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 속함 (이사야 43:1-7)
오늘은 대림절 첫째 주일입니다. 크리스마스로부터 4주 전 주일부터 대림절이 되며, 교회력으로는 새해입니다. 원래 달력보다 한 달 앞서서 12월에 교회력은 시작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사실상 주님 안에서 새해를 맞이하는 날이며, 주님을 기다리는 귀한 절기입니다. 대림절, 또는 대강절이라고도 하는 이 시기는 주님의 오심, 즉 ‘어드벤트(Advent)’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우리의 친구가 되기 위해 아기 예수로 오시는 그날을 기다리고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성탄절 하면 들뜨고 선물과 트리, 캐럴과 즐거운 분위기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원래 신앙의 사람들은 무엇을 기다렸을까요? 대림절,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이 날에 우리는 진정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구약의 성도들, 특히 이사야서에서 이 말씀을 듣는 성도들은 그야말로 주님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주님만이 이 세상에 공의와 자비를 베풀어 주시고, 세상을 치유하시며, 세상의 소망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 구약의 성도들만큼 우리가 주님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지 한번 돌아보게 됩니다.
이사야의 말씀은, 지금 새벽 예배에 줌으로 참석하시는 분들은 계속 한 장씩 읽고 있는데, 40장부터 분위기가 바뀝니다. 39장까지는 주전 8세기에 유다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 백성들에게 주는 경고와 고난, 심판과 같은 무거운 말씀들이 많이 있다면, 40장부터는 분위기가 바뀌어 위로하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살면서 ‘나에게 좀 위로가 필요하다, 힘들다’고 느껴질 때 이사야 40장부터 읽으시면 참 좋습니다. “너희는 내 백성을 위로하라 위로하라”는 말씀이 계속 나옵니다. 오늘 말씀도 그 가운데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나라가 멸망합니다. 바벨론이 쳐들어와 도시는 멸망하고 성전은 불탔으며 많은 사람이 죽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포로로 끌려갑니다. 남의 나라 땅, 천 마일 이상 떨어진 먼 곳으로 강제 이주되어 낯설고 물선 이방 땅에서 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세월이 50년 넘게 지났습니다. 만약 어린 나이에 포로로 끌려갔다면 종살이로 평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 인생의 한과 마음의 괴로움이 어떠할지 우리가 상상도 못 할 것 같습니다. 일평생을 그렇게 포로로 살다가 이제는 하나님께서 돌려보내 주실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제는 자유를 얻고 고향 땅으로 돌아가, 조상들이 주님을 섬겼던 그 정다운 나의 본향으로 돌아가는 약속의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제는 때가 되었다, 너희에게 자비와 용서와 회복의 시간이 시작될 것이라는 말씀을 주고 계십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그런 자비와 사랑으로 오시는 그날을 백성들이 얼마나 간절히 기다렸을까요? 대강절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그와 같은 치유와 용서와 회복, 그리고 주님의 뜨거운 사랑을 우리에게 친히 보여 주시기 위해, 말씀하실 뿐 아니라 그 증거로 심지어 어린 아기 예수님이라는 그 놀라운 기적을 통해 우리에게 확실히 보여 주시기로 약속하신 날입니다. 우리들은 그날을 기다리며 고대하고 감사하며 마음에 준비를 하는 복된 대림절을 지금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 마음으로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1절의 말씀입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원래 “지금”이 첫 단어입니다.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왜 ‘이제는’ 말씀하신다고 할까요? 그때가 어떤 때인지는 바로 앞 42장 끝 부분을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은 포로로 사로잡히고 외적인 바벨론이 쳐들어와 도시가 파괴되고 멸망하는 그런 때를 바로 앞에서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42장 끝에 나오는 ‘약탈되었다’는 대목이 강조됩니다. 적들이 쳐들어와서 도시를 다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전쟁을 하면 그것이 당연했습니다. 군사들이 성을 포위하다가 함락하면 그 안으로 다 쳐들어가, 드러내 놓고 공식적으로 적군의 병사들이 집집마다 쳐들어가서 다 빼앗아 오는 것입니다. 약탈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하는 입장에서는 얼마나 마음이 무너지겠습니까. 평생을 모으고 열심히 일해서 쌓아온 삶의 터전과 가정을, 가정의 기반과 이 모든 것들을 적들이 쳐들어와서 다 쓸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끔찍한 일을 당한 것입니다. 인간이 참 악합니다. 우리들은 지금 문명 사회에서 이렇게 잘 살고 있지만, 원래 인간에게 그런 보호 장치가 없다면 우리들 본성에는 그런 무자비함이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와 같이 파괴되고 죽임당하고 특별히 약탈을 당하는 그런 일을 우리가 겪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그 고백이 바로 앞장에 있습니다. 