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읽은 이사야 55장은 제가 참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40장부터 55장까지는 하나님이 특별히 위로와 평화의 말씀을 전해주시는 대목입니다. 그 말씀을 듣는 일차적인 대상은 포로로 잡혀가 있는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나라가 망하고 도성은 불탔으며,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가 먼 나라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황폐해지고 낙담해 있는 주님의 백성들에게, 주님께서 이제는 힘을 내고 위로를 받아 다시 믿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격려하시는 부분이 바로 이사야 40장에서 55장입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은 그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너무나 귀한 초청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오라’고 부르시는 말씀인데, 아무런 조건이나 대가 없이, 필요한 것 없이 그냥 오라고 하십니다. 누구나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는 그런 초청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오늘 1절 말씀을 보시면 ‘오라’는 감탄사로 시작합니다. 우리도 기도할 때 하나님께 이것저것을 아뢰기 전에, 어떤 날은 감탄사가 먼저 나올 때가 있습니다. “오, 주여!”, “하나님 아버지!” 하고 부르는 것은, 단순히 부르는 행위를 넘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강하게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오라.” 그런데 성경에서 이 단어가 나올 때는 분위기가 좋기보다는 안 좋을 때가 많습니다. 이 말의 뜻은 ‘아이고’에 가깝습니다. ‘어쩌나, 세상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 자녀들을 보시고 무언가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아이고야’ 하는 느낌이 드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백성들의 현실이 어떠한지 이사야 1장에 잘 나타나 있는데, 마치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멍투성이인 모습과 같기 때문입니다. 두들겨 맞아서 멍들고 터지고 상처 입은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영적으로 그러했습니다. 육신적으로는 사실 잘 살고 있었고, 물질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서 괜찮아 보였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니었습니다. 영적으로는 죄악이 너무 많아서 세상으로부터, 원수 마귀로부터, 또 자기 자신의 죄책감으로부터 맞아 상처투성이가 된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어쩌나’ 하는 마음을 가지신 것이죠.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요, 자녀요, 기르시는 양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을 보시는데 그렇게 상처투성이로 있으니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시겠습니까? ‘세상에,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이 ‘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부르십니다.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우리 모두 목말라 본 경험이 있습니다. 목이 타는 듯할 때 얼마나 간절히 물을 원하겠습니까? 이 말씀은 실제로 물이 없어 목마른 사람을 가리키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만큼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그렇게 간절하고 애타게 불러본 적이 있으십니까? 무언가 힘들 때 더욱 그렇게 됩니다. “하나님!”, “주여!” 하며 정말 간절하게 매달리듯이 기도하는 경험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렇게 애타게, 목마른 자처럼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 사실 평소에도, 별일 없이 잘 지낼 때에도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야 하지만, 우리는 대개 힘들 때 그러기가 쉽습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문제가 생겼을 때, 어쩔 줄 모를 때 주님만 붙들고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목마른 자가 되어 간절히 주님께 매달립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니 때로는 우리가 고난을 겪을 때 힘들고 어렵다고만 생각하기보다, ‘아, 이것이 하나님께 내가 목마른 자처럼 간절히 매달리라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라고 주시는 기회이구나’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지금 이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 종이 되었습니다. 먼 나라에 가서 이방 민족의 종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약 50년이 지나 마침내 해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본향으로 돌아와도 독립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종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와 같은 책을 보면, 포로에서 돌아와 예루살렘 성을 다시 세우고 성전을 짓지만 여전히 페르시아 사람들의 종노릇을 합니다. 그들은 “주여, 우리 조상들이 하나님을 섬기던 이 땅, 이 복 받은 귀한 땅에서 우리가 종이 되었나이다”라고 기도합니다. 그 심정을 상상해 보면 너무나 답답하고 괴롭습니다. 종이 되어 나뿐만 아니라 내 자녀들도 종으로 살아야 한다면 그 마음이 얼마나 메이겠습니까? 그 괴로운 마음 가운데 하나님만 간절히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약속하신 대로 이제는 우리를 용서해 주소서. 우리와 우리 조상들의 죄 때문에 이렇게 되었지만, 이제는 이 모든 죄로부터 우리를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시며 치유하여 주시고, 다시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이켜 구원해 주소서.” 그 간절한 기도가 이 백성들의 ‘목마른 자’라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하나님이 모든 이들을 초청하십니다. 그 모든 사정을 아시고 “너희가 목마르구나, 너희가 이제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있구나. 나오너라, 물로 나아오라”고 하십니다.
