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게시판

오늘은 삭개오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삭개오의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에서는 나오지 않고 누가복음 19장에만 나옵니다. 1절에서 10절까지 그 사실 분량으로는 굉장히 짧지요. 그렇지만 그 짧은 분량에 비하면 삭개오는 굉장히 유명한 편입니다. 어린이들이 교회 학교에서 배우는 성경 이야기에도 빠지지 않고 나오고 또 그 그림 삭개오가 나무 위에서 웅크리고 있고 예수님께서 밑에서 올려다 보면서 부르시는 그 장면은 또 굉장히 유명하지요. 그래서 아이들이 색칠하는 그 그림에도 참 빠지지 않고 많이 나옵니다. 이렇게 비교적 짧은 이야기 지만 이렇게 유명한 이유는 뭘까요?

삭개오가 어느 날 들어보니까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거예요. 자기 마을에 예수님이 오신대요. 그 소문은 이래저래 듣고 있었는데 여리고로 마침내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그 소문을 들었어요. 또 들리는 소리에 보니까 오늘 본문 바로 앞에 18장에 보면 바로 그 여리고로 오시면서 주님께서 또 맹인도 한 명 고쳐 주세요. 이 맹인은 얼마나 소리를 소리를 질러 댔는지 몰라요. 안 보이니까 안 보이니까 주님 앞에 가기 위해서 소리지를 수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주 다윗의 자손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하면서 소리소리 질러 대니까 사람들이 아 시끄럽다 하면서 이렇게 될 거 같어요. 그래서 주님께서 또 눈뜨게 해 주시고 그러니까이 사람이 또 집에 안 가고 또 예수님 좋다고 또 따라다니고 이런 일들이 막 소문들이 막 퍼지는 거예요. 그래서 주위의 사람들이 막 따라다니니까 이거는 뭐 눈에 안 뛸 수는 없겠지요. 이 얘기를 듣고 이 삭개오가 마음속에 아 질문이 생기는 거예요. 그 얘기를 듣고 사기의 마음속에 무슨 질문이 생기는가 저가 예수가 어떤 사람인가 보고 싶어했다고 했어요. 예수가 어떤 사람이지 영어로는 who was Jesus 였어요. 예수님이 누구지 그런 질문을 하게 되었다고요. 삭개오는 원래 질문을 안 하던 사람이에요. 왜냐면은 사교는 질문을 하게 되면은 인생이 복잡해져요. 내가 지금 왜 이렇게 살고 있지 이게 정말 바르게 사는 삶인가 내 이름은 이렇게 좋은데 내 이름에 비해서 내 삶이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왜 사람들이 나를 다 싫어하지 내가 이렇게 살아서 구원받을 수 있는가 이런 본질적인 질문들이 있잖아요. 그런 질문을 막 하면 머리가 복잡해지죠 그러면서 어떻게 세리장 일을 할 수가 있겠어요. 그러니까 아 그런 복잡한 질문은 이제 생각을 안 하고 그냥 자기 삶 자기 직업에만 그렇게 열심히 사는 그런 육은 있지만 영적으로는 죽은 그런 사람으로 살아 왔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소문을 듣고 다시 한번 그 마음속에 바짝 마른 땅에 물 하나 떨어지는 것처럼 질문을 하게 된 것이지요.

기독교는 질문을 하게 만들어요. 우리 삶에 본질적인 질문을 하게 하지요. 하나님이 누구신가 나는 누구인가 내가 지금 사는 것이 정말 옳은 삶인가 무엇이 참된 인생인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런 질문을 하게 하지요. 그리고 사기가 그런 질문을 하면서 참 신기한 거는요. 예수님이 누구지 하는 질문하면서 동시에 그런 질문을 하는 나 자신을 발견해요. 그전에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잊어버리고 살았어요. 그런데 어 그렇게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을 안다고요. 지금 사귀어도 예수님이 누구지 하면서 그것이 바로 다시 한번 잃어버린 나를 찾는 시작이 되었다고요. 이렇게 정말로 예수님을 접하면서 삭개오가 마음속으로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시지 알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나아갔는데 문제가 있었죠 예수님 주변에는 사람들이 많이 따라가고 있었고 삭개오는 키가 작았어요. 안 보이는 거예요. 어떻게 하는가? 그는 포기하지 않고 그러면 나무에 올라가면 되겠다 하고 막 달려가는 거예요. 그런데 삭개오는 자기 자신에 대한 그런 가치가 그렇게 높지 않아요. 나같은 사람이 어떻게 저 존귀한 분 앞에 나아가는가 바라지도 않는다 그 가까이 가려고 해봤자 사람들이 뭐 밀어낼 거고 싫어하는데요. 그래서 그저 멀리서 나무 위에 딱 이렇게 숨어서 구경만 하면 좋겠다 아 그런 마음으로 올라간 거라고요. 그래서 이렇게 딱 앉아 있다가 예수님께서 점점 그 무리들이 쭉 다가오시는 그걸 보고 아 저 분이구나 하면서 있었어요.

그런데요. 삭개오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벌어지는 거죠 예수님께서 그 바로 밑에 딱 오시더니 삭개오가 앉아 있는 그 나무위를 딱 올려다 보시는 거예요. 눈이 딱 마주쳤어요. 그 한 1초 동안에 그의 마음이 어땠을까 깜짝 놀랐을까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벌어지는 거예요. 더 놀라운 일은 예수님께서 그의 이름을 불러 주셔요. 삭개오야 이름을 불러 주십니다. 이거는 그 단순히 나의 이름을 아신다는 것도 정말 놀랍지만 어떻게 저분이 내 이름을 아시지 그런데 이름 석자를 안다는 그런 차원이 아니에요. 그분이 나의 모든 삶을 벌써 다 아신다는 거예요. 나의 지나온 과거 내가 어떤 인생을 왔는지 내가 지금 내 마음속에 뭐가 그렇게 간절한지 지금 나에게 뭐가 필요한지 내 문제가 뭔지 다 아신다는 거예요. 그리고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내 모든 삶이 그분 손에 있다는 거예요. 주님 말씀이 속히 내려와라 내가 오늘 너희 집에 유해야 겠다. 그래서 삭개오가 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하면서 빨리 내려와서 즐거워하면서 예수님을 영접을 했어요. 예수님께서 지금 삭개오에게 주신 가장 좋은 선물이 이거였다고 삭개오가 지금 필요한게 뭐예요. 뭐 물질적으로 뭐가 필요합니까 무슨 지위가 더 필요합니까 아니라고요. 결국 삭개오에게 아 정말 나도 이렇게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 나로 인해서 이런 알지도 못하던 사람들이 나 때문에 즐거워도 하는구나 하는 경험을 하게 하는 것이 제일 필요했다고 그것이 나의 참 참된 가치를 이게 참된 인생이 그거라는 걸 알려 줘요. 인생의 기쁨 근데 내가 뭘 좋아서 내가 원하는 걸 가지는 그런 즐거움은 오래 가지 않지만 참된 기쁨은 나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기뻐하게 하면서 그 기쁨 보면서 내가 기뻐하는게 참 기쁨이죠 이 기쁨은 세상이 알 수 없는 기쁨 세상에 줄 수도 없는 기쁨이자아요. 사기는 그런 기쁨을 누려 본 적이 없는데 오늘 예수님이 갑자기 그 집에 손님이 되어 주심으로 인해서 삭개오는 나로 인해서 야 사람들이 이렇게 좋아하네 하는 그런 인생의 처음 보는 그런 체험을 했다고요. 결국 삭개오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이었어요. 삭개오가 근데 내가 나도 누구를 좀 사랑해 봅시다 하고 아무 다가가도 안 와요. 그렇지만 예수님 자신이 그 집에 손님이 되어 주심으로써 그 주 다른 사람들도 오에게 들어가서 삭개오가 베푸는 그런 친절을 함께 누리면서 사교의 마음속에 아 나도 나도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도 할 수 있다 나도 사랑 베풀 수 있다 나도 사랑 받을 수 있는 존재다 나도 가치 있는 존재이다. 나도 사람다운 사람이다 하는 그 가장 귀한 선물을 예수님께서 주셨습니다.