이때 ‘지금’이라는 말은 바로 그때에 ‘이제는 말씀하시느니라’는 의미입니다. 그와 같은 고난과 서러움을 당하는 백성들을 주님께서는 일단 놓아두셨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그들의 죄가 속함을 받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일이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잠시 자기 백성이 눈물 흘리는 것을 아픈 마음으로 참고 보시다가 이제는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이는 창세기를 생각하게 하는 단어들입니다. ‘창조하신 분.’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창세기의 첫 대목입니다. 또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 이 단어는 하나님이 아담을 땅의 흙으로 지으셨다는 그 단어입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그 정성스러운 따뜻한 사랑의 손길로 흙으로 사람을 친히 지으셨다는 그 단어입니다. 창세기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창세기 1장을 주로 언제 읽습니까? 새해에 성경 한번 처음부터 읽어 보자 할 때 처음에 읽는 것이 창세기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성도님들은 특별히 창세기로 돌아갈 때가 이와 같이 고난의 때입니다. 힘들고 어렵고 서러울 때, 사람들로부터 고난을 당하거나 버림받을 때, 신앙의 위기가 닥쳐 ‘내가 왜 이렇게, 하나님과 관계가 어떻기에 나의 삶에 이런 위기가 닥치는가, 주님께서 나를 과연 돌보시는가’ 하는 힘들고 괴로울 때에 창세기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시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우주를 만드시고 인간과 생물들을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시고, 나는 그분을 믿는 사람이지.’ 그렇게 신앙의 근본으로 돌아가서 나를 힘들게 하던 주위 환경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주님은 누구십니까? 내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고 묻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주님은 창조주,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게 우리들은 창세기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와 같이 하나님은 창조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백성들에게 위로의 말씀으로 주십니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구속’이라는 단어는 구원하시는데 값을 주고 구원하시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말씀으로 “너를 구원하라” 이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는데,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때는 그냥 말씀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값을 치르십니다. 실제로 우리들을 소중하게 여기시고 우리들을 위해서 친히 값을 치르셨습니다. 세상에 있는 아무것이나 가져오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는 가장 값비싼, 큰 희생을 치러야 하는 값을 치르십니다. 그 아들을 주시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그 귀한 아들을 먼 나라로 보내시는 겁니다. 하늘나라와 이 땅의 거리는 무한합니다. 자녀가 먼 나라로 간다고 할 때, 유학생 부모가 자녀를 먼 나라로 유학을 보낼 때의 심정을 생각해 보면, 준비를 다 해서 잘 보내도 마음이 힘들 텐데,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을 아주 어린 아기, 그저 세게 쥐면 부서질 것 같은 아주 약한 육체로 이 세상에 보내시는, 하나님 편에서는 가장 큰 희생을 하시면서 자기 아들을 보내십니다. 그 값을 치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서 그 값을, 우리의 몸값을 주고 우리를 구속하십니다.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우리의 이름을 부르심인데, 이 본문에서는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렇게 이름을 부르십니다. 유대인, 유다 나라이지만, 사실 ‘유대인’이라는 말은 다른 나라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입니다. 유대인들이 자기 자신을, 특별히 정치적인 느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 백성으로서 말씀에 근거해서 부르는 이름은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떼를 위해서 보냄을 받았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특별한 언약을 맺은 백성을 말합니다. 그 옛 조상의 원래 이름은 야곱입니다. 야곱이었는데 하나님이 이스라엘로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어머니 리브가의 쌍둥이 형 에서가 먼저 나가니 동생 야곱이 발꿈치를 잡았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 나올 때부터 뭔가 부족하고 간절하며 원하는 것이 많지만 뜻대로 안 되는 인생으로 시작한 것입니다. 야곱이라는 분이 참 험하고 기구한 인생을 살지 않습니까? 우리가 창세기를 읽으면 그 이야기가 다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특별히 주신 이름인데, 원래 너는 야곱이었다고 하나님이 다시금 상기시켜 주십니다.
