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게시판

이사야 6장에서 우리는 이사야가 하나님의 특별한 비전을 보고 선택을 받아서 예언자로 세우심을 받는 아주 특별한 말씀을 읽었습니다. 오늘 7장에서는 이사야가 실전에 투입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아하스 왕에게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때가 BC 8세기입니다. BC 700년대. 역사 시간에 연대 외는 것처럼 성경이 암기 과목은 아니지만, BC 8세기는 특별하기 때문에 기억해 두시면 구약 성경 읽을 때 도움이 되겠습니다. BC 8세기에 있었던 중요한 사건이 있는데 732년이거든요.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을 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원래는 한 나라였지만 분열이 되지요. 그래서 남왕국은 유다, 북왕국은 이스라엘, 그렇게 갈라져서 지내다가 결국 그 형제의 나라인 북왕국이 멸망을 하게 되는 거예요. 그게 BC 8세기입니다. 그러니 참 위기 상황이고 백성들에게도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한 어두운 때에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평소에 평안할 때도 좋지만 특별히 삶의 위기가 닥치고 혼란스럽고 이제 어찌 하면 좋은가 하고 우리가 당황하는 그런 때에 하나님은 말씀을 전해 주십니다. 그래서 이 BC 8세기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지자들을 보내 주시는데요. 네 명이거든요. 이사야가 있고 호세아, 아모스, 미가입니다. 외워두시면 좋습니다. 이사야는 대선지서이고 그 다음에 호세아, 아모스, 미가, 이분들이 바로이 시대를 배경으로 예언을 하시게 되는데 호세아와 아모스는 북왕국입니다. 바로 멸망을 앞둔 그 지역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분들인데 호세아가 그렇고 아모스는 남왕국 사람인데도 북왕국으로 가서 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이사야와 미가는 남왕국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말씀을 전하는 분들입니다.
이사야가 오늘 본문에서 아하스 왕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할 텐데 아하스라는 사람은 구약 성경에서 별로 평가가 좋지 않습니다. 이 분이 도덕적으로나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었다기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지요. 하나님을 굳게 믿고 마음이 담대하여서 백성들을 잘 이끌어야 하는 리더인 왕인데 그렇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뭐라고 하면 마음이 왔다 갔다 하고 어떻게 하면 내가 좀 강한 편에 붙어 볼까 그런 궁리를 하는 사람입니다. 인간적으로 그럴 수 있지요. 그러나 구약 성경에서 다윗의 자손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받은 왕이 하나님을 믿고 주님의 뜻대로 행하는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지금 구약 성경에서 읽으면 왕이 흔들리면 백성들도 같이 흔들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아하스 왕은 특별히 큰 위기가 닥쳤을 때 전혀 리더로서의 자리를 보여주지 못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유다 남왕국에 큰 일이 벌어진 것이죠.
1절의 말씀에 보시면 유다의 아하스 왕 때 아람의 르신 왕 그리고 이스라엘의 배가 왕이 연합을 해서 쳐내려오게 됩니다. 이스라엘과 아람. 그래서 이 전쟁을 Syro-Ephraim war 그렇게 부릅니다. 아람-이스라엘의 연합군이 쳐내려온 전쟁이다. 사실 두 나라 다 친척 관계인 가까운 나라이거든요. 이스라엘은 형제의 나라고도 할 수 있고 아람도 친척 민족입니다. 옛날에 이삭과 야곱의 부인들이 그쪽에서 왔거든요. 그러니까 굉장히 가까운 친척 민족인데 그 북쪽의 이스라엘과 아람이 웬일로 연합을 해서 같이 쳐내려 오는 거예요. 거리상으로만 따지면 예루살렘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와 아람의 수도인 다마스커스를 거리상으로만 생각하면 DC에서 볼 때 저기 필라델피아와 뉴욕시 정도가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그 쪽에서 연합해서 내려오는 형상을 상상하시면 조금 실감이 갈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 두 나라, 아람과 이스라엘이 왜 연합해서 유다에 쳐들어오게 되었는가? 사실은 더 북쪽에 더 골치 아픈 큰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그게 뭐냐면 아시리아 제국의 팽창입니다. 앗수르 제국은 당시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재패하게 되는 일련의 제국들 가운데 첫 번째입니다. 앗수르는 고대에도 악명 높은 잔인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리고 전쟁하는 기계처럼 가는 곳마다 격파하고 나아가면서 자기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그런 나라였어요. 그러니 작고 약한 나라들은 얼마나 두려움에 떠는지 모릅니다. 자비와 용서가 없이 다 격파하고 다 파괴하고 죽이고 그런 무서운 민족이 큰 힘을 가지고 지금 밀고 내려오는 형상이거든요. 그러니까 바로 거기에 접해 있는 아람과 이스라엘은 동맹을 맺고, 유다 아하스 왕에게도 우리 편에 붙어라 하는 이런 상황인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의 아하스 왕은 고만고만한 나라이 우리랑 같은 편 하자 그러니까 난 싫어 그렇게 된 거예요. 그래서 유다 왕의 입장에서는 작은 나라들의 편 드는게 아니라 나는 차라리 저 큰 나라 앗수르 편에 붙을 거야 이러는 상황입니다. 차라리 저 큰 형님한테 한편이 되어서 같이 있는게 낫지 괜히 거기에 저항한다고 작은 나라 편에 붙었다가 같이 깨지기 싫어. 그런 느낌인 거지요. 그런 사정이 있어서 유다는 그 두 왕국들의 요구를 거절하는 것이죠. 그러자 아람과 이스라엘 두 나라는 그래? 우리 말 안 들어? 그럼 쳐들어와서 아하스 왕을 몰아내고 다른 왕을 세워서 동맹을 맺고 앗수르에게 저항해 보려고 하는 형국입니다.
그런 이유로 해서 아람 이스라엘이 내려오고 있는데 2절의 말씀을 보시면 그 이야기를 듣고 왕의 마음과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았습니다. 큰 바람이 불면 숲에 나무들이 왔다 갔다 하잖아요. 그랬다는 것입니다. 왕의 마음이 두 왕국 아람과 이스라엘이 연합해서 쳐내려 온다고 하니까 바람 앞에 나무처럼 흔들흔들하는 것이고 또 왕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벌벌 떨고 있으니까 백성들은 더 하겠지요. 다 함께 말도 못 할 딱한 처지가 되어서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위기가 있을 수 있지요. 아무리 평소에 대비를 하고 또 성실하게 살아서 웬만한 어려움들은 우리들이 극복하면 살지만 인생이라는게 참 기가 막혀서 때로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위기가 닥치기도 하고 뜻밖의 일이 벌어져서 당황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놀라거나 당황하고 바람이 흔들릴 수 있죠. 그러나 잠시 그렇게 흔들리는 마음도 우리들이 다 잡고 정신 차리고, 내가 이를 어떻게 해결할까? 문제 해결 능력이란 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게 참 중요하고 그 사람이 참 어떤 사람인가? 마음이 굳은가 아니면 흔들흔들하는 사람인가는 이런 어려움이 닥칠 때 보이는 것이죠. 신앙, 믿음의 힘이 이때 위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아하스 왕과 백성들은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위기가 닥쳤는데 어쩔 줄 몰라서 발버둥만 치고 왔다 갔다 하고 있습니다.
3절 말씀 그때 여호와께서 이사야를 부르시죠. 그래서 아하스 왕과 대면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면전에 두고 하나님 말씀을 전하라고 명령을 하시지요. 그런데 특별한 일은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네 아들과 함께 가라고 하셨습니다. 아들이 이때는 어린 소년이었고 이름이 스알 야숩입니다. 특별한 이름이지요. 영어 식으로 말하면 쉬어 제이셥 그렇게 읽습니다. 제섭이. 여러분 주위에 제섭이라는 이름이 있으면 성경에 나오는 이름이라고 말해주면 되겠습니다. 이 스알 야숩 이름의 뜻은 남은 자가 돌아온다, Remnants will return. 이름이 특별하죠. 그리고 예언적인 이름인 것이죠. 사실 당사자 아이의 입장에서는 자기 이름을 좋아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유치원에 가면 선생님이 출석 부르잖아요. 사무엘, 한나,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 그런 거예요. 아이들이 이 아이를 보고 이름 가지고 뭐라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분명히 하나님께서 지어 주신 이름이고 예언적인 뜻을 갖고 있는 특별한 이름, 남은 자가 돌아오게 됩니다. Remnants will return 사실은 번역할 때 좀 까다로움이 있는데 return이라는 단어가 돌아간다도 되고 돌아온다도 되거든요. 두 가지 의미가 다 있어요. 그런데 우리말로는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 한 가지로만 번역되니까 좀 애매합니다. 남은 자가 귀환하리라 그럴 수 있기는 한데 너무 재미가 없죠. 남은 자가 돌아간다, 돌아온다. 이 뜻은 첫 번째는 지금 유다를 향해서 쳐들어오는 두 왕국들, 이스라엘과 아람의 연합국, 또 궁극적으로는 더 북쪽에서 밀고 내려오는 더 큰 문제, 감당할 수 없는 큰 문제인 앗수르가 내려오는 거니까 큰 문제란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밀려오는 군대들을 다 멸하시고 구원해 주실 거예요. 그래서 침입해 오는 군대가 수는 비록 많고 강하지만,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문제이지만, 하나님께서 그 모든 군대를 다 멸망시키시고 유다를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거의 다 멸망하고 몇몇 사람만 남아서 돌아갈 거다. 남은 자가 돌아가리라. 그 뜻입니다. 그러니 그런 뜻으로 이 스알 야숩이라는 이름의 예언은 하나님의 심판이 되고 있어요. 심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의 군사력과 세상적인 권세와 힘만 믿고 이웃 나라를 괴롭히던 앗수르의 세력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시고 하나님이 정의로 온 세상에 주권을 행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무시하지요. 자기의 힘이 세면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양 그랬던 것이 이 당시의 역사고 오늘날까지도 그러합니다. 앗수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의 힘만 믿고 온 세상을 재패하고 돌아다닐 때 하나님이 심판하시면 그 군대는 다 무너지고 겨우 살아남은 몇몇 사람이 자기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다. 남은 자가 돌아간다, 그 뜻입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깊은 뜻을 가진 이름이죠.
이 소년의 이름 스알 야숩의 두 번째 뜻은 남은 자가 돌아온다. 이 예언은 이때로부터 150년 뒤입니다. 결국 유다 나라는 멸망할 거거든요. 그 때는 바벨론이 쳐들어와서 멸망을 할 것인데 많이 죽고 파괴되고 또 포로로 끌려가서 첫 세대는 다 돌아가시고 그다음 세대까지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할 텐데 그때도 남은 자들은 돌아온다. 이번에는 주님의 백성의 남은 자들, 끝까지 신앙을 지킬 믿음의 사람들, 남은 자들은 고향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남은 자가 돌아온다. 이 주제는 이사야서에서 굉장히 중요하고 반복해서 나올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계속 예언하실 때 비록 한때는 고난이 있을 것이나, 백성이 그런 고난이 있을지라도 낙담하지 말아라, 남은 자는 돌아올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반드시 베풀어 주신다는 메시지입니다. 아까 적들의 남은 자가 돌아간다, 이것은 심판의 예언이 될 것이고 또 주의 백성에 남은 자가 돌아온다, 이것은 구원의 예언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과 구원,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그 중요한 두 줄기가 이 스알 야숩이라는 이름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언이 참 특별하고 신비롭습니다. 굉장히 의미가 깊고 다층적인 면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한 말씀도 그때에는 어떤 의미고 나중에는 상반되는 여러 의미가 복합적으로 되는 예언의 말씀이 많아요. 그러니 참 재미도 있고 깊죠. 그러니 하나님 말씀 읽으면서 우리가 주님의 뜻을 잘 이해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사야는 다름 아니라 자기 사랑하는 아들에게 이름 지어 줄 때에도 그냥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주님의 예언의 말씀을 담은 이름으로 지었습니다. 이 아들 스알야숩이라는 특별한 이름을 가진 아들과 같이 가라.
그래서 예언자와 아들이 함께 나아가서 아하스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의 내용은 명백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흔들리지 말아라, 떨지 말아라. 지금 북쪽에서 내려오는 두 왕이 큰 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굉장히 위협적이죠. 그 왕들이 연합돼서 유다를 무너뜨리고 왕을 몰아내고 우리 마음대로 할 거야 큰 소리를 치고 있는데 두려워하지 말아라. 혹 눈에
보이는 저들의 그 군사력으로 그럼 흔들리지 말아라. 하나님이 그들을 타다남은 장작, 불이 꺼지고 나면 연기만 폴폴 나는 나무 장작에 비교하십니다. 연기는 날 수 있죠. 그렇지만 아무 힘 없는 그런 장작에다가 그 왕들을 비유를 하십니다.
7절의 말씀 주 여호와의 말씀이 그 일을 서지 못하며 이루지 못하리라. 하나님이 작정하셨어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은 하늘의 별들과 하늘 군대와 천사를 다 뜻대로 부리시는 분입니다. 그분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실 때에 작정을 하셨습니다. 아람이나 에브라임이나 그 왕들은 뭐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작정하셨으면 반드시 그 뜻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것은 서지 못하며 이루어지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막으시면 절대로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우리들의 삶 가운데에도 계획하고 행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대로 이루어지고 주님께서 막으시면 결코 됩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인정하면서 하나님께 맡겨 드려야 하지요.
9절에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오늘의 주제 말씀, 너희가 믿지 않으면 서지 못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지금 아하스 왕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이에요. 믿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마음 컨트롤도 아니고 확신을 가져보자 이런 것도 아니고, 인격적인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고 신뢰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북쪽의 왕들이 아무리 뭐라 그래도 반드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막으시고 구원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셨잖아요. 그러면 우리들은 어떻게 해요? 그 말씀을 믿어야 하잖아요. 그것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죠. 말씀이 없으면, 아예 성경 말씀을 모르고 예수님을 모르면 삶의 위기가 닥칠 때 놀라고 당황하고 그럴 수 있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삶 가운데 어떤 괴로움이 닥칠 때에 말씀을 붙들고 주님의 약속의 말씀, 구원의 말씀을 붙들고 나아가야 하죠. 그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저도 그런 개인적인 경험이 있습니다. 대학원 공부를 하러 왔는데 수학 공부보다는 성경 공부를 더 많이 하게 됐습니다. 계획하진 않은데 그렇게 됐어요. 그러다 보니까 원래 계획에서 다른 길로 가게 된 거죠. 당연히 하나님이 인도하심이고 저는 그것이 좋았습니다. 그렇지만 학생으로서는 원래 계획에서 틀어진 것이죠. 그런데 두렵지는 않았습니다. 조금 혼란은 있었지요. 그렇지만 오래 가지 않았죠. 원래는 제가 생각했던 바운더리 안에서만 돌았는데,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입니까 바운더리가 없어요. 나의 바운더리가 훨씬 확장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예전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길을 가는데 믿음이 없을 때 봤다면 어떻게 계획도 할 수 없는 그런 길을 가나 했겠죠.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평을 넓혀 주시면 전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길로 가면서 고난이 고난으로 안 느껴집니다. 믿음이 없으면 굉장히 괴로움일 것입니다.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가는지 모르니까. 그러나 내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이해되지 않아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인도하시니 두렵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면 굳게 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녀인 우리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게 그겁니다. 우리에게 말씀을 풍성히 주셨습니다. 오늘 이사야 7장도 대표적이고 그 외에도 주시는 말씀이 정말 많지요. 믿음의 말씀, 우리들에게 신뢰와 평강과 승리를 약속하시는 말씀이 많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두려워 말라, 하나님 아버지를 믿어라. 하나님께서 선하게 모든 것을 주시고 인도하신다, 예수님의 선한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졌으니 우리들은 그걸 믿는 것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면 넘어지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믿지 않으면 서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믿으면 하나님 앞에 굳게 설 수 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는 아무리 큰 환난이나 괴로움이나 혼란스러운 상황이 있을지라도 주님의 말씀을 믿으면 주님을 신뢰하면 우리들은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 말씀이 그런데 헬라어로 번역되면서 뜻이 확장되었습니다. 영어로 말하면 선다, 스탠드가 언더스탠드, 이해한다는 뜻으로 확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믿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한다. 참 귀한 진리가 거기에 있거든요. 하나님을 우리가 이해하기를 원합니다. 제 소원도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더 알고 싶어서 책도 읽고 연구도 하고 여러 사색도 하고 하나님을 더 알고 싶습니다. 우리가 작은 머리로 다 이해할 수 없지만 그분의 그 놀라우심, 그분의 신성과 영광과 능력과 지혜와, 특별히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그분의 놀라우신 사랑과 구원과, 또 그분과 함께 누릴 영원한 생명과 놀라운 영광과 하늘의 찬양과 천사들의 모임과, 우리보다 먼저 가신 믿음의 선조들 그분들과의 기쁨의 만남, 이 모든 것이 너무너무 궁금합니다. 결국은 다 알게 되겠지요. 주님께서 다 보여 주실 것입니다. 주님을 이해하고 싶고 무엇보다 제 삶에서 주님께서 어떻게 하시는지를 저는 알고 싶습니다. 다 모르겠어요. 마지막까지. 그러나 몰라도 그저 한 발짝 한 발짝 가는 것이고 또 주님께서는 다 안 보여 주시고 주님 따라 가면 더 보여 주시는 그런게 있습니다. 우리 삶 가운데 하나님을 더 이해하고 싶고 내 삶 가운데서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그 주님의 뜻을 이해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믿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들이 믿으면, 하나님을 신뢰하면 그때부터 make sense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삶 가운데 내가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 벌어진다든가, 나는 이렇게 뜻을 정하고 노력했지만 뭔가가 다르게 이루어진다든가, 수많은 일들, 기막힌 일들이 많이 있지요. 그때 우리들이 잠깐 당황할지라도 주님을 믿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그분께서 나에게 그분의 뜻 안에서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으면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사랑, 나에게만 주시는 그 특별한 인격적인 사랑을 우리들이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지요.
오늘 아하스에게 주신 이사야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이 그 교훈을 얻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선하신 말씀을 믿으면 은혜로 설 수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무너지지 않습니다. 또한 은혜로 설 뿐 아니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시는가? 나의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향해서 주님께서 일하시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고 그분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귀한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 구원의 말씀을 통해서 다시 새롭게 되고, 주님을 믿음 가운데 굳게 서고 주님의 사랑을 더 이해해 가는 우리 모든 주의 자녀들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이사야 6장의 말씀은 이사야의 소명장이라고 불립니다. 소명은 부르심이지요. 그 부르심으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주님으로부터 할 일을 받았습니다. 이사야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1절에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라고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웃시야왕 이때에는 유다 나라가 굉장히 잘 살 때입니다. 왕 자신이 농사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농사는 그 당시에 주요 산업이잖아요. 그러니까 왕이 그 나라가 잘 살고 또 기술과 국력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나라가 대체로 잘 살았습니다. 이사야 2장 7절의 말씀, 그 땅에는 땅에는 가득하고 보화가 무한하려고 그 땅에는 마필이 가득하고 병거가 무한하며. 나라가 잘 돌아가서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좋았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8절, 우상도 가득합니다. 그들이 자기 손을 짓고 자기 손가락으로 만든 것을 경배합니다. 나라가 아무리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국방력이 당해도, 그 모든 것이 우상을 섬기는 가운데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우상은 거짓 신이지요. 사람이 만들어낸 신. 그래서 사람이 자기의 손으로 여러 가지 신의 형상을 만듭니다. 자기 손으로 짓고 손가락으로 만들고 그것을 경배하는 거예요. 그런 신들을 굳이 섬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번영 또 풍요를 바라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에 참 하나님의 진리와 정의의 말씀 그리고 사랑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해야 되는데 그것이 그것이 아니라 나의 필요와 나의 욕망을 위해서 그렇게 기도하기 위해서 그런 신을 만든 것입니다. 그런 거짓 신과 참 하나님 우리 성경의 하나님과의 주된 차이가 무엇인가? 예레미야 10장 11절의 말씀. 천지를 짓지 아니한 상들은 땅 위에서이 하늘 앞에서 망하리라. 이것이 가장 큰 차이입니다. 천지를 짓지 않은 신들은 망하리라. 참된 신이라면 그 신은 전능하시고 창조주이십니다. 온 천지와 인간과 자연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만이 참 우리의 주님과 신이 되십니다. 그렇지 않은 다른 모든 신들은 망할 것입니다. 왕으로부터 백성들이 자기의 욕심을 위해서 그리고 내가 잘되는 것을 위해서 그 신에게 기도한다면 그것은 거짓된 기도이고 헛된 일입니다. 그것은 신을 내 마음대로 부리겠다는 뜻이거든요. 마치 자기 종처럼 부리겠다는 그런 마음이고 그것이 가장 큰 죄입니다. 우상숭배를 성경에서 지극히 금지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그래서는 결코 안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순종하고 따르겠다는 참된 신앙은 있어야 합니다. 웃시야왕 때에는 나라가 굉장히 잘 살았지만 그 이면에는 이런 큰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왕이 죽었습니다. 그 해에 이사야가 참 하나님을 뵙게 된 것입니다.
1절에 하나님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하나님의 보좌는 하늘이죠. 하늘은 나의 보좌요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저 하늘 위 보좌에 앉으셨고,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습니다. 아마도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사야가 기도하고 있는데 그 성전에까지 하나님의 옷자락이 온 하늘과 땅을 가득 채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굉장히 자세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얼굴이나 자세한 모습을 볼 수가 없습니다. 창조주의 영광과 능력은 우리 피조물이 감당할 수 없기에 그분의 보좌와 옷자락과 그런 것만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그분의 영광을 보여주십니다. 사실 이사야가 본 이 비전도 굉장히 자세한 편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직접 본 사람이 몇 명 없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자세한 비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 그분을 직접 뵐 수 없고 그분의 영광에 압도될 뿐입니다.