이 대목에 자꾸 나오는 동사가 ‘오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오라’고 부르시는 말씀이 반복됩니다. “돈 없는 자도 오라.” 이 세상은 돈이 없으면 환영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것이 없어도, 자격이 없어도, 내 자신이 스스로 보기에도 너무 부족하고 형편없는 한심한 사람일지라도 외면하지 않으시고 누구나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와서 사 먹되.” 히브리 원어로 읽어보면 동사 하나하나가 굉장히 강조되는 느낌을 받는데, 이 대목이 그렇습니다. 원래 느낌은 ‘너희는 와라! 사라! 먹어라!’처럼 하나님께서 한 단어 한 단어마다 힘을 주시는 것 같습니다. “너희는 와라.” 하나님께서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께 갈 때 막지 않으십니다. ‘오지 마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와라, 누구나 와라.” 혹시라도 마음이 힘들어 오지 못할까 봐 자꾸 반복하십니다. “괜찮아, 와라. 나는 하나님이고 너희는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이다. 비록 과거에 그런 어려움이 있었지만 괜찮으니 와라.” 그런데 사실 우리가 하나님께 잘 가지 않으니, 하나님은 심지어 우리에게 오십니다. 우리가 오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오십니다. 그날이 바로 성탄입니다. 우리가 그날을 기다리는 대림절을 지내고 있는데, 우리가 부족하고 무지해서 하나님께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고, 또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간절히 찾으시는 것도 몰라서 나아가지 않으니 하나님이 그냥 짐을 싸서 우리 곁에 오시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모습으로 하나님이 우리 곁에 친히 오셔서 함께 계시는 것이지요. 그만큼 하나님은 우리를 가까이하기 원하십니다. 지금도 우리가 ‘오라’는 그 말씀을 믿고 주님 앞에 가면,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환영하시고 안아주십니다. 돌아온 탕자를 안아주는 아버지처럼 우리를 안아주시고 환영해 주십니다.
“너희는 와서 사되… 먹어라.” 하나님은 “사라”고 명령하십니다. 앞서 돈 없이, 값없이 괜찮다고 하셨는데 왜 다시 사라고 하실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이 모든 은혜와 구원은 사실 너무나 값진 것이기에 당연히 대가가 치러져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값을 지불할 능력이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초청하시며 와서 사라고 하시는 것은, 이것이 공짜라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의 목숨 값으로 이미 그 대가가 온전히 치러졌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초청하시면서 우리가 내야 할 돈까지 대신 다 내어주셨습니다. 그 값은 바로 예수님의 목숨과 피와 모든 사랑입니다. 온 천하를 다 주어도 사지 못할 우리를 위해 주님께서 대신 값을 치러주셨기에, 우리는 그 값으로, 즉 예수님의 목숨 값과 그 사랑으로 지불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먹어라.” 하나님께서 태초에 인간을 지으시고 첫 명령으로 주신 것이 ‘먹어라’였습니다. 모든 풀과 과일을 먹고 우리 자신이 살아야 합니다. 나 자신의 생명을 돌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먹어야 하고 육신으로 삶을 영위해야 하는 존재임을 아십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에도 일용할 양식, 매일 먹을 양식을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육체의 건강을 위해, 살기 위해 먹는 생존의 차원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존귀히 여기신다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에 한 식사 장면이 나옵니다. 아주 나쁜 귀족 돈 조반니가 좋은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고 있을 때, 옆에서 시중드는 하인 레포렐로는 침을 흘리며 배고파합니다.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하인은 주인에게 바쳐야 할 닭고기 같은 것을 몰래 먹습니다. 주인이 그것을 눈치채고는 짓궂게 놀립니다. 입안에 음식이 가득한 하인에게 자꾸 말을 시키니, 하인은 우물쭈물하며 당황합니다. 얼마나 수치스럽겠습니까? 그렇게 먹는 것은 단지 육신을 위한 것일 뿐, 자존감에 큰 상처를 줍니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께서 ‘먹어라’고 초청하시는 것은 단순히 먹고 살라는 차원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원래 하나님의 귀한 생명을 받았고, 하나님의 귀한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존재입니다. 그 귀한 생명을 돌보기 위해 먹어야 하고, 또 서로 먹여주어야 합니다. 그만큼 먹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초청하셔서 “와서 값을 치르고 사서 먹되, 너희 자신이 이만큼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다시금 새기면서 자기 자신과 이웃을 돌보고 함께 먹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포도주는 기쁨입니다. 단지 음료일 뿐 아니라 기쁨을 상징합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을 여러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기쁨은 감정이기에 보통 명령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동은 명령할 수 있고, 속마음으로는 싫어도 억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신 뜻은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자신의 감정을 터치하시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그것을 내 마음대로 한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포도주와 젖을 사라”, 즉 기뻐하라고 하시는 것은, 이미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놀라운 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사실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엇이 기쁩니까? 