본래 우리들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로서 많은 복을 받아 주님 안에서 하루하루 살고 있지만, 신앙의 위기가 닥칠 때, 삶에 고난이 있을 때, 또는 내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야겠다는 간절한 믿음의 도약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 원래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야곱처럼, 태어나기도 전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돌아가셔도 좋고, 아니면 내가 신앙을 처음 가졌을 때가 기억나신다면 영적으로는 그때가 갓난아기입니다. 저는 그 기억이 납니다. 혹 나중에 믿었거나 아주 어려서 믿어서 기억이 안 나시더라도, 내가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가, 이런 갓난아기와 같이 아무 힘없고 보잘것없는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셔서 지금까지 있게 하셨다는 사실을, 나의 지난날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복을 한번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이와 같이 인도하신 하나님, 그분의 귀한 뜻 가운데 내가 있으니 나의 앞날도 그분께 맡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 내가 눈으로 보지 못하여도 그분의 인도하심을 믿고 신뢰하며 나아가는 것, 믿음의 길은 그런 것입니다. 앞날이 레드 카펫 깔린 길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손을 붙잡고 하루하루 인도하시는 길입니다. 주님을 늘 믿고 의지하고 기도하면서 살라고 주님은 이 세상에 우리를 보내셨습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을 우리들이 날마다 느끼고, 나는 야곱과 같이, 이스라엘과 같이 부족한 사람이었으나 주님께서 이날까지 인도하셨다는 고백이 새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너는 내 것이라.” 주님의 소유입니다. 주님께서는 자기의 소유, 그분의 것이 된 우리 자신을 결코 소홀히 여기지 않으십니다. 주님 자신의 것으로서 보중하게 여기시고 지키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품에, 주님의 소유로 되어 있으면 두려울 것이었습니다. 그분의 사랑을 알고 그분은 신실하시고 변치 않으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다시금 믿음으로 우리들은 살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만 우리들은 일어설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이 세상에서 그냥 내 힘만, 내 육신만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내 지식, 내 경험 믿고 살 수 있겠지요. 그러나 오래가지 못합니다. 거기에는 기쁨도 없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내가 주님의 소유, 나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날마다 새길 때에 오직 주님의 힘, 주님의 능력 가운데에서 날마다 인도함 받는 자녀의 삶을 살게 되는 줄을 믿습니다.
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또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주의 백성들이 지금 큰 물 가운데로, 또는 불 가운데로 지나간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포로기에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제 다시 먼 길을 떠나가야 하는데,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가기 때문에 실제로 물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본문에는 이 물을 하나님이 마르게 하셔서 마른 땅을 내신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이 험한 길, 산 넘고 물 건너가는 이 길을 하나님께서는 평탄하고 어려움이 없도록 해 주신다는 뜻이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 물 가운데에서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한다는 말씀은 출애굽기를 생각나게 합니다. 홍해를 건너는 주의 백성들을 위해 좌우로 물이 벽이 되어 하나님께서 물에 침몰당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시는 그 대목을 생각나게 합니다. 불 가운데로 지난다는 것은, 현실이라기보다는 전쟁이 나면 그런 불 가운데 처할 수 있지만, 포로에서 돌아오는 백성들에게는 그보다는 마치 다니엘 3장에서 다니엘의 친구들이 불 가운데에서도 주님에 대한 신앙을 버리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불 속에서도 그들이 주님께 순종하고 순수한 믿음을 지켜냅니다. 그 대목을 보면 물 가운데를 지나고 불 속을 믿음으로 지날 때에 조금도 해를 입지 않고 하나님이 지켜 보호하여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가야 합니다. 만약 이 포로로 잡힌 백성들이 가만히 있으면 잠시는 편하겠지요. 물과 불을 겪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주저앉아 있으면 아무런 미래나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들은 가야 합니다. 순례길, 우리들의 천성 본향을 향해서 가는 순례길에 비유하지 않습니까? 우리들은 주저앉아 있는 사람이 아니고, “아, 여기가 너무 좋습니다. 그냥 여기서 영원히 살 거예요” 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우리들은 나그네로서 계속 길을 갑니다. 순례의 길, 믿음의 길, 주님께서 새롭게 인도하시는 길을 두려워하지 않고 가고, 또 그렇게 새롭게 보여 주시는 곳에서 주님의 뜻을 이루는 순례의 길을 갑니다. 그것이 겉보기에는 큰 무서운 물도 있고 불도 있고 별것이 다 있어 보이지만, 두려워할 일이 아닙니다. 주님을 믿지 않으면 두렵고 빠져 죽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모든 인생의 환난과 고난과 서러움처럼 보일지라도, 사실은 그것이 축복이고 주님이 함께하시는 길이며, 그 속에서 주님의 능력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기 때문에, 도리어 우리들은 그것을 기뻐합니다. “이게 무슨 물과 불이야, 이게 웬일이야, 왜 이렇게 힘들어” 하고 반응할 것이 아니라, 이런 힘든 고난 가운데 주님의 능력이 드러나니 주의 성도들은 더욱더 그것을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믿음으로 갑니다. 어떤 순례길이라도 주님 안에서 날마다 행하는 우리가 될 줄을 믿습니다.
