말합니다. 사실 이 말만 본다면 괜찮은 말일지도 모릅니다. 한국말에는 존대말과 반말이 있어서 성경 번역에도 어려운 문제가 됩니다. 예수님은 늘 반말을 하시고 제자들은 존댓말을 합니다. 그래서 마치 예수님이 큰 어른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사실은 헬라어에는 영어처럼 존대말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친구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이 강도의 말도 한국말로 반말로 번역했는데 만약에 존대말로 한다면 “당신이 그리스도가 아닙니까? 당신과 우리를 구원하소서”가 됩니다. 본문은 그가 비방했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 말투와 태도에서 예수님을 모욕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한 말은 본문 앞부분에서 지도자들과 군인들의 말, 네가 그리스도면 자신을 구원하라, 네가 유대인의 왕이면 자신을 구원하라는 말과 일관적입니다. 아마도 그는 예수가 누구인지 알았고, 사람들의 조롱도 들었기에, 십자가에 달린 고통 속에서도 예수님의 비방에 참여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면 숨도 쉬기 어렵습니다. 그 힘든 상황에서 굳이 예수님을 비방했을까요? 어쩌면, 이 말에는 그의 진심이 조금이라도 담겨 있었을지 모릅니다. 예수님, 당신은 그리스도가 아닙니까? 왜 자신을 구원하지 않습니까? 자신도, 우리도 좀 구원해 주소서 라고 말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편의 강도는 그를 꾸짖습니다. 네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 그는 목숨이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두려울 것이 없지 않습니까? 앞에 왕이나 황제가 와도 그 앞에 겁먹을 필요가 있습니까? 어차피 죽을 텐데요.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육신 뿐 아니라 우리 영혼도 영원한 지옥불에 던지실 수 있습니다. 육신의 죽음으로 그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계수할 날이 올 것이며 마땅히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이 사람과 동일한 정죄를 받기 때문에 두려워하라고 합니다. 자신이 보기에 그와 동료는 마땅히 죽을 죄를 지었기에 이렇게 십자가에 달리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이 예수라는 분은 조금도 잘못한 것이 없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신 의로우신 분인데, 이 분과 자신들이 동일한 형벌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정확히 왜 그럴까요? 이 강도는 지금 십자가의 극심한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정상적인 사고는 불가능합니다. 또 이 강도가 예수님에 대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에 대해서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었을 가능성은 낮을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 고난을 당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았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도리어 그의 말은 아마도, 본능적이고 직관적인 깨달음이나 느낌이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저 그는 한 인간으로서의 양심, 하나님 앞에 솔직히 선 영혼, 그리고 그가 이해하고 있던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심판에 기반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이고 형벌을 당해야 하는지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럴 수 없습니다. 그는 지극히 존귀하고 거룩하신 분입니다. 의로운 선생님이요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알리신 분입니다. 그 분과 자신이 똑같은 처지에 놓인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왕자와 거지라는 소설에 보면 거지가 왕자와 똑같이 생겼습니다. 사람들이 왕자인줄 알고 시중을 드니까 거지가 폼잡는 것이 아니라 너무 불안해 합니다. 자기에게 그럴 자격이 없기 때문에 나중에 발각되면 큰 벌을 받을 것입니다. 그것처럼 이 강도도, 예수님과 같은 처분을 받는다니 크게 잘못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이러한 형벌을 당하시니, 그 분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이 악한 자신과 동료는 얼마나 더한 심판과 정죄를 받아야 할 것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같은 정죄를 받고 있으니, 아직도 더 당해야 할 심판과 형벌이 훨씬 많을 것입니다. 혹시 천사가 나타나서 네가 어떻게 예수님과 같은 형벌을 받는단 말이냐 너는 더 큰 벌을 받아라 하며 지옥불에 던질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가 보기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이 세상이 얼마나 끔찍한 죄악 가운데 있는지를 드러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 의로우신 분을 이렇게 비참하게 처형시킬 수 있는 인간세상, 유대인과 로마인을 막론하고 모두가 죄악과 불의 가운데 타락해 버린 끔찍한 세상의 현실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본 것입니다. 자신들이 벌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더라도, 이 의로우신 분을 이렇게 죽일 수는 없다. 이 세상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심판과 정죄 아래 있고 하나님이 반드시 곧 이 세상에 벌을 내리실 것이라는 것을 그는 십자가에 달린 고통 가운데서도 직관적으로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은 그저 죽었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자신의 동료를 꾸짖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말한 또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은 앞의 것과는 매우 다른 이유입니다. 이 강도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어서 그가 누군지 알았고, 예수님이 얼마나 위대한지, 그의 사랑과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았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았고, 그가 사람들을 사랑하며 그들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전하신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존경하며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동료에게, 이 분은 옳지 않은 것을 하신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예수님은 너무 멀리 계십니다. 늘 사람들이 둘러싸서 다가갈 수도 없고, 설사 곁에 계셔도 자신같은 죄인과는 너무나 차이가 나서 거리감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수님이 바로 곁에 계십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자기를 버려도, 심지어 부모형제도 멀리 있어도, 예수님이 바로 곁의 십자가에서 그의 곁에 계십니다. 심지어 같은 십자가, 같은 고통, 같은 죽음을 당하십니다. 그 강도는 바로 곁에서 숨을 몰아쉬는 예수님에게서, 바로 곁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느낍니다. 우리가 죽으면 모든 원수는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어도 하나님은 피할 수 없습니다. 시 139: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무덤까지 찾아오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리면, 그 바로 옆에까지 오셔서 같이 매달리셔서 숨을 몰아쉬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두렵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결코 떠나서 도망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두려운 사랑입니다. 아가 8:6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이 사랑이 그 강도를 변화시킵니다. 내가 전에는 그 분과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큰 죄인이었는데, 이제 그 분이 내 곁에 오셔서 나와 같이 되셨습니다. 이제는 그 분이 어디를 가시더라도, 내가 그 분을 따라갈 수도 있겠다는 소망이 생깁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말합니다.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이것은 매우 놀라운 고백입니다. 그가 죽어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예수님이 죽으셔도 그의 나라는 끝나지 않습니다.