이제 삭개오는 말합니다. 주님 보시옵소서 내 재산에 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겠습니다. 그는 오늘 있었던 이 예수님과의 만남을 오늘 딱 하루에 그런 해프닝으로 지나 버리지 않겠다는 거예요. 그 오늘만 이렇게 기분 좋은 잔치가 벌어졌고 내일 지나고 나면 아 다시 아침에 일어났을 때 마치 꿈에서 깬 것처럼 다시 옛날로 돌아가서 다시 사람들 보면서 그렇게 주눅드는 다시 옛날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거예요. 나는 오늘부터 정말로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고 그것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그동안 내 삶에 제일 중요한 부분이었던 나의 재산 여기에서 나의 신앙을 고백하는 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습니다 하고 주님 앞에 고백을 하는 거지 우리들의 신앙의고 이 말이나 그런 생각 정도가 아니라 우리 삶 가운데 제일 중요한 여태까지 그것이 내 삶의 목적이라고 그렇게 살아왔던 내가 이거 의지한다고 생각했던이 세상적인 거 재산 이것마저 주님 앞에 포기할 수 있는 그런 결단을 했다고요. 원래 삭개오가 만약에 자기 세리 장이라는 직업에 충실했다면 절대로 이렇게 할 수가 없어요. 사실 세리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좋아할 수가 없는 사람들이에요. 왜냐면 세리들의 직업은 세금을 걷어서 로마제국에 바치는 거라고요. 그러니까 세리의 일이 제일 안정되고 좋게 잘되기 위해서는 그서 로마제국이 잘되어야 돼요. 그러니까 정말로 자기 직업 생각하는 사람이었다면 예수님과 그 예수님의 제자들이 지금 하는 일을 굉장히 싫어해야 돼요. 그런데 지금 그게 아니에요. 나도 예수님의 일을 따라가겠다는 거예요. 삭개오가 왜 이런 생각을 했을까 왜 자기 재산을 반을 들이겠다는 생각을 했을까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중요한 단서가 밑에 있어요. 뭐냐면 그 밑에 보시면 이런 대목이 나와요. 그 그 사람들이 예수님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과 그 일행들이 그 식사하시면서 무슨 얘기를 많이 했는가 우리가 짐작을 할 수가 있다고요. 대화의 주제가 하나님 나라였어요. 사람들이 다들도 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가 당장에 임할 줄로 생각했던 거예요. 그러니까 막 떠들썩 떠들썩 하면서 야 들 떠 있어서 나는 뭐 하고 너는 뭐 하고 그런데요. 하나님 나라가 당장에 임한다고 그 사람들이 생각했을 때 시간적으로 시간적으로 하나님 나라가 곧 임한다는 거는 맞아요. 그건 맞아요. 하나님 나라가 정말 임박했어요.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래서 세상 모든 죄를 깨끗이 사해 주시고 다음에 죽음 권세에 계시고 부활하시는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임해요. 그래서 우리들이 더 이상 죄와 사망의 권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자유를 얻어서 하나님 나라에 온전히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시간적으로는 맞아요. 임박했어요. 그런데 이 주의 다른 사람들이 생각 못했던 건 뭐냐면 시간적으로는 하나님 나라가 다 왔지만 그러나 그것이 가만히 기다린다고 저절로 오는 건 아니라는 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고난 당하셔야 돼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하셔야만 된다고요. 제일 중요한 그 대목이 없으면 하나님 자라가 오지를 않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 메시아의 고난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그 뒤에 좋은 것만 지금 생각해서 당장 임한다 그런 얘기만 오고 가고 있으니까 예수님께서 아니다 하면서 그 뒤에 비유를 또 하나 드시거든요. 아무튼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 사기가 아 그렇다 그렇지만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믿은 거라고요. 맞다 예수님께서 이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면 더 이상 이제 로마가 나의 충성의 대상이 아니다 내가 로마에 충성한다 이 사람들을 그냥 보내고 다시 내일에 열심히 해야 되겠지만 아니다 이제 더 이상 나는 로마를 섬길 수가 없고 나는 주님을 섬긴다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옛날에 나의 삶을 살 수가 없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나의 재산까지 드릴 수가 있는 거죠 삭개오가 이렇게 말했을 때요.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면서 오늘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 그러셔요. 그런데 재산을 드리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었을까요? 삭개오가 주님 내 재산의 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습니다. 내가 누구 것을 속여서 뺏었다네 배나 갚아 주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주님이 어 그래 그러면 그럼 네가 구원 받아도 되지 원인과 결과였을까요? 구원을 얻기 위해서 여러분 내가 그럼 주님 내가 구원 받으려면 도대체 내 재산에 얼마를 들여야 됩니까 질문하는 그 자체부터가 잘못된 질문입니다. 구원은 내 재산에 얼마면 되냐 이렇게 얻는게 아니라고요. 구원 얻기 위해서 빚을 얻어서 내 재산에 두 배를 들여도 그렇게 그런 마음으로는 절대로 구원받지 못해요. 로마서 9장 우리가 구원받는 거는요.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고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다. 우리가 구원 받으려고 아무리 간절히 원한다고 구원받는 거 아니에요.

삭개오가 그다음부터 어떻게 살았을까요. 직업을 버렸을까요. 그런 암시는 성경에는 없어요. 그가 어떻게 그다음부터 살았을까 예수님을 이날 하루만 보고 다시는 아마 못 봤을 거예요. 곧 돌아가시니까. 그러나 바뀐 삶으로 살았을 것이고 세리장이라는 자기의 직업을 유지했을 가능성도 많이 있어요. 그러나 세상 사람들 보기에이 세상적인 모습으로는 여전히 똑같은 세리장이지만 그러나 달라요. 옛날에는 그걸 가지고 사람들 로부터 미움받고 뺏으면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정직하게 그리고요. 세리들 가운데 크리스천이 있어야 돼요. 세상 일 하는 사람들 가운데 크리스천이 있어야 된다고요. 공무원 법관 의사들 사업가들 가운데 크리스천이 많이 있어야 돼요. 그래야지 그들이 하나님의 의를 가지고 세상에서 의롭게 그 직업을 한다고요. 세리로 정직하게 걷었을 거예요. 다시는 누구를 속이지 않았을 거예요. 그리고 세리 장이기 때문에 자기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가셨을 거예요. 여러분 이제 여러분 그래선 안 됩니다. 절대로 누구 속이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은 이 로마 제국이 우리를 다스리고 있는데 로마 제국에 딱 앞서서 우리 민족을 보호해 주는 사람이라는 걸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분들에게 절대로 정직하게 세금을 걷으시고 절대로 그분들을 섬기는 마음으로 새롭게 사십시오 하고 그렇게 가르치면서 세리라는 직업을 여전히 유지하면서도 구원받은 자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렇게 살아갔을 것입니다.

나의 삶 가운데서도 그리고 나의 교육과 나의 직업을 통해서도 어떤 직업까지도 그것이 정치든 경제든 사업이든 자든 또는 육신으로 뭘 하든 나의 일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에게 유익을 준다는 그런 생각으로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예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주시는 은혜를 생각하면서 우리들도 그런 죄인이었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새로운 삶과 삶의 목적을 주시는 그 뜻을 생각하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나를 지으신 주님 찬양하겠습니다.

올해 우리 교회의 표어가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위해서는 예수님과 사도들이 전한 천국 복음에 대해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잘 아는 방법은 오직 성경을 읽는 것 밖에 없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과, 그의 천국의 의미, 천국의 실현을 위해 요구되는 것들, 그것을 위해 사도들이 무엇을 했는지 등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올해 우리 교회는 성경을 잘 읽고 그대로 살기 위해 헌신하는 삶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경책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확실하고 올바르게 알 수 있으며, 그 분이 우리에게 친히 들려주시는 사랑의 말씀을 듣고 참된 위로와 평화를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옛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친히 말씀하셨고, 그들은 그 말씀을 기록하였습니다. 그것들이 모여 우리에게 성경책으로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은 구약에서는 예언자, 신약에서는 사도라고 불립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 선택받아서 그 분의 복음을 전하도록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입니다. 세상에 많은 경전들과 고전 문헌들이 있지만, 하나님의 참된 말씀을 기록한 책은 달리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인간의 지혜나 경험, 종교성으로는 알 수도 없고 체험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철학적으로, 영적으로 생각해 왔지만, 결코 하나님께 이르지 못했습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자연적 능력이 없습니다. 때로는 인간이 특이한 영적인 체험을 하기도 하고, 신기한 경험을 통해서 과거나 미래의 일들을 맞추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려움에 처하면 신앙이 없어도 자기도 모르게 기도하기도 합니다. 저도 어렸을 때, 어두운 골목길을 지나가야 했던 적이 있습니다. 너무 어두워서 발 앞의 땅이 마치 구덩이처럼 보였습니다. 무서워서 어머니에게 배웠던 주기도문을 외면서 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자연적 능력을 통해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기반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알려 주실 떄에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고 보여주시는 사건을 우리는 계시라고 부릅니다. Revelation 은 숨겨진 것을 드러내 보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 계시하시는가? 하나님이 선택하신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계시하셨습니다. 성경에서 그 계시를 받은 사람이 많아도 몇십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계시를 받는 것은 인격이나 능력이 탁월하거나, 특별히 양심적이고 거룩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선택해 주신 사람만이 받습니다. 대신 그들은 그 계시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사명을 받았고, 그 말씀을 그대로 전하고 또 기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말씀이라는 형태로 주어졌다는 것은 매우 특별합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가리킵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And God said 라는 말씀은 사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동사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무언가 보여주신 것보다 훨씬 많습니다. 우리 인간은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뭔가를 보아야 만족하고, 맛도 보고 뭔가도 해 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와 하늘의 신비로움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면 우리는 훨씬 실감나게 잘 믿을 것 같습니다. 사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이상을 보여 주신 적도 여럿 있습니다. 모세, 엘리사, 에스겔, 다니엘 등은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이나 이상을 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구약에는 Seer, 선견자라 불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시 훨씬 많은 것은 prophet, 선지자 또는 예언자들입니다. 하나님은 떄로 우리의 다른 감각들도 사용하셔서 자신을 알리십니다. 가끔씩 그 분의 터치를 받는 예언자들도 있었습니다. 맛을 느낀 경우도 있었습니다. 말씀을 먹었더니 입에 달았더라는 대목도 있습니다. 냄새는 어떨까요? 하나님이 냄새로 자신을 알리신 경우가 있을까요? 구약에서 번제를 비롯한 제사를 드릴 때는 냄새가 아주 강렬했습니다.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냄새를 맡으며, 하나님께 나 대신 바쳐진 희생 제물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감각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청각, 듣는 것이었습니다.

신명기 6장에서 하나님은 들으라 이스라엘! 이라고 하십니다. 보라! 가 아닙니다. 왜 하나님은 말씀하신 것만큼 보여주지 않으셨을까요?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때 많은 기적을 보았습니다. 심지어 홍해가 갈라지는 것도 보았고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 경험은 그들의 믿음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성경에는 보는 것이 우리를 올바른 판단에서 벗어나게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볼 때, 보기에 좋았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먹지 말라는 말씀을 들려 주셨는데, 그것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눈에 보이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사무엘이 다윗의 형제들을 보았을 때, 외모로 보기에는 다른 형들이 더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셨습니다. 시각적 경험은 매우 강하고 다른 감각을 압도하는 것이 있지만, 우리는 자연적, 인간적 감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통해 선악을 판단해야 합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예언과 비교하면 좋겠습니다. 트로이 목마의 이야기를 아실 것입니다. 그리스 연합군이 트로이를 침공해서 시작된 트로이 전쟁은 10년이 지나도 승부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리스 군이 커다란 목마를 만들고 그 안에 숨어 있습니다. 트로이 사람들이 성에서 나와 보니까 집채만한 목마가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하나 논쟁이 벌어집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목마가 신들에게 바쳐진 제물이기 때문에 성 안으로 잘 들여야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라오콘이라는 예언자가 나와서 외칩니다. 이 목마를 성 안에 들이면 큰일납니다. 우리는 즉시 이 목마를 불태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실 그게 맞는 말이었지요. 그런데 갑자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바다에서 괴물이 나타나서 라오콘 예언자를 낚아채서 바다 속으로 사라집니다. 모두가 경악을 했지요. 이것은 분명히 신들이, 아마도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이 보낸 신적인 메시지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건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 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라오콘의 말이 맞았다. 그 말대로 목마를 불태워야 하는데 그것을 원치 않는 어떤 신이 그의 입을 막으려고 괴물을 보낸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사실 맞죠.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정반대의 해석을 합니다. 라오콘의 말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목마는 신들께 바쳐진 제물인데 라오콘이 감히 불태워야 한다고 해서, 신들이 노해서 괴물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토론을 하다가 결국 목마를 성 안으로 들입니다. 그리고 잘 아시는 대로 그 안에 숨어 있던 그리스 군사들이 나와서 트로이 성을 멸망시킵니다. 이 이야기는, 만약에 신적인 메시지, 신탁이 그저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주어졌을 때 문제를 말해 줍니다. 그 본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된다는 말입니까? 성경에서도, 아모스나, 스가랴, 다니엘 같은 분들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이상을 보았지만 해석할 줄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이나 천사가 해석해 줄 때에만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실 때에는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말씀으로 들려 주셔서 그의 백성들이 의미를 확실히 알도록 해 주셨습니다.