3절 말씀에,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주님의 이름을 쭉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이름, 우리에게 주신 귀한 이름은 여호와, 구원자이시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 너의 구원자 또는 구속자이시며, savior 되시고 redeemer 되시고, 우리들을 구원하여 주십니다.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여기에 굉장히 흥미로운 말씀이 있습니다. 주의 백성들을 이제 값을 치르고 구속하여 내시는데, 아주 특별하게 이 3절에서는 주님께서 속량물로 애굽과 구스와 스바, 아프리카에 있는 다른 나라들을 값으로 주고 주의 백성들을 구해낸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굉장히 신기하고, 사실 오해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게 뭐야, 하나님이 그럼 이스라엘만 편애하시네? 애굽이나 다른 나라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그냥 값으로 내주고 이스라엘만 구원하시니 완전히 편애하시네.’ 그런 생각이 드실 수도 있습니다. 또 애굽 백성들 입장에서는 ‘이게 뭐야, 우리들은 뭐야,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네’ 하면서 하나님을 안 믿을 수도 있겠습니다. 이 말씀은 실제로 어떤 역사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바벨론으로 붙잡혀 갔던 주의 백성들이 해방되어 돌아올 때가 페르시아 시대가 되는데,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주의 백성들을 해방시켜 주고 페르시아가 제국이 됩니다. 실제로 페르시아가 아프리카까지 점령하여, 고레스의 아들 캄비세스 왕 때 이집트를 정벌해서 엄청나게 큰 제국을 이룹니다. 이란 지역뿐 아니라 이집트까지 장악하게 됩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도 애굽과 구스와 같은 아프리카의 나라들이 페르시아에게 속하게 된 것을 가리키는 말씀도 될 수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 주의 백성들이 이 세상 여러 나라들로부터 당했던 서러움과 괴로움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주제입니다. 나라들 사이의 전쟁, 나라들 사이의 정의, 누가 나라들 사이에 판결하겠는가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나라의 왕들이 서로 잘났다고, 내가 더 강하다고 전쟁을 하면 그 왕들을 통제할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온전히 다스리셔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왕으로서 세상 나라들을 다스리시고 어떤 나라는 세우시고 다른 나라는 무너뜨리시는, 세상의 참된 왕이신 하나님에 대해서 구약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을 보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여러 악한 나라들이 쳐들어오고 말도 안 되게 괴롭히는데, 그것을 주님은 다 보십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뉴스나 인간의 역사라는 것은 결국 그 잘난 강한 나라들이 서로 이웃 나라들을 학대하고 괴롭히고 전쟁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그것을 눈여겨보신다는 뜻입니다. 두려워해야 할 일입니다. 세상의 나라들이나 왕들, 지배자들은 나의 권력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이것을 하나님께서 지금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을 마땅히 두려워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보시니,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 세상의 여러 나라들로부터 얻어맞고 있는 것입니다. 바벨론과 페르시아와 애굽 같은 나라들 사이에서 작은 나라로서 하나님 백성들이 고난받고 있는 것을 보시고, 때가 되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그래서 세상 나라들은 하나님 앞에 다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 구약의 메시지입니다.
신약에서는 이것이 완전히 바뀝니다. 신약에 이르러 주님의 관심은 이스라엘이라는 특정 민족과 나라가 더 이상 아니라, 세상 모든 나라 사람들이 오직 주님의 자비와 사랑 안에서 구원받고 구속받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바로 그것을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 주신 것이지요. 결국 우리들의 구원을 위해서 값으로, 이 속량물로 내어주게 될 그것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몸을 그 속량물로 내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한때 구약 시대에는 애굽과 구수와 스바와 같은 나라들이 속량물로 내어졌지만 그것은 구약 시대의 일이고, 지금은 심지어 그 나라들조차도 예수님께서 대신하여 자기 자신을 그 나라들을 위해서 내어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애굽과 구스와 스바, 이 나라들을 위해서도 그들 대신해서 속량물이 되어 주십니다. 그것을 위해서 아기 예수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들은 더 이상 세상의 나라들을 섬기지 않습니다. 나라들에 속해 있을지라도 그것이 우리들의 주인이 아닙니다. 이 세상 나라들을 다스리시고 세상 나라들의 모든 악한 행실을 심판하시고 구원하시는 그분을 바라보면서, 속량물 되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우리가 되었습니다.