그 강도는 예수님이 전하던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메시지를 들었으니, 그도 듣고 알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는 것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셨습니다. 킹덤, 하나님의 왕국, 하나님이 왕으로 등극하시고 다스리시는 나라가 곧 올 것이며 그 때가 찼다는 메시지를 그도 듣고, 믿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이 대목에서는 예수님은 실패자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실 것을 열렬히 기대했지만, 그 분도 결국 로마군인들에게 잡혀 십자가에 죽임당하시니, 그 분이 전하신 하나님 나라도 결국 실패라고 하며 절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강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지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시리라 말합니다. 이 나라가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나라임은 그에게 명백합니다. 하나님의 왕권은 우리의 육신이 죽어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죽어서 영혼이 가는 천국이 아니라, 살든 죽든 어떤 상황에서도 변치 않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의 왕국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의 실패나 패배가 아닙니다. 그는 끝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예수는 영광받고 하나님 나라의 통치자로 인정받으실 것입니다. 이 강도는 놀랍게도 이 사실을 알아서 예수님이 그의 나라에 들어가실 것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아주 겸손히 또 담대히 부탁합니다.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여기서 나를 기억해 달라는 말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도 그 중에 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대답하십니다. 낙원이라는 단어는 파라다이스인데 성경에 많이 나오지 않습니다. 바울이 낙원에 올라가서 말할 수 없는 것을 보았다고 할 때 나옵니다. 낙원은 일차적인 의미는 나무와 물이 있는 정원과 같은 곳입니다. 계시록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묘사할 때 생명나무와 생명수 강물이 나옵니다. 십자가의 나무는 죽었습니다. 그 위에 달린 사람에게도 죽음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나무는 과일을 먹는 이에게 생명을 줍니다. 그 잎사귀는 만국을 소생시킵니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숨을 몰아쉬기에 금방 목이 마릅니다. 그래서 신 포도주로 갈증을 채우려 합니다. 그러나 생명수의 강물은 누구나 값없이 마실 수 있으며 영원히 목마르지 않습니다. 이 강도는 예수님과 함께 그 날 이 낙원에 들어갈 약속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이 강도가 가장 운좋게 구원받은 사람이라 말합니다. 죽기 직전에 예수님을 믿어서, 아무 선행이나 공로가 없지만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강도가 운좋게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이 강도와 같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압니다. 영원한 하늘 영광과 신성을 가지신 분이 우리와 같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당할 죄와 사망의 저주를 대신 지시고 형벌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심지어 그 강도처럼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지지도 않았습니다. 우리가 질 십자가는 예수님이 오롯이 지셨습니다. 이 사실 앞에 두려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강도가 예수님과 같은 형벌을 받는 것을 두려워했다면, 그 형벌을 완전히 예수님께 넘긴 우리는 더 두려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강도가 십자가에 나란히 못박히신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포기하지 않는 사랑을 경험했다면, 우리는 우리를 끝까지 쫓아오시는 불길같은 하나님의 사랑에 더 감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강도들과 같은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이 얼마나 악하고 불의한지 보여줍니다. 십자가 양쪽의 강도들은 우리 인간 전체를 대표합니다. 죄악 속에 죽어가면서도 예수님을 비방하고 자신의 안위만 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편 강도처럼, 예수님이 내가 받아 마땅한 형벌을 받으시고 그만큼 내 곁에 다가오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주신다는 사실에 감격하는 죄인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할 저주를 대신 받으시며 우리에게 낙원을, 구원을 약속해 주십니다. 이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가까이 동행하는 고난주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고난받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마지막 주에 있었던 일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신 예수님은 시장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베다니에서 좋은 대접을 받으셨다고 생각하기에, 예수님이 배고프셨다는 것은 조금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예수님은 멀리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일부러 가까이 가셨습니다. 그랬더니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나무에게 말씀하십니다. 더이상 영원히 아무도 네게서 열매를 먹지 못하리라. 우선 나무에게 말씀하셨다는 것도 이상하지요. 누가 보면 농담하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만유의 주님으로서 말씀하시고, 바람과 파도에게도 말씀하시지요. 제자들이 그 말을 들었는데, 다음날 아침에 와보니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라 있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 있습니다. 마가에만 나오는 디테일인데, 이 무화과나무가 열매가 없었던 것은, 그것의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열매가 나는 것은 늦여름인데, 지금 이 시기는 딱 지금인 봄이거든요. 그러니 열매가 없는 것이 당연한데, 예수님이 왜 이렇게 하셔서 나무가 뿌리째 마르도록 하셨는지 참 이상합니다. 나무의 입장에서는 너무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 우리는 먼저 한가지 커다란 전제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먼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셨고 다스리시기에, 마땅히 모든 것을 그 분의 뜻대로 하실 수 있습니다. 무화과 나무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 의해 말라죽었다 해도, 그 분의 뜻이기에 불평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토기장이와 진흙에 비유합니다. 토기장이가 자기 뜻대로 그릇을 만드는데, 진흙이 왜 나를 귀한 그릇으로 만들지 않았냐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이 모든 것을 뜻대로 하신다는 것은, 그 분이 자기 마음대로 하는 독재자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가 이유도 없이, 자비심도 없이 그저 기분에 따라 일하시는 분이라면 , 그가 다스리시는 피조물인 우리는 늘 불안할 것입니다. 무화과나무가 때가 아닌데 열매가 없어서 말라죽으면, 억울할 뿐 아무에게도 호소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의롭다, 즉 옳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와 만물을 의롭게 다스리십니다. 그가 하는 모든 일은 정의롭습니다. 우리는 워낙 좁은 안목과 이기적인 관점을 갖고 있어서 하나님의 일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아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결국 모든 것이 선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믿지도 않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들인 우리들은, 내가 이해하지 못해도 하나님은 분명히 뜻이 있으셔서, 사랑하셔서 그렇게 하셨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무화과나무가 마른 것도,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질문은 남습니다. 봄에 열매가 없는 것은 무화과나무의 잘못이 아닌데, 왜 말라야 했을까요? 이 질문에 대답을 줄 수 있는 중요한 표현이 본문에 있습니다. 그것은 13절 끝에 나오는데, “무화과의 때가 아니었다” 여기서 때라는 단어는 대개 season 이라고 번역하는데 KJV 에는 time시간이라고 정확히 번역했습니다. “무화과의 시간이 아니었다” 이것과 정확히 반대되는 표현이 마가복음 첫부분, 예수님의 첫번째 선포의 말씀에 나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많이 들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 선포의 맨 처음에 나오고 가장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어로 kingdom, 즉 왕국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다는 것은 하나님의 왕권, 하나님의 통치가 가까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맨 처음에 외치신 말씀이,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다, 즉 하나님 나라의 때가 찼다는 것입니다.
시간 time 이라는 헬라어 단어가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크로노스입니다. 크로노스의 시간은, 우리가 시계나 달력으로 잴 수 있는 시간입니다. 며칠 몇 시간 몇 분 하고 양적으로 잴 수 있는 시간, 언제나 일정하게 흘러가는 시간입니다. 여러분 군대에서 흔히 듣는 말이 있지요? 국방부 시계는 느리게 가냐? 하지만 국방부 시계도 똑같이 갑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때가 찼다, 시간이 찼다고 할 때 이 의미이겠습니까? 지금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나라는 즉 예수님의 재림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래서 온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완성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의 다시 오시는 때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언제 오실지, 몇날 몇시에 오실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 다시 오시는 때가, 달력이나 시계로 잴 수 있는 크로노스의 시간이겠습니까? 그런 시간으로 하나님 나라의 시간이 찼다면, 대체 얼마나 찼다는 말입니까? 예를 들어서 예수님이 바로 내일 오신다고 해 봅시다. 그럼 정말 얼마 안 남은 겁니다. 오 주님, 내가 주님 맞이할 준비가 하나도 안 되었어요 하고 당황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예수님이 내일 오신다면, 그것은 오늘은 안 오신다는 뜻입니다. 적어도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안 오시는 하루를 보내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이 언제라도 오실 수 있다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때는 달력이나 시계로 잴 수 있는 양적 시간이 아닙니다.
헬라어에는 크로노스라는 양적 시간이 아니라 질적 시간을 나타내는 단어가 있습니다. 즉 카이로스입니다. 카이로스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는 때를 가리킵니다. 내가 태어난 때, 내가 예수님을 믿은 때, 내가 죽는 때 그것들은 나에게 가장 중요한 시간입니다. 그저 시계바늘이 돌아가는 일상적인 시간이 아닙니다. 그런 질적인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는 시간이 카이로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때가 찼다고 하시는 때, 시간이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저 시간이 흘러간다고 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 구원의 엄청난 일이 발생해야 비로소 일상을 뚫고 들어오는 카이로스의 시간에 임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카이로스가 찼다는 말씀은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일상적 시간 안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가 평소처럼 살다가, 조금 노력하고 기대하고, 생활패턴을 조금 바꾸지만 근본적 개혁은 없는 인생과 사회에서 그저 때가 되면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계획이나 노력, 바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과 은혜로만 일어납니다. 인간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에 그 분의 뜻을 온전히 이루면서 일어납니다. 이 때가 찼다고 예수님은 복음전도 맨 처음에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무화과나무의 때가 아니었다고 말씀합니다. 무화과나무의 시간, 카이로스가 차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때가 찼다고 외치셨는데, 무화과나무는 나의 때는 오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 나무는, 세상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외면하는 모든 사람들을 대표합니다. 예수님은 불과 며칠 후면 십자가에 못박히실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때가 찼다고 외치시는데, 사람들은 무지하고 악해서 아직도 그 때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복음서 전체에서, 기회만 있으면 때가 찼다고 말씀하십니다. 그저 기회만 있으면 천국이 가까왔다고 외치시고, 제자들에게도 그러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을 2명씩 마을마다 보내시면서, 사람들에게 전할 소식은 단 하나, 천국이 가까왔다고 외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말 그대로 자나깨나, 밥먹을때나 걸을 때나 언제나 하나님 나라만 생각하십니다. 그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다는 것을 늘 사람들에게 알리십니다. 그런데 이날 아침에, 때가 차지 않았다고 말하는 무화과나무를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마도 이 나무를 통해, 제자들에게 또다시 교훈을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만일 너희가 때가 찼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이 때를 놓치면, 천국에서 멀어지고 이 나무처럼 심판받을 것이다. 이 교훈을 주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마르게 하신 이유와 교훈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질문은 남습니다. 무화과나무를 희생해서 우리에게 교훈하신 것은 좋으나, 무화과나무의 입장에서는 그래도 억울하지 않은가입니다. 때가 되지 않아서 열매가 없었고, 늦여름이 되면 당연히 무화과를 많이 내었을 것인데, 공연히 예수님의 눈에 띄어서 말라죽게 되었으니 얼마나 억울합니까? 그 옆에는 다른 나무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 나무들은 오래 살다가 죽었습니다. 아무 흔적도 남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무화과나무는 예수님께 적어도 쓰임받았습니다. 그 쓰임받은 결과가 말라죽음이었습니다. 나무 뿐 아니라 그 옆에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눈에 띄지 않았다면 그저 오래 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 여럿은 어부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않았다면 더 오래, 더 편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고 의미가 없는 일생을 마쳤을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묻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눈에 띄지 않아서 편하고 오래 살고 싶습니까? 아니면 주님 눈에 띄어서, 쓰임받고, 그 대신에 고난받고 싶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인생의 의미와 목적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분을 믿기 전에는 세상에서 잘 사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고난당하신 그 분을 내 주님으로 모시면, 잘 살고 오래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고난받아도, 이 나무처럼 말라죽어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임받다가 죽는 것이 소원이 되어야 합니다. 이 무화과나무는 예수님께 쓰임받았습니다. 그것이 가장 귀한 것 아닙니까? 이 나무는 정말로 복받은 나무 아닙니까? 우리도 그런 삶을 사모해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예수님도 믿고 세상에서도 잘 되기 바랍니다. 그런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해 달라고 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고난받기 위해 들어오셨습니다. 불과 며칠 후면 십자가를 지셔야 합니다. 그 고난당하시는 예수님 곁에 함께 있고자 하는 사람이 었습니다. 심지어 제자들도 도망갔습니다. 예수님처럼 그 분의 고난을 나도 지고 함께 그 분처럼 멸시와 죽음을 당하고자 하는 피조물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무화과나무는 그렇게 했습니다. 이 넓은 우주, 수많은 피조물들 중에 오직 이 무화과나무만 예수님과 함께 고난당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가장 영광스런 일이 아닙니까? 그리고 우리는 압니다. 우리가 그와
롬 8:17b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 하늘의 영광을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을 위해 받을 고난이 있습니다. 이 고난을 피하시겠습니까? 고난이 왔다고 원망하시겠습니까? 도리어 기뻐하고 감사할 일이 아닙니까?
벧전 4:12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 뵐때 우리에게는 세상이 상상도 못하는 기쁨과 감격을 누릴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면. 이 무화과나무는 그렇게 했습니다. 우리가 정말 부러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사순절을 지내고 있습니다. 다음 주일은 종려주일이고 고난주간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평안이나 풍요를 바랄 것이 아니고, 고난받을 때 원망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을 생각하며, 나의 고난이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되기를 위해 기도해야겠습니다. 그리할 때 주님은 우리에게 상상도 못했던 영광으로 베풀어주시고, 그분의 나라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인간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그 때를 위해 부름받았습니다. 언제라고 준비되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나라를 위해 고난받아고 기쁨으로 여기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오늘은 3월 16일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16을 외어보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제 요한일서 3:16을 읽어보겠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말씀도 우리가 꼭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요한복음 3:16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받는 영생에 대해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주님, 하나님의 아들로 믿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목되고, 우리는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믿음은 소망과 사랑과 함께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이 같이 갑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참 소망을 갖게 됩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 우리는 연약하고 넘어지지만, 주님 앞에 서면 우리는 완전해지고 영화로와질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죄악으로 인해 고난과 슬픔이 있지만, 그 날에는 모든 눈물이 씻기고 영원한 복락이 있을 것입니다. 믿는 성도들은 그렇게 산 소망을 갖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듯이, 소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8:24는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니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한편, 믿음은 사랑과 함께 갑니다. 예수님은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으면 그 계명을 따라 서로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으로 구원받는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요한일서 3:14는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갔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는 것으로 인해 구원받았습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어떻게 알게 됩니까? 16절에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것을 통해 우리가 사랑을 안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 주님의 사랑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사람이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면 그보다 더한 사랑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목숨을 버린다고 할 때 목숨은 프쉬케, 즉 영혼이라고도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이 흙으로 아담을 지으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 즉 살아있는 영혼이 되었다고 하는 대목에서 나옵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이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주셨기에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사람이 대단한 것 같아도, 이 호흡이 잠시 끊어지면 살 수 없습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 삶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 앞에서 인생은 그렇게 연약합니다. 하나님이 늘 우리의 생명을 붙들고 계셔야 합니다. 사무엘상 25:29에는 여호와께서 다윗의 생명을 생명싸개 속에 싸 두신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귀하게 싸서 지켜 주시기에 우리의 생명이 보존됩니다. 그러나 이 호흡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때가 되면 주님은 이 숨을 거두어 가실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의 삶은 끝날 것입니다. 이사야 40:7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풀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아는 백성이 복됩니다. 교만하지 않고 주님 앞에 겸손한 백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다고 하는 말씀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렇게 호흡에 의지하는 육신으로 오신 분임을 상기시킵니다.

