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흔히 천국이라 그러면 죽고 나서 가는 데로 생각합니다. 우리 찬송가에도 천국에서 만나보자 그런 찬송가 있죠. 그게 장례에 대한 찬송가예요. 죽고 나면 천국에 간다. 그 말 맞아요. 틀린 말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거는 그 정반대예요. 죽기 전에 천국이 온다 그러잖아요. 죽고 나서 천국에 가는게 아니라 죽기 전에 천국이 온다 그러셔요. 그러니까 포인트는 천국이 우리가 죽고 나서 가는게 아니고 이 땅으로 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땅에서 있을 때 우리가 살아 있을 동안에 이미 천국을 살고 경험해야 되겠죠. 그런데 여기서이 천국을 우리가 잘 이해를 할 필요가 있죠. 이 천국이 어떤 의미냐? 우리가 살아가는데 그러면 내가 직장이나 학교나 여기에서 천국을 한번 이루어 보자. 그렇게 적용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좀 애매해요. 어디까지 그럼 천국인가? 내가 직장에서 예를 들어서 일을 하는데, 내가 만약에 비즈니스를 하면 어디까지 천국이냐 사실은 그게 기준이 애매하거든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천국을 말씀하시는 것은 그거랑 좀 달라요. 내가 직장 생활하고 학교 생활하고 가정 생활하는데 거기에서 천국을 좀 이루어 보자. 그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이니까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그런 삶을 하나님의 다스리시는 내 직장을 학교를 만들어 보자. 그렇게 사람들이 이해를 하고 또 이렇게 많이 해요. 그런데 좋은 일이지만 그런데 예수님이 정확하게 무슨 말씀하셨는지 좀 보면 좋겠다. 그런 그런게 지금 목적이에요.
그래서 이 천국에 대해서 올해 교회 목표로 삼고 하는데 지금 하는 얘기가 사실 굉장히 중요한 마태복음 10장입니다. 거기에는 예수님께서 이 천국에 대해서 제자들을 실제로 보내시는 대목이거든요. 이거를 보면 천국이 예수님이 어떤 것을 생각하시는지 우리가 알 수가 있겠죠. 4절까지는 예수님이 12제를 뽑으셔요. 12 제자들 이름이 쭉 나와요. 예수님의 제자들 하면은 좀 엉성할 때가 많아요. 실수도 많고 자기들이 다투기도 하고 예수님한테 혼나고 그러는데 그렇게 처음에는 좀 부족한게 많았지만 나중에는 예수님을 위해서 순교하는 사람들이 되는데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굉장히 큰 능력을 주시거든요. 그러니까 대단한 분들이에요 사실. 근데 예수님께서 12제자 삼으시고 명령하시는 말씀이 여기에 나오죠. 5절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에게도 들어가지 말고 6절 오히려 이스라엘 집에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예수님이 왜 꼭 이스라엘에만 가라고 하시냐? 다른 사마리아인도 있고 다른 이방 나라 사람들도 많은데 굳이 이스라엘 집에만 가라 하시는데 예수님이 꼭 다른 민족을 배척하셔서 그런 뜻이 아니고 뒷부분에 읽어 보면 나오는데 이게 시간이 급해서, 때가 다 되어서 그래요. 천국이 가까이 왔다 그러시거든요. 얼마나 가까이 왔는가? 진짜 가까이 왔어요.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이스라엘 마을도 다 돌아다닐 시간이 모자라요. 그만큼 천국이 가까이 왔기 때문에 지금 이스라엘 집으로 먼저 가라. 그런 뜻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유대라는 말도 있잖아요. 유대라는 말은 외국 사람들이 유대인들을 부를 때 쓰는 말이에요. 외국인들은 우리를 코리안이러고 하죠. 근데 우리는 한국 사람이잖아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은 유대인이라고 하지 않고 만약에 누가 유대인이라 그러면 외국 사람이 그렇게 부른다는 뜻이고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이 자기 자신을,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라는 뜻으로 부르시는 이름이 이스라엘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집에 가라 그러시죠.
그 다음에 7절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포인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이스라엘의 마을로 다 보내시죠. 누가복음에 보면은 두 명씩 두 명씩 짝지어 보내셔요. 혼자 가면 힘들고 두 명씩 두 명씩 아마도 짝지어서 마을 마을마다 보내시는데 그럼 가서 제자들이 뭐 하냐? 이 얘기 하라는 거예요. 사람들에게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표준 새번역에는 너희들이 가면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전파하여라 그렇게 되어 있죠.
그래서 그런 그들이 할 일은 8절이 되겠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한 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져받았으니 거저 주라. 이것이 제자들이 할 일입니다. 마을마다 돌아다니면서, 마을마다 중앙에 가면은 시청도 있고 시장도 있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데가 있을 거예요. 거기에 가서 이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능력을 먼저 주셨겠지요. 가서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제자들도 병든 자를 고쳐 주고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고 이런 능력까지도 주십니다.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고 귀신을 쫓아내게 이런 일들을 막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마을 사람들이 제자들이 이렇게 하는 걸 보고 깜짝 놀라겠죠. 그리고 병든 사람들 이렇게 귀신 들린 사람들을 데려올 거예요. 그럼 제자들이 그들도 다 도와주겠죠. 그러면 사람들이 막 모였어요. 그러면 그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런 일이 있으면 아 이거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그러면 저분들은 하나님의 사자들이다, 하나님이 보내시는 사람들이니까 저분들이 무슨 말씀하시는지 들어보자.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내셔서 이렇게 하신다고 사람들을 알아요. 그러면 그 사람들에게 전할 메시지가 7절에 천국이 가까이 왔다.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 알아들어요. 그분들은 구약 성경을 기본적으로 이제 알고 있기 때문에 자세히는 모르더라도 들은게 많으니까. 그분들은 그게 자기들의 역사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걸 그분들이 다 알거든요. 그런데 뭔가 멀리 느껴졌던 거예요. 천국,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아는데 뭔가 멀리 느껴졌었거든요. 그리고 삶은 힘드니까 그냥 생활 속에서 그렇게 살고 있는데 우리가 이사야 52장의 설교 말씀 들으셨던 것처럼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그런 메시지가 이제 제자들 통해서 왔고 그 천국이 가까이 왔다 그러는 거예요.