계시록 1:3에는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라고 되어 있는데 읽는 자는 단수, 듣고 지키는 자는 복수형입니다. 그 때에는 각 사람이 성경책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에 모이면 한 사람이 성경을 큰 목소리로 읽습니다. 그러면 온 성도들은 듣고 지키는 것입니다. 성경책은, 구약과 신약 모두, 본래 소리내어 읽도록 쓰여진 책입니다. 4-5세기의 위대한 교부 성 어거스틴은 예수님을 믿게 될 때 성 암브로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어느 날 보니 암브로스가 성경을 소리 없이 묵독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야 어떻게 저럴 수 있나, 참 대단한 분이다 라고 감탄했습니다. 그것처럼 옛 성도들은 원래 성경을 소리내어 읽는 것이 보편적이었는데 오늘 우리는 모두가 성경을 갖고 있기에 속으로 읽는 것에 익숙해진 것입니다. 히브리어 구약을 보면, 이 문장을 읽을 때 어디를 길게 읽고, 어디에서 끊고 어디에서 올리고 내린다는 표시가 작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문자 그대로 악센트인데, 악세트는 원래 노래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을 흥얼거리면서 즐겁게 읽으면 노래하는 것처럼 들릴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소리내어 읽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을 수 있는데, 문장의 의미를 이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의미를 알아야 어디서 끊을 지 알고 정확히 읽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을 묵상한다는 단어는 새 번역에서는 작은 소리로 읊조린다고 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중얼중얼 하는 것입니다. 이삭은 말씀을 중얼거리다가 리브가를 만났습니다. 여호수아는 말씀을 주야로 중얼거리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말씀을 늘 중얼중얼 해야 합니다.

시편 1편은 복있는 사람에 대한 말씀입니다. 복있는 사람은 무엇을 합니까? 말씀을 밤낮으로 중얼거리는 사람입니다. 시편 150편 가운데 맨 처음인 1편에서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진리가 이것입니다. 우리 모두 새해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즐겨 읽고, 중얼거리면서, 무엇보다 말씀대로 살기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 중 가장 귀한 것은 성경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이 성경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정말로 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말씀을 읽으면서 그의 뜻과, 그의 사랑, 그 분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하셨는지, 그의 사랑과 은혜와 희생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알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성경책 없이 우리 스스로 생각하고 상상하면서 하나님에 대해 묵상하거나 기도한다면, 그것은 확실하지 않고 늘 불안하고 연약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 우리의 믿음이 견고하고 강해지고, 확신을 갖고 그만큼 능력 있는 신앙과 기도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성경을 많이 읽고, 또 좋아하는 성경 말씀도 많이 있으실 것입니다. 저는 특별히 오늘의 본문인 시편 91편을 좋아합니다. 제가 어려움 가운데, 곤경 중에 있을 때, 그래서 사방이 모두 막히고 아무런 길이 없이 느껴질 때, 세상에 캄캄함 밖에 없고 바라볼 곳이라고는 정말로 하늘 밖에 없을 때, 이 시편의 말씀을 읽으면서 많은 힘과 위로를 받았습니다.

시편 91편은 하나님께 피하는 사람의 복에 대해 말씀합니다. 1절은 지존자의 은밀한 곳, 전능자의 그늘에 사는 사람을 노래합니다. 하나님을 지존자, 지극히 높으신 분이라고 부릅니다. 세상에 많은 권세들이 있고, 인간적이거나 영적인 많은 지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권세들이 아무리 우리를 해치려 하여도, 하나님은 그것들보다 비교도 되시지 않을만큼 높으십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우리의 피난처, 은밀히 숨을 곳이 되십니다. 우리가 그 분께 피하면 세상의 어떤 권세도 우리를 해칠 수 없고 비난이나 고소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또한 전능자이십니다. 전능자의 그늘! 하나님께는 능치 못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적은 사람들에게 오셔서 이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의 문제가 크더라도 하나님은 그 문제보다 더 크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피난처, 그늘이 되어 주십니다. 그 분은 자신에게 피하는 자녀들을 전혀 외면하지 않으시고 신실하게 돌보십니다. 4절에는 그의 깃으로 덮으시니 그의 날개 아래 피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어린 새를 날개 아래 품어서 보호하는 어미 새의 사랑처럼 전능하신 하나님은 또한 자비롭고 은혜롭게 그의 백성들을 친히 돌보십니다.