요한복음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확실히 증거합니다. 그는 영원부터 아버지 하나님의 품에 계신 독생자 말씀이십니다. 그런데 때가 차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잠시 겉옷을 걸치듯이 육신을 입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 신화에는 신들이 필요에 따라 인간의 육신의 모습을 잠시 입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볼일 끝나면 다시 신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것은 그런 외형만이 아니라, 실제로 인간의 몸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갓난 아기로 태어나시고 먹고 자고 자라시고, 30년의 세월이 걸려서 청년이 되신 것입니다. 참된 인간의 육신을 가지신 참 인간이십니다. 그런데 육신은 몸과 의미가 좀 다릅니다. 고린도전서 15:44 몸body은 육의 몸이 있고 영적인 몸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몸은 영화로운 몸입니다. 그 몸으로 제자들에게 오셨고 지금도 아버지 우편에 앉아계시며 다시 오실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 오실 때에는 신령한 몸을 입을 것입니다. 그런데 육신flesh은, 인간의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있는 존재입니다. 율법의 정죄 아래 있고 심판을 받을 육신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르고 육체는 성령을 거스른다고 하십니다. 요한복음이 말씀이 단지 몸이 된 것이 아니라, 육신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신 것은 아담으로 인한 온 인류의 죄와 형벌, 고난, 심판을 받을 육신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 육신 가운에 연약한 호흡으로 매 순간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연은 필연의 반대입니다. 필연은 반드시 일어나야 되는 일입니다. 우연은 일어날 수도 있고 안 일어날 수도 있는 일입니다. 지금 우리가 미국에 사는 것은 우연입니다. 우리는 한국이나 다른 나라에 살 수도 있는데 미국에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었는데,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육신이 되신 것일까요? 예수님이 내려다보시며, 어디 보자, 아담이 선악과를 먹나 안먹나 … 아이고 먹었네 내가 육신으로 가야 되겠네 … 이게 아닙니다. 만일 그랬다면 예수님이 입으신 육신은 예수님 자신의 인격 자체가 아니라 단지 상황에 따라 입으신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추우면 입는 겉옷에 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이 단지 겉옷이었다면, 예수님이 육신으로 십자가를 지신 것은 마치 겉옷이 못에 걸려 약간 찢어진 것과 같을 것입니다. 우리의 겉옷이 상하면 속은 상하지만, 우리 자신이 상처를 입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입으신 육신은 그런 겉옷이 아니라, 그 육신을 통해 참으로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시고, 그 육신과 함께 살고 죽는 참된 자신의 인격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영원하신 참 하나님이시기에, 육신을 입는 이 사건은 영원부터 결정된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영원 속에서 자신을 육신을 입고 인간이 되실 성자 하나님으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도 영원 속의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결정된 사건입니다. 요한계시록 13:8에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된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 문장은 어순이 애매해서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창세 전부터 죽임을 당하시는가? 아담이 죄를 짓고, 그 후에 예수님이 성육신하시고, 그 다음에 죽으시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것이 영원하신 아들 하나님께 일어나기에, 시간적인 순서가 먼저가 아니라 예수님의 희생이 먼저이고 인간의 죄는 부수적입니다. 죄가 먼저이고 은혜가 부차적으로 따라오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가 먼저 있고 죄는 그림자로 따라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창세로부터 죽임당하신 어린양이시며, 그 손과 발의 못자국은 영원히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에 가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너무 기뻐하면서, 예수님 물 위를 걸으시는 모습을 꼭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오케이 하시고 물 위를 걸어셨습니다. 그리고 빠지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발에 못자국 때문에 물이 새서.

그러므로 예수님이 육신을 입으신 것은 분명한 목적이 있으셨습니다. 십자가에 죽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인간은 죽을 존재들입니다. 영어로 mortal 이라고 합니다. 반드시 죽을 존재, 그것이 인간의 존재를 규정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을 존재인 육신으로 오셨을 뿐 아니라, 죽기 위해 오셨습니다. 세상에 죽는 것을 목적으로 태어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전쟁에 나가는 군인은 죽을 각오를 하고 갑니다.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죽는 것을 임무로 전쟁에 나가는 군인이 있겠습니까? 만일 포로로 잡혔다가 나오면 국민적 영웅이 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포로로 잡히는 것을 목표로 하고 전쟁에 나가는 군인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려고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먼저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마치 유월절 저녁에 죽임을 당함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출하는 어린양처럼, 우리를 위해 죽임당하십니다. 히브리서에는 예수님이 자신을 제사로 드리신 것이 나옵니다.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또한 자신을 완전하고 영원한 제물로 드리셨습니다. 완전한 제사이기에 더이상의 제사가 필요없고 완전히 효력이 있어서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심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의 육신이 죄의 법에 붙잡혀 연약하여서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으니, 예수님은 죄 있는 육신으로 오셔서 육신으로 죄의 법을 멸하셨습니다. 육신이 죽으면 죄의 법에서 해방되듯이, 우리 육신이 예수님과 하나되어 함께 십자가에 죽으면 죄와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어 새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바울에게는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세례받고 죽은 것이 중요합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을 강조하며, 내가 날마다 죽노라 라고 합니다. 이렇게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아나는 것을 통해 새 사람이 되도록 하신다는 뜻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의 의미를 다양하게 알려주십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것을 또 다르게 설명합니다. 요한은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특별히 예수님이 목숨을 버리셨다고 표현합니다. 그것은 요한에게 특유합니다. 이 표현이 처음 나오는 곳은 요한복음 10장입니다. 예수님이, 나는 선한 목자라 나의 양들을 위해 내 목숨을 버리노라 라고 하십니다. 늑대가 양을 해치기 위해 오면, 선한 목자는 목숨을 걸고 싸웁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는 양떼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은 문자 그대로 악한 세력의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시기 위해 죽으심을 말합니다. 똑같은 표현을 베드로가 쓰게 됩니다. 예수님이 곧 제자들을 떠나가신다고 하자 베드로는 내가 주를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예언처럼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번 부인하게 됩니다. 이것은 밤에 예수님을 잡으러 온 군병들이 예수님의 일행과 부딪치는 장면입니다. 군인들은 무기를 들었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칼을 적어도 두 자루 가졌습니다. 충돌하면 많이 다치거나 죽을 수 있는 상황입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은 직접 군인들을 대하시고 잡혀 가십니다. 그런데 오직 요한복음만이, 예수님이 직접 제자들을 보호하시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군인들에게, 너희들이 찾는 나사렛 예수가 나이니, 이 사람들은 가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그 위험한 상황에서 제자들을 물리적으로 보호하시고 그 대신 예수님 자신이 잡혀 가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일이고, 또 우리를 위해 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대신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셨습니다. 지금 우리들도, 당시 제자들에게 닥쳤던 생명의 위협 앞에 있습니다. 그 때 제자들과 군인들의 충돌은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의 충돌이었고, 예수님 당시에도 그것은 언제 위험한 일이 닥쳐도 이상하지 않은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 이후 한 세대가 지난 주후 70년에, 로마군은 예루살렘을 완전히 파괴하고 유대인들을 죽이고 흩을 것입니다. 서로 다른 민족들이 미워하고 싸우고 해치는 이러한 인간의 죄악은 그 때 이후 한번도 그치지 않고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지난 2차대전의 피해가 너무나 커서 한동안은 인간들이 자제하면서 우리 세대가 지나갔습니다. 이제는 2차대전을 친히 겪은 세대가 지나면서, 그 비극을 잊어버린 인간들은 다시 서로를 위협하고 자기 이득만 취하면서 서로 돌보지 않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죄악을 요한은 마귀의 일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시기 위함입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입니다. 우리도 형제를 미워하면 살인자가 됩니다. 여기서 살인자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요한만 쓰는 특이한 형태인데 말 그대로 사람을 죽이는 자입니다. 마귀가 처음부터 살인했다는 것은 가인을 가리킵니다. 가인은 아담과 하와의 아들이면서 인류 첫 살인자로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자 가인은 내가 알지 못합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하고 반문합니다. 원어에서는 “내가” 가 강조됩니다. 내 형제를 지키는 자입니까, 내가? 라는 느낌입니다. 너무나 당당히 말하기에 속을 지경입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다 형제자매를 지키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에서는 원래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는 분입니다. 시편 121편에 우리를 지키시며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 분의 형상으로 지으신 것은, 하나님처럼 우리도 형제자매를 지키는 자가 되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지금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라마다 자기 이익만 내세우며 다른 민족과 국민의 고통은 외면합니다. 나라들마다 자기 이익만 챙기느라 세상에서 고통받는 백성들을 돌보지 않습니다.

바로 이러한 죄악과 위험의 세상에서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위협에 맞서 혼자 당하심으로 제자들을 살려 주시고 보호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너무 어렵게 느껴집니다. 도대체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상황이란 어떤 것입니까? 먼저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사랑의 모습임을 고백합니다. 우리가 서로 나누어야 할 사랑은 단지 일상적인 것만이 아니라, 이 정도까지 되는 것을 바라보는 그런 사랑입니다. 물론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은혜 주시고 능력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다만 그 능력이 무엇인지는 우리가 배웁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사랑으로 군인들을, 자기를 해치려는 악한 무리들을 담대히 맞서셨습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고 참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마귀의 세력에 맞서 이기는 것, 형제자매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결국 사랑입니다.

교회에는 워낙 다양한 성격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는다는 공통점 외에는 하나도 같은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오해하거나 얼굴을 붉히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럴 때 먼저 이해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소한 일로 오해가 일어나더라도, 저 사람은 아닐거야 라고 일단 믿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 신뢰합니다. 혹시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 와도 일단 믿어주고 시작합니다. 그리고 내가 오해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주님처럼 목숨을 바치지는 못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순종하면서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삭개오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삭개오의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에서는 나오지 않고 누가복음 19장에만 나옵니다. 1절에서 10절까지 그 사실 분량으로는 굉장히 짧지요. 그렇지만 그 짧은 분량에 비하면 삭개오는 굉장히 유명한 편입니다. 어린이들이 교회 학교에서 배우는 성경 이야기에도 빠지지 않고 나오고 또 그 그림 삭개오가 나무 위에서 웅크리고 있고 예수님께서 밑에서 올려다 보면서 부르시는 그 장면은 또 굉장히 유명하지요. 그래서 아이들이 색칠하는 그 그림에도 참 빠지지 않고 많이 나옵니다. 이렇게 비교적 짧은 이야기 지만 이렇게 유명한 이유는 뭘까요?

삭개오가 어느 날 들어보니까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거예요. 자기 마을에 예수님이 오신대요. 그 소문은 이래저래 듣고 있었는데 여리고로 마침내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그 소문을 들었어요. 또 들리는 소리에 보니까 오늘 본문 바로 앞에 18장에 보면 바로 그 여리고로 오시면서 주님께서 또 맹인도 한 명 고쳐 주세요. 이 맹인은 얼마나 소리를 소리를 질러 댔는지 몰라요. 안 보이니까 안 보이니까 주님 앞에 가기 위해서 소리지를 수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주 다윗의 자손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하면서 소리소리 질러 대니까 사람들이 아 시끄럽다 하면서 이렇게 될 거 같어요. 그래서 주님께서 또 눈뜨게 해 주시고 그러니까이 사람이 또 집에 안 가고 또 예수님 좋다고 또 따라다니고 이런 일들이 막 소문들이 막 퍼지는 거예요. 그래서 주위의 사람들이 막 따라다니니까 이거는 뭐 눈에 안 뛸 수는 없겠지요. 이 얘기를 듣고 이 삭개오가 마음속에 아 질문이 생기는 거예요. 그 얘기를 듣고 사기의 마음속에 무슨 질문이 생기는가 저가 예수가 어떤 사람인가 보고 싶어했다고 했어요. 예수가 어떤 사람이지 영어로는 who was Jesus 였어요. 예수님이 누구지 그런 질문을 하게 되었다고요. 삭개오는 원래 질문을 안 하던 사람이에요. 왜냐면은 사교는 질문을 하게 되면은 인생이 복잡해져요. 내가 지금 왜 이렇게 살고 있지 이게 정말 바르게 사는 삶인가 내 이름은 이렇게 좋은데 내 이름에 비해서 내 삶이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왜 사람들이 나를 다 싫어하지 내가 이렇게 살아서 구원받을 수 있는가 이런 본질적인 질문들이 있잖아요. 그런 질문을 막 하면 머리가 복잡해지죠 그러면서 어떻게 세리장 일을 할 수가 있겠어요. 그러니까 아 그런 복잡한 질문은 이제 생각을 안 하고 그냥 자기 삶 자기 직업에만 그렇게 열심히 사는 그런 육은 있지만 영적으로는 죽은 그런 사람으로 살아 왔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소문을 듣고 다시 한번 그 마음속에 바짝 마른 땅에 물 하나 떨어지는 것처럼 질문을 하게 된 것이지요.