8절에서 특별히 귀신을 쫓아낸다는 그런 말씀이 있어요. 성경에서 구약에는 별로 안 나오는데 신약에서 갑자기 많이 나오는 단어들이 있어요. 중요한 단어들이죠. 예를 들어서 신약에는 부활이라는 단어가 갑자기 많이 나와요. 그리고 성령 이런 단어도 갑자기 많이 나오죠. 그런데 신약에서 또 귀신이라는 말도 갑자기 많이 나오거든요. 그런데 귀신이라는 단어가 한국말로는 귀신이라 그러면 옛날에 전설의 고향 그런 느낌이 있어 가지고 좀 상상을 하니까 한국말로는 오해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원래 귀신은 그 디먼이거든요. 데몬, 디몬이라는 단어인데 유대인들에게도 이 단어가 외래어예요. 헬라어거든요.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원래 귀신이라는 디몬이라는 단어가 없어요. 원래 히브리 말이나 아람어에는 디몬이라는 단어가 없어요. 그냥 악한 영이라고 말할 수 있죠. 그러니까 귀신이라는 단어가 헬라어에서 넘어온 외래어를 쓰는 거예요. 그런데 신기하게 헬라어 단어가 들어와서 그런 개념이 이게 실체가 된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나 디몬 걸렸어, 나 귀신 걸렸어. 이렇게 이런 사람들이 나오고 있었던 거예요. 사실 무서운 거고 신기한 거거든요. 어떻게 어떤 단어와 생각이 실체가 되어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영향을 주느냐 이런 것이죠. 그래서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런 영적인 세계를 드러내신 것이고 그리고 기도하면서 그런 것들을 예수님의 능력으로 또 하나님의 사랑으로 쫓아내는 것을 보여 주셨죠. 그래서 사람들이 이것을 인해서 고통받는 것을 주님께서 구원해 주셨는데 이 귀신 디몬이라는 헬라어는 어떤 영적인 현상, 사람이 귀신에 들려서 아프고 그래서 귀신을 쫓아내고 그런 것도 우리들이 생각해야 되고 또 한편으로는 근데 의미가 더 커요. 사람들이 기도원에서 기도하면서 귀신 쫓아내는 그런 거를 많이 생각을 하는데 그런 의미도 물론 중요하고 그런데 좀 더 많은 의미가 있어요. 뭐냐면 헬라어 단어가 들어왔다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헬라 문화가 들어오고 헬라적인 그런 사상이 들어온 거거든요. 그런데 그게 구체적으로 뭐냐면 헬라문화가 어떤 유대인이나 이런 다른 민족에 들어갈 때 헬라 문화를 세우는 것들이 몇 가지가 있어요. 대표적으로 극장이 극장 여러분들께 이렇게 저는 오페라를 너무 좋아해서 오페라 보러 가거나 아니면 뮤지컬이나 보면 다 극장이고 요즘은 케이팝 그래서 노래하고 춤추고 하는 것들이 다 무대잖아요. 다 극장인데 그게 원류가 그리스에서 그런 걸 너무나 잘한 거죠. 그래서 지금 영화에도 헬라에서 그런 예술적인 문화적인 단어 굉장히 많이 왔어요. 예를 들어서 뮤직, 심포니, 오케스트라, 다 헬라어예요. 그러니까 그런 예술적인게 와서 무대에서 다 공연하는 이런 것들이 굉장히 헬라 문화의 아주 좋은 거거든요. 옛날에는 다 무대에서 실제로 연극하고 노래하는데 지금은 TV가 되고 영화관이 되는 거죠. 사람들이 다 영화보러 가고 집에서 여러 가지 비디오 보고 그런 것들이 요즘은 얼마나 잘 되어 있는지 그게 들어온 거예요.
그런데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이런 외래 문화가 확 들어오면 어떻게 되겠어요? 극장이 사람들의 마음을 확 사로잡는 거지요.
또 대표적인 헬라 문화가 뭐가 있냐면 운동 경기장이 있어요. 올림픽 아테니에서 시작하잖아요. 운동 경기 하면 그 넓은 운동장에서 막 젊은이들이 와서 막 달리고 그런 운동 경기가 대표적인 헬라 문화예요. 여러분 그런 운동 경기 구경하는 거 좋아하시나요? 저는 야구장에 한번 가 봤습니다. 워싱턴 내셔널 야구장에 가 봤는데 재밌더라고요. 야구 경기를 실제로 하는 것도 재밌지만 스크린 보면서 야구 경기 보면서 즐겁게 놀다 왔는데 미국 사람들도 풋볼이나 그런 거에 얼마나 열광을 합니까? 운동장에 다 모여서 빽빽하게 관종들이 응원하는 데서 선수들이 운동하면 다들 열광을 하죠. 운동장 이게 대표적인 헬라 문화예요. 또 하나는 공중 목욕탕, 그런 것들이 유대 사회에 들어온 거거든요. 그래서 그전에는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제사드리고 제사장에 이런 설교를 듣고 기도를 듣고 이런 것이 하나님 섬기는 것이라고 알고 있던 사람들한테 헬라 문화가 확 들어온 거거든요. 이게 알렉산더 대왕 정복으로 해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제가 역사를 앞으로 다루려고 하는데 역사를 알아야 됩니다. 특별히 알렉산더 대왕을 알아야 되고 그로 인해서 헬라 문화가 들어오는 걸 알아야 돼요. 알렉산더가 우리 성경에 나와요. 이거 성경 퀴즈 하면 좋았는데 알렉산더가 우리 성경에 나온다. O X 하면 정답은 O, 나오는데 이름으로는 나오지 않고 다니엘서의 어떤 뿔 이렇게 나옵니다. 그니까 비유로는 나오는데 어쨌든 나오는 거죠. 그만큼 중요하고 그래서 헬라 문화가 알렉산더 대왕이 갑자기 정복을 하면서 밀고 들어오는 거지요. 그래서 이건 막을 수가 없어요. 힘으로 들어오는 걸 어떻게 막겠어요? 그런데 힘으로도 막을 수 없지만 그래서 그 사람들이 와서 막 짓는데 극장 지어서 공연하고 운동 경기 하면서 열광하고 목욕하라 그러고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어떻게 되겠어요? 유대인뿐 아니라 어떤 민족이든 그런 일이 벌어지면 어떤 사람은 너무 좋아하는 사람들이 생기겠죠. 가서 즐기는게 뭐 어때? 그런 사람들도 당연히 많이 생겼어요. 그런데 또 어떤 사람은 아 안 되는데, 이거는 외국문화이고 우리가 하나님 섬기는데 방해가 되는데 하면서 막 거부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게 되겠죠. 어느 민족이나 다 그래요. 유대인들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너무너무 그런 거를 좋아해요. 우리가 이 우수한 헬라 문화를 받아들여야 된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너무 걱정하는 거죠. 안 되는데 지금 이러면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데 고민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겠어요.
지금 우리는 미국 문화 안에 있고 사실 미국이 서양 문화의 대표적인 그리고 가장 강한 그런 문명으로 되어 있고 우리들은 그 안에서 살고 있죠. 그러니까 우리들한테는 이 서양 미국 문화가 그냥 공기 같은 거죠. 우리가 이것 없이 살 수가 없고 맨날 보는게 그런 거고 보고 또 그렇게 살죠. 그런데 한 번쯤은 그래도 우리가 좀 스톱하고 생각은 해야 되죠. 이게 정말 나의 하나님 섬기는데 도움이 되나? 요즘은 K문화가 너무나 세계적으로 대단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데 내용이 그래도 정말 하나님 섬기는데 도움이 되나 그런 생각은 해야죠. 근데 안 그럴 때가 많을 거예요. 왜냐하면 사람들이 좋아하는 거는 대개 그런 거잖아요. 사람들이 자꾸 많이 보고 페이를 해야 되니까 만드는 사람들 입장에서도 점점 더 매운 거, 내용들이 너무나 정말 매운 맛 진짜로 이렇게 겁나는 그런 내용들도 너무너무 많죠. 자극적인 거. 근데 지금은 그게 너무나 흔해져서 우리들이 익숙해진 거 같아요. 그런데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은 해야 되겠죠. 그런 것들이 과연 하나님을 섬기는데 도움이 되나? 안 될 때가 많을 텐데, 절제를 해야 될 텐데 그런 고민을 해야 될 거예요. 어거스틴도 그래요. 그분은 라틴 문명에 있었지만 젊었을 때는 방탕해서 살다가 한 30살 때쯤 회심을 하거든요. 30살 때쯤 완전히 사람이 변해서 신앙의 사람이 되고 나중에 그걸 고백록으로 쓰는데 자기가 하나님 믿기 전에 어떻게 방탕했는지 쓰면서 자기가 연극을 좋아했어요. 내가 하나님을 잘 섬겨야 되는데 연극을 보러 가 거기에 비극의 여주인공의 슬픈 것을 보면서 내가 울었는데 내가 내 영혼을 위해서 울지 않고 지옥갈 내 영혼을 위해서 울어야 될 텐데 그게 아니라 연극 중에 그런 여주인공의 슬픔을 보면서 울었으니 하나님 부끄럽습니다. 그런 내용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세상 문화 가운데 있는 그 세상을 보면서 고민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겠죠.