2절의 말씀 보시겠습니다.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스랍은 천사의 일종이고 특별히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천사들입니다. 여섯 날개가 있어서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고 있습니다. 왜 그랬는가? 아마도 하나님의 영광으로부터 자신을 가린다는 뜻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능력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저 하늘에 있는 태양도 똑바로 못 보는데 저 태양과 은하계와 온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의 능력은 그야말로 무한합니다. 우리가 도저히 볼 수 없고 그 능력에 노출되면 금방 재가 될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자신의 영광을 가리시지요. 스랍들도 하나님의 엄청난 영광과 능력 앞에서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자기의 얼굴을 가리고 있다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또 하나는 나의 부족함, 나의 연약함, 나의 비천함을 하나님 앞에 드러낼 수 없어서 얼굴을 가리기도 하겠지요.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세상에서 당당하게 사는 것은 필요하겠습니다. 좋은 의미로 높은 자의식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세상은 우리를 몰라주어도 우리들은 전혀 흔들리지 않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며 당당하게 그분을 믿고 의지하면서 긍정적으로 밝게 살아가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은 한없이 겸손해져요. 주님만이 높아지시기를 바라고 나는 주님 앞에 한없이 약하고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런 태도가 필요합니다. 세상에서는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서는 겸손한 그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주님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고 나의 부족함을 가린다는 뜻으로 얼굴을 날개로 가리었습니다. 또 두 날개로는 발을 가립니다. 천사들이 발로 세상을 다닐 일은 별로 없을 것 같고 날아다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을 가렸습니다. 성경에서 발이 나오는 중요한 대목은 모세가 하나님 뵐 때 하나님께서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내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십니다. 우리는 발로 내 맘대로 다닙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거룩한 곳에 있으므로 발을 벗고 하나님 앞에 겸손이 있어야 합니다. 내 맘대로 다니지 않고 주님 앞에 주님만을 바라보며 있겠다는 뜻이 되겠지요. 또 우리들의 발을 예수님께서 씻어 주시죠. 부끄럽고 간지럽고 세상에 먼지가 묻은 그런 발입니다. 웬만하면 안 내놓고 싶은 발. 그러나 이 발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아가서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만 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발을 가리었다는 말은 주님 내 마음대로 세상에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히 주님 앞에만 있고 주님의 뜻대로만 행하겠습니다 하는 뜻이 있겠습니다. 그래서 날개로 발을 가렸습니다. 또 두 날개로는 날고 있습니다.
3절에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이렇게 주 하나님을 지극히 영화롭게 찬송하고 있습니다. 천사들이 하나님의 찬양을 영광스럽게 장엄하게 화려하게 부르고 있는데 서로 불러 이르되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한 목소리로 하는 유니슨이 아니라 한쪽 천사들이 거룩하면 다른 쪽에서 거룩 이렇게 서로서로 화답하면서 협창으로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스랍들이 부르는 찬양 가운데 거룩 거룩 거룩 그 다음에 만군의 여호와라고 합니다. 만군의 일차적인 의미는 하늘에 수많은 별들, 그 많은 별들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그리고 하늘의 별들은 하늘의 군대가 되겠습니다. 하늘 군대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만군의 여호와이십니다. 주님께서 하늘 군대를 온 세상에 보내셔서 다스리시고 그분의 뜻을 이루십니다. 그 전능하신 주권자 하나님을 부르는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입니다.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사실 굉장히 놀랍습니다. 왜냐면 지금이 온 땅은 사실 죄가 가득하거든요. 이사야 1장의 말씀을 보면 이 때에 영적인 모습이 어땠는가가 나옵니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롭고 은금이 넘치고 그럴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얼마나 죄가 많은지 그 백성들의 상태를 얻어맞은 환자로 말씀하시거든요. 얼마나 두들겨 맞았던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투성이고 멍들었다고 하는 영적인 모습이고 당장 외과 수술이 필요한 상태입니다. 온 세상이 우상이 가득하여서 죄악으로 가득해서 주님 앞에 엄청나게 상처와 또 고난 가운데 있는 그런 백성들이 사는 땅입니다. 그 온 땅에도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합니다. 우리가 볼 때이 세상은 굉장히 잘못되어 있고 하나님을 떠나 있고 주님을 거스르는 불의와 죄악이 가득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이 세상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세상을 멀리하고 멸망하라고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이 온 땅 모든 곳을 주님께서는 돌보시며 주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게 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이 곳, 세상의 모든 곳, 심지어 온갖 죄악과 고난이 가득한 곳에도 하나님의 영광은 가득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릅니다. 어찌 이 세상에 하나님이 계시는가 그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은 지금도 온 세상을 가득 채우시고 주관하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하나님의 영광과 사랑을 온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도록 저와 여러분을 주님의 자녀로 불러 주셨습니다.
4절에 이와 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합니다. 성전에서 천사들의 목소리가 단순히 커서 그랬겠습니까? 찬양의 능력이죠. 그 말씀, 거룩하신 하나님, 온 땅의 충만한 영광을 노래하는 찬양의 능력이 어찌나 큰지 심지어 성전이 지금 흔들흔들하고 온 성전의 연기가 충만합니다. 찬양에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목소리는 작을지 몰라도, 노래를 못 할지 몰라도 찬양의 말씀의 능력이 있기 때문에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기도할 때 찬양할 때 주님께서 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임재하시고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을 더 잘 알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찬양 가운데서 우리가 주님께 영광을 올리고 받는 은혜가 너무나 많습니다. 이 찬양의 능력을 우리들이 꼭 체험해야 하고 날마다 이 능력 가운데 거해야 하겠습니다. 천사들의 찬양 가운데 온 성전이 영광과 능력으로 흔들릴만큼 놀라운 능력의 찬양을 듣고 있습니다.
5절의 말씀 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굉장히 고상한 말투로 되어 있지만 실감나게 말해 보면 어 큰일 났어 나 죽었어 이 말이 되겠습니다. 망하게 되었도다. 나 죽었네. 이 말입니다. 만군의 여호와 앞에서 자기가 있다는 것을 알 때에 나 죽었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평생을 예배를 드렸을 거거든요. 이사야는 늘 기도하고 예배하고 그래서 이런 자리가 굉장히 익숙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하나님을 겪고 나니까 아 나 죽었어 큰일 났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 영광과 능력에 압도되는 것이지요. 우리도 이럴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예수님 얼굴을 뵈면 오래 알던 사람 만난 것처럼 그럴까요? 굉장히 오래된 친구 만나듯이 그렇게 하이파이브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분의 영광과 사랑의 모습과 얼굴을 보면서 우리가 깜짝 놀라지 않겠어요? 그래서 예수님 정말 내가 늘 생각하고 기도하고 예수님에 대해서 말했지만 정말 예수님 뵈니까 너무나 놀랍고 기쁘고 좋습니다 하면서 감격할 거예요. 그날을 우리들이 날마다 사모하고 기다리는 것이죠. 그리고 그 놀라운 예수님 만나는 그 날을 이 땅에 앞당겨서 사는 것이죠. 우리가 실제로 예수님 뵙는 그 날에는 우리도 이렇게 깜짝 놀라서 너무 놀라서 좋아서 죽을 것처럼 예수님 앞에서 이런 고백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이사야도 하나님을 직접 뵈었을 때 나 정말 죽었구나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그가 고백하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입술이 부정하다 그랬어요. 사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가 많고 죄를 우리들의 눈으로도 또 손발로도 짓겠지만은 특별히 입술을 말합니다. 죄란 무엇인가?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아니라 내 뜻대로 하는 것이거든요. 주님께서 뜻하시는 대로 행하는 것이 우리들인데 그렇게 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그래서 나에게 좋은 대로 나의 눈과 손길과 발걸음이 행하고 그런 마음으로 말을 한다는 거죠. 입술의 부정함은 우리가 하는 말을 가리킵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 즉각적으로 튀어나는 것이 말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들이 말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주님의 사랑을 전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합니다. 그래서 입술이 부정하고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군의 여호와신 왕을 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입술의 부정함과 부끄러움으로 인해서 온전히 감격하지 못하고 어쩔 줄 몰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구원의 손길이 임하지요.
6절입니다. 그때 그 스랍 중에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숯을 하나 집어 가지고 날아옵니다. 얼마나 뜨겁겠습니까? 그래서 7절에 보시면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뜨겁지는 않았겠죠. 그렇지만 뜨겁게 단 숯불을 하나 젓가락으로 들고 와 가지고 이사야의 입술에 대어주고 보라 이것이 내 입에 닿았으니 내 악이 제하여졌고 내 죄가 사하여졌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온전히 하나님의 것이 되었고 하나님의 일을 할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단순히 입술만 그런 것이 아니겠죠. 그것은 그 온 몸을 대표하는 그런 일이고 사실 온 몸이 정결해지는 것이죠. 눈과 귀와 가슴과 손과 발이 모든 것이 이제 정결해진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에게는 이 재단의 숯보다 더 능력 있는 예수 십자가의 보혈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흘리신 피는, 그 사랑은 모든 사람을 완전히 정결하게 하시기에 충분하고 넘쳐납니다. 우리들이 예수님 안에서 온전히 거하면 우리들에게도 이와 같이 정결케 되는 은혜가 임합니다. 숯보다도 더욱 능력 있는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나의 입이 정해져서 더 이상은 내 맘대로 말하거나 불평하거나 시기하거나 이런 말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말, 주위 사람들에게 도와주고 세워주고 사랑을 전하는 말을 할 수 있는 정결한 입술이 됩니다. 나의 눈길이 가는 것, 나의 귀로 듣는 것, 나의 몸의 모든 기관이 하나님의 것이 됩니다. 그래서 마치 하나님께서 나의 눈을 통해서 세상을 보시고, 나의 몸이 하나님의 성령의 임재하시는 성전이 되어서 주님께서 내 몸을 통해서 세상에 임하시고 일하시는 놀라운 은혜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들의 헌신과 정성과 삶을 주님께 드리고 뜨겁게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께서 그런 놀라운 은혜도 주십니다. 그리 할 때 우리들의 믿음이 자라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놀라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8절의 말씀을 보시면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해서 갈까? 주님께서 온 세상을 살피시면서 보내실 사람을 찾으십니다. 지금 이때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이사야라는 청년을 택하신 것이지요. 이때 그의 나이가 젊습니다. 주님께서 사람들을 인생의 여러 지점에서 불러 주십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살고 주님과 함께 하는 인생입니다. 참 복되지요. 어떤 사람은 늦게 여러 체험 후에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인생 경험을 통해서 주님의 역사를 증거하는 간증이 그분들에게는 특별히 있지요. 저는 청년 때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지적으로 감성적으로 예민하고 활성화되어 있을 때 주님을 만난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좋은지. 그래서 주님께서 젊은 날을 사용해 주셨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곳에 있는 사명이 특별히 우리 메릴랜드 대학교 학생들 청년들을 섬기는 것이고 그분들께 하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청년 때 하나님을 만난다면 인생이 완전히 변화가 되고 새로운 목표로 달라지게 되겠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에게 하나님이 정말로 살아 계시고 우리 하나님이 이와 같은 분이시라는 것, 너무나 놀랍도록 영광스럽고 능력이 많으시고 모든 세상을 그분의 영광에 채우고 있다는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하나님을 떠나서 죄 가운데 있고 그러나 이 세상을 주님께서는 불쌍히 여기셔서 예수님을 보내어 주시고 우리를 자녀 삼으신다는 놀라운 사실을 학생들과 이 지역에 전하는 것이 우리들의 할 일입니다. 그리 할 때에 어 사람들의 삶이 변화되어서 주님을 영화롭게 할 것입니다.
이사야도 젊은 날에 하나님을 만나뵙고 죄가 사하여졌으므로 이제는 자신을 헌신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까? 하실 때에 이와 같이 대답을 하게 되겠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주님께서 자신을 받아 주실 것을 확신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까지 모든 비전을 보여 주신 것이 이사야를 사용하시겠다는 뜻일 거잖아요. 이사야도 그것을 완전히 알고 있고, 비록 준비가 안 되었을지 모르지만 아직까지 주님 앞에 온전한 훈련이 부족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 먼저 주님께서 불러 주셨기 때문에 이미 모든 것은 충분합니다 내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자원하게 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이사야를 불러 쓰셔서 놀라운 주님의 말씀의 사역을 삶을 통해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이 귀한 고백이 우리들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은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확실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받았습니다. 이사야 6장의 말씀은 우리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은 불러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도 할 일을 맡겨 주십니다. 우리들의 순종이 필요합니다. 우리들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주님 나는 안 돼요 그것이 아니라 나는 부족하지만 주님께서 나를 빚어 주실 것이니 주님 도와주시니 나는 할 수 있습니다 하는 믿음이 있으면 됩니다. 그리고 나의 모든 부족함과 나의 죄스러운 모습이 있을지라도 주님께서 다 용서해 주시고 죄를 사해 주신다는 믿음이 있으며 충분합니다. 이 시간에 우리들의 헌신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고대 그리스 문학 가운데에서 최고의 작품은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입니다. 일리아드는 유명한 트로이 전쟁을 배경으로 하는데 그리스군이 트로이를 침공하고 10년 동안 전쟁을 합니다. 그 10년 전쟁의 막바지에 있었던 일들이 일리아드에 기록이 되어 있는데 그리스 진영의 최고의 전사는 아킬레스입니다. 얼마나 빠른지 별명이 발빠른 아킬레스라고 합니다. 트로이 진영의 최고의 전사는 트로이의 왕자인 헥터입니다. 그런데 양 진영의 최고의 전사들이 대결을 하게 됩니다. 헥터도 훌륭한 전사이지만 아킬레스에게는 당할 수가 없었고 결국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핵터의 시신이 그리스 진영으로 끌려가요. 트로이의 왕 프리암은 굉장히 존경받고 품위 있는 훌륭한 왕이었는데 아들을 그렇게 잃게 되었습니다. 프리암 왕이 밤에 그리스 진영으로 홀로 찾아갑니다. 굉장히 위험한 일이죠. 적진에 아무 무장도 군사도 없이 들어가서 아킬레스를 만납니다. 자기 아들을 죽이는 원수인 아킬레스에게 무릎을 꿇고 손에 입맞춤을 하면서 내 아들의 시신을 돌려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 왕의 용감함과 고결함에 아킬레스도 감동이 되어서 극진히 대접하고 두 사람이 그냥 앉아서 같이 웁니다. 아킬레스, 최고의 전사 그리고 프리암, 세상의 부와 명예를 다 가진 왕, 두 사람이 어린아이 같이 우는 그 장면이 일라이드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 중의 하나인데 프리암 왕은 죽은 자기 아들을 생각하면서 울고 아킬레스는 그 왕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 아버지를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아킬레스는 자기가 곧 죽을 거라는 걸 알아요. 신탁이 있거든요. 두 사람 다 인생의 허무함, 인생의 덧없음 앞에서 우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최고로 성공한 사람들, 최고의 전사와 왕인데도 모든 인간에게 닥치는 숙명, 죽어야만 하는 인간의 존재를 슬퍼하면서 같이 울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이 인간의 이런 덧없는 존재를 묘사하는 단어가 바로 멸망할 존재라는 단어입니다. 18절의 말씀 보시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멸망한다는 단어는 다른 곳에 보면 허무하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허무함. 그 단어는 또 전도서 첫 부분에 헛되고 헛되며. 헛되다, 허무하다 하는 것은 인생에 대한 비관주의나 탄식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에 참된 목적이 뭐냐? 의미가 뭐냐? 없다는 거예요. 목적이 없고 방향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생의 단기적인 목표는 있습니다. 누구나 성공을 원하고 성공을 위해서 많이 노력을 하지요. 그것이 합당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성공을 단기적으로 이루어도 그런 성공을 끝까지 다 가져본 사람들, 아킬레스도 프리암 왕도 솔로몬도 다 해 봤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보고 내린 결론이 허무하다, 헛되다, 그리고 멸망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숙명이죠. 하나님께서 인생을 원래 그렇게 지으셨는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본리 본래 선하게 우리 사람들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가깝게 교제하고 사랑하면서 살도록 지으셨지요. 그래서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나면 하나님과 더불어 영생을 누리는 영화롭고 복된 존재로 창조해 주셨는데 지금 뭔가 잘못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서 내 뜻대로 살겠다고 한 이래로 인간 세상이 완전히 망가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멸망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인생과 세상에 대해서 내리는 진단은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멸망할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것이 십자가의 도입니다. 여기서 도는 로고스입니다. 십자가의 말씀, 십자가의 원리 그런 뜻인데 사도 바울이 지금 고린도 교회에 복음을 전하고 있지 않습니까? 고린도는 그리스 본토에 있는 유명한 항구 도시입니다. 무역을 많이 해서 굉장히 부유하죠. 수많은 물자와 사람과 돈과 문화와 이런 것들이 늘 오고 가는 북적북적하는 아주 잘되는 도시입니다. 그런데 그 세상적인 문화가 가득한 그 곳의 중심에 딱 들어가서 예수님을 전하는 바울이 말하는 첫 단어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예수님에 대해서 무엇을 말할 것인가? 십자가를 말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과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됨을 늘 강조합니다. 나는 예수님과 하나된다. 어디에서?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나같은 사람을 위해서 죽으셨는데 내가 그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는다고 합니다. 예수님과 내가 어떻게 같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 존귀하신 분과 내가 도저히 비교도 할 수 없는데,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되기 위해서 이 낮은 땅에 오시고 결국 우리와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그 예수님과 함께 나는 죽는다. 이것이 바울의 고백입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과 하나됨. 그러면 나는 예수님과 함께 또 살 것이라 그러거든요. 바울은 평생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고린도 성도들에게도 바울은 십자가가 제일 먼저 하고 싶은 말인 것이었죠. 십자가의 도. 그런데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멸망의 길로 가는 사람에게 이 십자가라는 것은 사실 말이 안 된다는 것이 미련한 것이요. 사실 상식적으로 어떻게 이것이 말이 되겠습니까? 십자가는 죽음과 형벌을 상징하고 거기에 달린 사람은 다 저주받은 끔찍한 고통과 수치 가운데 죽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일생의 절정인 30대 꽃다운 젊은 나이에 십자가에 죽은 분입니다. 그분이 나의 주님이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보통 사람에게는 말도 안 될 미련한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조롱거리가 될 일입니까? 그러나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을 통해서 나와 하나님의 관계가 회복된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떠나서 이 세상에서 멸망할 존재가 되고 그런 사람들이 다 모여서 온 세상이 하나님 앞에 멸망당하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 가장 놀라운 일입니다. 그것이 구원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고 우리가 그분의 자녀가 되는 이 관계는 온 우주가 없어져도 끊어지지 않습니다. 사람의 부모 자식 관계도 끊어지지 않는데, 그런데 간혹 그런 일도 있죠.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삼으시면 그 관계는 절대로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죠. 이 땅에서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과의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 되니 얼마나 놀랍고 영광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나님의 능력. 세상 사람들은 강한 것, 대단한 것을 찾고 그런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서 끔찍하다고 멀리하고 어떻게 저분이 나의 주님이 되겠는가 하지만, 구원받는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19절은 이사야의 말씀입니다. 이사야 29장에서, 하나님이 지혜 있는 자들과 총명한 자들, 성경을 잘 알고 세상적인 지식도 많아서 뭔가 인생의 선생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의 지혜와 총명을 폐하십니다. 왜냐면 사람이 아무리 궁리해도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 대다수가 지옥으로 멸망할 이런 인간의 조건을 도저히 치유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런 생각을 짜낼 수 없고 설사 이렇게 하면 인생이 좀 나아진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은 어리석어서 따르지도 않습니다. 결국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이 위에서 건져 주시지 않으면 구원받을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받는다는 이 말이 다른 곳에는 레스큐, 문자 그대로 구출한다는,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 준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멸망할 세상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가? 인간의 지혜와 총명으로는 되지 않고 하나님은 그것을 멸하시고 십자가를 주십니다. 20절에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 지식인, 학자들, 똑똑해서 변론과 말을 잘하는 사람들, 이 세상의 지혜를 하나님은 미련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똑똑하고 유식하다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낮추시고 도리어 세상에서 미련하다, 선하다, 멸시 받는다 하는 버림받는 사람들을 도리어 돌보아 주십니다.
21절. 세상은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헬라인들이 이것에 굉장히 능했습니다. 철학이라는 단어가 필로소피, 문자 그대로 지혜 사랑이죠. 그리스들이 얼마나 지혜를 사랑하고 자랑했는지 모른 거예요. 서양문명의 과학이나 철학이나 음악, 예술, 이런 것이 고대 그리스에서 기원하는 것이 많습니다. 그만큼 지혜를 사랑하고 자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게 지혜를 짜내도 하나님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박혀야 한다는 걸 생각하겠습니까? 우리들의 죄가 있다는 것 생각할 수는 있죠. 어떤 사람이 양심이나 도덕에 예민해서 나는 죄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러나 나의 죄가 너무나 중해서 이 죄의 해결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한다는 것을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한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지 않으면 도저히 알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또 십자가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라고 했습니다. 전도라는 말은 케리그마라는 단어인데 선포입니다. 선포한다는 말은 그냥 설득하거나 또는 근거를 들어서 증명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면 십자가의 복음은 뭔가 설명하고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과학적인 이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제자들이 나아가서 예수님 살아나셨습니다. 이게 선포거든요. 내가 봤어요. 이거예요. 아닐 걸? 헛된 거 본 거 아니야? 분명히 봤어요. 그런데 한두 명이 아니라 500명이 예수님이 살아나셨어요. 그분을 내가 눈으로 봤고 손으로 만졌고 같이 식사도 했다니까요. 나는 이걸 위해서 목숨도 걸 거예요. 이것이 예수 십자가의 복음이거든요. 그러니까 선포라는 것은 어떤 근거를 가지고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체험한 예수님의 사랑을 증언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선포를 들은 사람은 선택을 해야죠. 그것을 믿거나 안 믿거나. 이것이 일반적인 과학 이론이라면 듣고 아 이해되는구나. 동의 안 동의. 그렇게 되겠지만 전도, 선포라는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 그리고 그 십자가에 죽으신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이 기독교의 메시지를 듣고 믿거나 안 믿거나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으면 삶이 변화하는 것이죠. 그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복음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을 구원하기를 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절에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유대인은 표적을 원합니다. 표적이라는 것은 기적으로 많이 나타나고, 옛날 모세 때에 하나님께서 표적을 많이 주셨습니다. 대표적으로 홍해를 가르시고, 그건 확실한 기적이고 표적이잖아요.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표적. 유대인은 이 표적을 구합니다. 엘리야 때도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고, 사람들도 예수님께 표적을 보여 주세요.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뭐 보여 주세요. 그럽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표적을 보여 주신다고 해서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계시면 뭐 좀 보여 주시면, 뭔가 기적이 하늘에서 나타난다든가 그러면 믿을게요. 그렇게 말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성경의 말씀을 보면 저 옛날에 하나님이 그렇게 굉장히 많이 하셨어요. 모세 때도 엘리야 때도 수많은 표적을 보여 주셨는데 사람들이 어떻게 했느냐? 금방은 와 하죠. 그러나 하룻밤 지나고 나면 똑같다는 것입니다. 표적을 보고 와 한다는 그것 자체로는 사람의 마음이 변화되지가 않습니다. 그냥 대단한 경험 한번 하는 것이지. 그리고 1년 10년 지나고 나면 뭐겠습니까? 아 내가 옛날에 대단한 거 봤어. 그게 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합니다. 단지 표적을 보는 것만으로. 헬라인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에 지혜를 원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잘 사는 것과 연결이 될 겁니다. 그러니 헬라인들이 지혜를 찾는 입장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고 되도록 멀리할수록 좋은 것이 되는 것이지요. 유대인의 표적을 구하는 것. 헬라인의 지혜를 찾는 것.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23절,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유대인에게 거리끼는 것이다. 스칸달론, 스캔들이라는 말 자체가 걸려 넘어진다는 것이고 표적을 원하는 유대인들에게 그래서 뭔가 하나님의 대단한 능력, 홍해가 갈라지고 하나님이 능력으로 자기들을 이 세상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잘 살게 해 주시는 그런 능력을 원하는 유대인들에게 십자가는 걸려 넘어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저런 걸 믿어? 어떻게 저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야? 어떻게 하나님이 저런 걸 한다는 말입니까?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으시는 저주받은 죄수의 죽음을 당하시는 예수님. 그분은 절대 나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리끼는 것.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게 십자가입니다. 세상에 누가 아무리 사랑이 많고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고 싶어 한다 한들 그런 끔찍한 일을 당한다는 말입니까? 십자가의 고난을 자원할 사람이 세상에 누가 있겠습니까? 설사 십자가를 진다 한들 그것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이 된다는 거예요? 그 사람의 불행한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죠. 그러니 이방인 헬라인, 지혜를 찾는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미련한 것이고, 이 세상이 좋아하고 추구하는 것과 정반대입니다. 표적과 능력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는 가장 연약한 것이에요. 지혜를 좋아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가장 미련한 것입니다. 바보 같은 일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우리는 전한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가장 이 세상과 반대되는 일이지만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가장 약한 것이 세상보다 강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십자가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24절 보겠습니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이다. 부르심을 받은 저와 여러분. 하나님은 부르시고 그들을 거룩하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삼아 주십니다. 우리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세상에서는 가장 약해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상에 일어난 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헬라 문법에서 여기에서 어 바로절에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는이 동사가 있는데 그 뒤에 목적어가 계속 따라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거리끼는 것 이게 목적격이거든요.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이 분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인데 전합니다.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인데 전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이니 우리는 이 분을 전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냥 취미 활동이나 고상한 종교 활동이 아닙니다. 만약에 기독교가 그런 것이었더라면 저는 안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 사랑이 진짜라는 것을 믿게 되었기 때문에 저는 삶이 완전히 달라졌고 삶의 목표도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그분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그분이 부활하신 이 놀라운 소식이 진짜라면 우리의 삶을 거기에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드려도 아깝지 않습니다. 나의 삶에 다른 어떤 것보다 예수님이 나의 삶의 첫째가 되셔야 하고 중심이 되셔야 합니다. 사람들은 보면서 어리석다 미련하다 할 것입니다. 그 약한 예수님 미련한 예수님을 왜 믿냐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방법은 세상 사람들의 생각을 완전히 초월해서 우리에게 놀라움으로 다가오고 우리들을 기적적으로 구원하시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분을 믿고 붙듭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삼아 주셔서 우리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켜 주십니다.