기독교는 질문을 하게 만들어요. 우리 삶에 본질적인 질문을 하게 하지요. 하나님이 누구신가 나는 누구인가 내가 지금 사는 것이 정말 옳은 삶인가 무엇이 참된 인생인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런 질문을 하게 하지요. 그리고 사기가 그런 질문을 하면서 참 신기한 거는요. 예수님이 누구지 하는 질문하면서 동시에 그런 질문을 하는 나 자신을 발견해요. 그전에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잊어버리고 살았어요. 그런데 어 그렇게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을 안다고요. 지금 사귀어도 예수님이 누구지 하면서 그것이 바로 다시 한번 잃어버린 나를 찾는 시작이 되었다고요. 이렇게 정말로 예수님을 접하면서 삭개오가 마음속으로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시지 알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나아갔는데 문제가 있었죠 예수님 주변에는 사람들이 많이 따라가고 있었고 삭개오는 키가 작았어요. 안 보이는 거예요. 어떻게 하는가? 그는 포기하지 않고 그러면 나무에 올라가면 되겠다 하고 막 달려가는 거예요. 그런데 삭개오는 자기 자신에 대한 그런 가치가 그렇게 높지 않아요. 나같은 사람이 어떻게 저 존귀한 분 앞에 나아가는가 바라지도 않는다 그 가까이 가려고 해봤자 사람들이 뭐 밀어낼 거고 싫어하는데요. 그래서 그저 멀리서 나무 위에 딱 이렇게 숨어서 구경만 하면 좋겠다 아 그런 마음으로 올라간 거라고요. 그래서 이렇게 딱 앉아 있다가 예수님께서 점점 그 무리들이 쭉 다가오시는 그걸 보고 아 저 분이구나 하면서 있었어요.

그런데요. 삭개오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벌어지는 거죠 예수님께서 그 바로 밑에 딱 오시더니 삭개오가 앉아 있는 그 나무위를 딱 올려다 보시는 거예요. 눈이 딱 마주쳤어요. 그 한 1초 동안에 그의 마음이 어땠을까 깜짝 놀랐을까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벌어지는 거예요. 더 놀라운 일은 예수님께서 그의 이름을 불러 주셔요. 삭개오야 이름을 불러 주십니다. 이거는 그 단순히 나의 이름을 아신다는 것도 정말 놀랍지만 어떻게 저분이 내 이름을 아시지 그런데 이름 석자를 안다는 그런 차원이 아니에요. 그분이 나의 모든 삶을 벌써 다 아신다는 거예요. 나의 지나온 과거 내가 어떤 인생을 왔는지 내가 지금 내 마음속에 뭐가 그렇게 간절한지 지금 나에게 뭐가 필요한지 내 문제가 뭔지 다 아신다는 거예요. 그리고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내 모든 삶이 그분 손에 있다는 거예요. 주님 말씀이 속히 내려와라 내가 오늘 너희 집에 유해야 겠다. 그래서 삭개오가 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하면서 빨리 내려와서 즐거워하면서 예수님을 영접을 했어요. 예수님께서 지금 삭개오에게 주신 가장 좋은 선물이 이거였다고 삭개오가 지금 필요한게 뭐예요. 뭐 물질적으로 뭐가 필요합니까 무슨 지위가 더 필요합니까 아니라고요. 결국 삭개오에게 아 정말 나도 이렇게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 나로 인해서 이런 알지도 못하던 사람들이 나 때문에 즐거워도 하는구나 하는 경험을 하게 하는 것이 제일 필요했다고 그것이 나의 참 참된 가치를 이게 참된 인생이 그거라는 걸 알려 줘요. 인생의 기쁨 근데 내가 뭘 좋아서 내가 원하는 걸 가지는 그런 즐거움은 오래 가지 않지만 참된 기쁨은 나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기뻐하게 하면서 그 기쁨 보면서 내가 기뻐하는게 참 기쁨이죠 이 기쁨은 세상이 알 수 없는 기쁨 세상에 줄 수도 없는 기쁨이자아요. 사기는 그런 기쁨을 누려 본 적이 없는데 오늘 예수님이 갑자기 그 집에 손님이 되어 주심으로 인해서 삭개오는 나로 인해서 야 사람들이 이렇게 좋아하네 하는 그런 인생의 처음 보는 그런 체험을 했다고요. 결국 삭개오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이었어요. 삭개오가 근데 내가 나도 누구를 좀 사랑해 봅시다 하고 아무 다가가도 안 와요. 그렇지만 예수님 자신이 그 집에 손님이 되어 주심으로써 그 주 다른 사람들도 오에게 들어가서 삭개오가 베푸는 그런 친절을 함께 누리면서 사교의 마음속에 아 나도 나도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도 할 수 있다 나도 사랑 베풀 수 있다 나도 사랑 받을 수 있는 존재다 나도 가치 있는 존재이다. 나도 사람다운 사람이다 하는 그 가장 귀한 선물을 예수님께서 주셨습니다.

이제 삭개오는 말합니다. 주님 보시옵소서 내 재산에 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겠습니다. 그는 오늘 있었던 이 예수님과의 만남을 오늘 딱 하루에 그런 해프닝으로 지나 버리지 않겠다는 거예요. 그 오늘만 이렇게 기분 좋은 잔치가 벌어졌고 내일 지나고 나면 아 다시 아침에 일어났을 때 마치 꿈에서 깬 것처럼 다시 옛날로 돌아가서 다시 사람들 보면서 그렇게 주눅드는 다시 옛날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거예요. 나는 오늘부터 정말로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고 그것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그동안 내 삶에 제일 중요한 부분이었던 나의 재산 여기에서 나의 신앙을 고백하는 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습니다 하고 주님 앞에 고백을 하는 거지 우리들의 신앙의고 이 말이나 그런 생각 정도가 아니라 우리 삶 가운데 제일 중요한 여태까지 그것이 내 삶의 목적이라고 그렇게 살아왔던 내가 이거 의지한다고 생각했던이 세상적인 거 재산 이것마저 주님 앞에 포기할 수 있는 그런 결단을 했다고요. 원래 삭개오가 만약에 자기 세리 장이라는 직업에 충실했다면 절대로 이렇게 할 수가 없어요. 사실 세리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좋아할 수가 없는 사람들이에요. 왜냐면 세리들의 직업은 세금을 걷어서 로마제국에 바치는 거라고요. 그러니까 세리의 일이 제일 안정되고 좋게 잘되기 위해서는 그서 로마제국이 잘되어야 돼요. 그러니까 정말로 자기 직업 생각하는 사람이었다면 예수님과 그 예수님의 제자들이 지금 하는 일을 굉장히 싫어해야 돼요. 그런데 지금 그게 아니에요. 나도 예수님의 일을 따라가겠다는 거예요. 삭개오가 왜 이런 생각을 했을까 왜 자기 재산을 반을 들이겠다는 생각을 했을까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중요한 단서가 밑에 있어요. 뭐냐면 그 밑에 보시면 이런 대목이 나와요. 그 그 사람들이 예수님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과 그 일행들이 그 식사하시면서 무슨 얘기를 많이 했는가 우리가 짐작을 할 수가 있다고요. 대화의 주제가 하나님 나라였어요. 사람들이 다들도 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가 당장에 임할 줄로 생각했던 거예요. 그러니까 막 떠들썩 떠들썩 하면서 야 들 떠 있어서 나는 뭐 하고 너는 뭐 하고 그런데요. 하나님 나라가 당장에 임한다고 그 사람들이 생각했을 때 시간적으로 시간적으로 하나님 나라가 곧 임한다는 거는 맞아요. 그건 맞아요. 하나님 나라가 정말 임박했어요.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래서 세상 모든 죄를 깨끗이 사해 주시고 다음에 죽음 권세에 계시고 부활하시는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임해요. 그래서 우리들이 더 이상 죄와 사망의 권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자유를 얻어서 하나님 나라에 온전히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시간적으로는 맞아요. 임박했어요. 그런데 이 주의 다른 사람들이 생각 못했던 건 뭐냐면 시간적으로는 하나님 나라가 다 왔지만 그러나 그것이 가만히 기다린다고 저절로 오는 건 아니라는 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고난 당하셔야 돼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하셔야만 된다고요. 제일 중요한 그 대목이 없으면 하나님 자라가 오지를 않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 메시아의 고난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그 뒤에 좋은 것만 지금 생각해서 당장 임한다 그런 얘기만 오고 가고 있으니까 예수님께서 아니다 하면서 그 뒤에 비유를 또 하나 드시거든요. 아무튼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 사기가 아 그렇다 그렇지만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믿은 거라고요. 맞다 예수님께서 이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면 더 이상 이제 로마가 나의 충성의 대상이 아니다 내가 로마에 충성한다 이 사람들을 그냥 보내고 다시 내일에 열심히 해야 되겠지만 아니다 이제 더 이상 나는 로마를 섬길 수가 없고 나는 주님을 섬긴다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옛날에 나의 삶을 살 수가 없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나의 재산까지 드릴 수가 있는 거죠 삭개오가 이렇게 말했을 때요.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면서 오늘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 그러셔요. 그런데 재산을 드리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었을까요? 삭개오가 주님 내 재산의 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습니다. 내가 누구 것을 속여서 뺏었다네 배나 갚아 주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주님이 어 그래 그러면 그럼 네가 구원 받아도 되지 원인과 결과였을까요? 구원을 얻기 위해서 여러분 내가 그럼 주님 내가 구원 받으려면 도대체 내 재산에 얼마를 들여야 됩니까 질문하는 그 자체부터가 잘못된 질문입니다. 구원은 내 재산에 얼마면 되냐 이렇게 얻는게 아니라고요. 구원 얻기 위해서 빚을 얻어서 내 재산에 두 배를 들여도 그렇게 그런 마음으로는 절대로 구원받지 못해요. 로마서 9장 우리가 구원받는 거는요.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고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다. 우리가 구원 받으려고 아무리 간절히 원한다고 구원받는 거 아니에요.