이렇게 되니까 사람들이 어떻게 돼요? 점점 죄의식에 빠지는 거예요. 점점 헬라 문화는 이 세상에 주도하는 문화가 되고 그것 없이 살 수가 없고 쫓아낼 수도 없고 쫓아낼 힘도 없고 주의 자녀들은 다 그런게 좋다고 따라다니고 마음속으로 양심은 찔리고 하나님께는 부끄럽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어떻게 되겠어요? 죄의식에 눌리는 거죠. 예수님이 제사들을 부를 때 베드로가 주님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그렇잖아요. 베드로뿐 아니라 성경에 예수님이 죄인들을 부르시잖아요.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은 저런 죄인들이랑 세리들이랑 예수님이 같이 식사한다고 비난하지요. 사람들이 왜 자꾸 죄에 대해서 그렇게 얘기를 하고 나는 죄인이다 그런 얘기를 하냐면 그 당시에 이런 헬라 문화가 큰 역할을 했어요. 그런 세상 문화는 문화대로 사람들을 누르고 그 가운데서 벗어날 수 없고 하나님께는 죄송하고 하니까 죄의식이 가득할 수밖에 그리고 그 와중에서 사람들이 아 나 데몬 걸려서 나 귀신 들렸어 이런 말이 나와요. 여기서 귀신이라는 단어가 그런 영적인 권세 영적인 형상 그런 의미도 물론 중요하고 그런데 이런 세상 문화 그 유대인들에게 헬라 문화가 들어와서 그들에게 실체가 되어서 귀신이 사로잡힌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을 예수님이 구해 주는 거예요. 그래서 더 이상 그런 세상 문화에 얽매이지 말고 거기로 인해서 죄책감 갖지 말고 또 그것으로 인해서 삶이 파탄나지 말고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멀리가 멀리하지 말고 돌아와라. 하나님께 돌아와라.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 사랑을 회복해라 그런 뜻이 있는 거지요. 그런 뜻으로 예수님께서 귀신 쫓아냈다는 그런 말씀을 우리가 이해를 하면 좋겠습니다.
제자들이 이런 권세를 받았고 예수님께서 예수 이름으로 귀신 쫓아내는 그런 권세를 주셨기 때문에 다 가능했습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했고 사람들이 모이면 전하는 메시지는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래서 9절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음이나 동을 갖지 말라. 그런 천국의 메시지를 전하는 제자들은 어떻게 해야 되냐면 돈이나 그런 여행 경비를 걱정하지 말고 베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이런 여러 가지 여행한다고 이것저것 챙기지 마라, 그럴 필요 없다, 가는 곳마다 너희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실 것이다. 그래서 일꾼이 자기들이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까 가는 곳에서 천국을 전하면 너희들에게 모든 너희들이 받을 것이다. 이런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받는 메시지는 이거 하나 딱 기억해 주시면 저는 만족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셨다. 왜 보내셨는가? 메시지 전하라고. 그럼 그 메시지는 뭐다? 천국이 가까왔다. 쉽죠? 간단하죠? 아주 짧은 이 한 문장인데 요거만 딱 전할 수 있으면 성공입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할 수 있으면 제자들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럼 듣는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알죠? 우리들이 오늘 저녁 그리고 내일 또 이렇게 그런 천국에 가까이 왔다 하는 메시지가 어떤 의미인지 계속 살펴보기를 원하고 우리들이 이 시간에 함께 기도하면서 이 메시지가 나의 것이 되기를 먼저 바라고 그리고 나도 이것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천국은 말 그대로 하늘나라 하나님의 나라 그것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인데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그 복음이 나를 나의 삶에 먼저 실현이 되고 나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그런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설교 게시판
오늘의 제목은 그 나라로 부르심입니다. 예수님이 전하신 천국, 하나님의 나라는 말 그대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이 나라를 모든 사람에게, 특별히 연약한 사람들에게 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당시에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가 오더라도 자기와 직접적인 상관이 있겠나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이 주로 생각하는 것은 어떤 위대한 왕이나 메시아가 와서 적들과 싸워서 왕국을 회복시키고 그 자기들은 거기에 속한 백성이 되겠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나 자신이 주체적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뭔가 역할을 할 것이라는 생각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모든 사람에게,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 하고 생각하는 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인격적으로 사랑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을 부르신다는 것을 전해 주기 원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마태를 부르시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마태는 이 마태복음서의 저자일 것입니다. 우리가 신약 성경을 읽어보자 하고 펼치면 제일 먼저 보는게 마태복음인데 사실 본문에는 마태가 저자라는 말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교회 전승으로서 우리가 아는 것인데 마태는 이 본문에서 자기 자신은 감춥니다. 내가 이 복음서를 썼는데 나는 누구고 그런 얘기를 전혀 하지 않아요. 예수님만 드러내기를 원하고 다만 오늘 본문에서만 마태가 자기 자신에서 대해서 쓰고 있지만 그것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고 그냥 지나가는 느낌이 있지만 그러나 그 중요성은 가볍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다가 마태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 당시에 세리, 즉 세금 걷는 사람인데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걷어서 지배자인 로마 제국에 바치는 사람이니까 동족들에게 미움을 받는 겁니다. 종족을 배신한 사람 그런 느낌이 되겠지요. 또 그 가운데는 부정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더 많이 걷어서 나머지는 자기가 챙기고 그런 느낌이 있기 때문에 세리들은 다 사람들이 미워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예수님이 부르신 거예요.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까 마태가 즉시 일어나서 따랐다고 간단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성경에서 좀 디테일을 생략했을지는 모릅니다. 뭔가 어떤 대화가 오고 갔는데 성경에서 간단하게 표현했을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마태뿐 아니라 베드로나 요한이나 다른 제자들을 주님께서 부르시는 장면들을 보면 분명한 것은 제자들이 그렇게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주저하면서 아 내가 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그런 느낌이 전혀 없어요. 주님께서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까 따랐다는 거예요.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뭔가 질문이 많이 돼야 될 것 같거든요. 주님, 제가 따라가는 거는 좋은데 예를 들어서 언제까지입니까라든지 일주일에 몇 시간, 휴가는 있는지, 집에는 언제 올 수 있는지 그런 질문들이 있을 수 있는데 전혀 그런 거를 예수님께 물어본 느낌이 없어요. 그냥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제자들이 굉장히 엉성한 느낌이 많아요. 자기들끼리 실수도 많이 하고 다투기도 하고 예수님이 책망도 하십니다. 제자들이 굉장히 불완전한 사람들이거든요. 그렇지만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들을 지금 존경하고 그들로 인해서 우리 교회가 세워진 것을 감사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비록 부족한 것이 많이 있지만 예수님께서 따르라 하실 때 즉시 따랐다는 것 이것이 정말로 대단한 믿음이고 우리들이 그분들을 존중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하는 것은 그 당시에는 사실 뜻이 명확합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들은 예수님을 따른다 하면 무슨 뜻인지 약간 막연하거든요. 