5-7절에는 하나님께 피하는 성도들이 세상의 환난으로부터 보호받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말씀들이 나옵니다. 수많은 위협과 위험과 고난이 성도들을 공격합니다. 그것들은 밤에 찾아오는 공포, 낮에 날아드는 화살, 그리고 여러가지 전염병과 재앙이라고 불립니다. 먼저 밤에 오는 공포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실제로 밤에 몰래 공격해 오는 적군을 말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 시편을 지은 다윗은 실제로 부하들을 이끌고 사울 왕을 비롯한 적들을 피해 목숨을 걸고 도망다녔던 적이 많이 있었습니다. 날마다 언제 어떤 위험이 닥치고 목숨을 잃을 지 모르는 극심한 고난 가운데 하루 하루를 살았습니다. 밤에도 동굴이나 들판에서 야영하면서, 언제 적들에게 발각될 지 모르는 불안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러한 밤에 닥치는 공포는 온 세상을 덮는 어두움과 함께 얼마나 우리를 낙담시키는지 모릅니다. 또는 밤에 그런 외적인 위협이 없어도, 나의 내면으로부터 오는 불안과 공포가 나를 덮칠 수 있습니다. 걱정거리, 마음의 괴로움이 있으면, 아무리 좋운 집 좋은 침실에서 있더라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악몽에 시달립니다. 여러분은 밤에 잠을 잘 주무시나요? 밤에 잘 주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십니다. 혹시 어떤 걱정이나 이유로 밤잠을 설치신다면 꼭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평강과 위로, 그 분의 따뜻한 사랑이 여러분의 영혼을 만지셔서, 영육간에 모든 피로가 풀리는 복되고 깊은 잠을 잘 수 있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 외에도 낮에 날아오는 화살과 전염병이 있습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들은 사실 수없이 많습니다. 어떤 때는 사람이 주는 괴로움, 즉 날아오는 화살이 있고, 또 어떨 때는 자연이, 우리의 육신이 주는 어려움, 전염병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로부터 보호하여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읽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질문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 정말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녀들은, 세상이 주는 이런 화살이나 질병이나, 그런 위험들로부터 다 안전합니까? 왜냐하면, 우리는 아무리 하나님을 믿고 기도한다 하여도, 때로는 이런 사고나, 다치는 일, 병에 걸리는 일을 겪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아무 사고나 안나고 아무 병도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런 화를 면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을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다른 종교나 신앙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참되고 순수하게 믿는 신앙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어도 실제로는 화살이나, 전염병이나, 재앙을 당하는 일이 생기는데, 성경 말씀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하시니,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 그 분의 뜻과 말씀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분은 영원하시고 전능하신, 능력과 지혜가 무한하신 분입니다. 그 하나님이 인생의 진리를 말씀하실 때, 우리는 무지하고 유한하여서 도저히 다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그 분의 말씀이 우리에게 걸림돌로 다가옵니다. 음식에 비유하자면 먹기 쉬운 우유가 아니라 딱딱한 음식, 먹기 힘들고 소화도 안되는 음식 같은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은 성경을 억지로 해석하려고 하면 멸망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말씀이 있을 때 우리는 너무 성급하게 아멘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질문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과 씨름해야 합니다. 하나님,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여쭈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 말씀은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서가 아닙니다. 지식적으로 배우고 암송하는 내용이 아니라, 오직 나에게 인격적으로 주시는 사랑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귀와 마음을 열어서 그 분의 깊은 비밀과 진리를 알려 주십니다. 욥이 온갖 고난을 당했습니다. 자녀와 재산을 잃고 자신도 병에 걸렸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친구들과 아무리 토론을 해도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고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모든 것이 해결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와 같이 말씀을 붙들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놀라운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한 번 상고해 보겠습니다. 화살과 전염병, 재앙이 나와 내 집에 닥치치 않으리라는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그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으면 되겠습니까? 성경 그대로 믿는다면, 가장 단순하고 직관적이며, 강력한 믿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큰 오해를 낳게 됩니다. 예전에 코비드가 한창 퍼질 때였습니다. 나중에는 코비드가 워낙 기승을 부려서 누구나 걸릴 수 있다고 인식되었지만, 처음에 막 시작되어서 사람들이 불안해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 어떤 교회의 목사님, 장로님, 권사님이 코비드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말을 못했습니다. 왜요? 어떻게 목사님이, 장로님이 코비드에 걸리느냐고 말이 나올까봐요. 여러분 제가 질문합니다. 누가 코비드에 걸리면, 그 사람의 신앙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까? 교회에 덕이 안 됩니까? 여러분 우리는 그런 생각을 완전히 버려야 합니다. 그건 그냥 바이러스로 인해 걸린 것입니다. 그 사람의 신앙이나 인격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모든 것을 영적으로 해석하고 함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리고 자기 신앙이 좋다고 착각합니다.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서 다른 사람을 정죄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큰 죄입니다. 여기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대접받기를 원하는 대로 대접하라. 만약에 내가 코비드에 걸렸는데, 또는 개인과 가정에 어려움이 닥쳤는데 다른 교인이 너는 신앙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 거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우리는 성경 말씀을 마음대로 문자적으로 이해해서 다른 사람에게 괴로움을 주어서는 안됩니다. 말씀은 양날 칼과 같아서 우리의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갭니다. 얼마나 위험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십니다. 이 말씀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오직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이 생명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는 좋은 방식으로, 영적인 해석이 있습니다. 화살이나 전염병을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으로, 즉 사탄의 여러 공격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마귀는 우리를 해치기 위해 화살을 쏘고, 여러 가지 유혹과 올무를 놓습니다. 기회만 되면 우리 귀에 악하고 어두운 말을 속삭입니다. 너는 그것밖에 안돼, 너는 형편 없는 사람이야, 너는 또 실패했어. 이렇게 우리 자신을 죽이고 위축시킵니다. 때로는 반대로 너는 너무 잘났어 라고 유혹합니다. 너는 훌륭해, 너는 대접 받아야 해, 너를 무시하는 사람들은 미워해야 해. 네 마음대로 해. 너의 욕망을 추구해. 이렇게 마귀는 우리에게, 너는 너무 못났어 또는 너는 너무 잘났어 라고 죄로 유혹합니다. 본문 3절에 새 사냥꾼의 올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새 사냥꾼은 새가 나타나는 곳에 올무를 설치하고 안에 먹이를 놓아둡니다. 그러면 새는 자기 발로 그 안에 들어가서 잡힙니다. 죄는 그것처럼, 우리가 죄의 즐거움를 따르다가 스스로 멸망하도록 합니다. 죄라는 것을 알면서도 짓고 모르면서도 짓습니다. 그러한 마귀의 올무와 화살이 얼마나 강하고 교활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죄의 유혹과 마귀의 공격에서 우리를 능히 보호해 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따르면 죄는 저절로 멀어집니다. 죄와 싸우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과 그 분의 날개 아래 있으면 죄는 우리를 건들지도 못합니다. 나의 죄로 인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우리는 죄와 어둠의 권세를 성령님의 능력으로 이깁니다. 이렇게 오늘 본문을 영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매우 필요하고 강력한 성경 해석입니다. 신약성경도 이렇게 영적인 해석을 많이 합니다. 가령 구약에는 아브라함의 아들들 중에 이스마엘이 육신의 아들, 이삭과 유대인들이 약속의 자손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에 보면, 유대인들이 율법 안에서 도리어 종의 아들이고, 우리 이방인들이 자유한 사라를 통한 참된 약속의 자손들입니다. 이렇게 신약에서는 구약의 여러 말씀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변화시키는 해석들이 있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수많은 전쟁이나, 물질적인 부요함, 장수하는 삶 등의 물질적인 복들을 신약 시대의 우리는 영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영적 해석은 또한 약점과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적 세계 뿐 아니라 물질 세계도 창조하고 다스리십니다. 본문은 분명히 육신적인 위험과 질병으로부터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권세를 영적인 측면에만 한정한다면 하나님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적인 삶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보호와 공급과 만족을 기대하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본문, 재앙으로부터 보호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사실 성경에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현실과 잘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말씀들이 많이 있고, 도리어 그것들이 더 일반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때 읽었던 이사야 9장의 말씀도, 메시야가 오시면 세상의 전쟁이 끝나고 영원한 평화가 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 오신지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전쟁은 그치지 않습니다. 그런 말씀들을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 합니까? 그저 영적으로, 또는 종말론적으로, 또는 실존주의적으로 읽어야 합니까? 우리는 성경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관점과 우리 인간의 관점이 그야말로 천지 차이라는 점을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은 완전히 충돌합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의 시각이 더 옳겠습니까? 인간적 관점은 유한하고, 부정확하고, 시간에 속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히 지혜로우시고, 모든 것을 아시며, 시간을 초월해서 영원을 보십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보는 세상의 관점이 틀렸으니 완전히 폐기해야 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최선의 판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판단은 우리의 관점을 완전히 넘어서 새로운 진리를 보여주십니다. 인간의 이해와 이성과 판단을 완전히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을 가장 잘 보여주시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로서 육신을 입고 인간이 되신 예수님은, 영원하고 완전한 하늘과, 시간적이고 불완전한 땅을 만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을 하십니다. 어떻게 거룩하고 완전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육신으로 오신다는 말입니까? 시공간적으로 한정되고, 유한하고, 온갖 연약함과 죄악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는 인간의 실상을 그대로 자신의 것으로 취하셨습니다. 그리고 온전한 인간으로서 우리의 친구가 되시고 우리의 고난을 그대로 당하셨습니다. 인간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은 자신의 신적인 영광과 능력마저 내려놓으시고 인간의 본성을 입으셔서 우리 곁에 오십니다. 성경에 이것보다 더 큰 기적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물리적인 불행이 닥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보다 더 큰 비밀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말합니다. 나의 죄가 너무 중해서 하나님을 뵐 수 없습니다. 나에게는 저주와 멸망 뿐입니다. 그러나 은혜의 말씀은 말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보다 더 커서 그 중한 죄인도 받아주시고 의롭다고 말하신다. 더이상 죄와 어둠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의롭고 영화로운 삶을 살 수 있다. 이것보다 더 큰 신비와 비밀과 역설은 없습니다. 이 은혜를 입은 사람은 이제 성령님 안에서 고백합니다. 내가 어떤 환난 가운데 있더라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품어 주십니다. 나와 같은 사람이 구원받았다면, 그보다 더 큰 은혜와 기적은 없습니다. 세상의 권세나 위협이 나를 만지지도 못합니다. 어느 곳 어떤 환경에서도 나는 감사하고 기뻐하며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고백하고 찬양합니다.

지금은 대강절입니다. 대강절은 대림절이라고도 하는데 강림이라는 단어가 안에 있습니다. 그것은 오심, 즉 예수님이 오신다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Advent 라고 하는데 같은 뜻입니다. 그래서 전례적 색깔도 보라색, 왕이나 황제를 상징하는 색입니다. 12월은 성탄절에 예수님이 아기의 몸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친구가 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을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성탄절을 잘 알고 기다리지만, 예수님 당시의 성도들도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알고 기다렸습니다. 어떻게 알았을까요? 구약성경에 메시야가 오실 것이 자세히 예언되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헨델의 유명한 오라토리오 메시야에는, 구약과 신약에 나오는 메시야 예수에 대한 성경말씀이 아름다운 노래로 들어 있습니다. 메시야의 가사들만 묵상해도 예수님에 대해서 아주 잘 알게 됩니다. 메시야의 가사는 구약에 나오는 예수님에 대한 예언들,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예수님의 왕권과 통치를 모두 다룹니다. 그 가운데 오늘의 본문인 이사야 9장도 아주 유명한 노래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9장 1절에는 전에 고통받던 자들에게 흑암이 없습니다. 2절, 흑암과 사망의 그늘진 땅에 빛이 비취었습니다. 스불론과 납달리, 이방의 갈릴리는 모두 사람들이 무시하던 땅입니다. 중심지인 유다의 예루살렘에서 보면 아주 먼 북쪽, 변두리이기 때문에 이무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셨고 이 지역에서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래서 갈릴리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며 그가 그리스도이신 것을 안믿는 사람도 있었고, 베드로는 그의 말투가 갈릴리 방언인 것이 드러나서 예수님의 제자인 것이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참된 가치, 하나님이 지어주신 복된 정체성을 알지 못하고 그의 배경, 출신, 외적인 것, 소유, 경력 등으로 판단합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업그레이드 하기 위해 얼마나 애쓰는지 모릅니다. 만일 그런 것이 중요했다면 예수님은 로마에서 태어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변두리, 이방의 갈릴리에서 자라셨고, 집으로 삼으셨습니다.

3절 주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즐거움을 주십니다. 구체적으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누는 즐거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복을 주시기에, 우리가 받아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고 우리는 그에게 감사합니다. 구약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기쁨이 구체적으로 음식과 관련되어 묘사되곤 합니다. 우리는 영적인 것만 생각하기 쉬운데,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과 육신을 모두 창조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먹을 것이 필요한 것을 아시고 주십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내리시고, 예수님은 사람들과 자주 식사를 하셨습니다. 마치 잔치하는 것처럼 보여서 바리새인들은 먹고 마시기를 좋아한다고 욕했습니다. 자기들이 금식하는 것을 자랑하면서요.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 안에서 기뻐하는 성도들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과 세례요한의 차이를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그분들의 메시지는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한 데서 비슷하지만, 세례요한은 그것이 심판을 의미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이고, 불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면서 많이 금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기쁨과 은혜를 강조하십니다.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말씀하시면서, 사회에서 미움받고 소외된 사람들, 세리, 죄인, 병자들과 어울리셨습니다. 그들과 잔치를 베푸시며 함께 먹고 마시면서 즐거워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천국잔치를 나타내는데 바로 3절에 나오는 추수하는 즐거움과 같습니다.

특별히 탈취물을 나누는 즐거움이라고 되어 있는데, 흔히 전쟁에서 승리하면 전리품을 빼앗아서 승리자들끼리 나눕니다. 이것은 인류 역사의 모든 시기에 있었던 일이고 하나님 앞에 범죄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는 6, 8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탈취물은 유대인들이 다른 나라를 침략해서 빼앗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사야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36-37장에 나오는 앗수르의 침략입니다. 히스기야 왕 때의 일인데, 거대하고 무자비한 앗수르 제국이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킵니다. 그리고 남왕국 유다로 쳐들어와서 모든 도시들이 무너지고 예루살렘만 남았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구원하셔서 적군이 멸망하고 나라가 구원받은 사건이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사야 36-37장 외에도 열왕기하 18-19장, 역대하 32장에도 반복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천사들이 적군을 치시므로 그들이 도망가고, 그 자리에 그들이 남긴 재물들이 있어서 나누는 것입니다. 온 나라가 멸망할 것같은 극심한 위기에서 구원해 주시고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이, 탈취물을 나누는 즐거움입니다.