삭개오가 그다음부터 어떻게 살았을까요. 직업을 버렸을까요. 그런 암시는 성경에는 없어요. 그가 어떻게 그다음부터 살았을까 예수님을 이날 하루만 보고 다시는 아마 못 봤을 거예요. 곧 돌아가시니까. 그러나 바뀐 삶으로 살았을 것이고 세리장이라는 자기의 직업을 유지했을 가능성도 많이 있어요. 그러나 세상 사람들 보기에이 세상적인 모습으로는 여전히 똑같은 세리장이지만 그러나 달라요. 옛날에는 그걸 가지고 사람들 로부터 미움받고 뺏으면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정직하게 그리고요. 세리들 가운데 크리스천이 있어야 돼요. 세상 일 하는 사람들 가운데 크리스천이 있어야 된다고요. 공무원 법관 의사들 사업가들 가운데 크리스천이 많이 있어야 돼요. 그래야지 그들이 하나님의 의를 가지고 세상에서 의롭게 그 직업을 한다고요. 세리로 정직하게 걷었을 거예요. 다시는 누구를 속이지 않았을 거예요. 그리고 세리 장이기 때문에 자기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가셨을 거예요. 여러분 이제 여러분 그래선 안 됩니다. 절대로 누구 속이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은 이 로마 제국이 우리를 다스리고 있는데 로마 제국에 딱 앞서서 우리 민족을 보호해 주는 사람이라는 걸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분들에게 절대로 정직하게 세금을 걷으시고 절대로 그분들을 섬기는 마음으로 새롭게 사십시오 하고 그렇게 가르치면서 세리라는 직업을 여전히 유지하면서도 구원받은 자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렇게 살아갔을 것입니다.

나의 삶 가운데서도 그리고 나의 교육과 나의 직업을 통해서도 어떤 직업까지도 그것이 정치든 경제든 사업이든 자든 또는 육신으로 뭘 하든 나의 일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에게 유익을 준다는 그런 생각으로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예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주시는 은혜를 생각하면서 우리들도 그런 죄인이었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새로운 삶과 삶의 목적을 주시는 그 뜻을 생각하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나를 지으신 주님 찬양하겠습니다.

올해 우리 교회의 표어가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위해서는 예수님과 사도들이 전한 천국 복음에 대해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잘 아는 방법은 오직 성경을 읽는 것 밖에 없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과, 그의 천국의 의미, 천국의 실현을 위해 요구되는 것들, 그것을 위해 사도들이 무엇을 했는지 등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올해 우리 교회는 성경을 잘 읽고 그대로 살기 위해 헌신하는 삶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경책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확실하고 올바르게 알 수 있으며, 그 분이 우리에게 친히 들려주시는 사랑의 말씀을 듣고 참된 위로와 평화를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옛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친히 말씀하셨고, 그들은 그 말씀을 기록하였습니다. 그것들이 모여 우리에게 성경책으로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은 구약에서는 예언자, 신약에서는 사도라고 불립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 선택받아서 그 분의 복음을 전하도록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입니다. 세상에 많은 경전들과 고전 문헌들이 있지만, 하나님의 참된 말씀을 기록한 책은 달리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인간의 지혜나 경험, 종교성으로는 알 수도 없고 체험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철학적으로, 영적으로 생각해 왔지만, 결코 하나님께 이르지 못했습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자연적 능력이 없습니다. 때로는 인간이 특이한 영적인 체험을 하기도 하고, 신기한 경험을 통해서 과거나 미래의 일들을 맞추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려움에 처하면 신앙이 없어도 자기도 모르게 기도하기도 합니다. 저도 어렸을 때, 어두운 골목길을 지나가야 했던 적이 있습니다. 너무 어두워서 발 앞의 땅이 마치 구덩이처럼 보였습니다. 무서워서 어머니에게 배웠던 주기도문을 외면서 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자연적 능력을 통해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기반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알려 주실 떄에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고 보여주시는 사건을 우리는 계시라고 부릅니다. Revelation 은 숨겨진 것을 드러내 보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 계시하시는가? 하나님이 선택하신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계시하셨습니다. 성경에서 그 계시를 받은 사람이 많아도 몇십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계시를 받는 것은 인격이나 능력이 탁월하거나, 특별히 양심적이고 거룩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선택해 주신 사람만이 받습니다. 대신 그들은 그 계시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사명을 받았고, 그 말씀을 그대로 전하고 또 기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말씀이라는 형태로 주어졌다는 것은 매우 특별합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가리킵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And God said 라는 말씀은 사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동사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무언가 보여주신 것보다 훨씬 많습니다. 우리 인간은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뭔가를 보아야 만족하고, 맛도 보고 뭔가도 해 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와 하늘의 신비로움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면 우리는 훨씬 실감나게 잘 믿을 것 같습니다. 사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이상을 보여 주신 적도 여럿 있습니다. 모세, 엘리사, 에스겔, 다니엘 등은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이나 이상을 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구약에는 Seer, 선견자라 불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시 훨씬 많은 것은 prophet, 선지자 또는 예언자들입니다. 하나님은 떄로 우리의 다른 감각들도 사용하셔서 자신을 알리십니다. 가끔씩 그 분의 터치를 받는 예언자들도 있었습니다. 맛을 느낀 경우도 있었습니다. 말씀을 먹었더니 입에 달았더라는 대목도 있습니다. 냄새는 어떨까요? 하나님이 냄새로 자신을 알리신 경우가 있을까요? 구약에서 번제를 비롯한 제사를 드릴 때는 냄새가 아주 강렬했습니다.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냄새를 맡으며, 하나님께 나 대신 바쳐진 희생 제물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감각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청각, 듣는 것이었습니다.

신명기 6장에서 하나님은 들으라 이스라엘! 이라고 하십니다. 보라! 가 아닙니다. 왜 하나님은 말씀하신 것만큼 보여주지 않으셨을까요?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때 많은 기적을 보았습니다. 심지어 홍해가 갈라지는 것도 보았고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 경험은 그들의 믿음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성경에는 보는 것이 우리를 올바른 판단에서 벗어나게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볼 때, 보기에 좋았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먹지 말라는 말씀을 들려 주셨는데, 그것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눈에 보이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사무엘이 다윗의 형제들을 보았을 때, 외모로 보기에는 다른 형들이 더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셨습니다. 시각적 경험은 매우 강하고 다른 감각을 압도하는 것이 있지만, 우리는 자연적, 인간적 감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통해 선악을 판단해야 합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예언과 비교하면 좋겠습니다. 트로이 목마의 이야기를 아실 것입니다. 그리스 연합군이 트로이를 침공해서 시작된 트로이 전쟁은 10년이 지나도 승부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리스 군이 커다란 목마를 만들고 그 안에 숨어 있습니다. 트로이 사람들이 성에서 나와 보니까 집채만한 목마가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하나 논쟁이 벌어집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목마가 신들에게 바쳐진 제물이기 때문에 성 안으로 잘 들여야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라오콘이라는 예언자가 나와서 외칩니다. 이 목마를 성 안에 들이면 큰일납니다. 우리는 즉시 이 목마를 불태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실 그게 맞는 말이었지요. 그런데 갑자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바다에서 괴물이 나타나서 라오콘 예언자를 낚아채서 바다 속으로 사라집니다. 모두가 경악을 했지요. 이것은 분명히 신들이, 아마도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이 보낸 신적인 메시지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건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 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라오콘의 말이 맞았다. 그 말대로 목마를 불태워야 하는데 그것을 원치 않는 어떤 신이 그의 입을 막으려고 괴물을 보낸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사실 맞죠.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정반대의 해석을 합니다. 라오콘의 말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목마는 신들께 바쳐진 제물인데 라오콘이 감히 불태워야 한다고 해서, 신들이 노해서 괴물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토론을 하다가 결국 목마를 성 안으로 들입니다. 그리고 잘 아시는 대로 그 안에 숨어 있던 그리스 군사들이 나와서 트로이 성을 멸망시킵니다. 이 이야기는, 만약에 신적인 메시지, 신탁이 그저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주어졌을 때 문제를 말해 줍니다. 그 본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된다는 말입니까? 성경에서도, 아모스나, 스가랴, 다니엘 같은 분들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이상을 보았지만 해석할 줄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이나 천사가 해석해 줄 때에만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실 때에는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말씀으로 들려 주셔서 그의 백성들이 의미를 확실히 알도록 해 주셨습니다.

계시록 1:3에는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라고 되어 있는데 읽는 자는 단수, 듣고 지키는 자는 복수형입니다. 그 때에는 각 사람이 성경책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에 모이면 한 사람이 성경을 큰 목소리로 읽습니다. 그러면 온 성도들은 듣고 지키는 것입니다. 성경책은, 구약과 신약 모두, 본래 소리내어 읽도록 쓰여진 책입니다. 4-5세기의 위대한 교부 성 어거스틴은 예수님을 믿게 될 때 성 암브로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어느 날 보니 암브로스가 성경을 소리 없이 묵독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야 어떻게 저럴 수 있나, 참 대단한 분이다 라고 감탄했습니다. 그것처럼 옛 성도들은 원래 성경을 소리내어 읽는 것이 보편적이었는데 오늘 우리는 모두가 성경을 갖고 있기에 속으로 읽는 것에 익숙해진 것입니다. 히브리어 구약을 보면, 이 문장을 읽을 때 어디를 길게 읽고, 어디에서 끊고 어디에서 올리고 내린다는 표시가 작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문자 그대로 악센트인데, 악세트는 원래 노래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을 흥얼거리면서 즐겁게 읽으면 노래하는 것처럼 들릴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소리내어 읽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을 수 있는데, 문장의 의미를 이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의미를 알아야 어디서 끊을 지 알고 정확히 읽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을 묵상한다는 단어는 새 번역에서는 작은 소리로 읊조린다고 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중얼중얼 하는 것입니다. 이삭은 말씀을 중얼거리다가 리브가를 만났습니다. 여호수아는 말씀을 주야로 중얼거리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말씀을 늘 중얼중얼 해야 합니다.

시편 1편은 복있는 사람에 대한 말씀입니다. 복있는 사람은 무엇을 합니까? 말씀을 밤낮으로 중얼거리는 사람입니다. 시편 150편 가운데 맨 처음인 1편에서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진리가 이것입니다. 우리 모두 새해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즐겨 읽고, 중얼거리면서, 무엇보다 말씀대로 살기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 중 가장 귀한 것은 성경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이 성경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정말로 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말씀을 읽으면서 그의 뜻과, 그의 사랑, 그 분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하셨는지, 그의 사랑과 은혜와 희생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알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성경책 없이 우리 스스로 생각하고 상상하면서 하나님에 대해 묵상하거나 기도한다면, 그것은 확실하지 않고 늘 불안하고 연약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 우리의 믿음이 견고하고 강해지고, 확신을 갖고 그만큼 능력 있는 신앙과 기도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성경을 많이 읽고, 또 좋아하는 성경 말씀도 많이 있으실 것입니다. 저는 특별히 오늘의 본문인 시편 91편을 좋아합니다. 제가 어려움 가운데, 곤경 중에 있을 때, 그래서 사방이 모두 막히고 아무런 길이 없이 느껴질 때, 세상에 캄캄함 밖에 없고 바라볼 곳이라고는 정말로 하늘 밖에 없을 때, 이 시편의 말씀을 읽으면서 많은 힘과 위로를 받았습니다.