그래서 말은 내가 주님 따른다 하면서도 실상은 자기 생활하는 그런 경우도 많이 있는데 그 당시 제자들은 주님을 따른다 하면 문자 그대로 따라다니는 거예요. 따르면서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것을 배우고 주님께서 어떻게 사람들을 만나시고 고쳐 주시는지를 다 일일이 보고 따라하는 거지요. 예수님과 같이 생활합니다. 같이 먹고 같이 자고 따라다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것이 무슨 뜻인지는 굉장히 쉬워요.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의 직업을 다 버려야 돼요. 이전에 자기의 생활들 뒤로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른다 하면서 생각은 집에 가 있으면 안 되는 거지요. 매일 집에 전화해 가지고 그 투자한 거 어떻게 됐어? 이렇게 되면 예수님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가족도 버려야 되는 거거든요. 나의 부모, 자식, 부부 다 그런 관계도 다 뒤로 하고 주님을 따라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실 엄청난 헌신입니다. 이 엄청난 일들을 제자들은 한 것이지요. 주님께서 그만큼 확신을 주신 것도 있고 그들 모두가 얼마나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것을 보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사야서 52장 말씀에서 봤듯이 지금 이 세상은 악한 나라들이 다스리고 있습니다. 로마 제국이 당시에 대표적이었고 그 외에도 세상에 수많은 악한 왕들, 사람들이 세상을 다스리고 선한 사람들은 괴로움 당하고 설움 당하고 있는데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것을 보고 싶다. 이 소망이 가장 강렬한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귀한 복음이거든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신 것이지요. 천국이 가까이 왔다. 그러니까 두 말 없이 다 제쳐 놓고 주님을 따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보니까 정말 저분의 가르치심과 저분이 하시는 일과 저분이 사람들 만나시는 것을 보니까 정말 하나님이 저분과 함께 계신다. 예수님께서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시면 정말 그런 것이다. 내가 그것을 볼 거야. 그런 소망이 가장 강렬했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 다 제쳐 놓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하셨으니까 오래 하지 않겠지 그런 느낌이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얼마나 오래 하겠어. 몇 달 몇 날일지 모르겠지만 금방 하나님 나라가 올 거라고 하니까 선뜻 따라 나섰던 모습도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도 그중에 한 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 마태는 일어나 따랐습니다. 근데 마태가 아마도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 친구들을 모아서 식사 자리를 마련한 것 같습니다. 원문에는 그냥 집이라고 나오지만 마태의 집이었을 가능성이 크죠. 그래서 자기 친구들이었던 세리들과 죄인들을 불러서 같이 식사를 하고 예수님과 제자들도 초대가 됩니다.이 식사 자리는 사실 굉장히 의미가 깊지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을 만나시면서 많이 먹이십니다.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 수천 명을 먹이신 사건이 대표적이고 그 외에도 먹는 자리를 굉장히 많이 마련을 하셔요. 이것은 구약 성경에서 천국 잔치를 비유하시는 것입니다. 특별히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구원과 승리와 용서, 백성들과의 화해를 말씀하실 때에 잔치자리에 비유를 하셔요. 오늘 교독문의 이사야 55장에도 그런 말씀이 있었지 않습니까?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다.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을 것이다. 함께 모여서 먹는 이 즐거움이 천국 잔치의 모습이라는 것이에요. 성경에서 먹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고 저는 사실 성경에서 먹는 거에 대해서 다 모아 가지고 공부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도 있습니다. 창세기 1장부터 하나님이 천지 창조하시고 동물들과 사람들에게 맨 먼저 하시는 명령이 먹으라 입니다. 이것이 너희들의 먹을 것이다. 먹어야 사니까, 주님이 너무나 잘 아시니까 우리들에게 먹을 것을 주십니다. 특별히 천국 잔치, 이 세상의 모든 불의가 다 없어지고 하나님이 승리하시고 주님의 백성들이 그 동안에 고난당하고 있다가 다시 하나님이 회복시켜 주셔서 영광 속에 들어가는 그 자리가 천국 잔치인 거예요. 얼마나 기쁘고 복된 자리가 되겠습니까? 예수님이 그것을 다시 재현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먹는 자리를 마련하시고 또 사람은 같이 먹으면 마음이 열리고 얼굴도 밝아지고 서로서로 대화하지 않습니까? 그런 자리를 주님께서는 자꾸 만드십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다 초대가 됩니다. 누구는 올 수 있고 누구는 올 수 없고 그런게 전혀 없어요. 오늘 세리들과 죄인들도 초대가 되었습니다.이 세리와 죄인이라는 단어는 흔히 같이 가지요. 세리는 죄인이라는 느낌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죄인이라는 것은 꼭 무슨 법을 어겨서 감옥에 가야 되는 그런 느낌보다는 그 당시에 율법에 의하면 죄인인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어서 안식일에는 일을 하면 안 되는데 생활하다 보니까 어쩔 수 없이 일을 해야 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거예요. 또 하나님 율법대로 하려고 그러면 얼마나 제한 사항이 많은지 이거는 먹을 수 있고 먹을 수 없고 하면 되고 안 되고 몸을 정결하게 씻고 등등 굉장히 율법 조항이 많은데 그대로 다하면서는 못 사는 사람들이 많아요. 특별히 가난한 사람들 중에, 또는 세상에서 버림받고 사회에서 쫓겨나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야 되는 그런 사람들은 율법을 지킬 수가 없죠. 그런 사람들이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사는 것도 힘든데 하나님 말씀에서 너는 죄인이라고 하니까 이중으로 힘든 것이지요. 그런 사람들 다 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들 초대하셔서 같이 먹고 마시면서 즐거워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 그 깊은 하나님 나라의 정신을 우리가 알 수 있지요. 주님이 전하시는 천국은 이 땅에서 누구나 웰컴입니다. 그저 예수님 사랑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사모하기만 하면, 그리고 내 모습 이대로 주님이 나를 받아 주신다는 믿음으로 나오기만 하면 누구나 웰컴이에요. 너는 돼, 너는 안 돼,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는 풍성합니다. 주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가 잔치상으로 비유가 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누구에게나 풍성하게 임합니다. 부족함이 없고 모자람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은혜와 기쁨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보고 또 불편하는 사람들은 꼭 있게 마련이지요. 오늘 본문에서는 바리새인들이라는 사람들이 나오는데 그들은 율법을 너무 잘 지키는 사람이고 하나님을 너무너무 잘 믿는 사람들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입니다. 금식도 많이 하고 예배도 많이 드리고 기도도 얼마나 많이 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자기들은 의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만하면 내가 하나님 앞에 나갈 자격이 있지. 그런데 나에 비하면 저저 죄인들은 아니야, 저 사람들은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어, 이런 의식으로 가득찬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고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니까 너무나 못마땅한 것입니다. 어떻게 저런 세리들과 죄인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뭐라 그럽니다. 제자들에게 너희 선생은 어떻게 저런 사람들과 같이 식사를 하느냐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꾸만 배제하는 것이죠. 하나님 나라에는 우리 같은 사람이 들어갈 수 있지, 저 죄인들은 안 돼 -- 배제하는 사람들이고 반면에 예수님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 나오기 원하는 사람은 받아들이는 그런 사랑의 마음을 예수님은 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바리새인들이 뭐라고 하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 쓸 데 있다 -- 의사와 병자의 예를 드십니다. 