여러분 타이타닉이라는 영화를 아시나요? 1997년에 나왔습니다. 저는 그때 뉴욕에 있었는데 학교 사람들이랑 같이 보러 갔다가 사람이 워낙 많아서 일행이 흩어져서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타이타닉이라는 영화에 보면 여자 주인공이 나오고 그녀의 약혼남이 나옵니다. 이 약혼남은 굉장히 돈도 많고 거만하고 다른 사람들 무시하는 아주 비호감 캐릭터입니다. 그런데 그 배가 침몰를 하게 되지요. 그런데 분명 보트가 모자라요. 그래서 다 탈 수가 없는데 이 약혼남이 배의 승무원에게 많은 돈을 건네면서 나를 구명 보트에 좀 태워 달라고 합니다. 그 때 이 승무원이 아주 경멸적인 눈으로 보는 그런 장면이 있습니다. 생사가 걸린 위기 상황에서도 돈으로 해결하려는 그 모습이 얼마나 속물스러워 보였을까요. 결국 그 약혼남은 어떤 어린아이를 태운다는 핑계를 대고 겨우 보트에 비집고 들어갑니다. 그래서 살아남아요. 그 사람이 나중에 어떻게 되었는가? 여자 주인공이 아주 간단하게 언급하고 지나가는데 1929년에 자살했다 그럽니다. 더 이상 설명을 하지 않아요. 설명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1929년은 미국의 대공황이 온 해입니다. 그러니 이 남자는 배가 침몰하는 그 상황에서도 기어이 살아남았던 생명력 강한 사람이었는데 자기의 경제가 무너지니까 그만 자살하고 만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 교훈이 있지요. 타이타닉 배가 침몰하는 것보다 경제 위기가 더 무섭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는 영적인 면에서도 많은 가르침을 주시지만 우리들의 실제 경제 문제, 먹고 사는 문제를 아주 중요하게 다룹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들은 매일매일 먹고 살아야 하고 우리들이 삶의 경제 문제를 매니지하는 것이 우리들의 신앙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이 실제로 먹고 사는 경제 문제에 대해서 많이 언급을 하셔요. 오늘 본문도 그중에 하나가 되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올무에 놓기 위해서 질문을 하는 것이지요. 가이사, 로마의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이 질문은 몰라서 묻는 질문이 아니죠. 함정입니다. 카이사에게 세금을 바쳐야 합니까? 여기에 예스를 해도 노라고 해도 함정에 빠집니다. 예스라고 하면 안 됩니다. 왜냐면 유대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이고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지금 로마의 황제가 지배하고 황제를 왕으로 섬기라고 하는 거거든요. 그러니 그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은 카이사를 왕으로 인정하는 것이니 하나님을 버리는 일이 됩니다. 그러니 그런 말을 한다면 당신이 어떻게 우리 민족의 지도자가 될 수 있겠느냐라고 공격을 할 수 있겠지요. 반대로 No라고, 카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하면 그것은 바로 반역죄가 될 것입니다. 황제에게 반대했다고 해서 당장 고발하고 처벌할 수 있겠지요. 이렇게 함정을 놓기 위해서 한 질문인데 예수님은 거기에 예스, 노 그렇게 대답하지 않으시고 동전을 하나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데나리온이라는 로마의 동전을 가져옵니다. 데나리온은 그 당시에 일꾼의 하루 품삯이라고 합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200불, 300불 그 정도 가치가 있겠지요. 그 동전은 유대인들이 일상적으로 늘 쓰는 동전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한 번은 예수님이 수많은 사람들과 들판에 있을 때이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다 먹이나 200 데나리온으로도 모자라겠다 이런 대화가 있습니다. 그것처럼 평소에 빵 사먹고 일상 생활을 하는데 늘 쓰는 로마의 동전이 데나리온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람들이 데나리온 동전을 가져오니까 질문하십니다. 이 동전에 있는 이 형상과이 글씨가 누구의 것이냐? 카이사의 것입니다 대답합니다. 동전에는 황제 카이사의 얼굴과 카이사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지요. 그것을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내용이 이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그저 세금내는 문제 가져왔는데 세금만이 아니라 지금 훨씬 큰 경제 문제가 여기에 다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질문한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괜히 세금 질문했다가 완전히 덤탱이로 예수님께 이런 과제를 떠안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것이 이것입니다. 너희들이 이미 로마의 황제의 형상이 있는 동전을 널리 쓰고 있지 않느냐? 그래서 유대가 이미 로마의 경제권에 다 편입이 되어 있고 그 로마 경제의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그 현실을 지적을 하시는 것입니다. 동전에 카이사의 형상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거를 쓰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십계명에서 형상을 만들지 말라 분명히 말씀하셨잖아요. 그런데 이것은 자기 민족도 아니고 지배하는 로마 이방 민족의 황제의 형상이 있는 동선이니까 원래는 만지면 안 돼요. 그러나 지금 유대인들은 이것을 일상적으로 매일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이게 왜 이렇게 되었는가? 예수님 오시기 한 150년 전에는 달랐습니다. 그때는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독립 왕조를 세운 적이 있습니다. 하스모니안이라고 하는 독립왕조를 세웠습니다. 그때는 유대 동전을 유통했죠. 그래서 유대 왕의 그림이 있는 자신들의 화폐를 썼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고 로마의 입장에서는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동전을 쓰면 안 됩니다. 그러면 세금을 걷을 수가 없잖아요. 유대 민족의 동전을 로마인들이 걷어서 뭐 하겠습니까? 세금 걷기 위해서라도 유대인들은 로마의 동전으로 바꿔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을 그러면 강제로 했느냐? 강제로 칼 들고 너희들 이제부터 유대 동전을 쓰면 안 돼. 로마의 데나리온을 써야 돼 하면서 칼 들고 감시하겠습니까? 그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둬도 경제라는 것은 자기가 알아서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유대의 밀농사하는 농부가 있다면 그 밀을 팔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다른 유대인들이 유대 동전을 가지고 사 먹겠죠. 그런데 로마인들은 어떻게 하냐면 이제 유다 동전을 가져오면 로마 동전으로 바꿔 줍니다. 환전을 해 줘요. 그런데 환전을 하면 매우 유리하게 그렇게 해 주는 거예요. 그러면 그 유대 동전을 가지고 로마 돈으로 바꾸면 이제 이집트의 밀을 살 수 있습니다. 이집트는 다 로마 땅이니까, 그런데 훨씬 많이 사는 거예요. 가난한 서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내가 유대 동전 가지고 유대 밀 사 먹는 거랑 이 돈을 로마 돈이랑 바꾸어서 이집트 밀 사 먹는 거랑 비교해 보면 이집트 밀 사 먹는게 훨씬 이득이라는 말이에요. 그러니 특히 가난한 사람들은 이게 싫어도 어쩔 수 없이 생활을 위해서 로마 돈으로 자꾸 바꾸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가만히 내버려 둬도 유대인들은 로마의 동전을 쓰고 결국 로마 경제권에 종속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다 아무렇지도 않게 로마의 카이사의 형상이 있는 동전을 쓰게 된 것이죠.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했느냐? 이거는 그래도 로마 동전인데 찝찝하다, 그러니 우리가 밥 먹을 때는 세수하자 이랬습니다. 물로 씻으면 마치 그 로마 동전 만졌던 부정함이 씻기는 것처럼. 율법에는 그런 조항이 없거든요. 자기들이 만든 법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기들의 전통을 가지고 예수님을 흉본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왜 식사할 때 세수하지 않느냐 그렇게 말합니다. 그거는 비위생적이다는 뜻이 아니고 로마 동전 가지고 여러 가지 했는데 밥 먹을 때는 세수해야지 그 뜻인데 너무 소용 없는 말입니다. 그저 자기들이 자기 만족을 위해서 만들어 놓은 규칙인 것이죠. 예수님께서 너희들 외식하는 자라고 그러시지 않습니까? 로마 동전 쓸 때는 실컷 다 쓰고 그걸로 밥 사 먹고 치약 사고 다 하다가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는 아 세수해야지 이러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 성전에서 제사 드릴 때는 어떻게 하는가? 제사드릴 때 원래는 소나 양이나 동물들을 가져와야 하는데 유대인들이 전 세계에 흩어져 있으니까 그 먼거리를 제사 짐승을 끌고 오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돈으로 가져오면 성전 앞에서 바꿔줍니다. 그런데 일단 로마의 돈을 유대 돈으로 또 바꿔요. 성전에서 제사드리기 위해서 재물을 사는 그 동전도 거룩해야 된다고 유대 동전을 준비해 놨다가 로마 돈 갖고 오는 사람들에게 바꿔 주는데 이때 또 이득을 남깁니다. 그래서 유대 돈으로 바꿔서 그걸 가지고 소나 양을 사면 그걸로 또 이득 남기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예수님께서이 이런 엉망된 성전을 한번 청소하십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빗자루로 쓰셨다는게 아니라 이렇게 완전히 장사 속이 되어 버린 성전을 완전히 뒤엎으신 사건이지요. 그래서 환전하는 테이블을 다 엎어 버리시고 동물들을 다 풀어 주시고 이랬던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 보시기에는 이게 얼마나 외식하는 일인지, 얼마나 하나님을 속이는 일인지 모릅니다. 나가서 평소 생활할 때는 로마 동전 잘 쓰다가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는 제사드릴 때는 뭐 동전 바꾸고 이런 일을 하는데 율법에도 없는 일이고 그냥 자기들이 만든 것입니다. 그러면서 외식하는 일을 하는 것이죠. 지금 바리새인들이 하는 일은 생활을 이분법적으로 둘로 나누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 교회 일 따로 있고 일상 생활 따로 있어서 일상 생활 때는 그냥 로마 동전 가지고 할 거 다 하다가 예배드릴 때 있으면 세수하고 돈 바꾸고 이렇게 자기들의 생활을 둘로 나누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모든 일상 생활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동전, 로마 동전을 사용하는 일상 생활에서 유대인들은 최소한 하나님께 죄송합니다라는 생각을 했어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할 건 다 하고, 하나님 앞에 와서는 거룩한 모양만 보이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단순히 세금 내냐 안 내냐 그런 본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지 않습니까? 천국이 이 땅에 오는데 예수님이 선포하시는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의 수많은 나라들, 로마 제국이나 미국이나 한국이나 이런 세상 여러 나라들 중에 또 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 오시는 나라가 아닙니다. 천국은 이 세상 나라를 다 심판하십니다. 다니엘 환상에서 돌이 날아와서 신상을 깨뜨리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임하면 세상 나라와 충돌하고 세상 나라를 심판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로 투쟁하시는 것이거든요. 지금 그 십자가 지실 날이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예수님이 그저 너들 세금 잘 내라는 말씀하실 리가 없어요.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것은 우리들이 알게 모르게 일상 생활 가운데 이미 얼마나 세속화되어 있느냐. 너희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데나리온 로마 동전 가지고 빵 사 먹는 거 그게 하나님 앞에 어떠하냐. 그런데 그것에 대해서는 전혀 가책이 없다는 이 현실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경제 문제는 지금 우리들에게도 매우 중요하죠. 경제라는 한자말이 굉장히 좋은 말입니다. 경세제민의 존말이고 세상을 경영하고 백성을 구제한다는 멋진 말이에요. 영어로는 economy, 집의 법, 집의 살림을 꾸린다는 단어입니다. 경제 문제. 실제로 우리들이 돈을 벌고 쓰고 먹고 사는 문제. 그러니까 우리 모두에게 가장 중요하고 절실합니다. 실제로 우리들은 삶에 굉장히 많은 시간과 에너지와 생각을 경제 문제, 돈 쓰고 돈 벌고 하는데 소모합니다. 그것이 또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그런 연약함을 다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 또 직업을 가지고 학교 공부를 하고 또 그것을 위해서 시간과 나의 육체적인 또 노력과 또 나의 정신적인 이런 노력을 엄청나게 들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들이 일하고 돈 벌기 위해서 계획도 다 하고 생활도 거기에 맞추고 또 이것저것도 걱정거리도 있고 하다 보면은 우리들이 얼마나 많은 삶의 에너지를 경제 문제에 썼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경제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분명하게 말씀을 하시지요.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서 돈쓰고 돈 버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우리들의 신앙을 고백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 인간들은 세상의 모든 것에 값을 매겨놓았습니다. 가치를 부여했습니다. 하나님이 본래 창조하신 세상은 그렇지 않았죠.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과 동물과 식물과 열매와 이런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매우 좋았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좋고 좋지 않음의 판단자이십니다. 그분께서 이 모든 것을, 특별히 사람을 창조하시고 매우 좋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선악과를 먹었고 선악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선악이라는 단어는 굉장히 도덕적으로 들리는데 원래 의미가 더 넓습니다. 좋다 안 좋다 호불호 그런 의미까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물건을 보고 좋아하면 사고 싶고 안 좋아 그러면 사기 싫고 그런 가치를 담고 있는데 이 선악을 사람이 판단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좋다고 하신 세상인데 이제는 사람이 하나님은 쫓아내고 내가 선악의 판단자가 된 것이 선악과를 먹은 사건이거든요. 이제 사람이 선악 또는 호불호를 스스로 판단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숫자로 값을 매기니까 서로 비교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빵 한 조각 1불, 스마트폰 200불 이런 식으로 가치를 내게 됩니다. 빵과 전화기는 비교를 할 수가 없는 대상인데 값으로 비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위기 상황이 닥쳐서 식량이 없어지면 완전히 달라지겠죠. 빵이 훨씬 비싸질 것이고 폰은 아무 가치 없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이 세상의 모든 것에 그렇게 가치를 부여하고 값을 매겼습니다. 사람이 만들어 놓은 세상입니다. 본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답고 멋진 자연 세계에 인간들은 가치라는 덮개를 덮어 씌웠습니다. 그리고 그 값으로 이 세상을 판단합니다. 우리들은 모두가 돈이라는 선글라스를 끼고 이 세상을 봅니다. 그래서 이거는 100불 저거는 200불 이런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습니다. 인간의 나라, 인간의 시스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온전히 심판하시고 하나님의 정의와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그 마지막 때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하는 그때에는 이 세상 나라가 하나님 앞에 완전히 모든 탐욕이 드러나고 심판받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3장 17절 한번 보시겠습니다.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이 이름이라. 이 본문은 굉장히 유명하고 666 나오는 본문입니다. 우리가 나중에 계시록 자세히 공부하면 좋은데 오늘은 666 그 얘기 하려는게 아니라 이 마지막 때에 환난이 닥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이 짐승의 표를 갖지 않으면 매매를 못 하게 됩니다. 경제 문제로 마지막 날에 우리들의 신앙의 시험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을 고백할 때 환난이 닥치면 핍박이 오면 우리들이 그것을 이겨야 하지요. 끝까지 예수님을 고백하고 그러다가 목숨까지도 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핍박이나 투옥이나 사형 선고보다 더 어려운 시험이 경제적으로 오는 시험입니다.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하시지 않습니까? 그런는데 씨를 뿌리시면 금방 새가 와서 먹고 그런데 어떤 씨는 조금 살아다가 핍박이 옵니다. 마른 땅에 뿌리면 환난과 핍박이 와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그런 씨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씨가 그 환란 핍박 다 이겨내고 좀 자랐는데 그 다음에 오는 시험이 뭐냐? 이 세상의 유혹, 세상의 부, 세상에 부요, 재물, 욕심 이런 것이 가시덤불로 눌러서 더 자라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너무 무섭지 않습니까? 감옥에 집어넣고 고문하는 이런 환란 핍박보다 더 무서운게 경제적으로 보는 유혹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부요한 거 다 보여 줘요. 부잣집 번쩍번쩍하는 것 그리고 좋은 생활 환경, 교육 환경 이런 것으로 유혹하면 넘어간다는 거죠. 마지막 날에는 이게 극단적으로 되겠죠. 그래서 짐승에게 절하지 않으면 매매를 못 하게 된 겁니다. 빵 사먹을 수가 없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유혹이 오면 우리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요한계시록의 이 말씀은 우리가 더 깊이 깊이 생각하는 기회를 다음에 갖기를 바랍니다. 이 경제 문제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데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그다음 본문들 잠깐만 보시면 요한계시록 18장에는 그렇게 이 세상은 뭘 추구하느냐? 수많은 부와 무역과 매매함을 통해서 부를 추구하는 이 세상의 실패가 나오는데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 다음에 에스겔 27장은 전체가 이 이슈입니다. 무역을 하는 두로라는 도시가 장사를 하면서 얼마나 부를 많이 축적했는지, 그런데 하나님과 다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인간 세상의 부요를, 인간들의 이런 엄청난 이런 성과를 다 심판하실까요? 뉴욕같이 부요한 도시들,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도시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도시들을 하나님은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들이 잊어서 안 됩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사람이 그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고 ...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변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이 세상에 우리들의 돈이 꼭 필요합니다.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것은 성도에게도 매우 합당합니다. 그렇게 우리들이 성실하게 일하고 가족들을 부양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선한 일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거기에 늘 따르는 유혹이 있습니다. 돈이라는 것은 어찌나 위험한지 우리들이 늘 깨어 있고 조심해야 합니다. 세상은 조직적으로 돈을 더 벌라고 우리들을 유혹하고 자꾸 부릅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서 주식 투자하라 그럽니다. 그리고 실제로 사람들이 주식을 해야 기업들이 투자를 할 수 있고 경제가 돌아갑니다. 그렇게 지금 우리들이 사는 사회가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주식 투자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당신이 주식 투자하는 이유가 정말로 나의 작은 돈이라도 보태서 기업이 잘되고 우리 사회를 더 잘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까 물어보면, 뭐 그런 것도 있겠죠, 그러나 더 큰 이유는 나의 이득입니다. 내가 돈 더 벌기 위해서 주식 투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이 세상을 주식이라는 눈으로 보게 되고 그래서 세상의 어떤 전쟁이나 재난 사고 같은 뉴스가 생기면 거기 있는 사람을 걱정하는 것보다 먼저 내 투자한 주식이 어떻게 되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비인간적인 것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들을 그렇게 유혹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하나님과 재물을 둘 다 섬길 수 없다 말씀하시는데 그만큼 재물이 무섭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재물이라는 맘몬이라는 단어는 돈의 신이거든요. 돈의 신이 하나님과 지금 비교가 되고 있습니다. 돈의 힘이 얼마나 크면 그래도 하나님과 지금 비교가 되냐고요. 그래서 예수님은 둘 다 섬길 수 없다. 하나님만 섬기든지 돈만 섬기라고 예수님께서 경고를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돈을 섬겨서는 안 됩니다. 돈을 신으로 삼아서는 안 되지요. 돈은 그저 사람들이 편하게 유용하게 사용하도록 사람이 만든 것이니 사람이 돈을 부려야 합니다. 그러나 거꾸로 될 때가 너무 많지요. 우리들의 경제 문제에 대해서도 마땅히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고 특별히 내가 돈이 없어서 힘들다면 당연히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가지신 분이고 주님 뜻대로 나누어 주십니다. 그러니 하나님 지금 내가 욕심이 아니라 나의 필요, 나의 가족과 자녀들을 위한 필요로 인해서 하나님 내가 눈물 흘리면서 기도합니다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면 하나님은 나의 그런 물질적인 부족함도 채워 주십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옳습니다. 그리고 그런 경우에 교회가 함께 힘을 합쳐서 도와주는 것도 마땅한 일입니다. 초대 교회부터 바울과 베드로가 모두 동의했습니다. 교회가 마땅히 할 일은 당연히 복음 전하고 하나님 섬기는 것뿐 아니라 가난한 사람 돕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직업을 위해서 우리들이 학교 공부하는 것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마땅한 일입니다. 게으르지 않고 하나님 앞에 성실하게 일함으로 나에게 합당한만큼 그리고 분수에 맞게 돈을 벌어서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기도함 가운데 주님 뜻 가운데 이루어지도록 우리들이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기 때문에 우리들이 세상에서 그런 재정적인 필요를 위해서 기도하고 열심히 일하는 것을 주님은 이해하시고 그리고 우리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세상과 싸워서 승리할 수 있도록, 그래서 나의 가정을 부양할 수 있도록 주님은 힘 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에는 늘 위험과 유혹이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10절,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유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서 자기를 찔렀다. 이 말씀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입니다. 돈 자체는 중립적이지만 돈을 사랑하면 악에 빠지게 됩니다. 그것을 탐내면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믿음에서 떠납니다. 많은 근심이 있습니다. 돈 때문에 근심하는 적도 있고요. 돈이 우리들에게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찍게 하는 일이 많습니다. 성도들에게도 이런 유혹이 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잘 아시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고 이런 우리들의 부족함도 용서해 주시는 것이죠. 그러니 우리들이 늘 주님 불쌍히 여겨소서, 부족합니다, 나를 도와주소서 하고 시험과 근심에 빠지지 않도록 늘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복종시켜야 합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 21절,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세상의 재물은 카이사의 것입니다. 세상 것입니다. 내 것이 아닙니다. 내가 붙들고 있으려고 노력할 필요 없습니다. 필요에 따라 주님께서 채워 주시는 대로 우리들이 사용하지만 만약에 세상이 그것을 어떻게든 가져간다면 아 이건 원래 내 것 아니지, 카이사의 것이지 하고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아깝게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억울하게 그런 상황이 있더라도 그렇게 마음을 비울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죠. 그러나 특별히 동전에 카이사의 형상이 있어서 가이사의 것인 것처럼 하나님의 것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 있어서 저와 여러분이 특별히 하나님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지기 바랍니다. 특별히 오늘은 돈과 비교되어 있습니다. 돈에게 우리 자신을 드리지 말고 하나님께 드려라. 돈은 그저 우리들이 매니지하고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욕심 부리지 않고 분수에 맞게 소박하게 또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면서 쓰라고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잠시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돈이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 자신을 그렇게 드리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에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질 텐데 주님 나 자신 돌아보면서 주님 나의 모든 이런 재정적인 현실적인 필요도 다 아시는 주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다 채워 주시는 줄 믿고 특별히 나의 모든 필요를 또 주님께서 또 필요한 것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돈에 휘둘리지 않고 걱정하지 않고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면서 목소리 내서 주님께 기도하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은혜로 변화된 사람이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원래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멀리하여서 그저 이 세상에 속해서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무한하신 은혜로 우리들을 아무 조건 없이 선택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들을 불러서 그분의 자녀로 삼아 주시고 복되고 풍성한 삶을 살도록 인도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분과 영원히 영광을 누리는 영생으로 인도하십니다. 우리들의 그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늘 감사하고 감격하며 마음속에 늘 평강이 임하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세상 사람들에게도 전하고 나누면서 살기를 원합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변화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바울을 생각할 수 있는데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변화된 다음에는 평생 이 은혜를 자랑하고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살았습니다. 그리고 지난 기독교 2000년의 역사 가운데에도 그렇게 주님의 은혜를 받아서 평생 주님을 자랑하면서 산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 가운데 특별히 어거스틴이라는 분을 함께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어거스틴은 주후 4세기 5세기 로마 제국에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대단한 지성인이고 이 분이 남겨 주신 수많은 책들과 설교가 지금까지도 기독교 신앙에 큰 도움이 되는 위대한 분입니다. 그런데 어거스틴이 젊었을 때에는 완전히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이분의 전공이 수사학이라고 하는데 수사학은 말을 잘하는 학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나의 말이 문법과 논리에 맞고 또 여러 가지 표현으로 사람들을 잘 설득해서 내 주장을 관철시킬 수 있을까에 대한 학문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제일 가까운 직업이 변호사, 정치인 그런 겁니다. 그만큼 말로서 사람들을 설득하는 기술에 능했고 자기의 젊은 시절을 그것을 연구하면서 바쳤습니다. 대단히 명석했기 때문에 성공한 수사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늘 마음속에 진리에 대한 갈망이 있는거예요. 그래서 20대 젊었을 때에는 마니교라는 종교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종교에서 아무리 해도 만족이 없어서 거기를 나오게 되고 결국은 자기가 수사학 교수를 하고 있던 이태리의 밀라노 지역에 있던 암브로스라고 하는 교역자 그리고 설교자를 만나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어거스틴의 삶을 봐도 한 사람과의 만남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젊은 어거스틴이 암브로스의 설교를 말을 얼마나 잘하나 보자 하고 들은 겁니다. 자기의 직업적인 것으로 말의 표현에 집중하면서 듣다가 자꾸만 설교를 듣다 보니 하나님 말씀을 접하게 되고 성경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성경 말씀을 읽기 시작하다가 중간에 덮어 버립니다. 왜냐면 자기가 익숙한 수준 높은 품위 있는 라틴어 문헌들과 비교해 보면 성경의 말씀이 그렇게 대단해 보이지 않는 거예요. 내용도 좀 희한한 것도 많고 그리고 번역본이기 때문에 본래 아름다움이 살아나지 못한 것도 있고 그래서 성경을 처음에는 가까이 하기 힘들어 했습니다. 그렇지만 자꾸 설교 말씀을 접하면서 마음이 열렸지요. 그래서 결국은 무엇을 알게 되었냐면 성경은 은혜로 읽어야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적인 도움을 받아서 읽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은 세상의 다른 책들처럼 어떤 지식이나 인생 사는 방법 그런 것을 배우는 책이 아니고 오직 그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그래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읽으면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그래서 이 분이 성경 말씀을 열심히 읽다가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가 강력하게 임하는데 이분이 견딜 수 없이 통곡하면서 지난날에 젊은 날에 방탕했던 삶을 완전히 내려놓게 됩니다. 그리고 변화되어서 남은 일생을 하나님께 바치는 위대한 목회자, 설교자, 주교가 되었습니다.