시편 91편은 하나님께 피하는 사람의 복에 대해 말씀합니다. 1절은 지존자의 은밀한 곳, 전능자의 그늘에 사는 사람을 노래합니다. 하나님을 지존자, 지극히 높으신 분이라고 부릅니다. 세상에 많은 권세들이 있고, 인간적이거나 영적인 많은 지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권세들이 아무리 우리를 해치려 하여도, 하나님은 그것들보다 비교도 되시지 않을만큼 높으십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우리의 피난처, 은밀히 숨을 곳이 되십니다. 우리가 그 분께 피하면 세상의 어떤 권세도 우리를 해칠 수 없고 비난이나 고소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또한 전능자이십니다. 전능자의 그늘! 하나님께는 능치 못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적은 사람들에게 오셔서 이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의 문제가 크더라도 하나님은 그 문제보다 더 크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피난처, 그늘이 되어 주십니다. 그 분은 자신에게 피하는 자녀들을 전혀 외면하지 않으시고 신실하게 돌보십니다. 4절에는 그의 깃으로 덮으시니 그의 날개 아래 피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어린 새를 날개 아래 품어서 보호하는 어미 새의 사랑처럼 전능하신 하나님은 또한 자비롭고 은혜롭게 그의 백성들을 친히 돌보십니다.

5-7절에는 하나님께 피하는 성도들이 세상의 환난으로부터 보호받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말씀들이 나옵니다. 수많은 위협과 위험과 고난이 성도들을 공격합니다. 그것들은 밤에 찾아오는 공포, 낮에 날아드는 화살, 그리고 여러가지 전염병과 재앙이라고 불립니다. 먼저 밤에 오는 공포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실제로 밤에 몰래 공격해 오는 적군을 말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 시편을 지은 다윗은 실제로 부하들을 이끌고 사울 왕을 비롯한 적들을 피해 목숨을 걸고 도망다녔던 적이 많이 있었습니다. 날마다 언제 어떤 위험이 닥치고 목숨을 잃을 지 모르는 극심한 고난 가운데 하루 하루를 살았습니다. 밤에도 동굴이나 들판에서 야영하면서, 언제 적들에게 발각될 지 모르는 불안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러한 밤에 닥치는 공포는 온 세상을 덮는 어두움과 함께 얼마나 우리를 낙담시키는지 모릅니다. 또는 밤에 그런 외적인 위협이 없어도, 나의 내면으로부터 오는 불안과 공포가 나를 덮칠 수 있습니다. 걱정거리, 마음의 괴로움이 있으면, 아무리 좋운 집 좋은 침실에서 있더라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악몽에 시달립니다. 여러분은 밤에 잠을 잘 주무시나요? 밤에 잘 주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십니다. 혹시 어떤 걱정이나 이유로 밤잠을 설치신다면 꼭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평강과 위로, 그 분의 따뜻한 사랑이 여러분의 영혼을 만지셔서, 영육간에 모든 피로가 풀리는 복되고 깊은 잠을 잘 수 있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 외에도 낮에 날아오는 화살과 전염병이 있습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들은 사실 수없이 많습니다. 어떤 때는 사람이 주는 괴로움, 즉 날아오는 화살이 있고, 또 어떨 때는 자연이, 우리의 육신이 주는 어려움, 전염병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로부터 보호하여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읽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질문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 정말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녀들은, 세상이 주는 이런 화살이나 질병이나, 그런 위험들로부터 다 안전합니까? 왜냐하면, 우리는 아무리 하나님을 믿고 기도한다 하여도, 때로는 이런 사고나, 다치는 일, 병에 걸리는 일을 겪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아무 사고나 안나고 아무 병도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런 화를 면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을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다른 종교나 신앙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참되고 순수하게 믿는 신앙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어도 실제로는 화살이나, 전염병이나, 재앙을 당하는 일이 생기는데, 성경 말씀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하시니,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 그 분의 뜻과 말씀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분은 영원하시고 전능하신, 능력과 지혜가 무한하신 분입니다. 그 하나님이 인생의 진리를 말씀하실 때, 우리는 무지하고 유한하여서 도저히 다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그 분의 말씀이 우리에게 걸림돌로 다가옵니다. 음식에 비유하자면 먹기 쉬운 우유가 아니라 딱딱한 음식, 먹기 힘들고 소화도 안되는 음식 같은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은 성경을 억지로 해석하려고 하면 멸망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말씀이 있을 때 우리는 너무 성급하게 아멘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질문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과 씨름해야 합니다. 하나님,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여쭈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 말씀은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서가 아닙니다. 지식적으로 배우고 암송하는 내용이 아니라, 오직 나에게 인격적으로 주시는 사랑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귀와 마음을 열어서 그 분의 깊은 비밀과 진리를 알려 주십니다. 욥이 온갖 고난을 당했습니다. 자녀와 재산을 잃고 자신도 병에 걸렸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친구들과 아무리 토론을 해도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고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모든 것이 해결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와 같이 말씀을 붙들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놀라운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한 번 상고해 보겠습니다. 화살과 전염병, 재앙이 나와 내 집에 닥치치 않으리라는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그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으면 되겠습니까? 성경 그대로 믿는다면, 가장 단순하고 직관적이며, 강력한 믿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큰 오해를 낳게 됩니다. 예전에 코비드가 한창 퍼질 때였습니다. 나중에는 코비드가 워낙 기승을 부려서 누구나 걸릴 수 있다고 인식되었지만, 처음에 막 시작되어서 사람들이 불안해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 어떤 교회의 목사님, 장로님, 권사님이 코비드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말을 못했습니다. 왜요? 어떻게 목사님이, 장로님이 코비드에 걸리느냐고 말이 나올까봐요. 여러분 제가 질문합니다. 누가 코비드에 걸리면, 그 사람의 신앙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까? 교회에 덕이 안 됩니까? 여러분 우리는 그런 생각을 완전히 버려야 합니다. 그건 그냥 바이러스로 인해 걸린 것입니다. 그 사람의 신앙이나 인격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모든 것을 영적으로 해석하고 함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리고 자기 신앙이 좋다고 착각합니다.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서 다른 사람을 정죄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큰 죄입니다. 여기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대접받기를 원하는 대로 대접하라. 만약에 내가 코비드에 걸렸는데, 또는 개인과 가정에 어려움이 닥쳤는데 다른 교인이 너는 신앙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 거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우리는 성경 말씀을 마음대로 문자적으로 이해해서 다른 사람에게 괴로움을 주어서는 안됩니다. 말씀은 양날 칼과 같아서 우리의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갭니다. 얼마나 위험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십니다. 이 말씀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오직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이 생명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는 좋은 방식으로, 영적인 해석이 있습니다. 화살이나 전염병을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으로, 즉 사탄의 여러 공격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마귀는 우리를 해치기 위해 화살을 쏘고, 여러 가지 유혹과 올무를 놓습니다. 기회만 되면 우리 귀에 악하고 어두운 말을 속삭입니다. 너는 그것밖에 안돼, 너는 형편 없는 사람이야, 너는 또 실패했어. 이렇게 우리 자신을 죽이고 위축시킵니다. 때로는 반대로 너는 너무 잘났어 라고 유혹합니다. 너는 훌륭해, 너는 대접 받아야 해, 너를 무시하는 사람들은 미워해야 해. 네 마음대로 해. 너의 욕망을 추구해. 이렇게 마귀는 우리에게, 너는 너무 못났어 또는 너는 너무 잘났어 라고 죄로 유혹합니다. 본문 3절에 새 사냥꾼의 올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새 사냥꾼은 새가 나타나는 곳에 올무를 설치하고 안에 먹이를 놓아둡니다. 그러면 새는 자기 발로 그 안에 들어가서 잡힙니다. 죄는 그것처럼, 우리가 죄의 즐거움를 따르다가 스스로 멸망하도록 합니다. 죄라는 것을 알면서도 짓고 모르면서도 짓습니다. 그러한 마귀의 올무와 화살이 얼마나 강하고 교활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죄의 유혹과 마귀의 공격에서 우리를 능히 보호해 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따르면 죄는 저절로 멀어집니다. 죄와 싸우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과 그 분의 날개 아래 있으면 죄는 우리를 건들지도 못합니다. 나의 죄로 인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우리는 죄와 어둠의 권세를 성령님의 능력으로 이깁니다. 이렇게 오늘 본문을 영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매우 필요하고 강력한 성경 해석입니다. 신약성경도 이렇게 영적인 해석을 많이 합니다. 가령 구약에는 아브라함의 아들들 중에 이스마엘이 육신의 아들, 이삭과 유대인들이 약속의 자손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에 보면, 유대인들이 율법 안에서 도리어 종의 아들이고, 우리 이방인들이 자유한 사라를 통한 참된 약속의 자손들입니다. 이렇게 신약에서는 구약의 여러 말씀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변화시키는 해석들이 있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수많은 전쟁이나, 물질적인 부요함, 장수하는 삶 등의 물질적인 복들을 신약 시대의 우리는 영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영적 해석은 또한 약점과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적 세계 뿐 아니라 물질 세계도 창조하고 다스리십니다. 본문은 분명히 육신적인 위험과 질병으로부터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권세를 영적인 측면에만 한정한다면 하나님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적인 삶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보호와 공급과 만족을 기대하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본문, 재앙으로부터 보호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사실 성경에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현실과 잘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말씀들이 많이 있고, 도리어 그것들이 더 일반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때 읽었던 이사야 9장의 말씀도, 메시야가 오시면 세상의 전쟁이 끝나고 영원한 평화가 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 오신지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전쟁은 그치지 않습니다. 그런 말씀들을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 합니까? 그저 영적으로, 또는 종말론적으로, 또는 실존주의적으로 읽어야 합니까? 우리는 성경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관점과 우리 인간의 관점이 그야말로 천지 차이라는 점을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은 완전히 충돌합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의 시각이 더 옳겠습니까? 인간적 관점은 유한하고, 부정확하고, 시간에 속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히 지혜로우시고, 모든 것을 아시며, 시간을 초월해서 영원을 보십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보는 세상의 관점이 틀렸으니 완전히 폐기해야 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최선의 판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판단은 우리의 관점을 완전히 넘어서 새로운 진리를 보여주십니다. 인간의 이해와 이성과 판단을 완전히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을 가장 잘 보여주시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로서 육신을 입고 인간이 되신 예수님은, 영원하고 완전한 하늘과, 시간적이고 불완전한 땅을 만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을 하십니다. 어떻게 거룩하고 완전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육신으로 오신다는 말입니까? 시공간적으로 한정되고, 유한하고, 온갖 연약함과 죄악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는 인간의 실상을 그대로 자신의 것으로 취하셨습니다. 그리고 온전한 인간으로서 우리의 친구가 되시고 우리의 고난을 그대로 당하셨습니다. 인간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은 자신의 신적인 영광과 능력마저 내려놓으시고 인간의 본성을 입으셔서 우리 곁에 오십니다. 성경에 이것보다 더 큰 기적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물리적인 불행이 닥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보다 더 큰 비밀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말합니다. 나의 죄가 너무 중해서 하나님을 뵐 수 없습니다. 나에게는 저주와 멸망 뿐입니다. 그러나 은혜의 말씀은 말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보다 더 커서 그 중한 죄인도 받아주시고 의롭다고 말하신다. 더이상 죄와 어둠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의롭고 영화로운 삶을 살 수 있다. 이것보다 더 큰 신비와 비밀과 역설은 없습니다. 이 은혜를 입은 사람은 이제 성령님 안에서 고백합니다. 내가 어떤 환난 가운데 있더라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품어 주십니다. 나와 같은 사람이 구원받았다면, 그보다 더 큰 은혜와 기적은 없습니다. 세상의 권세나 위협이 나를 만지지도 못합니다. 어느 곳 어떤 환경에서도 나는 감사하고 기뻐하며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고백하고 찬양합니다.