비록 몸은 종살이하고, 고단한 세상에서 삶의 짐을 지고 가느라 힘들지 몰라도, 우리 가장 깊은 곳에서는 기뻐합니다. 물론 힘든 일이 있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어야 할 때도 있지만, 그 마음속 깊은 곳에는 평화와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기뻐합니다. 시편 기도가 “구원의 기쁨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고 간구하는 것처럼, 비록 이 세상에 기뻐할 일이 없어 보일지라도 다시금 내가 누구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지. 하나님은 누구신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시지. 하나님과 나의 관계는 영원히 끊어지지 않지.’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주셨고, 내가 장차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들어갈 사람이라는 것, 나에게는 영원이 약속되어 있다는 것, 하나님과 함께 누릴 영생의 복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영광에 비하면 지금 이 땅에서 조금 잘 살고 못 사는 것은 정말 비교도 할 수 없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하나님이 주셔서 나를 구원해주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기뻐할 수 있습니다. 사실 가만히 상상해보려 해도, 내가 나중에 정말 하나님 앞에서, 천국에서 하나님과 영생을 누린다는 것이 어떤 삶일지, 어떤 존재가 될지 상상이 잘 안 됩니다. 그저 말도 못 할 만큼 기막히게 좋을 것이고, 너무 좋아서 감격한 나머지 말로 표현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밖에 상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기쁨을 우리는 받아서 누리는 사람입니다. 본질적으로 크리스천은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비록 이 세상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며 슬픈 사람들을 돌보지만, 우리는 본질적으로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크게 요란하지 않더라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잔잔하지만 충만하게, 하나님 주시는 포도주와 젖을 사서 마시며 기뻐하는 사람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2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즉 빵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여기서 ‘은을 달아 준다’는 것은 저울에 은을 달아 대가를 치른다는 뜻입니다. 은은 예나 지금이나 돈입니다. 기껏 돈을 지불하고 무언가를 샀는데, 양식이 아닌 것입니다. 속은 것입니다. 눈으로 보기에는 대단해 보이고 화려하며, 사람들도 다 원하기에 귀한 은을 주고 샀는데, 막상 사고 보니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나에게 유익도, 기쁨도 되지 못하는 것에 허비한 것입니다. 솔로몬 시대에는 은이 너무 많아 땅의 돌과 같았다고 하지만, 그 많은 은을 다 허비하고 이제는 종으로 사는 것이 이 백성들의 현실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우리가 어리석어서 그럴 때가 많이 있지만, 다시금 ‘하나님, 나를 도와주셔서 분별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정말 나에게 꼭 필요한 것, 나의 생명, 나의 영과 육, 나의 모든 것을 위해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위해 나의 은을 달아주어야지, 그렇지 않고 필요 없는 것에 허비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한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여러분, 우리는 수고를 많이 합니다. 애써서 날마다 일하고 신경을 많이 쓰는데, 그렇게 기껏 수고했는데도 만족이 없다는 것입니다. 남들이 다 좋다고 하니까 나도 따라서 했는데, 수고만 많이 했지 남는 것이 없는 인생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시금 ‘하나님, 나를 도와주셔서 이 귀한 인생을 허비하지 않고, 나에게 주시는 모든 것을 나의 생명과 이웃의 생명을 위해 꼭 필요한 데에 쓸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하는 우리가 되기 바랍니다.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예전 성경에는 ‘청종하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반복하시는 동사는 ‘들으라’입니다. 아까는 ‘오라’를 반복하셨고, 이제는 ‘들으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그 안에서 생명의 말씀을 받고, 무엇이 하나님 앞에 참된 길인지, 정말로 나 자신과 이웃을 위하는 길인지 알 수 있습니다. 들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예전 번역에는 ‘너희 마음’이라고 했는데, ‘나 자신’을 뜻합니다. 다음 절의 ‘영혼’과 같은 단어입니다. 나의 영혼이 주님께서 주시는 귀한 양식, 그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3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나아와 들으라’는 말씀이 반복됩니다. 그리하면 나의 마음과 영혼이 살아날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 하나님은 다윗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다윗이 자기는 좋은 궁전에 살면서 하나님의 언약궤는 텐트에 있는 것을 마음 아파하며 “주님을 위해 성전을 짓겠습니다”라고 했을 때, 하나님은 “너는 아니고 네 아들 때에 지을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영원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다윗의 집이 영원히 하나님 앞에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예수님을 통해 성취됩니다. 