병든 사람, 이것은 비유라고도 할 수 있고 실제로 그렇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들은 병든 사람입니다. 실제로 몸이 병들어서 아픈 사람도 있고 마음이 병든 사람도 있고 영혼히 병에 들어서 하나님 앞에 힘든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병자에 대해 말씀하실 때 어떤 사람은 병자이고 다른 사람은 건강하고 그런 느낌이겠습니까? 아니지요.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웰컴하시는데 사실 그 말씀은 모든 사람이 병자라는 것입니다. 병이라는 것은 원래 우리가 건강해야 되는데 뭔가 몸에 어떤 부분이 어떤 이유로 고장이 나고 약해지고 병균이 침투하고 그래서 아픈 거 아닙니까? 건강한 상태로 돌아가야 되는데 우리가 그런 상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완전하게 창조하셨고 우리들은 하나님과 닮아서 늘 하나님 앞에 옳고 사랑이 넘치고 이웃과 이웃들과 좋은 관계로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 사람의 본래 모습인데 우리 모두가 병이 나 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 얼마나 문제가 많고 서로서로 힘들게 하고 불의하고 거짓말하고 해치고 이 세상이 지금 엉망이 되어 있는 것이죠. 하나님 보시기에 지금이 세상은 병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이사야 1장에 그 딱 이미지가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보시니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맞아서 멍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들을 고쳐 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의사로 오신 것이죠. 우리 모두가 그 예수님의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죄인이지만 죄로부터 지금은 완전히 벗어난게 아니고 하나님이 의롭다고 칭해 주시는 것처럼 우리들이 병자인데 예수님이 우리를 치유해 주시지만 아직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나는 지금 완전해 건강해 그럴 사람이 없고 계속해서 우리들은 치유받고 있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들이 나 자신이나 또는 옆에 누가, 심지어 예수님을 믿건 안 믿건 상관없이 어떤 사람이 저 사람은 왜 저래 할 때도 있고 저 사람이 날 힘들게 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 미워하지 말고 아, 병 나서 그래, 이렇게 생각하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람이 누구나 병들 수 있잖아요. 예수님께서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다, 나는 병을 고치러 온 의사다, 하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는 뜻이 있는 것 같아요. 병은 누구나 걸릴 수 있는 것이죠. 그 사람이 나빠서 그렇습니까? 나도 그 병 걸릴 수 있는데 그러니까 겸손하라는 것이고 그러니까 병든 사람 미워하지 말고 저 사람은 나아야 될 사람이야, 의사가 치료해 주고 돌봐 줘야 될 사람이야, 그렇게 이해를 해 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 사람이 왜 그러는지 조금 이해도 될 수 있을 것이고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하나님 저 사람을 도와주세요. 고쳐 주세요 하면서 이해도 잘 해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병든 자에게 의사로 오셨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죄인들을 미워하지 마라, 배척하지 마라, 도리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천국을 전하시는 것은 저런 사람들을 위해서 오신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호세야 6장의 말씀을 인용을 하시는데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나는 번제가 아니라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는 말씀을 가서 배워라 그러십니다. 주님은 제사가 아닌 자비를 원하십니다. 물론 구약 성경에는 굉장히 많은 제사의 종류도 있고 규칙도 엄격하고 따라서 해야 되고 그런 말씀이 굉장히 많기 때문에 주님은 제사 받기를 좋아하시는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은 그런 형식이나 종교 행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소 한 마리 끌고 와서 하나님께 다 통째로 바쳐도 그 마음이 딴 데가 있으면 소용 없는 것이지요. 모든 제사와 예배와 종교 행위의 본질은 정말 하나님 마음을 담는 것입니다. 자비로워지는 것입니다. "헤세드"라는 단어는 긍휼히 여긴다, 그리고 공감한다, 이해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정말로 불쌍히 여긴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사람이 어떤 잘못을 했더라도 그에게는 나름의 이유도 있을 수 있고 어떤 환경이나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그럴 수도 있는데 그 사람을 이해해 주고 공감해 준다는 그런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으로만 그렇게 불쌍히 여기는 것뿐 아니라 그 사람을 실제로 도와준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행동이 따라가는 단어거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비롭게 여기시면서 정말로 우리를 품어 주시고 사랑해 주시고 우리를 위해서 실제로 행동하십니다. 그래서 문자 그대로 우리들을 건져 주시고 살려 주시죠. 그것이 하나님의 자비인데 이 자비를 배우라는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정말로 내가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하나님의 자비를 배워야 되지 않겠습니까?
번제가 아니라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호세아의 말씀인데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은 종교 생활 열심히 하고 경건하고 기도 많이 하고 금식하지만 결국은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지를 전혀 모르면서 겉보기에 기도나 금식이나 아무리 많이 하면 뭐 하겠습니까? 소용 없는 것이죠. 정말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이렇게 모든 사람, 특별히 죄인, 세리,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특별히 주님께서 더 돌보시는 것입니다. 마치 부모가 자녀들이 많이 있는데 그중에 연약한 자녀가 있으면 더 마음이 가는 것은 당연하잖아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의롭고 아름답게 창조하셨는데 인간들의 죄로 인해서 그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으면 하나님의 마음이 아프시지요.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왜 이런 일이 벌어집니까 하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원망하죠. 하나님은 그것을 슬퍼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창조하신 모든 사람들이 귀하다, 특별히 세상에서 가난하거나 병들었거나 버림받은 사람들이 세상에서는 멸시받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들도 사랑하시고 그들에게 더 마음이 주시는 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노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 모두를 초청하시는 이것이 예수님의 천국의 의미가 되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에게나 다가가시지만 특별히 주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주님 앞에 나오고 주님께 부르짖는 사람들을 돌보시고 찾아가십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마을마을마다 돌아다니면서 찾아가셔요. 그래서 마음은 있어도, 내가 하나님께 나가고 싶은데 용기가 없든지 사정이 안 돼서 못 나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어요. 지금 마태도 일을 하고 있는 자리였거든요. 세관에 앉아 있는데 주님께서 찾아가시고 부르신 것이죠. 그러자 마태가 일어나서 따라가는 것인데 주님은 이렇게 일일이 찾아가시고 약한 사람들을 어루만져 주시고 하나님 나라가 너희들의 것이라고 심지어 세리들과 죄인들이 하나님 나라에 먼저 들어가리라 그랬습니다.이 바리새인들이 들으면 기절할 이야기가 되겠죠. 이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천국의 복음이 이것입니다.