이분이 나중에 연세가 든 다음에 자기의 젊은 날을 돌아보면서 자기가 어떻게 죄 가운데 살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되었는가를 책으로 남긴 것이 있습니다. 유명한 어거스틴의 고백록인데 지금까지도 기독교의 아주 훌륭한 고전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 어거스틴 고백록의 9권에 보면 그가 처음 하나님 믿었을 때 오늘 본문인 시편 4편의 말씀을 가지고 큰 은혜를 받았던 대목이 있거든요. 오늘은 그 대목을 중심으로 우리도 함께 은혜를 받아보면 좋겠습니다. 굉장히 옛날 사람이고 또 우리와 좀 다른 버전의 성경책을 읽은게 있기 때문에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것과는 조금 다른 그런 성경 읽기를 보게 될 겁니다. 우리에게 도움이 되기 바랍니다.
1절 말씀 보시겠습니다. 시편 4편 1절에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이렇게 시작합니다. 어거스틴이 은혜를 받고 성경을 읽으니까 그냥 단어 하나하나가 은혜입니다. 이분이 희한하게 단어 하나를 붙들고 너무 좋다, 은혜롭다 하면서 그렇게 읽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여기에서 어거스틴을 사로잡은 단어는 부를 때입니다. 하나님을 부름. 다윗의 시편이고 다윗이 하나님을 부르고 있지요. 그런데 어거스틴은 다윗이 그랬다는 것 뿐 아니라 내가 부른다는 겁니다. 자기가 다윗처럼 하나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큰 소리로 부릅니다. 예전에 한번 말씀드린 것처럼 그 때에 성경을 읽는 것은 반드시 소리내어 읽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부를 때 라는 대목에서 실제로 어거스틴도 하나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내가 성경 말씀에 그만큼 몰입되고 그 안에 들어가서 자신도 하나님을 부른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부른다, 이 말씀에 딱 꽂혀서 어거스틴이 얼마나 감격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 성경에 응답하소서 이 대목이 어거스틴이 읽은 성경에는 응답하십니다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부르면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이렇게 읽으면서 또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성경 한 단어 한 단어 읽으면서 이게 그저 옛날 누군가의 고백이 아니라 나의 고백이 되고 그리고 내가 이것을 읽을 때 하나님이 즉시로 응답하시는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이렇게 읽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성경 읽으면서 내가 생각하고 은혜받는 것이 좋지만 기본적으로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고 그 말씀 가운데 임재하십니다. 성경을 읽고 내가 내 마음을 열 때에 하나님이 나를 만져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있는 고백이 옛날 믿음의 선조들 뿐 아니라 나 자신의 고백이 되고 바로 그 순간 그 자리에 하나님이 임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진정한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은혜로 성경을 읽어야 되겠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부를 때 하나님 응답하십니다. 오 좋으신 하나님 어거스틴이 그렇게 성경을 읽고 있지요.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여기서 너그럽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표현을 해 보면 나의 영혼을 크게 하심이라는 표현이 되겠습니다. 고전 시대의 사람들은 자기의 영혼을 어떤 분명한 실체로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들의 육신이나 이 세상의 물질은 도리어 그림자 같은 것이고 나의 영혼이 진짜 참된 실체다, 이렇게 보았거든요. 그리고 나의 영혼이 실제로 크기가 있다고 믿은 거예요. 그러면 나의 영혼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것은 뭐냐? 곤란 중에, 우리가 괴로움이나 걱정거리가 있으면 우리가 쪼그라들잖아요.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얼마나 힘들어요. 그러면 우리의 영혼도 쪼그라들겠죠. 그러나 이렇게 곤란할 때 아무리 큰 곤경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그렇지 않아요. 담대합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신다. 나는 실패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나를 건져 주신다는 믿음이 있으면 나의 영혼이 퍼지는 겁니다. 심호흡도 하고 가슴을 쫙 펴고 두 팔을 들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면서 나의 영혼이 말 그대로 커지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이와 같은 담대함을 배우기 원합니다. 걱정거리가 있고 내일 당장 교수님 만나고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요. 그럴 때 떨지 말고 마음을 담대히 하고 곤란 중에 나의 영혼을 크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넉넉해지면 실제로 너그럽게 되겠지요. 사람들과도 더 친절하게 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좋은 의미로 나 자신에 대해 자신감, 정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내 중심대로 살라는게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기 때문에 나는 걱정하지 않는다, 나는 담대하다, 이런 올바른 의미로 어 나의 자의식을 가져야 되겠고 그렇게 할 때에 주 사람들에게 너그럽게 될 수 있겠습니다.
2절,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이 대목은 대개 다윗 자신의 고백이라고 생각하게 되지만 어거스틴은 여기서 이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인생들을 볼 때 이렇게 안타까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하나님의 영광, 우리에게 허락하신 주님의 영광이 있는데 불쌍한 인생들이 어리석어서 이 영광을 말도 안 되는 것과 바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그 가운데 거하지 않고 그 대신에 헛된 일, 거짓된 것과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얼마나 안타까워하시겠습니까? 여기에서 어스틴은 자기의 지난 날을 돌아봅니다. 내가 옛날에 마니교라는 종교에 빠져서 헛된 일과 거짓에 살았다고 고백합니다. 성경에서 우리를 책망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말씀을 읽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적응하면 안 됩니다. 이런 말씀을 읽으면서 다른 누구를 생각하면 안 되고, 그렇게 책망하시는 말씀은 나 자신에게 적용해야 옳겠습니다. 어거스킨도 이 말씀을 읽으면서 내가 이랬지, 내가 한때 헛되고 거짓된 것을 찾았지 하고 고백을 합니다. 그가 한 때 믿었던 마니교라는 종교는 영지주의에 속하는데 이 세상을 이원론적으로 선과 악의 투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선한 세력이 있고 악한 세력이 있어서 동등한 겁니다. 그래서 맞서고 있고 늘 투쟁한다는 교리를 갖고 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과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시니 아무리 세상에 악하고 어두운 권세가 있어도 결국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것에 비춰 볼 때 마니교의 선악 2원론은 잘못된 것입니다. 특별히 마니교는 영적인 것은 선하고 육적인 것은 악하다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영적인 것이 다 선하냐? 선한 영도 있고 악한 영도 있습니다. 그 영적인 현상이 있다고 다 믿으면 안 되고 분별해야 하죠. 악한 영은 사람들에게 거짓으로 속이고 또 사람들을 겁주고 위협하면서 사람들을 자기의 노예로 만니다. 그런 악한 영들이 지금도 이 세상에서 역사를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분별해야 하지요. 그리고 그런 것은 예수 이름으로 우리가 승리해야 합니다. 육적인 것이 다 악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어 주신 우리의 육적인 물질 세계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하는 육신적인 일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하셨고 선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런 우리들의 육신적인 모습을 보살펴 주십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것은 선하고 육적인 것은 악하다는 마니교의 교리는 헛되고 거짓된 것이었지요. 어거스틴이 그것에 빠져서 있다가 만족이 안 되어서 나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자기의 지난날을 돌아보면서 고백을 하고 있지요.
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이 말씀은 어거스틴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합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경건한 자, 가장 귀하신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이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품 속에서 영원히 계시고 때가 되매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신 분이지요. 하나님께서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들 여러 중에서 선택하신게 아니죠. 오직 외아들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택하셨느냐? 그분이 우리이 세상을 우리 사람을 위해서 무엇을 하실 것을 택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자 예수님은 순종하시고 때가 되매 사람의 몸으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시고 십자가 고난받으시고 죽고 살아나십니다. 이 모든 것을 영원 전부터 선택하시고 결정하신 것입니다. 그와 같이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간구하시는 기도, 우리들을 위한 중보를 들으시지요. 여기서 어거스틴이 로마서 8장 34절을 인용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예수님이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십니다. 그렇게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면 여호와께서 들으십니다. 가장 귀하시고 의롭고 경건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지금도 우리를 위해서 이렇게 간구하고 계십니다.
또 너희가 알지어다 라고 했습니다.이 시편을 읽는 너희가 알지어다. 어거스틴이 지금이 말씀을 읽으면서 나의 이런 성경 읽기를 통해서 내 주위 사람들도 좀 알지어다. 알면 너무 좋겠다.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래서 뭐라 하냐면 내가 옛날 친구들, 방탕할 때 친구들이나 마니교에 있을 때 알던 사람들이 여기에 와서 내가 이렇게 성경 읽는 이 소리를 좀 들었으면 좋겠다 그럽니다. 그래서 그들도 알도록. 지금 나는 성경 읽는 괜찮은 사람이야, 자랑하는게 아니고 자기가 읽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나의 옛날에 알던 그 사람들도 듣고 알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참된 주님이시고 예수님의 우리의 사랑을 그들도 알게 되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언자가 하는 일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예언자인데 지금 우리도 성경 말씀을 읽고 이것을 전하면 우리도 예언을 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들이 성경 말씀을 읽고 또 그것을 전하면서 사람들이 듣고 이와 같이 우리 주의 사람들도 알게 되기 바랍니다. 그리고 꼭 말 뿐 아니라 우리들의 행동으로도,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도 우리 주위 사람들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들은 성실하고 정직하게 삽니다. 게으르지 않고 세월을 낭비하지 않아요.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 수고도 다 아시고 갚아 주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께서 의롭게 각 사람들에게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속이지 않아요. 그리고 성실하게 일하고 공부합니다. 그리고 꾀를 부리지 않아요. 어떻게 사람들 속에서 이래저래 해 볼까? 그런 일이 하나님이 다 보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올바르게 예수님 믿는 사람은 성실하게 올바르게 직업이나 학업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사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 세상 사람들도 알게 되지 않겠습니까? 너희가 알지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저런 삶을 볼 때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구나, 너무 보기에 좋구나 하면서 우리들의 생활이, 우리들의 말과 생각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는 그런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4절입니다.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여기서 떨며 범죄한다는 대목이 어거스틴이 읽은 성경에는 노하여서 범죄하지 말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이 에베소서 4장 26절에도 인용이 되는데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 말은 화내지 마라 그런 뜻도 되겠지요. 그런데 어거스틴이 읽기로는 너희는 분을 내어라, 그리고 범죄하지 말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왜 분을 내라고 하느냐? 여기에서 화내는 대상이 누군가? 자기 자신입니다. 나 자신의 옛날에 죄된 모습, 그래서 헛된 것과 거짓된 것을 쫓았던 나의 죄된 모습을 보고 화를 좀 내어라 이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주시는 감정이 다 선한데 특별히 노하는 그런 모습이 나 자신과 나의 죄된 모습, 잘못된 모습을 보면서 좀 화를 내고 노하여서 범죄하지 말지어다. 이렇게 어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지난 날, 옛 사람의 모습, 죄된 모습이 있습니다. 이걸 보면서 그냥 무덤하게 늘 그래 왔는 걸 하지 말고 아 그러면 안 되는데, 하나님이 주시는 어떤 의로운 분노, 이래서는 안 되지 하는 경각심을 가지고 매일매일 살면서 새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이 내가 날마다 죽노라 하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나의 지난 날 옛 사람, 심지어 어제 모습도 죄된 모습이 있다면 그것이 우리들을 다시금 깨우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은 새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범죄하지 말지어다. 이런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의 지난날 옛 사람의 모습 이것은 그럼 어떻게 되는가? 5절과 연결이 되는데 5절에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 의의 제사를 드린다고 했는데 제사의 재물이 뭐냐? 나의 옛사람, 그러니까 나의 지난 날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물론 날마다 새로워져야 하고 날마다 주님 앞에 부족합니다, 내가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로 품어 주시기 때문에 매일매일 살게 되죠. 나의 그런 죄된 모습, 이것을 재물로 드리는 것이 의의 제사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의 지난날, 나의 옛사람 그대로 그냥 계속 계속 살면 크리스천이라고는 하지만 변화가 없는 그래서 보람도 기쁨도 없는 그런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지 말고 이런 모습도 받아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그것을 제물 삼아서 의의 제사를 드리라고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들이 옛 사람 그대로 살면 마치 꿈속에서 아무리 배불리 먹어도 꿈을 깨면 배고픈 사람의 비유가 나옵니다. 참 생생한 비유 같습니다. 혹시 그런 꿈 꿔 보셨습니까? 꿈속에서 아무리 배불리 먹어도 꿈 깨고 나면 배고프고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만약에 나의 죄된 모습을 주님께 의의 제사로 드리지 않으면 나의 모습 옛사람 그 모습 그대로 산다면 그렇게 허망한 꿈 속에서 살다가 깨는 것 같은 그런 삶이 됩니다. 그러지 말고 나의 지난 삶을 주님께 의의 제사로 드리는 결단을 하여라. 그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 이렇게 어 말을 하고 있습니다.
6절,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냐 하오니. 6절은 문답의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질문입니다. 누가 우리에게 선을 보일까? 우리에게 정말 좋은 것을 보여 줄 분이 누구입니까? 이것이 모든 인생의 질문 아니겠습니까? 각 사람의 형편은 달라도 결국 우리 모두에게 내가 좀 좋은 것을 보고 싶다, 과연 누가 어떤 분이 나에게 좋은 것을 선을 보여 줄 수 있겠는가? 이것이 인생의 질문이라면 대답은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그 응답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이 모든 질문에 답이 되십니다. 인생은 질문을 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인생은 완전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늘 깨어 있고 늘 주님 앞에 더 가까이 가야 하므로 주님 앞에서 날마다 질문하는 것이 옳고 좋습니다. 주님 내가 어떻게 하면 더 주님 앞에 더 선한 삶을 보여 드릴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주님을 더 닮아갈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내가 선을 더 좋은 것을 볼 수 있겠습니까? 누가 그렇게 하겠습니까? 라는 질문에 대답은 늘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비추소서,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답이 되십니다. 날마다 주님을 찾는 우리가 되기 바랍니다.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여기서 빛이라는 단어가 어거스틴에게 특별합니다. 왜냐면 옛날 마니교에 있을 때는 빛을 그렇게 강조했거든요. 그러나 헛되었죠. 참된 빛은 우리 여호와의 주의 얼굴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얼굴에서 나오는 빛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빛의 근원이 되시고 우리들은 그 빛을 받아서 비추는 사람들입니다. 에베소서 5장 8절이 인용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우리들 스스로는 빛을 낼 수 없지만 하나님이 그의 얼굴을 우리에게 비추어 주시는 그 빛을 우리에게 주시면 우리가 그것을 받아서 비추는 빛의 자녀들이 됩니다.
7절의 말씀입니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여기에서 어거스틴에게 꽃히는 단어는 기쁨입니다. 기쁨. 결국은 크리스천의 삶을 규정하는 단어는 기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정말로 크게 드러나는 눈에 뜨는 기쁨일 수도 있고 또는 여러 가지 형편과 사정에 따라서 잔잔한, 사람들은 모르지만 내 마음 속에서 샘물 같이 솟아나는 기쁨일 수도 있습니다. 결국은 기쁨이 이깁니다. 우리 삶 가운데 걱정이나 어둠움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압도하고 승리하는 기쁨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어거스틴이 이 대목을 묵상하면서 실제로 기뻐하거든요. 그리고 그냥 가만히 앉아 있는게 아니라 너무 기뻐서 왔다 갔다 하는 그런 모습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이 성경 읽으면 좀 요란합니다. 그래서 읽다가 할렐루야 하다가 오 주여 기쁨 이러고 그런 소리가 계속 나니까 아마도 어거스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알았을 것 같습니다. 소리 들으면서 아, 또 성경 읽는구나 알았을 것 같아요. 어거스틴이 이렇게 성경 말씀 읽으면서 그냥 자기의 그런 모든 감정과 열정과 자기의 삶을 다 들여서 하나님과 대화하고 주님 주시는 은혜를 완전히 체험하고 또 기뻐하고 감사하는 그 모습을 우리가 보면서 우리도 그렇게 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혼자 성경 읽으면서 부흥회 하는 모습을 우리들이 상상하면서 우리도 그렇게 하면 좋겠습니다.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나옵니다. 실제로 우리들의 몸을 풍성하게 하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입니다. 특별히 구약 성경에서는 그런 표현이 되는데 그런 것이 풍성할 때보다 더한 기쁨, 참되고 커다한 기쁨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늘 우리에게 있습니다. 은혜로 변화된 사람은 성경을 이렇게 은혜로 읽습니다. 오늘 1장 읽어야 되니까 읽는게 아니라 그냥 단어 하나하나만 가지고도 묵상하고 기뻐하고 아마 그렇게 읽다 보면 뭐 한 시간 지나도 한 줄도 못 넘어갈 겁니다. 그렇게 정말로 하나님 앞에 깊이 잠기는 성경 읽기를 하면 좋겠고, 그렇게 느리게도 읽고 또 한편으로는 또 그러면 몇 년 걸릴 거니까 성경 전체의 스토리도 알기 위해 빨리 읽고 그래서 어 성경을 느리게도 읽고 빨리도 읽는 두 가지를 병행하면 좋다는 생각을 생각이 들게 됩니다.