4절, 하나님은 무거운 멍에, 어깨의 채찍,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십니다. 미디안의 날은 사사기에 나오는데, 미디안이 괴롭힐 때 하나님이 기드온을 보내셔서 구원하십니다. 더 옛날로 가면,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노예로 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괴로움과 탄식, 눈물을 보시고 모세와 아론을 보내셔서 그들을 압제와 노예생활로부터 해방하십니다. 메시야 예수님이 오시는 것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5절 군인들의 신, 즉 군화와 피묻은 겉옷이 불에 지푸라기처럼 탈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시면 모든 전쟁이 끝나고, 전쟁에 썼던 군복이나 무기들이 불타서 없어질 것입니다. 이사야 2:4에는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쟁기를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 영감을 받은 조각상이 UN 본부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이 땅의 전쟁을 없애고 다시는 서로를 죽이지 않고 영원한 평화를 가져오시기 위해서였습니다.

6절 한 아이가 났고 한 아들을 주셨습니다. 아기보다는 아이라는 단어가 더 좋은데,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이라고 부르는 표현이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부르는 대목들이 있는데, 종보다는 아이라는 표현이 좋습니다. 하나님의 아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복된 표현이지 않습니까? 그 어깨에는 정사, 즉 주권, 권세, 능력을 메었습니다. 이 아이는 하나님의 권세를 가졌는데, 예수님은 그 권세를 자신이 아니라 남을 위해 쓰셨습니다. 그래서 병과 악령에 시달리는 사람을 구해주시고, 사회에서 멸시받는 사람들을 도와주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주십니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 Wonderful, 놀라운 분입니다. 온 세상을 강력히 영원히 다스리실 왕이 어린 아기로 우리 곁에 오시니 얼마나 놀라운지 모릅니다.

모사, Counsel은 역사 드라마에서 왕 곁에서 조언하는 책사같은 인물을 가리킵니다. 이사야에는 하나님이 하늘의 영들을 소집하시고 어전 회의를 여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사야가 소명을 받는 6장이 대표적인 장면입니다. 하나님이 “누가 우리를 위해 갈까”하고 물으십니다. 하나님이 지혜가 부족해서 조언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권능, 완전한 지혜, 그리고 심사숙고하시는 결정을 가리키는 장면입니다. 모사라는 단어는 이 회의에서 결정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 계획과도 연결됩니다. 특별히 이사야에는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인간 역사에서 이루시는 모든 것은 그 분의 뜻과 계획에 의해 일어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그의 메시야, 놀라운 모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메시야께서 오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에서 전능하심은 용맹하심, 강하심, 승리하심의 뜻입니다. 즉 강한 용사, 하나님의 전사와 같은 표현입니다. 이것도 세상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으로 용감하게 싸워 승리하시는 메시야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름입니다.

평강의 왕 - 메시야는 이 세상을 하늘의 권세로 제압하시고 전쟁을 끝내시고 불의한 자를 벌하시고 영원한 평화를 가져오십니다. 그래서 군화와 군복은 타버리고, 사람을 죽이는 칼과 창은 사람을 위하는 쟁기와 낫이 되고, 영원히 풍요롭고 즐거우며 평화로운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십니다.

7절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합니다. 그분의 다스리심과 평강이 끝없이 더할 것입니다. 다윗의 보좌와 나라에 영원히 군림하십니다. 그런데 그 왕권은 무력과 군사력으로 지탱되지 않습니다. 세상의 많은 권력자들이 강제력을 동원해서 자기 권력을 굳건히 하고 평화를 선전했지만, 예수님의 왕권은 그런 무력으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것은 영원히 정의(justice)와 공의(righteousness)로 보존됩니다. 여기서 정의와 공의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가리키는 중요한 두 원리입니다. 시편과 이사야에 정의과 공의라는 표현이 나란히 나오는 곳이 많습니다. 시편에는 정의와 공의가 하나님의 보좌의 기초입니다 (시 89:14, 97:2).

정의는 법적이고 사회적인 용어입니다. 이전 성경에는 공평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율법에 의거한 사회 정의와 배려에 근거합니다. 이 정의가 지켜지는 곳에서는 누구도 약하다고 해서 피해를 당하지 않습니다. 만일 힘있는 누군가가 약한 자를 착취하고 고통을 주면 하나님의 정의에 의해 징계를 받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가난한 자, 고아, 과부, 이방인에 대한 배려를 늘 이야기합니다. 다니엘에서 악한 왕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의 자비를 입는 비결도 가난한 자를 돌보는 것입니다.

공의(righteousness) 는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할 때 그 의로움입니다. 그 단어의 본래 뜻은 올바른 관계이며, 매우 인격적이고 관계적인 단어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올바르게 있는 것이 언약의 백성에게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약속하셨습니다. 이 언역이 지켜지기 위해 하나님은 늘 신실하십니다. 문제는 인간인데, 인간이 이 언약을 버려도 하나님은 버리시지 않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십니다. 여호와의 열심은 질투라고 번역되기도 합니다. 아가 8:6에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열심, 그의 질투는 불과 같아서 아무도 끌 수 없습니다. 그가 뜻하시면 이루어지는데, 그런 열심과 질투를 가지시면 누가 막겠습니까?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 주님의 열심으로 메시야를 통한 구원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복된 대강절, 예수님의 강림을 기다리면서 더룩 그분을 가까이 하고 경건하게 지내는 복된 절기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아만은 아람 왕의 군대장관으로 많은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병이라는 치명적인 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그의 병은 단순히 육체적인 고통을 넘어, 사회적 고립과 절망을 의미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병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의 치유와 구원을 경험하며 새로운 삶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특정 민족이나 사람에게만 머무르지 않고 모든 이에게 열려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도 과거에는 나아만과 같은 영적 이방인이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로마서 5:8)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오늘 추수감사절에, 우리를 구원하시고 은혜로 회복시키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합시다.

나아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된 계기는 그의 집에 있던 이스라엘 출신 여종의 선한 말 때문이었습니다. 이 여종은 포로로 끌려와 억울한 상황에 처했지만, 원망하거나 복수를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주인을 위해 선한 조언을 했습니다. 그녀는 나아만에게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소개하며 그가 나을 수 있는 길을 제시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말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십니다. 우리의 말은 누군가를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잠언 18장 21절은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소녀의 말은 작고 평범해 보였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도구가 되었을 때 나아만의 삶을 바꾸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말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말이 다른 사람을 살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도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추수감사절에, 우리의 말이 감사와 축복의 통로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나아만은 하나님의 일을 처음에는 자신의 기준으로 이해하려 했습니다. 그는 엘리사가 나와서 그에게 손을 흔들며 기적을 행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요단강에서 몸을 씻으라는 간단한 지시만 내렸습니다. 나아만은 이에 실망하며 화를 냈습니다. 그는 요단강이 다메섹의 강들보다 더럽다고 생각하며 거절하려 했습니다.

이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일을 우리의 기준과 방식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습니다. 이사야 55장 8절에서 하나님은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르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을 다 이해할 수 없지만, 그분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신뢰해야 합니다.

나아만은 결국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집과 교만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요단강은 겉으로 보기에는 특별할 것이 없었지만, 그곳에서 하나님의 치유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는 성찬의 빵과 포도주와도 같습니다. 빵과 포도주는 단순한 음식처럼 보이지만, 성령께서 임하심으로 거룩한 은혜의 도구가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종종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평범한 곳에서 역사합니다. 요단강의 물은 그 자체로 치유의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니었지만, 나아만의 순종과 하나님의 능력이 결합될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며 감사합시다.

하나님은 나아만을 단번에 치유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는 과정을 통해 나아만에게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 과정은 단순한 치유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단순한 기적의 수혜자로 머물게 하지 않으시고, 그분의 일에 참여하는 인격적 관계를 맺도록 초대하십니다.

나아만은 요단강에 몸을 잠그는 동안 자신의 교만과 고집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했습니다. 그는 치유의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나아갈 때, 우리의 삶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치유를 받은 나아만은 즉시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는 엘리사에게 예물을 드리려 했지만, 엘리사는 이를 거절하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나아만은 이에 감동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삶을 헌신했습니다. 그는 율법을 알지 못했지만, 은혜를 경험한 자로서 하나님께 온 마음으로 응답했습니다.

감사는 단순히 물질적 축복에 대한 반응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은혜"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리스와 "감사"를 뜻하는 유카리스티아는 같은 어근을 공유합니다. 이는 은혜와 감사가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반드시 감사로 반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카리스)는 우리가 받을 자격이 없지만 조건 없이 주어진 선물입니다. 이 은혜를 체험한 자는 자연스럽게 감사(유카리스티아)로 반응하게 됩니다. 나아만은 치유의 은혜를 받은 후 단순한 감사를 넘어 자신의 삶으로 그 은혜에 응답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생명, 일상, 가족, 구원의 선물—all of this is grace. 추수감사절은 이 은혜를 기억하며, 우리의 삶 전체가 감사의 표현이 되도록 결단하는 날입니다. 우리의 감사가 말과 행동, 예배 속에서 드러날 때, 하나님은 그 감사 속에서 더욱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나아만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며 감사로 가득 찬 삶을 살아갑시다. 은혜 없이는 감사가 없고, 감사는 은혜를 체험한 사람의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우리의 삶이 나아만처럼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제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수많은 기적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한적한 광야로 가셨고, 그곳에서 광야 집회가 열렸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의 물고기로 남자만 5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식사를 마친 후, 예수님은 제자들을 배에 태워 먼저 보내시고, 혼자 남아 사람들을 돌려보낸 후 산으로 올라가 밤새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왕으로 추대되는 분위기에 당황했지만, 주님의 명령에 따라 호수 가운데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배가 한 척뿐이었기에 예수님은 어떻게 오실지 의문이었습니다. 한편, 밤이 깊어지고 거센 바람이 불어 파도가 심하게 치기 시작해, 제자들은 배를 조종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습니다.