이 자비의 마음을 우리들도 배워야 합니다. 크리스천들이 교회 생활을 오래 하면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굳어지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함께 신앙생활하는 우리들이 뭔가 인격적으로 도덕적으로도 더 우월한 것 같은 생각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아무리 옳은 소리를 해도 아니야, 내가 저 사람보다는 더 낫지 하고 우월감을 갖게 되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고 벽을 세우는 것인데 그것은 오늘 예수님의 마음과 굉장히 다르지요. 예수님께서 자비를 베풀어라, 누구든 초대하여라 하시는 말씀은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에게 특별히 더 해당이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보면서 속으로 멀리하거나 나는 저 사람보다는 낫다고 우월감을 가질 때가 많은데 그것은 우리들이 다시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님 마음은 그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도 하나님 보시기에 불쌍히 여기고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실 그런 사정이나 그런 상황들이 있고 그들 속에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도덕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지식적으로는 그들이 훨씬 우리보다 나을 때도 많이 있고요. 그런데 우리가 무조건 예수 안 믿으니까 하고 멸시하고 내가 더 낫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바리새인들처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자비의 말씀을 배우고 실제로 찾아가셔서 사람들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먼저 다가가셔서 용서하시고 그래서 그들이 변화를 받고 하나님을 믿게 하시는 그러한 예수님의 마음이 담긴 나라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다시금 새기고 우리들도 그렇게 하는 우리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부터 천국,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의미인지, 어떻게 그 천국을 이 땅에서 살아낼 수 있을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제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 20살 때 뉴욕에서 유학 생활을 할 때였습니다. 형들을 따라서 교회에 갔다가 갑자기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신약 성경을 거의 다 읽었을 때였는데 하루는 교회에서 어떤 말씀 달력을 보게 되었습니다. 크게 하나님 말씀이 적혀 있는데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너무 귀한 말씀이라고 생각을 했고 그런데 신약이 어디에 있었지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구약이었습니다.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예수님의 고난이 예언서에 벌써 그렇게 예언되어 있다는 걸 알고 굉장히 놀랐고 정말로 하나님의 그 크신 계획과 말씀에 대해서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그때 그냥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500년 전 이상부터 계획하시고 말씀하셨던 것이지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예언의 말씀을 실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약 성경을 읽고 그 말씀을 가슴속에 다 아셨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이 이사야 53장을 읽으시는 장면을 한번 상상을 해 봤습니다. 그 말씀 읽으면서 이것이 예수님이 가실 길이라고 마음속에 새기셨을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이사야 52장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예수님께서 과연 어떤 그 말씀과 배경 가운데서 점점 하나님의 말씀이 진행되어 결국 주님의 고난에까지 이르게 되었는가 하는 내용을 볼 수 있겠습니다.
1절의 말씀을 먼저 보시겠습니다. 시온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내 힘을 낼지어다. 첫 번째 단어 원래는 깨어라 깨어라 시온,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시온이 지금 무슨 이유로 주저 앉아 있습니다. 잠을 자고 있는지 정신을 잃었는지 모릅니다. 시온은 다윗 언약 그리고 시온 언약을 상징하는 도시이고 예루살렘인데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시는 도시라는 뜻으로 시온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그 시온이 하나님께 징계를 받고 세상 다른 나라들로부터 큰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주저앉아 있고 쓰러져 있는 상태입니다. 잠자는 듯이 어떻게 보면 죽은 듯이 있습니다. 고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깨어라 깨어라 네 힘을 낼지어다. 하나님께서 힘이 되십니다. 그 힘을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힘이십니다. 우리들도 예수님 믿으면서 때로는 너무 힘들다 또는 무기력하다 그럴 때가 혹 있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이 나의 힘이시라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힘을 주십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반대로 생각합니다. 힘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뀌었어요. 하나님이 힘이신데 그걸 바꾸면 안 됩니다. 힘이 하나님이다. 그렇게 되면 큰일납니다. 그러면 힘을 송상하게 되고 어떻게 해서든이 힘을, 권력이나 재물이나 이런 세상적인 것들을 더 얻으려고 목숨을 걸게 되지요. 힘을 더 얻으려고 자기 인생을 다 낭비하고 또 힘을 조금 얻으면 약한 사람들을 힘들게 합니다. 힘이 하나님이 되면 그것은 우상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힘이십니다. 시온이 세상의 고난 가운데 무기력하게 쓰러져 있는데 하나님께서 힘이 되십니다. 힘 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이제 시온이 힘을 내게 될 것입니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내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 아름다운 옷, 영화로운 옷입니다. 여기서는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신부라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신부입니다. 신약에도 요한계시록에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은 신부가 단장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신부입니다. 신부에게 아주 아름다운 옷을 입혀 주시는 광경입니다. 신랑과 신부는 서로를 영화롭게 합니다. 서로가 서로의 사랑이고 자랑입니다. 서로를 아름다운 옷으로 치장하고 높여 주는 귀한 관계, 이것이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귀한 언약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얼마나 높여 주시는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존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귀한 아름다운 옷, 영화로운 옷을 입혀 주셔서 세상 가운데서 높여 주시고 세상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을 받게 하십니다.
그러나 시온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서 그 영화를 그리고 그 영광스러운 아름다움을 잠시 걷어가실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사랑받고 하나님의 신부가 된 백성은 마땅히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해야 하지만 백성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 사람들 하는 것과 똑같이 했습니다. 하나님을 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인생에서 하나님이 안 계시면 어떻게 됩니까? 의지할게 세상 물질밖에 없는 것이죠. 세상의 돈이라든가 사람이라든가 그런 것만 의지하고 사는 인생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혹시 잠시 잘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세상의 것으로 잠시 부요하게 살 수는 있을지 몰라도 결국은 멸망입니다. 결국은 죽음, 허무함입니다. 그런 세상이 좋다고 나간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붙드십니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고난으로 다가온 것이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매맞는 걸로 다가온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땅바닥에 쓰러져 있고 죽은 듯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징계의 시간이 끝났고 이제는 하나님께서 사랑스럽고 자비롭게 불러 주십니다. 그래서 깨어라. 아름다운 옷을 입어라. 이제부터 부정한 자가 다시는 내게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외국의 강한 나라들, 앗수르, 바벨론 이런 나라들이 쳐들어왔고 그 성을 멸망시키고 불태우고 죽이고 노예로 끌고 갔습니다. 그 부정한 사람들의 군화발이 도시를 짓밟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받았습니다. 끔찍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 백성들이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원하셨지요. 이제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 약속을 하셨습니다.