8절입니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이는 오직 여호와심이라. 여기서 평안히 눕고 잔다는 같은 말이잖아요. 그래서 여기서 어거스틴이 동일하신 분에 대해서 묵상을 합니다. 동일하신 변치 않는 분. 그분이 약속은 변치 않습니다. 그분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알아 주시는 그 사랑이 변치 않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살 수 있죠.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 삼아 주시는 그것은 온 우주가 사라져도 끊어지지 않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우리들을 사랑하시고 영생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십니다. 이 시편 4편의 짧은 본문을 가지고도 풍성한 이런 은혜 충만한 그런 삶을 사는 우리 믿음의 선조인 어거스틴의 삶을 보았습니다. 우리도 한번 이렇게 해 봅시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 생명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그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가운데 풍성히 잠기면서 삶이 진정 변화되는 그런 우리들의 모습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바로 전날 밤에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시고 그들의 발을 씻겨 주시고 마지막으로 말씀을 전해 주십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왕국을 세울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왔으니 곧 예수님이 보좌에 앉으시고 제자들 자신들도 중요한 자리에 앉고 이제 영광스러운 날이 곧 올 것이라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밤 예수님의 말씀은 사뭇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유월절의 식사를 제자들과 함께 하시고 또 특별한 일을 하시는데 제자들의 발을 시켜 주셨지요. 높은 보좌에 앉으셔야 할 왕이신 예수님께서 가장 낮아지신 모습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깜짝 놀랐지요. 그리고 자기들의 부끄러운 그 발을 내밀고 예수님께서 씻어 주시는 그 손길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그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에 내가 이같이 하였던 것처럼 너희들도 그렇게 하여라. 너희도 서로 섬기고 서로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곧 왕이 되실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분의 말씀과 행동이 굉장히 다르지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제 나는 너희를 떠나야 한다. 내가 너희를 떠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을 나를 보내신 분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을 부르는 여러 가지 이름이 있지요. 하나님, 아버지, 주님, 영원히 계시는 분. 여러 표현들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특별히 지금 하나님을 부르시는 그 이름은 나를 보내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셨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더라면 특별히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믿었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그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이분을 보내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 주시고 특별히 병든 사람들, 연약한 사람들, 마음의 고통이 있는 사람들, 이 세상에서 쫓겨나고 멸시받고서 받고 있는 그래서 눈물 흘리는 그런 사람들을 특별히 찾아가셔서 다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다 들어 주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셨지요.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많은 정말 보배와도 같은 귀한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해 주시는 하나님 나라, 그 하나님에 대한 그 귀한 복음은 아주 간단히 말한다면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라는 것입니다. 사실 굉장히 쉬운 내용입니다. 어린아이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린아이도 얼마든지 나와서 다 내 말을 들어라 하고 초대하셨지요. 너희들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할 거야 어려워 이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아주 쉽고 그러나 너무나 귀한 말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이 사실만 우리에게 잘 마음속에 새겨진다면 더 이상 바랄 것도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에서 어려움 당하고 또 괴로움 당하는 수많은 일들이 있지요. 병에 걸리기도 하고 여러 가지 어려움이나 곤란도 있고 그 사람들과의 그런 어려움이 있지만은 그 모든 괴로움과 문제를 다 이길 수 있는 그리고 해결할 수 있는 그 사실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다. 하나님은 지금이 시간에도 우리들을 선하게 살펴보시고 우리들의 모든 기도를 우리들의 눈물을 다 들으시고 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지금도 언제라도 우리 곁에 계시지요. 이 사실만 믿을 수 있다면 세상이 얼마나 좋은 곳이 되겠습니까? 결국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전해 주신 소식이 그 사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제부터는 내 이름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 주신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은 너희가 다 받을 것이다.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예수님이 여러 표현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결국은 우리들이 또 하나님의 그 백성들이 결국 하나님 안에서 복된 삶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그 자녀의 합당한 삶 그런 삶을 살기를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지요. 바로 그것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그저 막연하게 알거나 굉장히 멀리 계신 분으로 어렵게 여기거나 아니면 아예 모르거나 그렇게 사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요 너희의 아버지시니 그분을 믿고 염려하지 말고 참으로 복되고 평화로운 그런 삶을 살고 그 사랑을 이웃 사람들과 나누면서 살아라. 그 말씀 전해 주기 위해서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님이 나를 그 목적을 위해서 보내 주신 그분께로 돌아가야 한다 말씀하신 것이지요. 그러니까 지금 제자들의 마음에 근심이 있다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금방 자기들 곁에서 왕이 되실 줄 알았는데 주님은 이제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셔야 한다고 하시니까 제자들 마음에 근심이 있지요. 그렇지만 주님은 이것이 꼭 일어나야 할 일이다. 사실은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더 유익하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혜사라는 말씀이 나오죠. 말 그대로 돕는 분이시고 성령님을 가르킵니다.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내가 떠나가서 하나님께로 가면 내가 보회사 성령님을 보내 주신다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더 좋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성령님이 우리에게 계시지요. 성령님 하나님의 영 그리고 예수님의 영입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시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어 주십니다. 그 덕분에 지금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도 우리 마음속에 우리들의 삶 속에 성령님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함께 하시고 우리들을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지혜가 부족하면 지혜를 주시고 우리의 믿음이 부족하면 믿음을 주시고 그래서 우리들이 예수님 믿고 매일매일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성령님 그분이 지금 우리 곁에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이 성령님에 대해서 특별한 말씀을 하시는데 성령님이 이 세상에 오시면, 여기 세상이라는 단어는 코스모스입니다. 코스모스, 우주라는 뜻도 되고 세상이라는 뜻도 될 텐데 성경에서는 이 세상이라는 단어가 좀 특별한 의미가 있지요. 대부분은 하나님을 떠난, 하나님과 반대되는, 하나님을 모르는 이 세상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 하면 성경에서는 대개는 하나님을 아직 모르는 사람들, 그런 뜻이 되겠지요. 그래서 성령님께서이 세상에 오셔서 세상을 책망하실거라 말씀을 하셔요. 여기서 책망이라는이 단어는 다른 말로 하면 유죄 판결이다, 그런 뜻이 있습니다.이 세상이 주님 앞에서 어떤 잘못된 그리고 고쳐져야 할 그런 현실 안에 있다는 것을 선언하신다는 그런 뜻이 있습니다. 굉장히 엄중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예수님 말씀에 이 성령님은이 세상에 오시면 세 가지로 책망을 하실 것인데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먼저 죄에 대해서 이 세상을 책망하시는 것은 바로 그들이 나를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 오늘 주보에 마틴 루터가 이 본문에 대해서 설교한 내용을 소개를 하고 있는데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 그것이 세상이 죄로 책망받을 일입니다. 이 말은 사실 아직 예수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 될 겁니다. 어떻게 예수님 믿지 않는게 그렇게 큰 죄냐? 너무 기독교는 배타적이지 않냐? 예수님 안 믿는 것을 죄라고 말하면 너무하지 않느냐. 그렇게 거부감을 가질 것입니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 본래 뜻이 뭐냐, 그 무슨 의미냐 하는 것을 우리가 살펴봐야 하죠. 죄라는 것은 루터도 그런 말씀을 하지만, 사람들은 죄라 그러면 거부감을 느끼고 싫어하지요. 왜냐면 내 행실을 자꾸 지적하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인데 죄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어떤 범법을 한다는 그런 의미도 있겠지요.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이런 정말로 큰 죄를 지어서 감옥에 가야 될 그런 것도 죄지요.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죄라는 것은 그것보다 훨씬 넓은 의미가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그것은 이 세상이 하나님을 떠나 있다, 하나님과 반대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리를 모르고 있다. 그 현실이 죄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모든 사람이 그 죄 가운데 있습니다. 그 말은 내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내 생각이 어떻고 하는 그런 차원, 그런 개인적이고 사적인 차원뿐만 아닙니다. 그런 것도 있습니다. 우리들이 잘못된 것은 고쳐야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이 사는 이 세상 가운데 인간이라는 현실이라면 누구나 마주할 수밖에 없는이 세상이 하나님과 지금 잘못되어 있다는 이 현실이 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을 원래 창조하셨을 때 그 에덴 동산, 하나님의 본래 창조는 이렇지가 않았습니다. 본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사랑과 평화가 가득한 세상, 근심과 두려움이 없는 세상,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을 입어서 지음받은 사람은 그 가운데서 특별하게 하나님과 매일매일 교재하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과 사람이 늘 대화하고 함께하는 그런 세상이었던 거예요. 그래서 창세기 3장에 보시면 하나님이 서늘할 때쯤 늘 동산을 거니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아마 매일 저녁 그 시간이 되면 하나님이 산책하시듯이 에덴 동산에 오시고, 원래 인간은 아담, 아담이라는 이름 자체가 인간이라는 뜻이죠,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오시면 하나님과 함께 산책하고 이런저런 얘기하고 그것이 본래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원래 관계가 그렇습니다. 어린아이가 하나 부모님 앞에 어 자연스럽게 나오는 그 모습이 제일 합당한 비유가 되겠습니다. 순진한 아이들, 아직 아무 염려가 없는 아이들이 부모님 앞에 자랑스럽게, 편안하게 자연스럽게 나와서 부모님 손잡고 동행하는 그 모습이 가장 좋은 모습이 되겠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원래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세상은 그렇지가 않지요. 사람들이 하나님을 일단 많이 모르고 오랜 세월 동안이 세상 가운데 또 문화 가운데서 하나님을 아예 잊어버린 사람도 많고 또 안다고 하더라도 그냥 막연한 개념으로만 알고 좀 멀리 계신 어떤 분으로 아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때로는 하나님을 굉장히 두려운 두려워할 분으로 그래서 나를 늘 간섭하고 힘들게 하는 그런 분으로 아는 경우도 많아서 하나님과 인간 세상의 관계가 지금 매우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죄인 것이지요. 그것은 우리 인간의 책임이 되겠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가 뭐냐? 그것을 멀리서 찾을 것 없습니다. 옛날에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는데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어요. 사실 나 자신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되겠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지금 어떤 사람인가? 나는 하나님을 정말 아버지로 매일매일 그렇게 편안하게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모시고 그분과 동행하는가? 그리고 예수님께서 너무나 강조하시고 부탁하신 말씀은 두려워하지 말라거든요. 두려워하지 말라. 그 말씀 얼마나 많이 하시는지, 풍랑 가운데 걸어오실 때 제자들이 무서워하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니 두려워하지 말라. 그 말씀이 얼마나 강조되는지 모르는데 실제로 그렇잖아요. 어린아이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모님으로 모시고 있는데 걱정하겠습니까? 아 내가 내일 뭐 먹고 살지? 그런 걱정 안 하잖아요. 그것이 원래 인간의 모습인데 그걸 우리가 잃어버렸죠. 우리들도 사실은 마음속에 그런 두려움이 있습니다. 내가 이걸 어떻게 하면 좋지? 지금은 이렇게 살고 있지만 1년 뒤 10년 뒤 나는 어떻게 하지? 내 가정, 내 자녀들, 내 직장, 학교, 나의 미래는 하나하나 생각해 보면 다 걱정거리가 한두 개가 아닌데 이 모든 이런 것으로 인해서 내가 온전히 자유롭지 못하고 마음의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감사하고 기뻐하지 못하는 그런 나의 모습입니다. 그걸로 인해서 나 자신도 힘들고 옆에 사람도 힘들고 세상도 힘들고 그런 우리의 모습이 그걸 보여주는 나와 하나님의 관계가 지금 뭔가 잘못되어 있다. 이것이 죄인 것이지요.
그런데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 예수님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바로 그런 인간으로 오셔서 하나님과의 관계로 회복시켜 주시고 바로 그렇게 사는 모습을 보여 주시고 그것이 참된 인간의 모습이라고 가르쳐 주시고 그리고 그 길을 끝까지 가셔서 십자가까지 순종을 하셨습니다. 그러니 그분을 믿는 것이 사실 얼마나 당연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분을 믿고 그분을 마음에 구주로 모시고 그분의 말씀대로 따르기로 사는 따르기로 결심하는 삶, 그것이 사실 정말 마땅한 삶이 될 터인데 세상은 아직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그래서 이 세상이 성령님께 책망받을 것입니다.
의에 대해서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의에 대해서 책망하신다고 되어 있는데 의라는 말은 정의, 공의, 올바른 것, 공평한 것 그런 의미가 있지요. 그런데 가장 본질적으로는 성경에서 의라는 것은 뭐 다름 아니라 옳은 것, 맞는 것 그런 뜻이 되겠습니다. 올바른 것.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사람, 올바른 자리, 올바른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다시금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의롭기를 원하시고 또 의를 우리를 의롭다고 칭해 주십니다. 칭의라고 하는 말인데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십니다. 그 말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가 올바른 관계에 있다는 것, 다시금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 우리가 그분을 온전히 믿고 의지하고 신뢰함으로 마음에 늘 평강이 있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삶 이것이 의로운 것입니다. 다른 것이 아니지요.
이것이 우리들에게 허락해 주시는 의인데 심지어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의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도 의롭게 하신다는 말씀이 로마서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원래 의로우신 분, 완전하신 분이고 그분이 의의 기준이신데 어떻게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의롭다 하시나? 그만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모든 것을 맞춰 주신다는 뜻이지요. 하나님께서 그러면 어떻게 자기 자신을 의롭게 하셨는가? 바로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셔서 우리가 그분을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의롭게 회복되고 그렇게 우리를 의롭게 해 주시는 그것이 하나님 자신을 의롭게 하신 것이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필요 없죠. 하나님은 그렇게 굳이 안 하셔도 원래 당연히 의로우신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잘한 사람 상 주시고 못한 사람 벌 주시고 그렇게만 하셔도 얼마든지 그분은 정의로우신 분인데, 그걸 훨씬 넘어서서 굳이 안 하셔도 되는 일, 우리들을 자녀로 삼으시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 불러 주셔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삼아 주시는 그걸 굳이 하신 것이고 그만큼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것인데 바로 그것이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의롭게 하신 일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자리, 이 시간에는 그 올바른 일, 의로운 일이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 가시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그분의 모든 사역을 끝내시고 이제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때가 다 되었습니다. 그 예수님의 모든 사역의 끝은 그리고 정점은 십자가의 희생이 되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죽기 위해 오셨지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죽지만 그래서 우리들은 죽을 운명에 있는 존재인데 예수님이 그런 우리 인간으로 오셨지요. 그런데 그분이 죽으실뿐 아니라 죽기 위해 오신 것이지요. 그래서 그분은 태어나실 때부터 죽을 것을 작정하고 오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들의 이런 죄와 죽음의 이런 괴로움을 다 가져가기 위해서. 그래서 예수님 표현하셨을 때 동방 박사들이 드린 선물 중에 아예 몰약이 있는 것이지요. 장례 때 하는 그런 몰약을 어린아이에게 드리는 선물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예수님이 아예 죽기 위해 오신 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이 세상에서 모든 일과 가르침을 이제 다 끝내시고 그 마지막으로 끝까지 완성하기 위해서 이제 십자가에 바로 이 밤이 지나면 못박히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 의로운 일, 마지막 가장 옳은 일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시고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더 이상 보지 못하 섭섭하지만 그것이 올바른 의로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입니다. 이 밤이 지나면 예수님 죽으시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더 이상 그분을 보지 못합니다. 부활하시고 40일 동안 만났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지요. 그 대신 지금 우리에게는 그분의 영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것이 가장 의로운 길 하나님께서 정하신 올바른 일이 되겠습니다.
그 다음에 심판에 대해 대하여라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 세상의 임금, 영어에는 프린스라고 그렇게 되어 있고 이 세상의 주권자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으로는 로마의 황제나 세상의 왕들이나 그런 권력자들이 있겠지요. 그러나 그런 자들이 심판을 받을뿐 아니라 요한복음에서는 그 모든 배후에 있는 더 영적이고 본질적인 그런 존재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죠. 사탄이 되겠습니다. 우리들이 사탄에 대해서 궁금한 것도 많고 이상한 것도 많고 그런데, 성경에는 사탄에 대해서 우리가 꼭 알아야만 되는 데까지만 나와 있습니다. 자세히 나와 있지 않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사탄에 대해서 자세히 알 필요가 없고 너무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우리들이 성경 말씀 믿고 신앙생활할 때 사탄을 너무 의식하는 것은 건강하지 못한 겁니다. 그래서 내가 이거 할 때 아 실수했네, 또 사탄이 속였네 너무 그렇게 생각하실 필요 없어요. 우리들은 하나님 주시는 자유함을 누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 하나님 안에서 우리들은 늘 감사와 기쁨, 사랑 이게 중요한 것이지 사탄이 나를 넘어뜨린다고 너무 의식하시면 사탄이 좋아합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성경에는 사탄에 대해서 최소한의 내용만 나와 있는데 일단 사탄은 자기 혼자 나타난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이 창조하셨죠. 모든 것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사탄도 예외가 아니고 일단 영적인 존재고 그래서 육신인 우리보다 훨씬 많은 능력을 갖고 있는데 그런데 타락을 한 거죠. 그래서 성경에는 아주 살짝 힌트만 되어 있는데 교만해서 자기 자리를 떠났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천사니까 훨씬 책임도 있고 중요한 그런 일들이 있을 텐데 교만해서 자기 처소를 떠났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타락한 거죠. 그래서 그것이 사탄이 되었고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 결국 하나님 앞에 가장 큰 죄의 근원은 교만이다. 이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하나님처럼 되려는 것, 교만한 것, 내 생각대로 내 마음대로 그래서 처소를 떠나는 것, 이것이 죄의 근원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탄이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고 우리들은 더 자세히 알려고 연구할 필요가 없어요.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 세상의 임금이 심판받았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이 세상 사람들을 다 두려움으로 몰고 갑니다.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고 내가 지금 여기까지 이루었지만 앞으로 10년 뒤에는 또 불안하지 않을까? 언젠가 나에게 죽음이 닥치면 내 자녀들도 걱정되는데 그러면 지금 가진 것보다 더 많은 재산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사람들을 계속 불안하게 하고 두려워하게 하죠. 그것이 사탄의 제일 주된 무기입니다. 그런 것을 싹 예수님께서 다 멸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 임금이 정죄받고 심판받은 것입니다. 쫓겨난 것입니다. 더 이상 우리들은 사탄의 그런 유혹에 또는 위협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면 그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강하신 하나님이 우리들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물론 우리들에게는 매일매일 이런 시험이나 유혹, 그런 마음이 간혹 들기도 하지만 그냥 스쳐 보내면 됩니다. 머리 위에 새가 날아오는 것을 막을 순 없지만 머리에 동지를 트는 것은 우리들이 털어 버리면 되죠. 그런 비유가 있는 것처럼 그런 마음이 있을 때 사탄아 물러가라 하면 되고 그것도 너무 힘줄 필요도 없어요. 무시하는 것이 차라리 더 좋습니다. 그런 생각은 흘려 보내고 하나님 아버지를 붙들고 하나님 내가 하나님을 믿어서 염려하지 않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시니 나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십니다. 주기도문에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하는 기도처럼 매일매일 일용할 양식이잖아요. 매일매일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에게 선하신 그 사랑을 믿는데 왜 두려워하겠습니까?
사실 이것이 우리들의 영적인 전쟁입니다. 영적 전쟁은 다른게 아니고 투구 쓰고 갑옷, 칼과 방패와 그런 비유가 있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싸우는 그게 본질이 아니라 우리들의 정말 영적 전쟁의 가장 최전선은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주시는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무슨 소리 하더라도, 세상에 뉴스나 그런 것들이 틈만 나면 아니야 아직 모자라 더 있어야 돼 걱정하게 하고 두려워하게 하는 수많은 세상의 유혹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고, 아니야 나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기 때문에 전혀 요동하지 않아, 나는 늘 평강과 감사와 기쁨을 누릴 거야 이것이 성도의 마땅한 삶이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 영적 전쟁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우리 성도들은 영적 전쟁의 최전방에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르지요. 하나님을 모르니까 아예 그런 생각도 안 하고 그저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재물과 명예와 권력과 이런 것을 조금이라도 더 가지려고 살고 있지만 영적 전쟁의 최전방에 있는 우리들은 이 모든 사실을 알아서 그런 두려움이나 염려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만을 믿고 온전히 평화롭게 사는 것 그것이 영적 전쟁에 가장 중요한 모습이 되겠습니다.
결국 우리가 그렇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 오신 것이지요. 그것이 예수님의 부탁입니다. 유언이라고 할 수 있죠. 예수님 죽기 직전에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 우리가 들어야 되잖아요. 예수님 말씀 듣고요. 우리가 예수님 당부하시는 말씀처럼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두려워하지 않고 영려하지 않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채워 주시고 도와주시고 문제를 다 해결해 주신다고 하는 것을 굳게 믿는 성도의 삶이 되기 바랍니다. 오늘 제목을 진리의 성령이라 했습니다. 예수님이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이 모든 것을 다 일히 가르쳐 주시고 우리들에게 인도해 주신다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받은 우리들에게 진리의 성령님이 늘 인도해 주시고 말씀해 주셔서 주님이 도와주시는 풍성한 믿음의 삶,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사는 우리들이 되기를 주님 안에서 축원드립니다.

천국에 대한 본문들을 우리들이 살펴보고 있습니다. 천국,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들이 성경 말씀을 읽는 키워드로 생각하면 많이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천국 또는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 깊은 단어들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구약에는 여호와의 날 또는 간단히 그 날이라고 하면 그것이 하나님 나라가 오는 날이 됩니다. 그러면 그 날이 언제인가? 마지막 날입니다. 성경에서 마지막 날이라는 표현을 보면 이것은 하나님 나라가 오는 날, 그 날이라고 알면 됩니다. 성경 읽을 때 굉장히 도움이 되는 힌트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마지막 날을 생각하면 흔히 어떤 재앙이나 엄청난 일이 벌어지는 그 사건들에 집중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에서 마지막 날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시는 날입니다. 하나님이 그 권능과 영광으로 이 땅에 친히 오십니다. 그러면 온 세상이 주님 앞에서 마지막 날이 되는 것입니다. 옛날 성도들이 이 마지막 날을 바라보았던 이유는 이 세상에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 어떻게 할 수 없는 악하고 어두운 권세가 있기 때문입니다.이 이 세상의 불의와 고통과 슬픔이 너무나 극심해서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을 때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성도들은 이 세상의 엄청난 악한 권세 앞에서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이 반드시 우리를 구원하시고 온 세상을 바로잡아 주신다는 그 날을 믿음으로 바라본 것입니다. 그날이 마지막 날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 날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일하는 날, 천국의 날이 됩니다.