새벽 4시쯤, 제자들 중 누군가가 멀리서 하얀 형체를 발견했습니다. 물 위에서 다가오는 모습에 모두가 유령이라 생각해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안심하라. 나다.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기적 가운데 이 물 위를 걸으신 사건은 특별했습니다. 이전에는 병자를 고치고 많은 사람을 먹이시는 주님의 기적을 보며, 제자들이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 기적을 통해서는 단순히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이 고백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순간이 바로 이 기적에서 나타납니다.

어두운 밤, 강하게 몰아치는 바람과 파도가 이는 바다 위로 한 사람이 걸어오는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 모습은 창세기 1장과 비슷한 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창조 이전, 땅은 형체가 없고 흑암이 깊은 물 위에 있었으며,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를 운행하셨습니다. 이는 완전한 어둠 속, 아무런 빛이 없는 가운데 거대한 물과 폭풍이 일렁이는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기 직전의 혼돈과 흑암, 물과 바람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신 장면과 연결됩니다. 제자들은 마치 창조의 순간으로 돌아간 듯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후 다시 한 번 기적을 목격합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으로, 태초에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하셨던 그분이 강풍 속에서 바다 위로 걸어오셨습니다. 이 장면은 천지 창조를 떠올리게 하며, 예수님이 창조주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임을 보여줍니다.

성경에서 물은 생명과 심판의 상징으로 나타납니다. 물은 생명의 원천이지만, 물에 빠지면 죽음에 이르듯이 심판의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노아의 홍수와 홍해에서의 심판은 물을 통한 하나님의 경고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 물 가운데서 땅을 나오게 하셨으며, 하늘 위의 물과 아래의 물로 나누셨습니다. 이처럼 물이 창조와 심판의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그것을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세상이 물에서 나와 성립되었다고 말하며, 우리가 믿고 서 있는 이 세상이 영원하지 않음을 상기시킵니다. 하나님께서 물을 바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숨쉬며 살아갈 수 있지만, 그분이 손을 거두시면 우리는 물로 인한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한 번 있었던 노아의 홍수처럼,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으며 우리의 궁극적 소망은 이 세상이 아닌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오늘 제자들은 주님을 따라가다가 예상치 못한 위험을 맞닥뜨렸습니다. 주님은 일부러 그들을 위험 속으로 내보내셨고, 그들이 이를 통해 배우기를 원하셨던 듯합니다. 제자들이 주님 없이 배를 타고 나섰을 때, 큰 파도가 몰아쳐 생명의 위협을 느꼈지만, 그 가운데서 중요한 교훈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태초에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영원한 분이며, 이 세상은 그분과 달리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를 떠올려 보면, 물로 멸망한 세상은 주님이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성경은 이 땅이 불로 멸망할 때를 위해 보존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오시는 모습을 본 베드로는 주님이 맞다면 자신도 걷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베드로는 성미가 급하고 실수도 많은 성격이지만, 그만큼 대담한 믿음을 보인 사람입니다. 물 위를 걷다가 바람을 보고 두려워 빠지긴 했지만, 저는 그를 탓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베드로는 예수님 외의 인간 중 물 위를 걸었던 유일한 사람으로, 믿음이 대단합니다. 물론 주님만 바라보았으면 빠지지 않았을 거라고 할 수 있지만, 인간으로서는 바람을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자연스럽게 두려움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본다고 해도, 온전히 주님만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은 1분도 되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는 언제나 다시 자신을 의식하게 되고, 그 순간 물에 빠질 위험에 처합니다. 그러나 물에 빠진다 해도, 주님이 건져주신다는 사실이 더 중요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물 위를 걷기 시작했고, 그 순간은 매우 큰 의미를 지닙니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살려는 믿음과 순간적인 순종이야말로 우리에게 큰 도전과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 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두려워 말라"고 하실 때, 우리가 그 말씀을 얼마나 지킬 수 있겠습니까? 두려움을 억누르겠다고 다짐한다고 정말 두려움이 사라집니까? 물 위를 걷는 것은 단단하고 안정된 기반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안정과 안전을 원합니다. 가족을 부양하고, 자녀를 교육하며, 미래를 준비하려면 안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 어떻게 부모로서 마음이 편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직업이 필요하고, 매일매일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육신의 생각이 성령을 거스른다고 말합니다. 우리 삶의 모든 계획과 염려 속에서 주님 말씀대로 살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고, 그저 "두려워 말라"는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최소한의 안전과 재산, 자녀의 미래를 위해 계속 염려하고, 계획하며 삽니다. 주님은 부자 청년에게 가진 것을 다 버리고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청년은 염려하며 떠났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예수님은 새와 꽃처럼 염려 없이 아버지께서 입히고 먹이실 것을 믿고 살라고 하셨지만, 우리는 여전히 염려합니다.

이 시간에 다짐해 봅시다. 기도하며 "주님, 내가 염려하지 않겠습니다"라고 결심해 봅시다. 그러나 그 다짐이 얼마나 오래 갑니까? 하루도 가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염려하고, 불안 속에 살아갑니다. 세상의 염려와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은퇴 후에 평화가 올까요? 아닙니다. 세상에서 수고하며 사는 한 우리는 여전히 불안 속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시지만, 우리가 말씀대로 살 수 있습니까? "예"라고 한다면 그것은 교만이 됩니다. "아니요"라고 한다면 그것은 불순종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를 찔러 쪼개어, 우리의 살과 골수를 쪼개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면 우리의 육신은 파괴됩니다. 주님을 만나면 우리는 죽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주님을 죽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 육신의 생각으로 따를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가 그 은혜 없이는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이유입니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우리가 육신의 약함으로 율법을 지킬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아시고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이루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육신의 연약함 가운데 그 아들을 보내셔서 죄 가운데 있는 우리 육신 속에서 죄를 정하시고, 성령을 통해 우리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사는 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때, 자신의 힘이 아닌 주님만을 바라보며 주님께 의지했습니다. 그 순간 성령님께서 베드로를 붙드셨고, 바람 가운데서도 물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향한 순종의 그 한 순간이 얼마나 귀중한지 모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의 모든 순간마다 주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느냐고 물으면, 우리는 매번 자신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주님께 염려를 내려놓고, 오직 그분만을 의지하겠다고 다짐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우리가 순간순간 주님께 나아갈 때마다 원수는 우리를 정죄하고 넘어뜨리려 합니다. 또 실패했다고, 또 죄에 넘어졌다고 끊임없이 정죄하지만, 그것은 귀담아들을 필요가 없는 마귀의 속임수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주님께서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시고, 그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탓하지 않으십니다.

비록 우리가 1년 뒤, 10년 뒤를 염려할지라도, 지금 이 순간에 주님을 의지하며, 순간적인 순종을 드릴 때 주님께서 우리를 붙드십니다. 우리가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같이 주님의 날개 아래로 올라가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이 시간 주님께 순종하는 이 순간마다 주님께서 주시는 힘을 믿으며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많은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그들의 병을 고쳐 주시고, 마음을 위로해 주시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 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많은 도시들을 다니셨는데, 하루는 두로에 가시게 되었습니다. 두로는 유대를 벗어나야 갈 수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모처럼 외국여행을 하신 셈입니다. 두로에도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어서 그들을 만나 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왔던 사람들 중에 한 헬라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가 온 이유는 어린 딸이 있는데 악한 영이 들려서 고생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딸을 고쳐 달라고 부탁드리러 왔습니다. 우리가 아는 예수님은 친절하시고 자상하시고 모든 사람을 맞아주십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의 부탁도 선뜻 들어주셨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상하게도 이 부탁을 거절하십니다. 그리고 자녀가 떡을 먹고 있는데 뺏아서 개에게 줄 수는 없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비유인데 의미는 분명합니다. 자녀는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 빵은 하나님의 은혜, 능력, 사랑, 그리고 개는 이방인 헬라인을 말합니다. 이 여인을 개에게 비유하신 것이니, 듣는 우리도 민망하고 당사자는 얼마나 큰 수치를 느꼈는지 모릅니다.

물론 우리는 이 이야기의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해피엔딩입니다. 예수님은 결국 그 여인의 딸을 고쳐주십니다. 주님은 사람의 마음을 아시기 때문에, 그 여인이 비록 그렇게 거절당해도 가지 않고 계속 간청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꼭 주님처럼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지 못해도 우리도 그 여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모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병에 걸려 고통받고 있다면 이 병을 낫게 할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차라리 내가 대신 아픈 것이 낫습니다. 내가 아프다면 참든지 싸우든지 할 수 있는데, 눈앞에서 아이가 고통받는데 볼수밖에 없으면 마음이 찢어집니다. 우리는 아무리 사랑하는 자녀라 해도, 육신의 고통을 함께 느껴줄 수는 없습니다. 마음으로 함께 아파할 수는 있겠지만, 실제로 그 고통을 느끼거나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이 딸은 영적인 정신적인 병에 걸렸습니다. 나중에 그 어머니가 집에 가보니 침대에 얌전히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증세가 심할 떄에는 아마 난폭하고 폭력적이고 달려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어린 딸이 이렇게 병에 걸려 제대로 살지 못하고 비참하게 살아가니 얼마나 어머니의 마음이 아팠을까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셨다는 말을 듣고 딸을 낫게 해 달라는 부탁을 하려고 달려 온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좀 냉정한 말씀 하셨다고 해서 섭섭하다고 기분나쁘다고 가버리지 않습니다. 예수님, 너무 심하게 말씀하시네요! 용하다는 소문을 듣고 왔는데 아닌 가 봐요! 나는 갈랍니다. 리뷰 엉망, 벌점 테러할 테니 기대하세요! 라고 하지 않습니다. 여인이 그렇게 가 버리지는 않을 것을 우리도 알 수 있지만, 여전히 의문입니다. 예수님은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두로는 유대에서 북쪽에 있는 고대로부터 유명한 항구도시였습니다. 무역이 성했고 부가 몰렸고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습니다. 에스겔 27장을 보면 두로가 고대 여러 나라들과 얼마나 많은 무역을 해서 풍요롭게 살았는지 짐작할 수 수 있습니다. 두로가 헬라 문화권에 결정적으로 편입된 것은 본문부터 약 360년전인 알렉산더 대왕 때입니다. 알렉산더는 성경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이름으로는 아니지만 구약성경에도 나옵니다. 그는 마케도니아의 왕이었고, 그리스를 다 평정한 다음 페르시아를 정복하기 위해 원정을 떠났습니다. 이 당시 페르시아는 두 말할 필요가 없는 그야말로 초강대국이었습니다. 세계사에 유래없는 큰 영토를 지배했는데, 오늘날 터키 팔레스타인 이집트 이라크 이란 중앙아시아 그리고 인도까지 강력한 중앙집권제로 다스렸습니다. 그에 비하면 그리스는 변방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알렉산더는 이 페르시아 제국으로 쳐들어가 소아시아에서 일차전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내륙으로 진격하지 않고 이집트를 정복하러 갔습니다. 그 이유는 너무 성급하게 내륙으로 들어갔다가 뒤에서 역습을 당하거나 본국과의 보급로가 끊어지면 큰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나 지금이나 유럽에서 아시아를 치려면 이집트를 먼저 정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알렉산더가 이집트로 내려가기 위해 지중해 동부해안을 따라 진군하는 데 그 길목에 두로가 있습니다. 사신을 보내서 항복하고 길을 열라고 요구했더니 두로인들은 웃기시네 하며 그 사신을 바다에 던져버렸습니다. 알렉산더의 혈압이 바짝 올랐습니다. 이 때 그의 나이가 불과 23살인데 성질을 제대로 건드렸습니다.