2절에 너는 티끌을 털어 버릴지어다. 지금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입니다. 온통 먼지와 땅의 흙을 뒤집어 쓰고 있는 상태인 것이죠. 그러나 이제는 일어나서 올바르게 앉을지어다. 사로잡힌 딸 시온이여 목의 줄을 스스로 풀지어다. 목의 줄이 결박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목에 묶어서 노예처럼 끌고 가는 것이고 짐승 취급하는 것이지요. 사실 사람이 얼마나 악한지 모릅니다. 사람은 사람에게 늑대라는 경구도 있습니다. 사람이 정말 얼마나 악한지, 하나님을 떠나고 자신만을 위하는 위기적이고 폭력적인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악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사람이 사람을 목을 묶어서 결박시켜 끌고 가는 짐승 취급을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온통하고 억울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에게 이런 일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에 하나님을 믿으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 기대를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 모르고 살다가 하나님께 돌아오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고 하나님의 자녀되는 영원한 언약이 맺어져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도하면서 살게 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좋은 일이 있고 하나님 주시는 축복을 받을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에요.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께서 고난도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처럼 다시 마음이 하나님을 떠났다면, 그래서 다시 세상으로 나간다거나 하나님을 버리면, 습관처럼 형식만 있고 겉보기에는 하나님 믿는 사람이 됐지만 마음은 이 세상 것을 더 좋아하고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은 고난을 주십니다. 몸이 아프든지 여러 가지 일이 벌어져서 아 내가 잘못했구나 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인도하십니다. 때로는 그런 잘못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이 악하기 때문에 애매하게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세상으로부터 당하는 악한 고난과 사고와 질병을 다 막아 주시면 좋겠는데 사실 하나님은 그렇게 기계적으로 하지 않으십니다. 만약에 하나님 믿는 백성들이 자동적으로 모든 재앙을 피한다고 하면,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으면 병 안 걸리네 사고 안 당하네 하면서 하나님 믿게 된다면 그것은 참 믿음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 믿는 것이 하나님 주시는 복을 받는 길이지만 그것은 기계적으로 되진 않습니다. 하나님 믿으면 복받고 안 받으면 벌받고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어도 때로는 어렵습니다. 우리가 다 이해하기 힘들어요. 그럴 때 이사야 52장의 말씀은 우리에게 소망이 됩니다.
3절에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값없이 팔렸으니.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것은 성경에 나오는 공식과도 같은 표현입니다. 다 하나님 말씀인데, 특별히 하나님께서 이 공식을 쓰실 때가 있습니다. 이 공식이 여러 예언서에 계속 나오는데 그 이유는 잘 들으라는 뜻이지요. 하나님의 진심, 하나님의 관심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강조해 주십니다. 말씀하시되 너희가 값없이 팔렸으니 돈없이 속량 되리라.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로 팔렸는데 아무 대가를 받은 것도 없어요. 그러니까 다시 속량할 때도, 원래는 몸값을 주고 다시 사오는 것이 속량인데, 처음에 팔릴 때도 받은게 없으니까 되찾아올 때도 돈 없이, 아무런 그런 조건이 없이 되찾아올 것이다.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난을 하나님 다 아십니다. 그리고 이제 때가 되었으니 하나님이 다시 자유를 주시고 되찾아오실 것이라 약속을 하시는 것이죠. 우리들이 세상에서 고난 당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믿어도 때로는 힘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해해 줄 수도 없는 나만의 괴로움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납니다. 때로는 하나님께 불평합니다. 왜 하나님은 나에게 이렇게 하시는가?
욥이 그렇게 했습니다. 욥이 자기가 당하는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아무 잘못한 것도 없고 이유가 없는 그런 고난을 엄청나게 당하잖아요. 그래서 나는 너무나 억울하다. 하나님 나에게 이러실 수는 없다 하는데 마지막에 하나님이 다 회복시켜 주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잃었던 것도 되찾게 해 주시고 몸도 다 낫고 더 영화롭게 회복시켜 주시는데, 그렇게 하시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욥에게 다 말씀하시는 그 순간, 폭풍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그 순간에 이미 다 해결되었습니다. 욥이 그동안 갖고 있었던 괴로움과 불만과 하나님께 따지고 싶은 그 수많은 말들이 있었는데, 정작 하나님께서 다 듣고 계셨다는 것을 폭풍 속에서 욥이 깨닫는 그 순간 다 해결됩니다. 그리고 도리어 부끄러워합니다. 오 하나님 내가 왜 그랬을까요? 내가 불평했던 건 내가 잘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알고 계신다.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들도 각자 괴로움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되는 것 그리고 해결책은 결국 하나님이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실제로 해결도 해 주십니다. 그래서 문제들이 다 떠나가고 회복되어서 내가 이전보다 더 나은 상태가 되는 그 때가 오겠지만, 그 전에도 사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는 사실만 마음속에 새기면 문제가 더 이상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시온아 그렇게 괴롭고 힘든 것을 너 혼자 당한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알고 계신다.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사실만으로 문제는 떠나갑니다. 힘들수록 괴로울수록 고난 가운데 있다고 생각되시는 분들, 힘든 날을 가고 있다고 느껴지시는 분들은 이 말씀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정을 아시고 다정하게 말씀해 주신다는 사실로부터 이미 그 모든 상처가 치유가 되는 것입니다.
6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 백성은 내 이름을 알리라.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이름을 알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다 압니다. 세상 어느 나라 민족들도 God 이라는 단어는 알고 하나님 모르는 사람도 힘든 일이 있으면 하나님을 부를 수 있죠. 그러나 하나님 백성에게 특별히 허락해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구약에서는 여호와라는 이름, 신약에서는 예수라는 이름. 하나님의 이름은 그냥 단어가 아니라 하나님이 거기에 계십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하나님 이름을 부르면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6절 끝에 내가 여기 있느니라. 하나님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냥 지식으로 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 하나님이 거기에 임하신다는 뜻입니다. 내가 여기에 있느니라. 예수님의 이름을 우리에게 허락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이름 부르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즉시 오셔서 내가 여기에 있느니라 말씀하시는 그것이 우리들에게 주신 특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제일 좋은게 다른 어떤 것보다도 우리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즉시 부를 수 있고 하나님께서 즉시 응답해 주신다는 약속이 가장 귀합니다. 우리에게 주신이 귀한 이름 예수 이름,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라는 이 귀한 이름을 편하게 마음껏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때 그때 응답하시고 우리들에게 힘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 날에는. 예전에 이 말이 너무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구약에서 그 날 또는 여호와의 날은 신약에서 하나님 나라입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그 날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그 날에는 그들이 이 말을 하는 자가 나인 줄, 그리고 내가 여기에 있다는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확실히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백성들에게 주신 특권입니다.