지금은 대강절입니다. 대강절은 대림절이라고도 하는데 강림이라는 단어가 안에 있습니다. 그것은 오심, 즉 예수님이 오신다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Advent 라고 하는데 같은 뜻입니다. 그래서 전례적 색깔도 보라색, 왕이나 황제를 상징하는 색입니다. 12월은 성탄절에 예수님이 아기의 몸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친구가 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을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성탄절을 잘 알고 기다리지만, 예수님 당시의 성도들도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알고 기다렸습니다. 어떻게 알았을까요? 구약성경에 메시야가 오실 것이 자세히 예언되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헨델의 유명한 오라토리오 메시야에는, 구약과 신약에 나오는 메시야 예수에 대한 성경말씀이 아름다운 노래로 들어 있습니다. 메시야의 가사들만 묵상해도 예수님에 대해서 아주 잘 알게 됩니다. 메시야의 가사는 구약에 나오는 예수님에 대한 예언들,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예수님의 왕권과 통치를 모두 다룹니다. 그 가운데 오늘의 본문인 이사야 9장도 아주 유명한 노래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9장 1절에는 전에 고통받던 자들에게 흑암이 없습니다. 2절, 흑암과 사망의 그늘진 땅에 빛이 비취었습니다. 스불론과 납달리, 이방의 갈릴리는 모두 사람들이 무시하던 땅입니다. 중심지인 유다의 예루살렘에서 보면 아주 먼 북쪽, 변두리이기 때문에 이무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셨고 이 지역에서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래서 갈릴리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며 그가 그리스도이신 것을 안믿는 사람도 있었고, 베드로는 그의 말투가 갈릴리 방언인 것이 드러나서 예수님의 제자인 것이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참된 가치, 하나님이 지어주신 복된 정체성을 알지 못하고 그의 배경, 출신, 외적인 것, 소유, 경력 등으로 판단합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업그레이드 하기 위해 얼마나 애쓰는지 모릅니다. 만일 그런 것이 중요했다면 예수님은 로마에서 태어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변두리, 이방의 갈릴리에서 자라셨고, 집으로 삼으셨습니다.

3절 주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즐거움을 주십니다. 구체적으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누는 즐거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복을 주시기에, 우리가 받아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고 우리는 그에게 감사합니다. 구약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기쁨이 구체적으로 음식과 관련되어 묘사되곤 합니다. 우리는 영적인 것만 생각하기 쉬운데,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과 육신을 모두 창조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먹을 것이 필요한 것을 아시고 주십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내리시고, 예수님은 사람들과 자주 식사를 하셨습니다. 마치 잔치하는 것처럼 보여서 바리새인들은 먹고 마시기를 좋아한다고 욕했습니다. 자기들이 금식하는 것을 자랑하면서요.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 안에서 기뻐하는 성도들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과 세례요한의 차이를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그분들의 메시지는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한 데서 비슷하지만, 세례요한은 그것이 심판을 의미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이고, 불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면서 많이 금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기쁨과 은혜를 강조하십니다.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말씀하시면서, 사회에서 미움받고 소외된 사람들, 세리, 죄인, 병자들과 어울리셨습니다. 그들과 잔치를 베푸시며 함께 먹고 마시면서 즐거워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천국잔치를 나타내는데 바로 3절에 나오는 추수하는 즐거움과 같습니다.

특별히 탈취물을 나누는 즐거움이라고 되어 있는데, 흔히 전쟁에서 승리하면 전리품을 빼앗아서 승리자들끼리 나눕니다. 이것은 인류 역사의 모든 시기에 있었던 일이고 하나님 앞에 범죄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는 6, 8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탈취물은 유대인들이 다른 나라를 침략해서 빼앗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사야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36-37장에 나오는 앗수르의 침략입니다. 히스기야 왕 때의 일인데, 거대하고 무자비한 앗수르 제국이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킵니다. 그리고 남왕국 유다로 쳐들어와서 모든 도시들이 무너지고 예루살렘만 남았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구원하셔서 적군이 멸망하고 나라가 구원받은 사건이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사야 36-37장 외에도 열왕기하 18-19장, 역대하 32장에도 반복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천사들이 적군을 치시므로 그들이 도망가고, 그 자리에 그들이 남긴 재물들이 있어서 나누는 것입니다. 온 나라가 멸망할 것같은 극심한 위기에서 구원해 주시고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이, 탈취물을 나누는 즐거움입니다.

4절, 하나님은 무거운 멍에, 어깨의 채찍,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십니다. 미디안의 날은 사사기에 나오는데, 미디안이 괴롭힐 때 하나님이 기드온을 보내셔서 구원하십니다. 더 옛날로 가면,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노예로 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괴로움과 탄식, 눈물을 보시고 모세와 아론을 보내셔서 그들을 압제와 노예생활로부터 해방하십니다. 메시야 예수님이 오시는 것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5절 군인들의 신, 즉 군화와 피묻은 겉옷이 불에 지푸라기처럼 탈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시면 모든 전쟁이 끝나고, 전쟁에 썼던 군복이나 무기들이 불타서 없어질 것입니다. 이사야 2:4에는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쟁기를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 영감을 받은 조각상이 UN 본부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이 땅의 전쟁을 없애고 다시는 서로를 죽이지 않고 영원한 평화를 가져오시기 위해서였습니다.

6절 한 아이가 났고 한 아들을 주셨습니다. 아기보다는 아이라는 단어가 더 좋은데,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이라고 부르는 표현이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부르는 대목들이 있는데, 종보다는 아이라는 표현이 좋습니다. 하나님의 아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복된 표현이지 않습니까? 그 어깨에는 정사, 즉 주권, 권세, 능력을 메었습니다. 이 아이는 하나님의 권세를 가졌는데, 예수님은 그 권세를 자신이 아니라 남을 위해 쓰셨습니다. 그래서 병과 악령에 시달리는 사람을 구해주시고, 사회에서 멸시받는 사람들을 도와주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주십니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 Wonderful, 놀라운 분입니다. 온 세상을 강력히 영원히 다스리실 왕이 어린 아기로 우리 곁에 오시니 얼마나 놀라운지 모릅니다.

모사, Counsel은 역사 드라마에서 왕 곁에서 조언하는 책사같은 인물을 가리킵니다. 이사야에는 하나님이 하늘의 영들을 소집하시고 어전 회의를 여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사야가 소명을 받는 6장이 대표적인 장면입니다. 하나님이 “누가 우리를 위해 갈까”하고 물으십니다. 하나님이 지혜가 부족해서 조언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권능, 완전한 지혜, 그리고 심사숙고하시는 결정을 가리키는 장면입니다. 모사라는 단어는 이 회의에서 결정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 계획과도 연결됩니다. 특별히 이사야에는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인간 역사에서 이루시는 모든 것은 그 분의 뜻과 계획에 의해 일어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그의 메시야, 놀라운 모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메시야께서 오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에서 전능하심은 용맹하심, 강하심, 승리하심의 뜻입니다. 즉 강한 용사, 하나님의 전사와 같은 표현입니다. 이것도 세상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으로 용감하게 싸워 승리하시는 메시야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름입니다.

평강의 왕 - 메시야는 이 세상을 하늘의 권세로 제압하시고 전쟁을 끝내시고 불의한 자를 벌하시고 영원한 평화를 가져오십니다. 그래서 군화와 군복은 타버리고, 사람을 죽이는 칼과 창은 사람을 위하는 쟁기와 낫이 되고, 영원히 풍요롭고 즐거우며 평화로운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십니다.

7절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합니다. 그분의 다스리심과 평강이 끝없이 더할 것입니다. 다윗의 보좌와 나라에 영원히 군림하십니다. 그런데 그 왕권은 무력과 군사력으로 지탱되지 않습니다. 세상의 많은 권력자들이 강제력을 동원해서 자기 권력을 굳건히 하고 평화를 선전했지만, 예수님의 왕권은 그런 무력으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것은 영원히 정의(justice)와 공의(righteousness)로 보존됩니다. 여기서 정의와 공의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가리키는 중요한 두 원리입니다. 시편과 이사야에 정의과 공의라는 표현이 나란히 나오는 곳이 많습니다. 시편에는 정의와 공의가 하나님의 보좌의 기초입니다 (시 89:14, 97:2).

정의는 법적이고 사회적인 용어입니다. 이전 성경에는 공평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율법에 의거한 사회 정의와 배려에 근거합니다. 이 정의가 지켜지는 곳에서는 누구도 약하다고 해서 피해를 당하지 않습니다. 만일 힘있는 누군가가 약한 자를 착취하고 고통을 주면 하나님의 정의에 의해 징계를 받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가난한 자, 고아, 과부, 이방인에 대한 배려를 늘 이야기합니다. 다니엘에서 악한 왕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의 자비를 입는 비결도 가난한 자를 돌보는 것입니다.

공의(righteousness) 는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할 때 그 의로움입니다. 그 단어의 본래 뜻은 올바른 관계이며, 매우 인격적이고 관계적인 단어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올바르게 있는 것이 언약의 백성에게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약속하셨습니다. 이 언역이 지켜지기 위해 하나님은 늘 신실하십니다. 문제는 인간인데, 인간이 이 언약을 버려도 하나님은 버리시지 않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십니다. 여호와의 열심은 질투라고 번역되기도 합니다. 아가 8:6에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열심, 그의 질투는 불과 같아서 아무도 끌 수 없습니다. 그가 뜻하시면 이루어지는데, 그런 열심과 질투를 가지시면 누가 막겠습니까?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 주님의 열심으로 메시야를 통한 구원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복된 대강절, 예수님의 강림을 기다리면서 더룩 그분을 가까이 하고 경건하게 지내는 복된 절기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아만은 아람 왕의 군대장관으로 많은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병이라는 치명적인 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그의 병은 단순히 육체적인 고통을 넘어, 사회적 고립과 절망을 의미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병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의 치유와 구원을 경험하며 새로운 삶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특정 민족이나 사람에게만 머무르지 않고 모든 이에게 열려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도 과거에는 나아만과 같은 영적 이방인이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로마서 5:8)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오늘 추수감사절에, 우리를 구원하시고 은혜로 회복시키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합시다.