두로인들이 큰소리를 친 이유는 육지에서 반마일 떨어진 섬에 견고한 성을 쌓아놓았기 때문이었다. 성벽의 높이가 60m였다고 한다. 그런데 알렉산더는 바다를 메워 도로를 만드는 대공사를 시작한다. 돌과 흙으로 엄청난 공사였다. 두로인들이 성에 숨어서 내려다 보니 바다 위로 도로가 점점 다가온다. 가슴이 서늘하고 경악하여 반격을 한다. 불화살을 쏘고 돌을 굴리고 배에 불을 붙여 보내고 했지만 결국 7개월만에 함락되었다. 분노한 알렉산더는 그들을 죽이고 불태우고 다 파괴시켰다. 그리고 자기에게 저항하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 2000명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해변을 따라 몇마일을 십자가가 섰으니 정말 끔찍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우리에게 십자가는 거룩하고 은혜롭다. 그러나 원래는 가장 사람을 가장 잔인하게 죽이는 형틀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험악, 흉칙, 혐오, 비참. 사람이 사람을 이렇게 미워할 수 있음을 극명히 보이는 증거이다.

알렉산더의 마음은 이미 사람이 아닌 짐승. 나에게 저항하는 자들을 이렇게 한다는 그는 이미 신이 되어 있다

사람을 죽이면 안되는 이유 (6계명) 질문 살인하면 안되는 이유는? 창세기 9장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었으므로. 사람을 죽이면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죽는다. 하나님의 형상이 못박힌다. 알렉스가 그런 폭력과 살인은 사람에게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정의를 땅에 짓밟았다. 피가 흘러 땅을 더럽힐 때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졌다. 하나님의 정의 못박히고 모욕당한 영광을 어떻게 ? 다 지옥불? 마지막 때 그리하신다 그러나 다 멸망시키는 보복하는 심판은… 사실 헬라인들이 로마인들에게 그렇게 보복을 당했다.

보복만 하면 끝나나? 보복과 심판으로만 하나님의 정의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아니다. 하늘과 땅에 큰 죄를 지은 알렉산더와 헬라인들의 죄를 용서, 치유, 화해받을 수 있는가? 헬라인들이 통회하며 회개하고 울면서 주님 잘못했습니다 라고 하는 길밖에 없다. 가슴을 찢으며 울며 용서하옵소서. 자기들이 죽였던 사람들에게 영혼에게라도 미안하다 용서하라고 비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누가 그렇게 용서를 빌 수 있단 말인가? 구원받고자 하는 자는 세상 것을 움켜쥐고 있어서는 안된다. 알렉산더는 33살에 죽었다. 자손들은 그런 조상을 둔 죄밖에 없지만 그로 인한 지배자로 군림하며 온갖 혜택을 누리며 살았다. 특권을 누리며 다른 민족을 멸시하거나 최소한 외면했다. 그들의 죄에 동참했다. 권세와 재물. 이 세상 것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손에서 놓지 않는 한 회개가 없다. 양심이 안다. 죄악의 열매을 누리며 산다. 나로 인해 고생하는 다른 민족들을 멸시하거나 외면했는데 그 특권을 놓지 않으면 회개가 없다.

나에게 오고자 하는 자 재산을 버리고 오라 하셨는데 과연 누가 그리할 수 있단 말인가? 단 한명이라도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나의 가진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라도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본문의 여인이다. 왜냐면 이 여인의 마음은 사랑이기 때문에.

결국 문제의 해결은 사랑이다. 물론 혈육에 대한 사랑이지만 이 사랑이 세상 것을 버릴 수 있게 한다. 자존심 상해도 좋아요. 멸시 당해도 좋아요. 주님의 은혜만 필요해요 하고 다가오는 사람이 단 한명이라도 있다면!

만약 예수님이 이 여인의 부탁을 바로 들어주셨다면 혼자만의 은혜로 끝이다. 그러나 이 여인으로 하여금 너는 헬라인임을 상기시키신다. 다른 죄가 없다. 오직 헬라인이라는 이유뿐이다. 여인으로 하여금 수세기의 큰 죄 가운데 살았던 헬라인을 대신해서 주님께 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이것은 놀라운 사랑이다. 모질게 대하신 것이 아니라 놀라운 사랑의 표현.

왜냐면 주님은 이 여인이 주님의 은혜만 붙들것을 아셨다. 맞습니다. 마치 주인 집 자녀들이 식탁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같은 그런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나는 너무 큰 죄인이기 때문에 감히 그런 은혜를 바랄 수 없다. 자녀들이 당연히 먹듯. 나는 한마리 개 식탁 밑에 쪼그리고 앉아 눈치보다가 부스러기 떨어지면 핥아먹듯이.

프랑스의 소설가 알렉산드르 뒤마가 쓴 몽테크리스토 백작 어릴 때 읽었다. 주인공이 에드몽 당테스 19살에 선장이 되고 약혼을 하고 인생의 최고를 맞이하지만 시기한 친구들의 모함으로 약혼식 파티장에서 경찰에 끌려간다 외딴 섬 감옥에 갖혀 평생을 살게 되었다. 늙은 아버지가 있었는데 자식이 그렇게 되니까 충격을 받고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아 절망하고 음식을 거부하다가 굶어 죽는다. 14년만에 기적적으로 탈출하고 보물을 찾아 부자가 된 후 아버지가 어떻게 되었는가 물어보러 다닌다. 어떤 사람에게 아버지가 충격과 절망과 걱정 가운데 굶어서 그렇게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탄식한다. 어찌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인가. 그 존귀한 분이 한마리의 개가 주인에게 버림받고 사람에게 멸시받고 쫒겨나서 굶주리고 병들고 사람들이 다 미워하는 개라 하더라도 그래서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다 침뱉고 돌던지고 막대기로 때리며 쫓아내도 많은 사람들 중에 단 한명이라고 불쌍하다 할 수 있다. 자비를 베풀어 빵 조각 던져주면 그걸 먹고 사는 법인데 어찌 그리 돌아가셨단 말입니까 하고 탄식하는 대목이 나온다.

본문에서 개는 천한 동물이다. 본문은 분명 그런 의미이다. 그러나 이 여인은 개가 아무리 천하고 더럽고 혐오스러워도 많은 사람들 중에 한 명이라도 빵조각 던져주면 먹고 살겠다. 주님은 감동하셨다. 도와주리라!