이 마지막 날에 일어날 중요한 사건들이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부활입니다. 죽은 사람들이 살아날 것입니다. 부활의 소망이 우리 기독교의 믿음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마지막 날의 부활에 대한 중요한 성경 말씀을 함께 읽어보면 좋겠습니다. 요한복음 11장은 예수님의 친구인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마르다와 마리아라는 두 명의 누이와 예수님께서 만나게 되십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려 주실 텐데 이 사건이 요한복음 전체에서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다른 세 복음서와 조금 다르게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시면서 굉장히 인기가 좋으셨어요. 사람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갑자기 너무 어려운 말씀을 하시니까 사람들이 많이 떠나요. 제자들 몇명만 남은 상태거든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려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갑자기 또 사람들이 막 몰려오는 거예요. 깜짝 놀라서 예수님과, 또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라는 사람 구경 좀 해 보자 이러면서 예수님 주위에 갑자기 사람들이 많이 몰려와요. 그러니까 그 권력자들이 아 너무 위험하다, 예수님 주위에 너무 사람들이 많이 따라다니까 잘못하면 일란이 일어날 수 있겠다 하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받게 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요한복음 전체 스토리의 흐름에서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려 주시고 그 대신에 십자가에 죽게 되시는 것입니다. 그만큼 요한복음의 흐름을 바꿔 놓는 중요한 사건이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었다는 말씀을 듣고 가셨을 때는 이미 나서로가 죽은지 4일 지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찾아가셔서 죽은 나사로의 누이가 되는 마르다를 만나십니다. 그러니까 마르다가 예수님께 아주 슬픈 목소리로 또 하소연하듯이 그리고 살짝 원망이라도 하듯이 주님 왜 빨리 더 빨리 오지 않으셨나요 하시면서 주님께서 만약에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굉장한 믿음의 표현도 되겠고 예수님 왜 더 빨리 오셔서 오빠를 살려 주시지 왜 이제 오셨어요 하는 그런 느낌도 있습니다. 그러나 22절에서 마르다가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께 무엇이라도 구하시면 주실 줄을 내가 아나이다 하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 오빠가 다시 살아나리라. 그러자 마리아 마르다가 이런 말을 합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그 당시 유대인들의 믿음, 또 그들이 갖고 있던 상식을 표현하는 말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살아나리라 말씀하시니까 그 누이가 좋아하는게 아니고, 오빠가 살아난다고요? 정말요? 하면서 깜짝 놀라서 감격하는게 아니라 좀 시큰둥해요. 마지막 날에는 다 살아난다. 이것이 그 당시 유대인들의 상식적인, 구약 성경으로부터 내려오는 믿음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마르다에게 실제로 소망과 능력이 되지는 못하는 거죠. 오빠가 살아난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는데 마지막 날에는 살아나겠죠 알아요. 이런 느낌입니다. 마지막 날에 있는 참된 소망이 되는 부활이 백성들의 어떤 지식으로만 있는 것이고 아직까지 나에 살아 있는 소망이 되지는 못한 상태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마지막 날에 부활이 있다, 이것은 백성들이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일어 주시는 것은 그것이 마지막 날, 먼 미래의 일이 아니다. 마지막 날에는 사람들이 다 살아날 거예요. 나랑 상관없죠. 이런 것처럼 언제 있을지 모르는 먼 일이 아니라 바로 지금 눈앞에 있는 사실이라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25절과 26절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부활의 메시지를 한 눈에 좀 볼 수 있겠습니다. 25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니 이것을 내가 믿느냐. 마지막 날에는 살아나겠지요 하니까 예수님이 지금 네가 보고 있는 나 예수 그리스도 바로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다. 마지막 날이라고 멀리 막연한 미래가 아니라 바로 눈앞에 임재해 있는 예수님이 바로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그 다음에 26절에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니. 이 25절과 26절을 함께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25절에는 예수님이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성도들도 죽지요. 우리들의 부모님, 조부모님, 성도들도 죽으면 무덤에 묻힙니다. 그런데 26절에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이 두 말씀이 어찌 보면 모순인 거 같습니다. 죽는다는 말씀인지 안 죽는다는 말씀인지 두 말씀이 조화가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이 두 말씀을 이렇게 이해해 보면 좋겠습니다. 25절의 말씀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그 죽은 사람을 옆에서 보는 사람이 있어요. 가족과 친구들이 지켜보잖아요. 이 25절의 말씀은 옆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 그래서 죽은 사람을 지켜보는 가족과 친구들의 시선에서 보면 죽어도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26절에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죽지 않는다. 이 말씀은 누구의 입장인고 하면 그 죽는 당사자의 입장입니다. 죽는 당사자의 입장에서 보면 살아서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는 영원히 죽지 않아요. 죽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옆에서 보는 사람의 시선으로 보면 그 사람이 죽지만 정작 그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죽음이 끝이 아니고, 무슨 영원한 망각이나 그런 것이 아니라 죽음의 순간에 예수님의 품에 들어가고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지 않습니다. 참으로 말로 표현할 수 없을만큼 복된 일이고 사실 우리가 상상도 못할 일이고 다만 우리가 소망을 갖고 있는 것인데 이것이 성도들에게 하나님 주시는 가장 큰 약속이고 복이고 우리들에게도 모두 이 날이 올 것입니다. 죽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죽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로 예수님 품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이 모순이 되지 않고 누구 시선이냐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지금 여러분 가운데에도 사랑하는 가족들, 친지들 가운데에 또 이미 주님 품으로 안기신 분들이 계실 것이고 또는 앞으로 분명히 그런 일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복입니다. 가장 기뻐하고 즐거워할 일입니다. 지금 주님 품에 앉으신 분들 우리들의 조상들 부모님들이 지금 주님 안에서 이 가장 큰 복락,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영광과 큰 복을 누리고 계십니다.
돌아가신 성도님이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가 여러 가지 견해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돌아가신 성도들은 지금 잠을 자고 있다고 합니다. 잠 자고 있다는 표현이 성경에 있습니다. 그렇게 지금은 의식이 없는 상태에 있다가 예수님 다시 오시면 마지막 날에 무덤이 열리고 다들 들림받는 그날에 깨어난다, 지금은 잠자고 있다는 그런 견해가 있는데 저는 거기에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성도들이 다 잠자고 있다면 베드로나 바울이나 요한 같은 사도들도 지금 장자고 있다는 말인가? 좀 이상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이 땅에 계실 때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합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살아 있고 그때 예수님 앞에 나타나서 대화를 한 것인데 그분들이 지금 잠자고 있다는 말입니까? 잠자고 있다가 그때 깨어서 대화하고 또 잠자러 갔습니까? 돌아가신 분들이 지금 잠자고 있다는 건 우리가 보기에 그렇다는 것이죠. 우리가 무덤을 보면서 표현하는 말이 그렇지, 하나님 보시기에 그분들은 이미 영광 가운데에, 주님 주시는 가장 큰 복을 누리고 계십니다. 잠자고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도 주님 앞에서 가장 복된 성도의 복을 복에 참여하고 계시죠. 그렇게 죽는 그 순간이 두려움이 아니고 그 순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가장 복된 시간입니다. 주님 앞에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정확히 맞는 것이지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내가 믿느냐. 이렇게 말씀하 죽은 자의 부활은 기독교의 가장 큰 소망이고 가장 큰 좋은 소식이고 모든 성도들에게 약속된 것입니다. 부활은 예수님께서 친히 살아나심으로 먼저 보여 주셨고 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 성도들도 부활할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부활이라는 단어의 특이한 점을 살펴보겠습니다. 누가 부활했다고 하는가? 1인칭 내가? 2인칭 당신이? 성경에서는 누군가가 부활했다는 말의 주어는 반드시 3인칭입니다. 예수님이 살아나셨습니다.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살아났습니다. 부활했다는 동사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부활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그 부활을 보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부활의 증인이 나가서 그 소식을 전하는 것이죠. 부활 사건에는 부활하는 당사자가 있고 반드시 부활의 증인이 있습니다. 그 살아나는 것을 보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이 두 사람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데 신약 성경 때에는 예수님이 곧 오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을 말씀하시는 것이 임박했어요. 그러니까 제자들이 목숨 걸고 신속하게 만사를 다 제쳐 놓고 복음 전하는 거거든요. 예수님께서 곧 오신다. 지금 마지막 때가 다 되었다. 그래서 때가 다 되었으니까 회개하라. 이것이 신약 성경의 메시지잖아요. 예수님 곧 오십니다. 사실 우리들은 이때로부터 2000년이 지났기 때문에 이 사실을 잊어버린 감이 없는데 본래 신약 성경의 정신대로 말하면 마지막 날의 부활이 곧 있을 것입니다. 언제일지 몰라요. 곧 임할 마지막 날의 부활인 것입니다. 그러면 초대 교회 때 성도들이 어떤 소망을 갖고 있었는지 우리가 상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믿는 성도들 가운데 가족 가운데 또 돌아가시는 분들이 있잖아요. 부모님과 형제 자매와 또 친구와 심지어 사랑하는 자녀와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을 때에 슬픔이 있지만 곧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은 사람들이 잊혀진 사람들이 아니고 예수님 곧 오시면, 마지막 날이 오면 그들이 곧 살아나서 다시 만날 것이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이것이 원래 기독교의 소망입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분들과 내가 관계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강력한 전통인데 지금 우리는 이걸 잃어버린 면이 있습니다.
이것을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와 관계 있는 사람, 내가 아는 사람인데 죽은 그 사람이 살아날 거예요. 그래서 내가 그 사람을 다시 만날 거예요. 이게 얼마나 엄청난 일이겠습니까? 죽었다가 부활하는 분, 그 사람과 내가 다시 만날 때에 나와 그 살아난 사람의 관계가 어떠냐에 따라서 부활이라는 양상이 몇 가지로 나뉘게 되겠습니다. 한번 생각을 해 보면 좋겠습니다. 먼저 이 부활하는 사람,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과 그 부활을 보는 사람의 관계가 첫 번째 원수지간일 수가 있습니다. 내가 죽인 사람일 수가 있습니다. 누군가를 내가 죽였는데 그 사람이 살아난 겁니다. 어떻겠습니까? 이런 경우에는 내가 그 사람을 미워해서 죽였는데 살아났으면 나한테 부활은 두려운 소식, 심판입니다. 내가 죽여서 이제는 괜찮겠지 했는데 그 사람이 일어나서 증언할 거 아니겠습니까? 헤롯 왕이 세례 요한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예수님이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시는 소식들 들리니까 헤롯 왕이 뭐라 그러냐면 세례 요한이 살아났다고 합니다. 내가 세례 요한을 죽였는데 소문 들어 보니까 비슷한 사람이 나타났어요. 그러니까 헤롯 왕은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죽인 세례 요한이 살았네. 부활은 이렇게 범죄자들, 살인자에게는 두려운 심판의 소식이 됩니다.
두 번째 시나리오가 있습니다. 죽은 사람과 죽인 사람이 있는데, 누군가를 죽였는데 이번에는 이 범죄자가 회개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너무너무 잘못했다. 그래서 내가 이 사람을 죽게 했는데 내가 너무 잘못했는데 용서를 구할 길이 없는 겁니다. 이미 피해자는 죽었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받고 싶어도 용서가 안 되는 겁니다. 이미 죽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데 그 죽은 사람이 살아난 겁니다. 이 시나리오에서는 이 범죄자에게 부활이 복된 용서의 소식입니다. 내가 죽여서 더 이상 용서받을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는데 그 죽은 사람이 살아났고 내가 그 사람 앞에 가서 내가 나를 용서해 주세요 하고 그 살아난 사람에게 용서받으면 나의 죄가 용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소식은 그 원수 지간이었지만 내가 용서받고 싶어 하는 죄인이 부활하는 사람을 만났다면 그 사람에게는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좋은 소식이 됩니다.
세 번째 시나리오. 부활한 사람과 또 부활을 보는 사람의 관계. 이번에는 이 두 사람이 원래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을 때입니다.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이 죽어서 너무나 애통해하고 있는데 그 부활한 것입니다. 그래서 영영 못 볼 줄 알았던 그 사람이 살아나서 이제 만난 거예요. 말로 할 수 없을만큼 큰 기쁨의 소식이 되겠죠. 오늘 본문에 나사로와 그 누이들의 관계가 그렇게 될 것입니다. 부활은 하나님만이 우리들에게 주실 수 있는 가장 복된 소식입니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절대 불가능한 영역이지만 하나님은 하십니다. 그래서 죽은 사람들을 살리십니다. 부활의 소식은 우리들에게 경우에 따라서 심판과 두려움의 소식도 될 수 있고 나의 죄가 용서받을 수 있는 기가 막힌 기회가 될 수 있고 또 한편으로는 나의 가장 큰 슬픔과 상실이 치유되고 회복될 수 있는 가장 복된 소식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이 세 가지가 예수님께 다 일어났어요. 예수님을 죽인 원수들은 살아나신 예수님을 보고 두려워서 떨었을 것이고 예수님을 죽였지만 예수님께 나를 용서해 주세요 하고 회개하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는 주님께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을 죽음으로 잃어버렸지만 살아나셔서 되찾았습니다.이 세 가지가 예수님께 다 일어났습니다. 성경의 부활의 복된 소식은 우리들에게 기가 막히게 놀라운, 우리들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좋은 소식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들의 죄가 드러나서 주님 앞에 심판받게 되지만 한편으로 우리들의 죄가 용서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죽었던 예수님이 살아나셔서 우리를 용서하시기 때문에 우리들의 모든 죄가 용서받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사랑하는 예수님을 잃어버려서 너무나 슬퍼했지만 다시 그 예수님을 우리들에게 우리가 돌려받았기 때문에 가장 그 놀라운 회복과 치유의 순간이 됩니다. 우리들이 죽음으로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회복할 길이 없지 않습니까? 부활이 없다면 평생 그 마음의 괴로움을 안고 무덤까지 가겠지요. 그러나 부활이 있기 때문에 부활을 믿을 수 있기 때문에 비록 지금은 죽음으로 인해서 사랑하는 사람이 눈앞에 안 보일지라도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될 거는, 영원히 흐를 것 같은 눈물을 닦아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있습니다.
죽음은 무정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저 사람은 죽으면 안 되는데 하는 그런 사람일지라도 죽음은 아무런 차별 없이 그냥 데려갑니다. 너무나 무정하고 잔인하고 비인간적입니다. 저의 물리학과 친구가 있었습니다. 대학교 때 정말로 똑똑하고 이름 자체가 김영재였습니다. 제가 그 친구를 보면서 내가 물리학을 해도 되나 고민을 했었습니다. 보통은 수업을 듣고 학점을 따는데 그 친구는 시험을 패스에서 학점 따고 그랬습니다. 프린스턴 대학교에 유학 와서 블랙홀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해서 모교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정말로 젊은 총망받는, 한국 물리학계의 큰 인물이 될 거라고 모두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포항공대에 세미나 하기 위해서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갑자기 죽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모릅니다. 저 두뇌가 저렇게 가면 안 되는데, 상상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아까운 것은 둘째 치고 인생이 너무나 무의미한 것입니다. 죽음은 그런 것입니다. 우리 인생들을 그렇게 모든 것을 앗아가고 영원히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가슴마다 안기는 것이 죽음입니다. 우리의 원수죠. 이 죽음을 이기실 분은 하나님밖에 안 계십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다시 살리심으로 부활이 진짜라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이죠. 이것이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우리들이 이 소식을 듣고 전하기를 원합니다. 지금도 이 소식을 들어야 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사랑하는 사람, 가족을 또 자녀를 잃어서 아무 소망 없이 그 상처를 평생 안고 살아가야 되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분들에게는 예수님 부활 소식 이것 밖에는 약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만이 그분들에게 치유가 되는 것입니다. 이 소식 전하지 않고 우리가 뭐 하겠습니까? 다른 방법으로는 치유가 없어서 죽을 때까지 괴롭게 살아야 되겠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살려 주셔서 반드시 사랑하는 가족을 자녀를 다시 만나게 하실 것입니다. 이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이 우리들의 사명입니다.이 세상에 이것을 전하라고 우리들을 교회로 세워 주신 것입니다. 이 가장 귀한 소식을 우리들이 받았기 때문에 전하기 원하고 그것을 위해서 우리들이 섬기고 사람들에게 또 우리들의 선한 행실로서 교회로서 책임을 다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저는 학생 때 역사를 안 좋아했습니다. 연대를 외울 것도 많고 복잡한 사건들이 많고 사람 이름도 많아서 암기해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안 좋아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나니까 역사가 얼마나 재미있어졌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전해야 하는데 세계 지도를 보면 지금도 예수님 믿지 않는 나라가 얼마나 많습니까? 중동에는 대부분의 나라가 이슬람이고 아시아에는 또 힌두교, 불교도, 국가도 많이 있습니다. 왜 이 나라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을까? 그런 것이 당연히 궁금해졌고 그 배경을 알려니까 역사를 알아야 되는 거예요. 그리고 서유럽 역사는 옛날에는 저한테는 굉장히 먼 나라 이야기였거든요. 나랑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투닥거리는 이야기가 멀게 느껴졌는데 예수님 믿고 나니까 그 기독교 사회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가 되는 거지요. 그러니까 훨씬 이게 잘 이해가 되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은 역사를 굉장히 좋아합니다.
서양의 역사의 아버지라고 하는 헤로도투스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리스인인데 헤로도투스가 가진 질문이 있었습니다. 너무 궁금한게 뭐냐면 페르시아 전쟁, 페르시아와 그리스가 전쟁을 하는데 페르시아는 그 당시 세계 최대 최강에 막강한 나라고 그리스는 기껏해야 몇몇 산골의 도시 국가 몇 개가 연합한 것인데 사이즈로도 말도 안 되게 비교도 안 되는데 어떻게 그리스가 이겼냐는 것입니다. 페르시아가 당연히 이길 줄 알았는데 졌거든요. 너무 궁금한 것입니다. 그래서 헤로도투스가 이 질문에 대답을 얻기 위해서 실제로 찾아갑니다. 그래서 페르시아, 그리스 여러 지역들을 여행하고 기억이 있는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탐구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결과를 쓰고 제목을 히스토리라고 붙였습니다.이 히스토리라는 말의 뜻은 탐구, 연구라는 뜻입니다. 그 자기가 연구 보고서 이렇게 쓴 느낌이거든요. 그런데 그 말에서 히스토리가 역사가 되었습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바울이 베드로를 심방하려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말이 있는데 심방한다는 말은, 실제로 찾아가지요, 이 성도님이 잘 계시는지 그냥 전화로만 묻는게 아니라 실제로 찾아가서 잘 있는지 본다면 탐구하는 건데 그게 히스토리입니다. 그만큼 실제로 관심을 가지고 그 사람에게 찾아가서 이야기하고 그것이 원래 역사라는 것이지요. 그니까 역사는 사람 사는 이야기. 결국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아오면서 스토리들이 많이 있겠지 않겠습니까? 그 얘기니까 사실 얼마나 흥미진한지 모릅니다.
성경은 역사적인 문서이고 우리 기독교는 역사적인 믿음입니다. 유대교도 마찬가지고 이슬람교도 그렇습니다. 역사적인 신앙이거든요. 하나님께서 실제로 역사 인류의 역사 가운데 일하셔요. 그래서 구약에서도 모세 때 출애굽 당시에 보면 이스라엘 나라가 이집트에 있다가 실제로 해방되어서 나오고 이스라엘 왕국에 세워지고 하는 그런 역사들 하나하나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거지요. 하나님께서 그 나라들을 세워 주시고 사람들이 그 왕국 가운데 살도록 일일이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신앙이지요. 신약 성경 예수님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시는 때는 로마 제국이 탄생하는 시기와 똑같습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로마가 이전에는 공화국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공화국이 거의 없는데 로마는 원래 공화국입니다. 그래서 로마 군인들이 SPQR이라는 문자를 씁니다. 그건 뭐냐면 세나투스 그러니까 의회죠, 그다음에 포풀루스 백성들 로마누스 로마의 의회와 백성에게 충성한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공식적으로는 로마 군인들은 황제보다는 의회에 충성한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는 안 그렇지만은 그렇게 로마가 오랫동안 공화정이었다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황제로 등극하는 그때 예수님이 태어나시는 거거든요. 그다음에 예수님이 활동하실 때는 2세 티베리우스 황제 치세입니다. 로마 제국의 탄생지 탄생기와 또 전성기가 신약 성경에 배경이 되는데 굉장히 중요한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다른 종교들 가운데는 역사적이지 않은 종교도 있어요. 역사랑 별로 상관이 없고 어느 시대 어느 어 나라에 갔다 놔도 큰 그런 역사적인 배경에 상관없는 종교가 있는데 예를 들어서 불교가 그렇습니다. 불교는 부처님이 언제 어느 나라의 왕자로 태어나셨다는 사실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그 가르침이 중요하다고 얘기하지. 그래서 불교의 가르침 중에 첫 번째는 인생은 괴롭다, 두 번째는 괴로움의 원인은 집착이다, 이렇게 일반 원리를 가르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불교는 어떤 철학적이고 교훈적인 교리 가르침이 중요한 거지 그 역사적인 배경은 중요하지 않아요. 부처님이 언제 어디서 그런 얘기를 하셨다고 해도 차이가 없거든요.
그러나 유대교와 기독교는 역사적인 배경을 빼놓으면 설명할 수가 없어요. 사실은 예수님께서 지금 하시는 말씀이 굉장히 강하잖아요.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솔직하게 그리고 마음 열고 읽어 보면 이 말씀을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실천할 수 있나? 도저히 우리가 이대로 살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말씀이에요. 예수님께서 오늘 하시는 말씀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않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고 하십니다. 사람이면 마땅히 부모님을 사랑하고 자녀들을 사랑해야 되잖아요. 저도 제 자녀들을 당연히 너무 사랑하고 사실은 하나님을 위해서 애쓰고 시간 드리는 것보다 제 자녀들을 위해서 드리는 시간이 더 많아요. 자녀들을 당연히 사랑해요. 그런데 예수님 말씀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니까 제 마음속에 예수님 앞에 그럼 죄책감이 들죠. 예수님은 아들이나 딸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라고 하는데 정작 내 삶의 모습은 그렇지 않은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의 이런 말씀이 너무나 극단적이고 강한데 이런 말씀을 도대체 누가 그대로 순종할 수 있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지요. 예수님 말씀에 가진 건 모두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정말 얼마나 되겠어요? 눈이나 손이 죄지으면 눈 빼라, 손 잘라 그런 말씀들 너무나 극단적이란 말이죠.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이렇게 완전한 온전한 헌신을 요구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 우리가이 말씀 듣고 그러면 진짜로 그렇게 하자 이러면서 부모님 버리고 자녀 팽개치고 그러면 되겠습니까? 그럼 또 안 된다고요. 이 말씀 읽고서 자녀들 신경 안 쓰면 안 돼요.
극단적인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순교를 당장 해야 되는 경우. 예를 들어서 일제 시대 때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감옥에 갇혀서 예수님을 부정하지 않으면 순교해야 돼요. 예수님 안 믿는다고 한마디 하면 풀려나요. 그런데 그렇게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끝까지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고 고백한 그 사람은 순교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자녀들이 있는 거예요. 나는 순교하면은 하나님께 가서 영광이고 다 좋다 이거예요. 내 자녀들은 어떻게 하나요? 눈에 밟히지 않겠어요? 자식들이 만약에 방문 오면 그 자녀들 보는 심정이 어떻겠어요? 그럴 때이 말씀이 적용되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 그런 순교해야 된다거나 그런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이 말씀이 그대로 적용이 돼요.