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우리가 주님 앞에 보배롭습니다. 그리고 존귀합니다. 꿀같이 단 말씀 아닙니까? 이 말씀은 계속 외시면 좋습니다. 좋은 말씀은 외는 것입니다. 찬양 가사로 외워도 되고, 힘들 때마다 이 말씀을 되뇌시기 바랍니다. ‘보배롭다’는 것은 보석과 비슷하다는 의미로, 값이 대단하다는 ‘precious’입니다. 주님 앞에서 우리들은 귀하고 값비싼 존재들입니다. 우리들은 주님 앞에서 존귀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을 존귀하다고 여기시면 아무도 우리들을 함부로 여기지 못합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우리들은 주님 앞에서 보배롭고 존귀하며 주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이 우리를 몰라줄지라도 우리는 실망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주님 앞에서 보배롭고 존귀한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대접해 줘’ 하고 바라지 않습니다. ‘내가 이렇게 보배로운데 나한테 이럴 수 있어?’라고 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자기가 보배롭고 존귀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서 무시당해도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보배롭고 존귀하며, 도리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몰라서 그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아기 예수로 가난하게 오셔서 사람들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도, 예수님은 전혀 그것을 슬퍼하지 않으십니다. 존귀한 분이시고 하나님의 보배로우신 분이시며, 주님은 도리어 그분의 존귀하심을 세상에 드러내시고 나누어 주십니다. 우리들은 주님의 보배롭고 존귀한 자녀들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우리를 무시해도 전혀 신경 쓰지 마십시오. “왜 나한테 이것밖에 안 해줘?” 하실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보배롭고 존귀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높여줍니다. ‘내가 그렇게 귀한 자이고,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여기시는 형제자매들을 나도 섬기고 높여줄 수 있어.’ 심지어 아직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하나님은 저 사람도 귀하게 여기실 거야’ 하면서 그들을 섬길 수 있습니다. 참으로 주님 앞에서 보배롭고 존귀한 사람은 이 세상의 법도나 가치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귀한 자로서 세상에 주님의 영광을, 그리고 주님의 겸손하지만 존귀하신 그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들입니다.
5절과 6절의 말씀을 보시면,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대로 아들들과 딸들, 주의 모든 백성들을 동서남북에서 모두 불러 모아 주실 것입니다. 신약에서 이것은 주님의 새로운 약속입니다. 주의 모든 백성들을 주님 오실 때 땅끝에서부터 불러 주십니다. 한 사람도 낙오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을 창세 전부터 택하셨고, 우리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표현처럼, 우리들의 이름이 기록된 책은 창세로부터 있습니다. 주님의 예정, 주님의 선택, 주님의 확실한 뜻이 있기 때문에 한 사람도 거기서 빠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주의 택한 자녀들을 남김없이 모두 땅끝에서부터 모으실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는 그 약속이 있기 때문에, 그 주님을 믿고 이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7절 말씀 보시겠습니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창조’라는 말씀이 또 나오고, “내가 그를 지었고 내가 그를 만들었느니라.” 창세기의 말씀이 또 나옵니다. 수미상관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들은 귀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고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에서 이것저것을 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목적은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주님의 영광입니다. 내가 얼마나 큰 업적을 이루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것, 주님을 믿는 것, 내가 주님의 자녀로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것을 삶으로 드러내는 것, 이것이 주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입니다. 나의 말과 행동으로서, 때로는 그저 내가 이 세상에 살아감으로써 영광을 드립니다. 특별히 어려움이 있을 때 세상 사람들은 포기하고 걱정하고 불평하겠지만, 그 상황에서도 감사할 때, 도저히 찬양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도 찬양이 나오고 감사가 나올 때,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저 사람은 어떤 하나님을 믿는가’ 하고 말할 만큼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 감사할 때, 하나님은 영광 받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창조하심을 받았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하루가 귀합니다. 단 하루도 우리는 낭비할 수 없습니다. 그냥 의미 없이 지나가는 하루하루인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루하루를 보시고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주어진 이 시간을 잘 써야겠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계가 있습니다. 언제 끝날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 허락하시는 때까지, 오늘 하루라도, 이 한 시간이라도 내가 주님께 영광이 되기를 바랍니다. 대단한 것을 해서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주님을 믿고 감사하고 주님께 찬양을 올릴 때, 그 찬양을 주님께서 받아 주실 때 주님은 우리를 통해서 영광 받으십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입니다. 주님과 우리가 관계 맺었다는 것, 우리가 그분의 자녀라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습니다. 우리들은 이 귀한 선물을 받았고, 이것의 증거가 되기 위해 아기 예수로 오시는 우리 예수님을 기대하면서 마음의 준비를 하는 복된 대림절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