우리도 대단한 것을 구하기 보다, 이미 많은 것을 받아 누리고 있는데 더 달라고 하기 보다 한번쯤 모든 것을 내려놓고 겸손하게 처음 마음으로 기도하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다. 하나님이 그만큼 사랑하신다. 그러나 당연시해서는 안된다. 가졌는데 더 달라고 하는 것은 민망하다. 혹시 기도하지만 마음이 시원하지 않거나 요즘 힘들다면 은혜를 당연시한 때문일 수 있다. 여인의 마음을 갖자 다른 것 필요없고 주님의 은혜만 족하다. 주님의 은혜는 크고 작은 것이 없다. 아무리 작아도 진짜가 중요하다. 헬라민족을 살리기 위해 온 민족이 회개하겠습니다 가 아니라 단 한 명 이 여인의 한 방울의 눈물을 원하셨다. 하나님의 일은 그렇게 된다. 크고 작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작아도 진짜냐가 문제다.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자. 그런 마음으로 구할 때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나로 인해 살아나는 사람이 있다. 나로 인해 이 시간 은혜의 문이 열리는 구원의 빛으로 들어오는 다른 사람이 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고통받는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주님 지금도 우리 모두는 주님의 은혜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저희들이 오직 주님의 은혜와 사랑만을 바라보도록 도와 주소서. 오늘 본문의 헬라 여인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만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이 세상은 하나님을 떠나고 욕심이 사로잡혀 커다란 죄악 가운데 있습니다. 그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울고 있습니다. 저희가 주님의 교회로서 주님의 사랑과 구원을 세상에 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죄악의 권세가 강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더욱 크다는 것을 세상에 널리 드러낼 수 있는 교회가 되도록 성령이여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 각자와 가정에 은혜를 베푸시고 주님을 증거하는 삶이 되도록 날마다 함께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러분 반갑습니다. 주님의 은혜 안에서 이렇게 만나게 되어 정말 기쁘고 감사합니다. 저는 청년 때 유니버시티 교회에 온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데이트하던 지금의 아내가 이 교회에 있어서 같이 와서 당시 청년들과 좋은 교제를 했었습니다. 이렇게 다시 오게 되어서 정말 좋습니다. 여러분은 김밥을 좋아하시지요? 그런데 김과 밥은 원래 만날 수 없는 사이였습니다. 사는 데가 바다와 땅으로 완전히 다르지요. 그런데 우리 인간이 그 조합을 좋아하기 때문에 만나서 김밥이 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원래는 만날 일이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공통점은 그저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 뿐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가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셔서 이렇게 만날 수 있도록 인도하신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 복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청년 때에 뉴욕에서 유학생활을 했습니다. 전공이 수학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살다보면 한번쯤은 수학과 친해져야 되는 떄가 있잖아요? 수학이 다른 과목들에 비해, 답이 매우 명확하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1이면 1, 2면 2 분명합니다. 어떤 과목은, 가령 영어나 역사는 애매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 같기도 하고 저것 같기도 하고요. 그런데 수학은 명학하고, 특별히 어떤 것을 증명한다는 것이 있습니다. 증명은 논리적으로 완벽해야 되거든요. 그래서 한번 증명이 성공하면 그 다음에는 이게 혹시 또 틀리지 않을까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완전히 믿을 수 있습니다. 가령 피타고라스의 정리는 2500년전에 증명된 것인데요, 그 이후로 아무도 이런 경우에는 틀렸는데요 라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다른 과학이나 학문은 틀렸던 것이 드러나면 수정하고 보충해야 합니다. 그러나 수학으로 무엇을 증명하면, 그것은 명확하고 절대적이고 불변하는 진리가 됩니다. 아무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수학적인 진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진리는 영원하고 보편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수학적 진리는 그것을 말하는 사람에게 권위를 가져다 줍니다. 그가 말하는 것이 절대 참이라는 확신과 능력을 주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수학 선생님도 실수하실 수 있지요. 그때 선생님 그거 틀렸는데요 하면 선생님도 오 그러네 하면서 제 말을 들어주셨습니다. 저는 좀 내성적이고, 제 주장을 막 세게 하는 성격이 아니었는데, 수학은 저에게 진리에 대한 그런 권위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수학 공부를 더 하기 위해 뉴욕에 유학생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뉴욕의 한 이민교회를 가게 되었고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 교회에 처음 간 것이 9월 1일 주일이었습니다. 오늘이 꼭 그 날짜와 요일이지요. 그것이 7년에 한번, 윤년이 있으면 6년에 한번 오기에 아주 흔한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오늘이 더 의미있고 감사한 시간입니다. 저는 교회에 나갔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정말로 저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습니다. 무엇보다 성경 안에 있는 진리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의 진리는 물론 수학의 진리와는 성격이 매우 다릅니다. 수학적 진리는 논리적이고 고정되어 있습니다. 수학의 어떤 문제를 풀게 되면 물론 기쁨이 있고요, 특유한 아름다움도 있습니다. 그러나 수학의 진리를 배우면서 아 너무 감사하다, 이 방정식에 감사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나의 영혼이 깊은 데서 새롭게 살아나는 것을 체험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나의 삶이 변화되고 이제는 완전히 새로운 삶이 되었다고 느끼는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진리를 알려줍니다. 성경은 더 크고 놀라운 진리, 삶을 바꾸는 진리입니다. 성경의 진리는 인격적이고, 날마다 새롭습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인격적인 진리를 배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실 학교 공부보다 성경을 더 열심히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시라는 말은 아닙니다. 공부도 열심히 하시고, 성경도 많이 읽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진리에 대해 듣게 됩니다. 도마가 묻습니다.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그 길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다. 이것이 우리가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진리입니다.

-- 길이신 예수

먼저 예수님은, 내가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길은 어디로 가는 길입니까? 나를 통하지 않으면 아버지께 올 자가 없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 길은 하나님 아버지께 가는 길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아버지께 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길 위의 인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순례자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가는 길이 아니라, 내가 주어가 아니라, 예수님이 주어이십니다. 그 분이 길이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께 가는 길이신 이유는, 그 분이 아버지로부터 우리에게 오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독생자, 홀로 나신 아들, 단 하나뿐인 그 분이 아버지로부터 우리에게,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서 오셨습니다. 그 분 자신이 그 길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아버지께 돌아가시면서, 우리를 위한 길도 되어주십니다. 오직 이 길로만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갈 수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아버지께 갈 수는 결코 없습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자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이 어떻게 창조자에게 스스로 갈 수 있겠습니까? 오직 그 분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데리고 가셔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만이 참된 길,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 되십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가장 중심적인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사랑하시는 외아들을 보내주셨다. 그 분이 길이 되셔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갈 수 있다. 세상 어느 종교에도, 도덕에도, 이런 소식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이 진리가 되십니다.

-- 성육신의 은혜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입니다. 우리는 받을 아무 자격이 없고, 댓가를 치를 수 없지만, 아무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가령 어떤 왕이 있는데, 궁전 밖에 거지가 있습니다. 왕이 그 거지를 초대해서 씻기고, 좋은 옷을 입히고 좋은 음식으로 대접한다고 해 봅시다. 그 거지에게 그것은 얼마나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선물입니까? 거지는 아무 자격이 없고 가진 것도 없지만, 왕이 보기에는 너무나 낮은 자리에 있지만 왕이 그렇게 선물을 준 것입니다. 은혜란 그렇게, 아무 보잘 것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그 분의 가장 소중한 외아들을 주신 놀라운 소식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또한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입니다. Grace and mercy. 하나님의 자비는 그분의 은혜와 비슷한 말입니다. 그런데 은혜는 아무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의미가 있고, 자비는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이 진심으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와 함께 마음아파하신다는 말입니다. 거지가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습니까? 얼마나 자기 자신을 보며 힘들었겠습니까? 그런데 왕이 초대해서 대접할 뿐 아니라, 그 손을 잡고 진심으로 그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 아픔을 함께 아파해 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런데 그것은 단지 지식적으로 아실 뿐 아니라, 우리의 아픔과 고난도 다 아신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아픔을 아신다는 것은, 단지 지식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 아픔을 느끼실만큼 아신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자비, 긍휼을 가리키는 단어는 창자와 상관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감정을 몸에 비유할 때가 많은데, 창자는 그만큼 애가 끊어질 만큼 마음이 아프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보시고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아픔과 괴로움을, 그 분의 뱃속으로 느끼실만큼 아시고 함께 아파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롭고 자비로우십니다. 사람은 은혜를 베풀어도 공감은 못할 수 있습니다. 왕이 거지를 초대하지만, 함께 있지 않고 가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은혜와 자비는 늘 함께입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우리에게 아들을 주시는 이 은혜가 또한 진리이기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요한 1:14은 말씀합니다.

-- 생명이신 예수

이렇게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또한 우리의 생명이십니다. 우리 모두는 육신의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생명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잠시 맡겨주신 것입니다. 내 것이 아닙니다. 사무엘상 25:29에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싸개 안에 싸여 있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를 소중히 보호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호흡하고 살아갑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귀한 생명을 주님은 우리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그리고 지금도 보호하고 돌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로 이 귀한 생명을 학대할 때가 있습니다. 너는 아무 것도 아니라며 멸시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 세상의 눈으로 판단하면서, 나 자신의 생명을 괴롭히는 것은, 결국 그 생명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을 박해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매우 슬프게 하는 일입니다. 육신의 생명은 언젠가는 약해지고 끝날 것입니다. 꺾인 꽃은 지금 살아 있어도 죽은 것과 같습니다. 횟집의 물고기는 어항에서 헤엄쳐도 죽은 목숩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생명도 원래 그렇습니다.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예수님의 생명이 없으면 우리는 살아 있어도 꺾인 꽃처럼, 횟집의 물고기처럼 죽은 목숨들입니다. 히브리서 2:15에는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한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딤전 6:8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 알라고 하시는데, 사람들은 당장 먹고 입을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년, 10년 뒤, 노후, 자녀들 걱정까지 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많이 가져도 만족하지 않고 늘 불안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생명 자체이시고,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그래서 그 분이 영원히 사실 뿐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우리가 그 분에게 붙어 있으면 참된 생명을 누립니다. 예수님은 그 자신의 생명,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십니다. 요한일서 5: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생명수 샘물을 아낌없이 주시는 예수님 떄문에 우리는 참된 생명, 창조자의 생명, 영원한 생명을 받습니다. 마태복음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이 세상이 우리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최악의 경우에도, 우리의 육신의 생명을 해롭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참된 생명, 예수님과 붙어 있는 생명은 건들지 못합니다.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님 안에서 이러한 담대함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 진리이신 예수

예수님은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가는 길이시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이 사실이 진리이고, 예수님은 그 진리 자신이십니다. 이 진리는 무슨 자연법칙이나 우주의 원리 같은 것이 아닙니다. 수학의 정리나 법전의 조문처럼 고정된 명제가 아닙니다. 바로 예수님의 인격, 우리와 눈과 눈을 마주보고 우리 이름을 부르시며 사랑하시는 인격적인 진리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서 천국에 간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구원의 확신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구원의 보장이 아닙니다. Guarantee 가 아니라 assurance 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자녀로 삼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혹시 인간 부모는 자녀와 헤어질 수 있어도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저는 이 약속을 믿습니다. 저는 혹시 내가 앞으로 잘못해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이 취소되지 않을까? 혹시 0.1%라도 내가 구원을 잃어버리고 천국에 못 가지 않을까? 걱정을 결코 하지 않습니다. 천국행 티킷을 소유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약속을 어기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천지가 없어질지라도 그 분의 말씀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그 약속의 말씀은 이 세상 어떤 것보다 강하고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 약속의 말씀이, 그것을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에게 진리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놀라운 사랑과 은혜로 선택하시고 불러주신 주님의 자녀들이 여기에 있습니다. 저희의 모든 삶이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 저희에게 은총을 주시고 능력을 주옵소서.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도록 도와주소서. 우리 주 예수님을 통해 삶이 새롭게 되고 변화받고, 이 놀라운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나타내며 사는 복된 삶들이 되도록 늘 저희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저희 모든 가족과 학교 일터와 주위 사람들이 저희를 통해 주님의 은혜를 또한 받아서 누릴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감사하옵고, 저희의 생명과 자랑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