그런데 이것을 분별할 필요가 있는데 이 역사적인 상황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이 때는 로마 제국이 아주 최전성기이고 그 때문에 다른 유대인 같은 이런 다른 이방 민족들을 억압하고 군사적으로 이렇게 다스리는 그런 때이기 때문에 이 당시에 유대 사회가 굉장히 불안해요.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은 위기 상황이고 언제 누가 잡혀가서 죽었다 그래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아요. 십자가 형이라는 것이 정말로 제일 끔찍한 형벌인데 이거는 그냥 아무런 그냥 보통 범죄자들을 그렇게 굳이 죽이지 않아요. 그냥 도둑질하다 잡혔는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형은 로마 제국에 반역했을 때 본보기로 그렇게 하는 거거든요. 감히 로마 제국에 대해들면 이렇게 된다는 걸 보고 사람들이 두려워해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사람을 멀쩡한 사람을 나무에 못 박아서 높이 내달아 놓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위에서 끔찍한 광경을 사람들이 보면서 몸소리를 치면서 아, 나는 로마 제국에 정말 순종해야 되겠구나 그런 힘과 군사력과 폭력으로 다스리는 그런 불안하고 위험한 사회였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당시에 이번 주말에 또 십자가 형이 있다고 해도 사람들이 무덤해요. 워낙 그런 일이 많으니까 놀라지도 않습니다. 어 그래 몇 명인데 그러는 거지? 세 명이라는데. 어 그래? 저번에는 800명이었는데 뭘, 이런 식입니다. 실제로 어떤 유대 왕이 나쁜 거를 로마인들한테 배워 가지고 자기 동족인데 자기한테 반대한다고 800명을 십자가에 못 박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 역사적인 배경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말로 하나님의 의에 목 마르고 의해 줄인 사람은 정말 거의 제정신으로 살기가 힘든 때인 것이지요. 이 악한 세상 그냥 외면하고 그냥 나는 내 생활만 하면서 그냥 소서민으로서 살면 모를까,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의와 진리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조금이라도 갈망하는 사람은 도저히이 눈으로 보 보이는 현실이 받아들일 수가 없는 그런 때였습니다. 바로 그런 때에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붙들려서 십자가 달리기 위해서 끌려가실 때 그 예수님을 보고 예루살렘의 여인들이 막 통곡을 해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 여인들을 보면서 나를 위해서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해 울어라 그러셔요. 왜냐면은 예루살렘이 곧 군대에 둘러싸일 거예요. 그래서 다 파괴되고 성전도 돌 위에 돌 하나가 남지 않고 다 파괴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다 내다보시고 그 도시가 나라가 완전히 황폐되고 사람들이 다 죽고 노예가 되는 미래를 아시기 때문에 너희 자신과 너희 자녀들을 위해서 울라고 말씀하셔요. 그런 때인 것입니다.
그런 험악하고 위험한, 언제 누가 죽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그런 때가 사실은 인류의 역사를 보면 더 많습니다. 그런 때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지금은 하나님 나라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제 가까이 온다는 것은 사실 얼마나 놀라운 소식인지 몰라요. 이제는이 악한 어둠과 사탄이 지배하는 이 세상이 이제는 끝이 나고 하나님 나라가 곧 온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큰 희망인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따라 나서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극단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 나는 예수님 따르고 싶은데 저희 아버지가 지금 돌아가셨으니 아버지 장사하고 오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안 된다 그러시거든요. 그만큼 급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런 극단적인 요구를 하시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거는 그야말로 모든 것 다 버리고 예수님 따르고 심지어 부모와 자녀까지도 뒤로 하고 예수님 따라야 되는 그런 것입니다. 그런 역사적인 배경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이 이렇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 그리고 실제로 성경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들은 다 구체적인 역사의 그 상황이 있습니다. 아무한테나 모든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그런 말씀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셔요. 누가 들어도 맞는 말이야. 음. 그런데 실제로 실제로 와닿지는 않는 그런 말씀. 그런 것은 성경에 없어요. 하나님 말씀하실 때는 각 사람에게 구체적인 상황에서 구체적으로 말씀하셔요. 나 자신에게도 구체적인 상황이 있지요.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그런 상황이 있는 나에게만 주시는 말씀이 있는 것이지요. 바로 그런 배경이 있다는 것을 우리들이 알고 복음서를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 지금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그 질문이 나오는 것이지요. 그 당시 예수님 당시의 유대 사회, 로마 제국의 그 폭력적인 지배를 받고 있고 근데 그 와중에 또 독립운동이 계속 일어납니다. 그래서 열심당원이라는 사람들은 계속 독립하기 위해서 무장 투쟁을 하고 있는데 그 사람들이 뭐가 힘이 있어서 뭐 군사력이 있어서 그렇게 하는게 아니고 진짜 깡으로 좋게 말하면 믿음으로 합니다. 구약 성경에는 하나님이 완전히 말도 안 되는 약한 상태인데도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서 구원해 주시는 게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또 우리 구원해 주실 거야 하면서 믿음으로 로마 제국에 말도 안 되는데도 군사적으로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렇게 되니까 사회는 더 불안해지는 거죠. 그러니까 사람들이 평안한 날이 없는 그런 사회에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분별을 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때는 감사하게도 그렇지는 않다고 봐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부모도 버리고 자식도 버리고 예수님 따라야 문자대로 그렇게 할만큼 그렇게 해야 되는가? 지금 우리가 그렇게 하면 그 안 됩니다. 그거는 성경 말씀을 잘 분별하지 못하는 거예요. 그런 극단적인 상황이 있고 그런데 또 각 사람에게 지금 우리에게 하나님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들은 언제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비교적 평화를 누리고 있고 2차대전 한국 전쟁 이후에 세계가 비교적 그래도 큰 그림으로 보면 미국과 한국과 이렇게 우리 세대는 특별히 또 저의 부모님 저와 저의 자녀 세대는 그래도 비교적 전쟁에서는 조금 어 거리가 있었습니다. 지금이 시간에도 전쟁이이 세계에 있지만은 그런데 이게 도리어 예외적인 것이죠. 그러니까 언제 또 이런 위험하고 전쟁이 있고 이런 상황이 또 닥치더라도 놀래서는 안 되고 어 이게 웬 일이야? 깜짝 놀래서 마치 일어나면 안 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그렇게 허둥거릴 일이 아니고 아 이것이 예수님 말씀하시는 그 상황이구나 그렇게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되겠는가? 이 세상에 미련 두면 안 되겠지요.이 세상이 너무 좋은 거예요. 세상에 내가 가진게 너무 많아요. 그래서 와 이거를 이제 다 버려야 돼. 너무 아까워. 이렇게 살게 된다면 그것은 예수님 원하시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물론 필요를 가지고 하나님 주시는 일용할 양식과 우리들의 삶을 위한 우리들의 집과 또 차와 그런 것 다 필요합니다. 학교와 직장과 다 필요해요. 그런 것까지 다 버려라. 그것은 도리어 지금 우리들의 상황에서는 무책임한 것입니다. 예수님 믿기 때문에 다 버리고 직장도 학교도 다 포기하고 다 헌금하라고 어떤 종교 지도자가 가르친다면 그것은 이단입니다. 분별을 할 필요가 있지요. 그러나 우리들은 만약에 이런 종말의 상황이 지금 우리에게 찾아온다면 언제라도 가볍게 척척 짐싸서 주님 따라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늘 그렇게 한다고 하잖아요. 그분들은 언제나 도망다닐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짐이 무겁지 않아요. 언제라도 떠날 수 있도록 그런 삶이 몸에 비어 있는 민족이라고 합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서 나는 가진게 너무 많아, 떠나기가 떠나려고 하니까 뒤에서 잡아당기는게 너무 무거워, 그런 삶은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우리의 일상의 믿음이 중요합니다. 평소에 물론 이런 환난과 또 마지막 때가 언제 올지 모르지만 그때까지 우리들은 일상 가운데서 나의 삶을 성실하게 살고 양식을 위해서 일을 해서 나의 빵을 벌고 이게 중요합니다. 열심히 일을 해서 가족을 부양하고 이런 일상적인 생활을 우리들은 여전히 성실하게 영위합니다. 그게 크리스천의 삶이에요. 성실하고 정직하게 과하지 않게 그러나 나의 삶의 중심은 하나님 나라에 있고 성도들을 이웃들을 섬기는데 있습니다.
우선 순위는 중요하지요. 그러면서 나의 삶을 허비하지 않고 시간을 아껴서 하나님을 위해서 또 나의 가족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매일매일 주님 앞에서 사는 삶 하루하루가 유별나지 않아도 똑같은 삶 가운데서도 주님 앞에서 주님 오늘 하루도 나의 삶을 지켜 주셔서 내가 이렇게 일할 것이 있어서 일을 했고 이렇게 빵을 벌어들여서 내 가족을 부양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는 일상의 삶이 있지 않습니까? 중요합니다. 이것을 행하시고 결혼할 일이 있으면 결혼하시고 자녀를 낳으시고 이렇게 일상적인 삶을 살지만 마지막 때가 언제라도 올 수 있으니까 우리들은 준비되어 있고 우리들의 삶에 언제라도 그렇게 주님 따를 수 있는 그런 무게 중심 우선 순위는 분별해야 되겠다. 그것이 바람직한 성도의 삶이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주님 앞에 어 겸손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38절,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이번 여름 수련회를 통해서 오늘까지 마태복음 10장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이것을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하고 예수님께서 그토록 우리에게 전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나라가 우리들에게 가장 귀한 것이 되기 바랍니다. 우리들은 그 사명을 위해서 부름받았으니 그것을 위해서 헌신하고 주님 앞에서 늘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는 우리들의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람들이 흔히 천국이라 그러면 죽고 나서 가는 데로 생각합니다. 우리 찬송가에도 천국에서 만나보자 그런 찬송가 있죠. 그게 장례에 대한 찬송가예요. 죽고 나면 천국에 간다. 그 말 맞아요. 틀린 말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거는 그 정반대예요. 죽기 전에 천국이 온다 그러잖아요. 죽고 나서 천국에 가는게 아니라 죽기 전에 천국이 온다 그러셔요. 그러니까 포인트는 천국이 우리가 죽고 나서 가는게 아니고 이 땅으로 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땅에서 있을 때 우리가 살아 있을 동안에 이미 천국을 살고 경험해야 되겠죠. 그런데 여기서이 천국을 우리가 잘 이해를 할 필요가 있죠. 이 천국이 어떤 의미냐? 우리가 살아가는데 그러면 내가 직장이나 학교나 여기에서 천국을 한번 이루어 보자. 그렇게 적용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좀 애매해요. 어디까지 그럼 천국인가? 내가 직장에서 예를 들어서 일을 하는데, 내가 만약에 비즈니스를 하면 어디까지 천국이냐 사실은 그게 기준이 애매하거든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천국을 말씀하시는 것은 그거랑 좀 달라요. 내가 직장 생활하고 학교 생활하고 가정 생활하는데 거기에서 천국을 좀 이루어 보자. 그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이니까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그런 삶을 하나님의 다스리시는 내 직장을 학교를 만들어 보자. 그렇게 사람들이 이해를 하고 또 이렇게 많이 해요. 그런데 좋은 일이지만 그런데 예수님이 정확하게 무슨 말씀하셨는지 좀 보면 좋겠다. 그런 그런게 지금 목적이에요.
그래서 이 천국에 대해서 올해 교회 목표로 삼고 하는데 지금 하는 얘기가 사실 굉장히 중요한 마태복음 10장입니다. 거기에는 예수님께서 이 천국에 대해서 제자들을 실제로 보내시는 대목이거든요. 이거를 보면 천국이 예수님이 어떤 것을 생각하시는지 우리가 알 수가 있겠죠. 4절까지는 예수님이 12제를 뽑으셔요. 12 제자들 이름이 쭉 나와요. 예수님의 제자들 하면은 좀 엉성할 때가 많아요. 실수도 많고 자기들이 다투기도 하고 예수님한테 혼나고 그러는데 그렇게 처음에는 좀 부족한게 많았지만 나중에는 예수님을 위해서 순교하는 사람들이 되는데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굉장히 큰 능력을 주시거든요. 그러니까 대단한 분들이에요 사실. 근데 예수님께서 12제자 삼으시고 명령하시는 말씀이 여기에 나오죠. 5절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에게도 들어가지 말고 6절 오히려 이스라엘 집에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예수님이 왜 꼭 이스라엘에만 가라고 하시냐? 다른 사마리아인도 있고 다른 이방 나라 사람들도 많은데 굳이 이스라엘 집에만 가라 하시는데 예수님이 꼭 다른 민족을 배척하셔서 그런 뜻이 아니고 뒷부분에 읽어 보면 나오는데 이게 시간이 급해서, 때가 다 되어서 그래요. 천국이 가까이 왔다 그러시거든요. 얼마나 가까이 왔는가? 진짜 가까이 왔어요.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이스라엘 마을도 다 돌아다닐 시간이 모자라요. 그만큼 천국이 가까이 왔기 때문에 지금 이스라엘 집으로 먼저 가라. 그런 뜻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유대라는 말도 있잖아요. 유대라는 말은 외국 사람들이 유대인들을 부를 때 쓰는 말이에요. 외국인들은 우리를 코리안이러고 하죠. 근데 우리는 한국 사람이잖아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은 유대인이라고 하지 않고 만약에 누가 유대인이라 그러면 외국 사람이 그렇게 부른다는 뜻이고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이 자기 자신을,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라는 뜻으로 부르시는 이름이 이스라엘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집에 가라 그러시죠.
그 다음에 7절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포인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이스라엘의 마을로 다 보내시죠. 누가복음에 보면은 두 명씩 두 명씩 짝지어 보내셔요. 혼자 가면 힘들고 두 명씩 두 명씩 아마도 짝지어서 마을 마을마다 보내시는데 그럼 가서 제자들이 뭐 하냐? 이 얘기 하라는 거예요. 사람들에게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표준 새번역에는 너희들이 가면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전파하여라 그렇게 되어 있죠.
그래서 그런 그들이 할 일은 8절이 되겠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한 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져받았으니 거저 주라. 이것이 제자들이 할 일입니다. 마을마다 돌아다니면서, 마을마다 중앙에 가면은 시청도 있고 시장도 있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데가 있을 거예요. 거기에 가서 이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능력을 먼저 주셨겠지요. 가서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제자들도 병든 자를 고쳐 주고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고 이런 능력까지도 주십니다.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고 귀신을 쫓아내게 이런 일들을 막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마을 사람들이 제자들이 이렇게 하는 걸 보고 깜짝 놀라겠죠. 그리고 병든 사람들 이렇게 귀신 들린 사람들을 데려올 거예요. 그럼 제자들이 그들도 다 도와주겠죠. 그러면 사람들이 막 모였어요. 그러면 그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런 일이 있으면 아 이거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그러면 저분들은 하나님의 사자들이다, 하나님이 보내시는 사람들이니까 저분들이 무슨 말씀하시는지 들어보자.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내셔서 이렇게 하신다고 사람들을 알아요. 그러면 그 사람들에게 전할 메시지가 7절에 천국이 가까이 왔다.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 알아들어요. 그분들은 구약 성경을 기본적으로 이제 알고 있기 때문에 자세히는 모르더라도 들은게 많으니까. 그분들은 그게 자기들의 역사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걸 그분들이 다 알거든요. 그런데 뭔가 멀리 느껴졌던 거예요. 천국,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아는데 뭔가 멀리 느껴졌었거든요. 그리고 삶은 힘드니까 그냥 생활 속에서 그렇게 살고 있는데 우리가 이사야 52장의 설교 말씀 들으셨던 것처럼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그런 메시지가 이제 제자들 통해서 왔고 그 천국이 가까이 왔다 그러는 거예요.
8절에서 특별히 귀신을 쫓아낸다는 그런 말씀이 있어요. 성경에서 구약에는 별로 안 나오는데 신약에서 갑자기 많이 나오는 단어들이 있어요. 중요한 단어들이죠. 예를 들어서 신약에는 부활이라는 단어가 갑자기 많이 나와요. 그리고 성령 이런 단어도 갑자기 많이 나오죠. 그런데 신약에서 또 귀신이라는 말도 갑자기 많이 나오거든요. 그런데 귀신이라는 단어가 한국말로는 귀신이라 그러면 옛날에 전설의 고향 그런 느낌이 있어 가지고 좀 상상을 하니까 한국말로는 오해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원래 귀신은 그 디먼이거든요. 데몬, 디몬이라는 단어인데 유대인들에게도 이 단어가 외래어예요. 헬라어거든요.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원래 귀신이라는 디몬이라는 단어가 없어요. 원래 히브리 말이나 아람어에는 디몬이라는 단어가 없어요. 그냥 악한 영이라고 말할 수 있죠. 그러니까 귀신이라는 단어가 헬라어에서 넘어온 외래어를 쓰는 거예요. 그런데 신기하게 헬라어 단어가 들어와서 그런 개념이 이게 실체가 된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나 디몬 걸렸어, 나 귀신 걸렸어. 이렇게 이런 사람들이 나오고 있었던 거예요. 사실 무서운 거고 신기한 거거든요. 어떻게 어떤 단어와 생각이 실체가 되어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영향을 주느냐 이런 것이죠. 그래서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런 영적인 세계를 드러내신 것이고 그리고 기도하면서 그런 것들을 예수님의 능력으로 또 하나님의 사랑으로 쫓아내는 것을 보여 주셨죠. 그래서 사람들이 이것을 인해서 고통받는 것을 주님께서 구원해 주셨는데 이 귀신 디몬이라는 헬라어는 어떤 영적인 현상, 사람이 귀신에 들려서 아프고 그래서 귀신을 쫓아내고 그런 것도 우리들이 생각해야 되고 또 한편으로는 근데 의미가 더 커요. 사람들이 기도원에서 기도하면서 귀신 쫓아내는 그런 거를 많이 생각을 하는데 그런 의미도 물론 중요하고 그런데 좀 더 많은 의미가 있어요. 뭐냐면 헬라어 단어가 들어왔다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헬라 문화가 들어오고 헬라적인 그런 사상이 들어온 거거든요. 그런데 그게 구체적으로 뭐냐면 헬라문화가 어떤 유대인이나 이런 다른 민족에 들어갈 때 헬라 문화를 세우는 것들이 몇 가지가 있어요. 대표적으로 극장이 극장 여러분들께 이렇게 저는 오페라를 너무 좋아해서 오페라 보러 가거나 아니면 뮤지컬이나 보면 다 극장이고 요즘은 케이팝 그래서 노래하고 춤추고 하는 것들이 다 무대잖아요. 다 극장인데 그게 원류가 그리스에서 그런 걸 너무나 잘한 거죠. 그래서 지금 영화에도 헬라에서 그런 예술적인 문화적인 단어 굉장히 많이 왔어요. 예를 들어서 뮤직, 심포니, 오케스트라, 다 헬라어예요. 그러니까 그런 예술적인게 와서 무대에서 다 공연하는 이런 것들이 굉장히 헬라 문화의 아주 좋은 거거든요. 옛날에는 다 무대에서 실제로 연극하고 노래하는데 지금은 TV가 되고 영화관이 되는 거죠. 사람들이 다 영화보러 가고 집에서 여러 가지 비디오 보고 그런 것들이 요즘은 얼마나 잘 되어 있는지 그게 들어온 거예요.
그런데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이런 외래 문화가 확 들어오면 어떻게 되겠어요? 극장이 사람들의 마음을 확 사로잡는 거지요.
또 대표적인 헬라 문화가 뭐가 있냐면 운동 경기장이 있어요. 올림픽 아테니에서 시작하잖아요. 운동 경기 하면 그 넓은 운동장에서 막 젊은이들이 와서 막 달리고 그런 운동 경기가 대표적인 헬라 문화예요. 여러분 그런 운동 경기 구경하는 거 좋아하시나요? 저는 야구장에 한번 가 봤습니다. 워싱턴 내셔널 야구장에 가 봤는데 재밌더라고요. 야구 경기를 실제로 하는 것도 재밌지만 스크린 보면서 야구 경기 보면서 즐겁게 놀다 왔는데 미국 사람들도 풋볼이나 그런 거에 얼마나 열광을 합니까? 운동장에 다 모여서 빽빽하게 관종들이 응원하는 데서 선수들이 운동하면 다들 열광을 하죠. 운동장 이게 대표적인 헬라 문화예요. 또 하나는 공중 목욕탕, 그런 것들이 유대 사회에 들어온 거거든요. 그래서 그전에는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제사드리고 제사장에 이런 설교를 듣고 기도를 듣고 이런 것이 하나님 섬기는 것이라고 알고 있던 사람들한테 헬라 문화가 확 들어온 거거든요. 이게 알렉산더 대왕 정복으로 해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제가 역사를 앞으로 다루려고 하는데 역사를 알아야 됩니다. 특별히 알렉산더 대왕을 알아야 되고 그로 인해서 헬라 문화가 들어오는 걸 알아야 돼요. 알렉산더가 우리 성경에 나와요. 이거 성경 퀴즈 하면 좋았는데 알렉산더가 우리 성경에 나온다. O X 하면 정답은 O, 나오는데 이름으로는 나오지 않고 다니엘서의 어떤 뿔 이렇게 나옵니다. 그니까 비유로는 나오는데 어쨌든 나오는 거죠. 그만큼 중요하고 그래서 헬라 문화가 알렉산더 대왕이 갑자기 정복을 하면서 밀고 들어오는 거지요. 그래서 이건 막을 수가 없어요. 힘으로 들어오는 걸 어떻게 막겠어요? 그런데 힘으로도 막을 수 없지만 그래서 그 사람들이 와서 막 짓는데 극장 지어서 공연하고 운동 경기 하면서 열광하고 목욕하라 그러고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어떻게 되겠어요? 유대인뿐 아니라 어떤 민족이든 그런 일이 벌어지면 어떤 사람은 너무 좋아하는 사람들이 생기겠죠. 가서 즐기는게 뭐 어때? 그런 사람들도 당연히 많이 생겼어요. 그런데 또 어떤 사람은 아 안 되는데, 이거는 외국문화이고 우리가 하나님 섬기는데 방해가 되는데 하면서 막 거부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게 되겠죠. 어느 민족이나 다 그래요. 유대인들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너무너무 그런 거를 좋아해요. 우리가 이 우수한 헬라 문화를 받아들여야 된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너무 걱정하는 거죠. 안 되는데 지금 이러면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데 고민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겠어요.