비록 다윗 왕국은 망했지만,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이 영원한 왕이 되심으로 비로소 완전히 성취된 말씀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확실한 은혜’에서 ‘확실하다’는 말은 ‘아멘’입니다. 우리가 ‘아멘’ 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대로 될 것입니다, 그대로 되소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멘’ 하시면 얼마나 확실하겠습니까? 그 확실한 은혜는 다윗에게 허락되었고, 메시아이신 예수님, 다윗의 자손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시는 영원한 언약입니다.
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원문의 뜻에 가깝게 번역하면, “주님께서 찾아지실 때에 찾아라”입니다. 우리가 찾으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지신다는 것입니다.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늘 이랬던 것은 아닙니다. 구약 시대에는 백성들이 하나님을 부르거나 가까이 가려면, 짐승 희생 제물을 가지고 성전으로 가야 했습니다. 제사장에게 가서 희생 제사를 드리고 기도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이 쳐들어와 성전이 불타 없어졌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제대로 예배드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싶고 부르고 싶어도 그것이 늘 허락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영원한 언약과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는 말씀처럼, 지금은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으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지십니다. 숨으려고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 어디 계세요?” 하고 찾으면 주님께서 나타나십니다. 우리 주님께서 영원히 우리에게 가까이 계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바로 그것을 위해 주님은 십자가를 지셨고, 주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허셨습니다. 늘 우리 곁에 가까이 계시고, 성령님이 아예 우리 속에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분을 부르면 응답하여 주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나의 죄나 죄책감을 주님 앞에 회개하고 바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부르면 주님은 응답하시고, 주님 앞에 나아가면 주님은 벌써 거기에 계십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를 향하신 귀한 초청의 말씀과 그 은혜, 주님의 사랑으로 인해 가능합니다.
7절 말씀입니다.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생각을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이 생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말씀에도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이 다 어렵고, 두려워하고 염려하게 하는 일들이 바깥에 있을지라도, 결국 중요한 것은 나의 생각입니다. 내가 그것을 어떻게 믿음으로 받아들이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고 나의 힘이 되시면, 주위에서 나를 괴롭히던 자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될 것입니다. 겉으로만 큰소리쳤지 예수 이름으로 나아가면 다 도망갈 것들이 괜히 우리에게 겁만 주는 것입니다. 그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령님의 능력으로 나의 생각이 주님 앞에 똑바로 서 있으면, 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서지 못하리라”는 이사야의 말씀처럼, 믿지 않으면 우리는 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으면, 하나님이 나를 뜨겁게 사랑하시고 늘 돌보아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면, 이 세상에 환난이 있을지라도 그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더 강하시고 능력이 많으시며, 전능하신 분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셔서 이 세상을 이길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러니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오늘 설교의 제목처럼, 주님은 우리를 긍휼히, 자비롭게 여기십니다.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그분과 멀리 느껴졌더라도, 돌아가면 하나님께서 받아주십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이 있을지라도 그것으로 인해 낙담하지 말고,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나아갑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초청하셨습니다. 누구나 나올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부족한 것을 아시기에 주님은 더욱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청종하면, 귀를 기울여 듣고 또 들으면,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십니다. 우리 자신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살려주시는 이 귀한 초청의 말씀에 기쁨과 감사함으로 응답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