나아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된 계기는 그의 집에 있던 이스라엘 출신 여종의 선한 말 때문이었습니다. 이 여종은 포로로 끌려와 억울한 상황에 처했지만, 원망하거나 복수를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주인을 위해 선한 조언을 했습니다. 그녀는 나아만에게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소개하며 그가 나을 수 있는 길을 제시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말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십니다. 우리의 말은 누군가를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잠언 18장 21절은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소녀의 말은 작고 평범해 보였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도구가 되었을 때 나아만의 삶을 바꾸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말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말이 다른 사람을 살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도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추수감사절에, 우리의 말이 감사와 축복의 통로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나아만은 하나님의 일을 처음에는 자신의 기준으로 이해하려 했습니다. 그는 엘리사가 나와서 그에게 손을 흔들며 기적을 행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요단강에서 몸을 씻으라는 간단한 지시만 내렸습니다. 나아만은 이에 실망하며 화를 냈습니다. 그는 요단강이 다메섹의 강들보다 더럽다고 생각하며 거절하려 했습니다.

이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일을 우리의 기준과 방식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습니다. 이사야 55장 8절에서 하나님은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르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을 다 이해할 수 없지만, 그분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신뢰해야 합니다.

나아만은 결국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집과 교만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요단강은 겉으로 보기에는 특별할 것이 없었지만, 그곳에서 하나님의 치유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는 성찬의 빵과 포도주와도 같습니다. 빵과 포도주는 단순한 음식처럼 보이지만, 성령께서 임하심으로 거룩한 은혜의 도구가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종종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평범한 곳에서 역사합니다. 요단강의 물은 그 자체로 치유의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니었지만, 나아만의 순종과 하나님의 능력이 결합될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며 감사합시다.

하나님은 나아만을 단번에 치유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는 과정을 통해 나아만에게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 과정은 단순한 치유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단순한 기적의 수혜자로 머물게 하지 않으시고, 그분의 일에 참여하는 인격적 관계를 맺도록 초대하십니다.

나아만은 요단강에 몸을 잠그는 동안 자신의 교만과 고집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했습니다. 그는 치유의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나아갈 때, 우리의 삶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치유를 받은 나아만은 즉시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는 엘리사에게 예물을 드리려 했지만, 엘리사는 이를 거절하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나아만은 이에 감동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삶을 헌신했습니다. 그는 율법을 알지 못했지만, 은혜를 경험한 자로서 하나님께 온 마음으로 응답했습니다.

감사는 단순히 물질적 축복에 대한 반응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은혜"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리스와 "감사"를 뜻하는 유카리스티아는 같은 어근을 공유합니다. 이는 은혜와 감사가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반드시 감사로 반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카리스)는 우리가 받을 자격이 없지만 조건 없이 주어진 선물입니다. 이 은혜를 체험한 자는 자연스럽게 감사(유카리스티아)로 반응하게 됩니다. 나아만은 치유의 은혜를 받은 후 단순한 감사를 넘어 자신의 삶으로 그 은혜에 응답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생명, 일상, 가족, 구원의 선물—all of this is grace. 추수감사절은 이 은혜를 기억하며, 우리의 삶 전체가 감사의 표현이 되도록 결단하는 날입니다. 우리의 감사가 말과 행동, 예배 속에서 드러날 때, 하나님은 그 감사 속에서 더욱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나아만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며 감사로 가득 찬 삶을 살아갑시다. 은혜 없이는 감사가 없고, 감사는 은혜를 체험한 사람의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우리의 삶이 나아만처럼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제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수많은 기적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한적한 광야로 가셨고, 그곳에서 광야 집회가 열렸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의 물고기로 남자만 5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식사를 마친 후, 예수님은 제자들을 배에 태워 먼저 보내시고, 혼자 남아 사람들을 돌려보낸 후 산으로 올라가 밤새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왕으로 추대되는 분위기에 당황했지만, 주님의 명령에 따라 호수 가운데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배가 한 척뿐이었기에 예수님은 어떻게 오실지 의문이었습니다. 한편, 밤이 깊어지고 거센 바람이 불어 파도가 심하게 치기 시작해, 제자들은 배를 조종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습니다.

새벽 4시쯤, 제자들 중 누군가가 멀리서 하얀 형체를 발견했습니다. 물 위에서 다가오는 모습에 모두가 유령이라 생각해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안심하라. 나다.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기적 가운데 이 물 위를 걸으신 사건은 특별했습니다. 이전에는 병자를 고치고 많은 사람을 먹이시는 주님의 기적을 보며, 제자들이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 기적을 통해서는 단순히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이 고백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순간이 바로 이 기적에서 나타납니다.

어두운 밤, 강하게 몰아치는 바람과 파도가 이는 바다 위로 한 사람이 걸어오는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 모습은 창세기 1장과 비슷한 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창조 이전, 땅은 형체가 없고 흑암이 깊은 물 위에 있었으며,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를 운행하셨습니다. 이는 완전한 어둠 속, 아무런 빛이 없는 가운데 거대한 물과 폭풍이 일렁이는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기 직전의 혼돈과 흑암, 물과 바람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신 장면과 연결됩니다. 제자들은 마치 창조의 순간으로 돌아간 듯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후 다시 한 번 기적을 목격합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으로, 태초에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하셨던 그분이 강풍 속에서 바다 위로 걸어오셨습니다. 이 장면은 천지 창조를 떠올리게 하며, 예수님이 창조주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임을 보여줍니다.

성경에서 물은 생명과 심판의 상징으로 나타납니다. 물은 생명의 원천이지만, 물에 빠지면 죽음에 이르듯이 심판의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노아의 홍수와 홍해에서의 심판은 물을 통한 하나님의 경고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 물 가운데서 땅을 나오게 하셨으며, 하늘 위의 물과 아래의 물로 나누셨습니다. 이처럼 물이 창조와 심판의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그것을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세상이 물에서 나와 성립되었다고 말하며, 우리가 믿고 서 있는 이 세상이 영원하지 않음을 상기시킵니다. 하나님께서 물을 바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숨쉬며 살아갈 수 있지만, 그분이 손을 거두시면 우리는 물로 인한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한 번 있었던 노아의 홍수처럼,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으며 우리의 궁극적 소망은 이 세상이 아닌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오늘 제자들은 주님을 따라가다가 예상치 못한 위험을 맞닥뜨렸습니다. 주님은 일부러 그들을 위험 속으로 내보내셨고, 그들이 이를 통해 배우기를 원하셨던 듯합니다. 제자들이 주님 없이 배를 타고 나섰을 때, 큰 파도가 몰아쳐 생명의 위협을 느꼈지만, 그 가운데서 중요한 교훈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태초에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영원한 분이며, 이 세상은 그분과 달리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를 떠올려 보면, 물로 멸망한 세상은 주님이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성경은 이 땅이 불로 멸망할 때를 위해 보존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오시는 모습을 본 베드로는 주님이 맞다면 자신도 걷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베드로는 성미가 급하고 실수도 많은 성격이지만, 그만큼 대담한 믿음을 보인 사람입니다. 물 위를 걷다가 바람을 보고 두려워 빠지긴 했지만, 저는 그를 탓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베드로는 예수님 외의 인간 중 물 위를 걸었던 유일한 사람으로, 믿음이 대단합니다. 물론 주님만 바라보았으면 빠지지 않았을 거라고 할 수 있지만, 인간으로서는 바람을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자연스럽게 두려움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본다고 해도, 온전히 주님만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은 1분도 되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는 언제나 다시 자신을 의식하게 되고, 그 순간 물에 빠질 위험에 처합니다. 그러나 물에 빠진다 해도, 주님이 건져주신다는 사실이 더 중요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물 위를 걷기 시작했고, 그 순간은 매우 큰 의미를 지닙니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살려는 믿음과 순간적인 순종이야말로 우리에게 큰 도전과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 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두려워 말라"고 하실 때, 우리가 그 말씀을 얼마나 지킬 수 있겠습니까? 두려움을 억누르겠다고 다짐한다고 정말 두려움이 사라집니까? 물 위를 걷는 것은 단단하고 안정된 기반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안정과 안전을 원합니다. 가족을 부양하고, 자녀를 교육하며, 미래를 준비하려면 안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 어떻게 부모로서 마음이 편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직업이 필요하고, 매일매일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육신의 생각이 성령을 거스른다고 말합니다. 우리 삶의 모든 계획과 염려 속에서 주님 말씀대로 살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고, 그저 "두려워 말라"는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최소한의 안전과 재산, 자녀의 미래를 위해 계속 염려하고, 계획하며 삽니다. 주님은 부자 청년에게 가진 것을 다 버리고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청년은 염려하며 떠났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예수님은 새와 꽃처럼 염려 없이 아버지께서 입히고 먹이실 것을 믿고 살라고 하셨지만, 우리는 여전히 염려합니다.

이 시간에 다짐해 봅시다. 기도하며 "주님, 내가 염려하지 않겠습니다"라고 결심해 봅시다. 그러나 그 다짐이 얼마나 오래 갑니까? 하루도 가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염려하고, 불안 속에 살아갑니다. 세상의 염려와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은퇴 후에 평화가 올까요? 아닙니다. 세상에서 수고하며 사는 한 우리는 여전히 불안 속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시지만, 우리가 말씀대로 살 수 있습니까? "예"라고 한다면 그것은 교만이 됩니다. "아니요"라고 한다면 그것은 불순종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를 찔러 쪼개어, 우리의 살과 골수를 쪼개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면 우리의 육신은 파괴됩니다. 주님을 만나면 우리는 죽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주님을 죽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 육신의 생각으로 따를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가 그 은혜 없이는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이유입니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우리가 육신의 약함으로 율법을 지킬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아시고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이루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육신의 연약함 가운데 그 아들을 보내셔서 죄 가운데 있는 우리 육신 속에서 죄를 정하시고, 성령을 통해 우리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사는 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때, 자신의 힘이 아닌 주님만을 바라보며 주님께 의지했습니다. 그 순간 성령님께서 베드로를 붙드셨고, 바람 가운데서도 물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향한 순종의 그 한 순간이 얼마나 귀중한지 모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의 모든 순간마다 주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느냐고 물으면, 우리는 매번 자신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주님께 염려를 내려놓고, 오직 그분만을 의지하겠다고 다짐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우리가 순간순간 주님께 나아갈 때마다 원수는 우리를 정죄하고 넘어뜨리려 합니다. 또 실패했다고, 또 죄에 넘어졌다고 끊임없이 정죄하지만, 그것은 귀담아들을 필요가 없는 마귀의 속임수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주님께서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시고, 그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탓하지 않으십니다.

비록 우리가 1년 뒤, 10년 뒤를 염려할지라도, 지금 이 순간에 주님을 의지하며, 순간적인 순종을 드릴 때 주님께서 우리를 붙드십니다. 우리가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같이 주님의 날개 아래로 올라가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이 시간 주님께 순종하는 이 순간마다 주님께서 주시는 힘을 믿으며 함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