지금 우리는 미국 문화 안에 있고 사실 미국이 서양 문화의 대표적인 그리고 가장 강한 그런 문명으로 되어 있고 우리들은 그 안에서 살고 있죠. 그러니까 우리들한테는 이 서양 미국 문화가 그냥 공기 같은 거죠. 우리가 이것 없이 살 수가 없고 맨날 보는게 그런 거고 보고 또 그렇게 살죠. 그런데 한 번쯤은 그래도 우리가 좀 스톱하고 생각은 해야 되죠. 이게 정말 나의 하나님 섬기는데 도움이 되나? 요즘은 K문화가 너무나 세계적으로 대단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데 내용이 그래도 정말 하나님 섬기는데 도움이 되나 그런 생각은 해야죠. 근데 안 그럴 때가 많을 거예요. 왜냐하면 사람들이 좋아하는 거는 대개 그런 거잖아요. 사람들이 자꾸 많이 보고 페이를 해야 되니까 만드는 사람들 입장에서도 점점 더 매운 거, 내용들이 너무나 정말 매운 맛 진짜로 이렇게 겁나는 그런 내용들도 너무너무 많죠. 자극적인 거. 근데 지금은 그게 너무나 흔해져서 우리들이 익숙해진 거 같아요. 그런데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은 해야 되겠죠. 그런 것들이 과연 하나님을 섬기는데 도움이 되나? 안 될 때가 많을 텐데, 절제를 해야 될 텐데 그런 고민을 해야 될 거예요. 어거스틴도 그래요. 그분은 라틴 문명에 있었지만 젊었을 때는 방탕해서 살다가 한 30살 때쯤 회심을 하거든요. 30살 때쯤 완전히 사람이 변해서 신앙의 사람이 되고 나중에 그걸 고백록으로 쓰는데 자기가 하나님 믿기 전에 어떻게 방탕했는지 쓰면서 자기가 연극을 좋아했어요. 내가 하나님을 잘 섬겨야 되는데 연극을 보러 가 거기에 비극의 여주인공의 슬픈 것을 보면서 내가 울었는데 내가 내 영혼을 위해서 울지 않고 지옥갈 내 영혼을 위해서 울어야 될 텐데 그게 아니라 연극 중에 그런 여주인공의 슬픔을 보면서 울었으니 하나님 부끄럽습니다. 그런 내용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세상 문화 가운데 있는 그 세상을 보면서 고민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겠죠.
이렇게 되니까 사람들이 어떻게 돼요? 점점 죄의식에 빠지는 거예요. 점점 헬라 문화는 이 세상에 주도하는 문화가 되고 그것 없이 살 수가 없고 쫓아낼 수도 없고 쫓아낼 힘도 없고 주의 자녀들은 다 그런게 좋다고 따라다니고 마음속으로 양심은 찔리고 하나님께는 부끄럽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어떻게 되겠어요? 죄의식에 눌리는 거죠. 예수님이 제사들을 부를 때 베드로가 주님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그렇잖아요. 베드로뿐 아니라 성경에 예수님이 죄인들을 부르시잖아요.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은 저런 죄인들이랑 세리들이랑 예수님이 같이 식사한다고 비난하지요. 사람들이 왜 자꾸 죄에 대해서 그렇게 얘기를 하고 나는 죄인이다 그런 얘기를 하냐면 그 당시에 이런 헬라 문화가 큰 역할을 했어요. 그런 세상 문화는 문화대로 사람들을 누르고 그 가운데서 벗어날 수 없고 하나님께는 죄송하고 하니까 죄의식이 가득할 수밖에 그리고 그 와중에서 사람들이 아 나 데몬 걸려서 나 귀신 들렸어 이런 말이 나와요. 여기서 귀신이라는 단어가 그런 영적인 권세 영적인 형상 그런 의미도 물론 중요하고 그런데 이런 세상 문화 그 유대인들에게 헬라 문화가 들어와서 그들에게 실체가 되어서 귀신이 사로잡힌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을 예수님이 구해 주는 거예요. 그래서 더 이상 그런 세상 문화에 얽매이지 말고 거기로 인해서 죄책감 갖지 말고 또 그것으로 인해서 삶이 파탄나지 말고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멀리가 멀리하지 말고 돌아와라. 하나님께 돌아와라.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 사랑을 회복해라 그런 뜻이 있는 거지요. 그런 뜻으로 예수님께서 귀신 쫓아냈다는 그런 말씀을 우리가 이해를 하면 좋겠습니다.
제자들이 이런 권세를 받았고 예수님께서 예수 이름으로 귀신 쫓아내는 그런 권세를 주셨기 때문에 다 가능했습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했고 사람들이 모이면 전하는 메시지는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래서 9절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음이나 동을 갖지 말라. 그런 천국의 메시지를 전하는 제자들은 어떻게 해야 되냐면 돈이나 그런 여행 경비를 걱정하지 말고 베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이런 여러 가지 여행한다고 이것저것 챙기지 마라, 그럴 필요 없다, 가는 곳마다 너희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실 것이다. 그래서 일꾼이 자기들이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까 가는 곳에서 천국을 전하면 너희들에게 모든 너희들이 받을 것이다. 이런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받는 메시지는 이거 하나 딱 기억해 주시면 저는 만족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셨다. 왜 보내셨는가? 메시지 전하라고. 그럼 그 메시지는 뭐다? 천국이 가까왔다. 쉽죠? 간단하죠? 아주 짧은 이 한 문장인데 요거만 딱 전할 수 있으면 성공입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할 수 있으면 제자들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럼 듣는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알죠? 우리들이 오늘 저녁 그리고 내일 또 이렇게 그런 천국에 가까이 왔다 하는 메시지가 어떤 의미인지 계속 살펴보기를 원하고 우리들이 이 시간에 함께 기도하면서 이 메시지가 나의 것이 되기를 먼저 바라고 그리고 나도 이것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천국은 말 그대로 하늘나라 하나님의 나라 그것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인데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그 복음이 나를 나의 삶에 먼저 실현이 되고 나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그런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제목은 그 나라로 부르심입니다. 예수님이 전하신 천국, 하나님의 나라는 말 그대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이 나라를 모든 사람에게, 특별히 연약한 사람들에게 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당시에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가 오더라도 자기와 직접적인 상관이 있겠나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이 주로 생각하는 것은 어떤 위대한 왕이나 메시아가 와서 적들과 싸워서 왕국을 회복시키고 그 자기들은 거기에 속한 백성이 되겠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나 자신이 주체적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뭔가 역할을 할 것이라는 생각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모든 사람에게,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 하고 생각하는 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인격적으로 사랑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을 부르신다는 것을 전해 주기 원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마태를 부르시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마태는 이 마태복음서의 저자일 것입니다. 우리가 신약 성경을 읽어보자 하고 펼치면 제일 먼저 보는게 마태복음인데 사실 본문에는 마태가 저자라는 말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교회 전승으로서 우리가 아는 것인데 마태는 이 본문에서 자기 자신은 감춥니다. 내가 이 복음서를 썼는데 나는 누구고 그런 얘기를 전혀 하지 않아요. 예수님만 드러내기를 원하고 다만 오늘 본문에서만 마태가 자기 자신에서 대해서 쓰고 있지만 그것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고 그냥 지나가는 느낌이 있지만 그러나 그 중요성은 가볍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다가 마태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 당시에 세리, 즉 세금 걷는 사람인데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걷어서 지배자인 로마 제국에 바치는 사람이니까 동족들에게 미움을 받는 겁니다. 종족을 배신한 사람 그런 느낌이 되겠지요. 또 그 가운데는 부정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더 많이 걷어서 나머지는 자기가 챙기고 그런 느낌이 있기 때문에 세리들은 다 사람들이 미워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예수님이 부르신 거예요.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까 마태가 즉시 일어나서 따랐다고 간단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성경에서 좀 디테일을 생략했을지는 모릅니다. 뭔가 어떤 대화가 오고 갔는데 성경에서 간단하게 표현했을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마태뿐 아니라 베드로나 요한이나 다른 제자들을 주님께서 부르시는 장면들을 보면 분명한 것은 제자들이 그렇게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주저하면서 아 내가 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그런 느낌이 전혀 없어요. 주님께서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까 따랐다는 거예요.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뭔가 질문이 많이 돼야 될 것 같거든요. 주님, 제가 따라가는 거는 좋은데 예를 들어서 언제까지입니까라든지 일주일에 몇 시간, 휴가는 있는지, 집에는 언제 올 수 있는지 그런 질문들이 있을 수 있는데 전혀 그런 거를 예수님께 물어본 느낌이 없어요. 그냥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제자들이 굉장히 엉성한 느낌이 많아요. 자기들끼리 실수도 많이 하고 다투기도 하고 예수님이 책망도 하십니다. 제자들이 굉장히 불완전한 사람들이거든요. 그렇지만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들을 지금 존경하고 그들로 인해서 우리 교회가 세워진 것을 감사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비록 부족한 것이 많이 있지만 예수님께서 따르라 하실 때 즉시 따랐다는 것 이것이 정말로 대단한 믿음이고 우리들이 그분들을 존중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하는 것은 그 당시에는 사실 뜻이 명확합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들은 예수님을 따른다 하면 무슨 뜻인지 약간 막연하거든요. 그래서 말은 내가 주님 따른다 하면서도 실상은 자기 생활하는 그런 경우도 많이 있는데 그 당시 제자들은 주님을 따른다 하면 문자 그대로 따라다니는 거예요. 따르면서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것을 배우고 주님께서 어떻게 사람들을 만나시고 고쳐 주시는지를 다 일일이 보고 따라하는 거지요. 예수님과 같이 생활합니다. 같이 먹고 같이 자고 따라다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것이 무슨 뜻인지는 굉장히 쉬워요.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의 직업을 다 버려야 돼요. 이전에 자기의 생활들 뒤로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른다 하면서 생각은 집에 가 있으면 안 되는 거지요. 매일 집에 전화해 가지고 그 투자한 거 어떻게 됐어? 이렇게 되면 예수님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가족도 버려야 되는 거거든요. 나의 부모, 자식, 부부 다 그런 관계도 다 뒤로 하고 주님을 따라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실 엄청난 헌신입니다. 이 엄청난 일들을 제자들은 한 것이지요. 주님께서 그만큼 확신을 주신 것도 있고 그들 모두가 얼마나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것을 보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사야서 52장 말씀에서 봤듯이 지금 이 세상은 악한 나라들이 다스리고 있습니다. 로마 제국이 당시에 대표적이었고 그 외에도 세상에 수많은 악한 왕들, 사람들이 세상을 다스리고 선한 사람들은 괴로움 당하고 설움 당하고 있는데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것을 보고 싶다. 이 소망이 가장 강렬한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귀한 복음이거든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신 것이지요. 천국이 가까이 왔다. 그러니까 두 말 없이 다 제쳐 놓고 주님을 따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보니까 정말 저분의 가르치심과 저분이 하시는 일과 저분이 사람들 만나시는 것을 보니까 정말 하나님이 저분과 함께 계신다. 예수님께서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시면 정말 그런 것이다. 내가 그것을 볼 거야. 그런 소망이 가장 강렬했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 다 제쳐 놓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하셨으니까 오래 하지 않겠지 그런 느낌이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얼마나 오래 하겠어. 몇 달 몇 날일지 모르겠지만 금방 하나님 나라가 올 거라고 하니까 선뜻 따라 나섰던 모습도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도 그중에 한 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 마태는 일어나 따랐습니다. 근데 마태가 아마도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 친구들을 모아서 식사 자리를 마련한 것 같습니다. 원문에는 그냥 집이라고 나오지만 마태의 집이었을 가능성이 크죠. 그래서 자기 친구들이었던 세리들과 죄인들을 불러서 같이 식사를 하고 예수님과 제자들도 초대가 됩니다.이 식사 자리는 사실 굉장히 의미가 깊지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을 만나시면서 많이 먹이십니다.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 수천 명을 먹이신 사건이 대표적이고 그 외에도 먹는 자리를 굉장히 많이 마련을 하셔요. 이것은 구약 성경에서 천국 잔치를 비유하시는 것입니다. 특별히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구원과 승리와 용서, 백성들과의 화해를 말씀하실 때에 잔치자리에 비유를 하셔요. 오늘 교독문의 이사야 55장에도 그런 말씀이 있었지 않습니까?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다.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을 것이다. 함께 모여서 먹는 이 즐거움이 천국 잔치의 모습이라는 것이에요. 성경에서 먹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고 저는 사실 성경에서 먹는 거에 대해서 다 모아 가지고 공부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도 있습니다. 창세기 1장부터 하나님이 천지 창조하시고 동물들과 사람들에게 맨 먼저 하시는 명령이 먹으라 입니다. 이것이 너희들의 먹을 것이다. 먹어야 사니까, 주님이 너무나 잘 아시니까 우리들에게 먹을 것을 주십니다. 특별히 천국 잔치, 이 세상의 모든 불의가 다 없어지고 하나님이 승리하시고 주님의 백성들이 그 동안에 고난당하고 있다가 다시 하나님이 회복시켜 주셔서 영광 속에 들어가는 그 자리가 천국 잔치인 거예요. 얼마나 기쁘고 복된 자리가 되겠습니까? 예수님이 그것을 다시 재현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먹는 자리를 마련하시고 또 사람은 같이 먹으면 마음이 열리고 얼굴도 밝아지고 서로서로 대화하지 않습니까? 그런 자리를 주님께서는 자꾸 만드십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다 초대가 됩니다. 누구는 올 수 있고 누구는 올 수 없고 그런게 전혀 없어요. 오늘 세리들과 죄인들도 초대가 되었습니다.이 세리와 죄인이라는 단어는 흔히 같이 가지요. 세리는 죄인이라는 느낌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죄인이라는 것은 꼭 무슨 법을 어겨서 감옥에 가야 되는 그런 느낌보다는 그 당시에 율법에 의하면 죄인인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어서 안식일에는 일을 하면 안 되는데 생활하다 보니까 어쩔 수 없이 일을 해야 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거예요. 또 하나님 율법대로 하려고 그러면 얼마나 제한 사항이 많은지 이거는 먹을 수 있고 먹을 수 없고 하면 되고 안 되고 몸을 정결하게 씻고 등등 굉장히 율법 조항이 많은데 그대로 다하면서는 못 사는 사람들이 많아요. 특별히 가난한 사람들 중에, 또는 세상에서 버림받고 사회에서 쫓겨나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야 되는 그런 사람들은 율법을 지킬 수가 없죠. 그런 사람들이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사는 것도 힘든데 하나님 말씀에서 너는 죄인이라고 하니까 이중으로 힘든 것이지요. 그런 사람들 다 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들 초대하셔서 같이 먹고 마시면서 즐거워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 그 깊은 하나님 나라의 정신을 우리가 알 수 있지요. 주님이 전하시는 천국은 이 땅에서 누구나 웰컴입니다. 그저 예수님 사랑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사모하기만 하면, 그리고 내 모습 이대로 주님이 나를 받아 주신다는 믿음으로 나오기만 하면 누구나 웰컴이에요. 너는 돼, 너는 안 돼,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는 풍성합니다. 주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가 잔치상으로 비유가 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누구에게나 풍성하게 임합니다. 부족함이 없고 모자람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은혜와 기쁨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보고 또 불편하는 사람들은 꼭 있게 마련이지요. 오늘 본문에서는 바리새인들이라는 사람들이 나오는데 그들은 율법을 너무 잘 지키는 사람이고 하나님을 너무너무 잘 믿는 사람들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입니다. 금식도 많이 하고 예배도 많이 드리고 기도도 얼마나 많이 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자기들은 의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만하면 내가 하나님 앞에 나갈 자격이 있지. 그런데 나에 비하면 저저 죄인들은 아니야, 저 사람들은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어, 이런 의식으로 가득찬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고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니까 너무나 못마땅한 것입니다. 어떻게 저런 세리들과 죄인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뭐라 그럽니다. 제자들에게 너희 선생은 어떻게 저런 사람들과 같이 식사를 하느냐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꾸만 배제하는 것이죠. 하나님 나라에는 우리 같은 사람이 들어갈 수 있지, 저 죄인들은 안 돼 -- 배제하는 사람들이고 반면에 예수님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 나오기 원하는 사람은 받아들이는 그런 사랑의 마음을 예수님은 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바리새인들이 뭐라고 하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 쓸 데 있다 -- 의사와 병자의 예를 드십니다. 병든 사람, 이것은 비유라고도 할 수 있고 실제로 그렇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들은 병든 사람입니다. 실제로 몸이 병들어서 아픈 사람도 있고 마음이 병든 사람도 있고 영혼히 병에 들어서 하나님 앞에 힘든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병자에 대해 말씀하실 때 어떤 사람은 병자이고 다른 사람은 건강하고 그런 느낌이겠습니까? 아니지요.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웰컴하시는데 사실 그 말씀은 모든 사람이 병자라는 것입니다. 병이라는 것은 원래 우리가 건강해야 되는데 뭔가 몸에 어떤 부분이 어떤 이유로 고장이 나고 약해지고 병균이 침투하고 그래서 아픈 거 아닙니까? 건강한 상태로 돌아가야 되는데 우리가 그런 상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완전하게 창조하셨고 우리들은 하나님과 닮아서 늘 하나님 앞에 옳고 사랑이 넘치고 이웃과 이웃들과 좋은 관계로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 사람의 본래 모습인데 우리 모두가 병이 나 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 얼마나 문제가 많고 서로서로 힘들게 하고 불의하고 거짓말하고 해치고 이 세상이 지금 엉망이 되어 있는 것이죠. 하나님 보시기에 지금이 세상은 병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이사야 1장에 그 딱 이미지가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보시니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맞아서 멍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들을 고쳐 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의사로 오신 것이죠. 우리 모두가 그 예수님의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죄인이지만 죄로부터 지금은 완전히 벗어난게 아니고 하나님이 의롭다고 칭해 주시는 것처럼 우리들이 병자인데 예수님이 우리를 치유해 주시지만 아직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나는 지금 완전해 건강해 그럴 사람이 없고 계속해서 우리들은 치유받고 있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들이 나 자신이나 또는 옆에 누가, 심지어 예수님을 믿건 안 믿건 상관없이 어떤 사람이 저 사람은 왜 저래 할 때도 있고 저 사람이 날 힘들게 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 미워하지 말고 아, 병 나서 그래, 이렇게 생각하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람이 누구나 병들 수 있잖아요. 예수님께서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다, 나는 병을 고치러 온 의사다, 하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는 뜻이 있는 것 같아요. 병은 누구나 걸릴 수 있는 것이죠. 그 사람이 나빠서 그렇습니까? 나도 그 병 걸릴 수 있는데 그러니까 겸손하라는 것이고 그러니까 병든 사람 미워하지 말고 저 사람은 나아야 될 사람이야, 의사가 치료해 주고 돌봐 줘야 될 사람이야, 그렇게 이해를 해 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 사람이 왜 그러는지 조금 이해도 될 수 있을 것이고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하나님 저 사람을 도와주세요. 고쳐 주세요 하면서 이해도 잘 해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병든 자에게 의사로 오셨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죄인들을 미워하지 마라, 배척하지 마라, 도리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천국을 전하시는 것은 저런 사람들을 위해서 오신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호세야 6장의 말씀을 인용을 하시는데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나는 번제가 아니라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는 말씀을 가서 배워라 그러십니다. 주님은 제사가 아닌 자비를 원하십니다. 물론 구약 성경에는 굉장히 많은 제사의 종류도 있고 규칙도 엄격하고 따라서 해야 되고 그런 말씀이 굉장히 많기 때문에 주님은 제사 받기를 좋아하시는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은 그런 형식이나 종교 행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소 한 마리 끌고 와서 하나님께 다 통째로 바쳐도 그 마음이 딴 데가 있으면 소용 없는 것이지요. 모든 제사와 예배와 종교 행위의 본질은 정말 하나님 마음을 담는 것입니다. 자비로워지는 것입니다. "헤세드"라는 단어는 긍휼히 여긴다, 그리고 공감한다, 이해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정말로 불쌍히 여긴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사람이 어떤 잘못을 했더라도 그에게는 나름의 이유도 있을 수 있고 어떤 환경이나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그럴 수도 있는데 그 사람을 이해해 주고 공감해 준다는 그런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으로만 그렇게 불쌍히 여기는 것뿐 아니라 그 사람을 실제로 도와준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행동이 따라가는 단어거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비롭게 여기시면서 정말로 우리를 품어 주시고 사랑해 주시고 우리를 위해서 실제로 행동하십니다. 그래서 문자 그대로 우리들을 건져 주시고 살려 주시죠. 그것이 하나님의 자비인데 이 자비를 배우라는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정말로 내가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하나님의 자비를 배워야 되지 않겠습니까?
번제가 아니라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호세아의 말씀인데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은 종교 생활 열심히 하고 경건하고 기도 많이 하고 금식하지만 결국은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지를 전혀 모르면서 겉보기에 기도나 금식이나 아무리 많이 하면 뭐 하겠습니까? 소용 없는 것이죠. 정말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이렇게 모든 사람, 특별히 죄인, 세리,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특별히 주님께서 더 돌보시는 것입니다. 마치 부모가 자녀들이 많이 있는데 그중에 연약한 자녀가 있으면 더 마음이 가는 것은 당연하잖아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의롭고 아름답게 창조하셨는데 인간들의 죄로 인해서 그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으면 하나님의 마음이 아프시지요.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왜 이런 일이 벌어집니까 하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원망하죠. 하나님은 그것을 슬퍼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창조하신 모든 사람들이 귀하다, 특별히 세상에서 가난하거나 병들었거나 버림받은 사람들이 세상에서는 멸시받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들도 사랑하시고 그들에게 더 마음이 주시는 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노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 모두를 초청하시는 이것이 예수님의 천국의 의미가 되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에게나 다가가시지만 특별히 주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주님 앞에 나오고 주님께 부르짖는 사람들을 돌보시고 찾아가십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마을마을마다 돌아다니면서 찾아가셔요. 그래서 마음은 있어도, 내가 하나님께 나가고 싶은데 용기가 없든지 사정이 안 돼서 못 나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어요. 지금 마태도 일을 하고 있는 자리였거든요. 세관에 앉아 있는데 주님께서 찾아가시고 부르신 것이죠. 그러자 마태가 일어나서 따라가는 것인데 주님은 이렇게 일일이 찾아가시고 약한 사람들을 어루만져 주시고 하나님 나라가 너희들의 것이라고 심지어 세리들과 죄인들이 하나님 나라에 먼저 들어가리라 그랬습니다.이 바리새인들이 들으면 기절할 이야기가 되겠죠. 이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천국의 복음이 이것입니다.
이 자비의 마음을 우리들도 배워야 합니다. 크리스천들이 교회 생활을 오래 하면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굳어지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함께 신앙생활하는 우리들이 뭔가 인격적으로 도덕적으로도 더 우월한 것 같은 생각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아무리 옳은 소리를 해도 아니야, 내가 저 사람보다는 더 낫지 하고 우월감을 갖게 되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고 벽을 세우는 것인데 그것은 오늘 예수님의 마음과 굉장히 다르지요. 예수님께서 자비를 베풀어라, 누구든 초대하여라 하시는 말씀은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에게 특별히 더 해당이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보면서 속으로 멀리하거나 나는 저 사람보다는 낫다고 우월감을 가질 때가 많은데 그것은 우리들이 다시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님 마음은 그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도 하나님 보시기에 불쌍히 여기고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실 그런 사정이나 그런 상황들이 있고 그들 속에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도덕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지식적으로는 그들이 훨씬 우리보다 나을 때도 많이 있고요. 그런데 우리가 무조건 예수 안 믿으니까 하고 멸시하고 내가 더 낫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바리새인들처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자비의 말씀을 배우고 실제로 찾아가셔서 사람들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먼저 다가가셔서 용서하시고 그래서 그들이 변화를 받고 하나님을 믿게 하시는 그러한 예수님의 마음이 담긴 나라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다시금 새기고 우리들도 그렇게 하는 우리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