7절의 말씀입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좋은 소식은 말 그대로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들을 위로하시고 구원하시고 새 힘을 주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이 귀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들에게 전해져야 우리들이 알 것 아닙니까? 이 좋은 소식의 내용은 먼저 평화입니다. 더 이상 괴로움이 없고 전쟁이 없고 고난이 없는 평화가 선포가 됩니다. 또한 복된 소식을 가져오는데 구원입니다. 이 구원은 히브리말로 문자 그대로 예수입니다.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분입니다. 복된 소식, 좋은 소식의 내용이 바로 구원, 예수입니다. 그리고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하는 것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도 문자 그대로 하나님이 왕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 읽으시면서 하나님 나라를 가슴 속에 새기시는 광경을 상상해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이것보다 더 좋은 소식이 없습니다.이 이 세상이 괴로워도, 온갖 악과 불의와 억울함이 가득한 것 같아도 결국은 하나님의 다스리심보다 좋은 소식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이 너무나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없다고 말합니다. 악한 사람들은 잘되고 잘 살고, 선하고 약한 사람들이 고난받고 억울하게 죽습니다. 이런 세상을 보면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만약에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산단 말입니까? 이 세상에 아무 소망 없이 그냥 눈에 보이는 물질 세계만 믿고 살라는 말입니까? 있다가도 없어지는 물질, 그리고 얼마나 살지 모르지만 결국은 죽을 우리들의 이 인생을 의지하고 살란 말입니까? 아무 소망 없이, 악한 사람 잘돼도 할 수 없고 선한 사람이 고난당해도 억을해도 아무 소망 없이 의미 없이 살다가 죽으라는 말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다고 하면 우리의 인생은 끔찍합니다. 그것이 지옥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복된 소식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아무리 이해가 안 되어도, 약한 사람들이 선한 사람들이 고난당하는 이런 불리한 세상이라 할지라도 결국은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이것 말고는 우리에게 소망이 없습니다. 성경의 백성들은 이 소식을 듣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 많은 고난과 괴로움을 당했어도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이 복음을 붙들었기 때문에 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소식을 우리들에게 전해 준 것입니다. 이 사실을 위해서 결국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 소식을 전하는 산을 넘는 발이 얼마나 그 아름다운지요!
8절 파수꾼들의 소리로다. 그래서 산을 넘어 좋은 소식 전하는 사람들이 달려오면 파수꾼이 멀리서 보고서 복음인 것을 알고 소리를 높여서 일찍이 노래합니다. 그러면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 그들의 눈이 마주봅니다. 눈이 마주 본다는 표현은 파수꾼들이 서로 본다는 뜻도 되지만 아마 파수꾼의 눈이 시온으로 오시는 여호와 하나님과 눈이 맞으신다는 너무나 멋진 표현도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온으로 오신다. 이것이 구약 성경에서 가장 강렬한 하나님의 임재의 말씀이 되겠습니다. 우리들은 이 말씀이 무엇인지 압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래서 우리와 눈을 맞추어 주시고 우리 곁에서 친구와 구원자가 되어 주십니다. 결국 이 복된 소식을 위해서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드리셔서 고난의 길, 그리고 고난을 통한 승리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전해 주시는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붙드시면서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먼저 우리들은 하나님 다스리신다는 말씀을 가슴 속에 새겨야 되겠습니다. 내가 힘들어도 이해가 안 되어도 결국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꼭 붙들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이 소식이 꼭 필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고난받는 사람들, 힘든 분들 또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눈물 흘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아니야, 소망이 있어, 하나님이 다스리셔, 이 사실을 우리들이 전할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그것을 위해서 교회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실 때에 이 귀한 복된 소식, 하나님 다스리신다는 소식을 온전히 전하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올해 우리 교회의 표어는 천국 복음을 전하는 교회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왕국입니다. 하나님이 왕으로서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전체와 부활 이후에 일관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구약 시대에도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셨습니다. 이것은 영적이나 심리적인 의미가 아니라 실체적인 왕국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시고, 그들에게 구체적인 땅을 주시고, 제도와 율법을 주셔서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나라는 한 때 전성기를 누렸지만 결국은 인간의 역사의 뒤로 사라졌습니다. 구약의 하나님 나라가 실패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잘 못되어도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 반대도 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 나라는 실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습니다. 다만 그 부족했던 것을 상고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은 왕이시지만 언제나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 리더쉽을 가지고 백성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다스립니다. 그들은 왕이 아니라 하나님의 왕권을 대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 중 가장 마지막, 가장 탁월했던 사람이 사무엘입니다. 사무엘은 제사장으로서 백성들의 예배와 기도를 주관하고 영적으로 이끌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가 기도하면 다른 민족과의 전쟁도 승리하는 등,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아말렉의 아각 왕을 칼로 조각내기도 하는 등 매우 카리스마 있는 모습도 보여줍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왕을 요구합니다. 다른 모든 나라들도 왕이 있다고 합니다. 사무엘은 기도하고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백성들을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촉구하고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기도와 예배도 좋지만, 당장 적들과 싸우려면 그들을 이끌고 전쟁에 나갈 지휘관인 왕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만일 사무엘이 내가 왕이 되겠다고 말했다면 분위기가 싸해졌을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흔한 인간의 심리입니다. 보통은 하나님께 기도하다가도, 정말로 중요한 인생의 문제가 있으면 기도하기보다 자기의 뜻대로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포장합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동시에 노력해야 합니다. 시험이 있으면 기도하고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원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인간적인 방법과 생각으로 승리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첫째 왕으로 선택하시는데 사울은 신정 국가에서 왕정 국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있었습니다. 그의 왕권 전체에 걸쳐 사무엘과 긴장 관계에 있습니다. 무엇보다 사무엘이 그에게 기름을 부어서 그의 권위 아래 시작했고,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야 했습니다. 당장 전투가 임박해서 군인들을 모아야 하는데 다들 사무엘을 기다리면서 흩어집니다. 결국 사무엘의 버림을 받고 죽임을 당합니다. 그의 치세는 국가와 종교의 분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왕이 모든 권세를 갖지 못하고 제사장의 견제를 받습니다. 그것이 바람직한 면이 있어서 오늘날까지 많은 나라들이 정교 분리를 실천합니다.
사울은 병에 담긴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뿔에 담긴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물론 상징적인 해석이지만, 다윗이 더 풍성한 성령의 부으심을 받았습니다. 사울은 성령을 받았지만 충만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황홀한 종교적 경험은 했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임해서 예언을 하면서 옷도 벗어던지고 땅에 드러누워서 예언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열렬한 경험을 했지만, 그것이 일상으로 연결되지는 못했습니다. 그의 평소 생각이 하나님의 뜻에 맞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다윗의 인기를 보고 질투하고 죽이려 합니다. 말하자면 교회에서의 모습과 일상의 모습이 다른 것입니다.
다윗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일단 사무엘은 이미 죽었고, 다윗의 시대에는 그의 카리스마에 비교할 제사장이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다윗 자신이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특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처럼 황홀경의 경험이 있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경험이 아니라, 일상의 생각이 늘 하나님을 향해 있었습니다. 골리앗과 싸운 것도 계획한 것이 아니라, 골리앗이 하나님의 이름을 욕하는 것을 듣고 나선 것입니다. 다윗은 찬양이 생활화되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수많은 찬송시를 짓게 되었습니다. 참된 신앙의 성숙은 열렬히 기도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시간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신앙이 나의 습관과 인격에 표현되는가입니다. 단순히 나의 언행이 아니라 나의 가장 근본적인 생각, 이 세상과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과 가치가 하나님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사울은 기름부음을 받은지 얼마 후, 비교적 쉽게 왕이 되었습니다. 적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즉시 왕이 되었기 때문에 고난을 모릅니다. 그래서 자기의 왕권에 대한 확신이나 자의식이 부족합니다. 다윗을 보고 자기를 도와줄 인재가 나타났다고 기뻐해야 할텐데, 도리어 자기의 자리를 불안해 합니다. 다윗은 반대로, 기름부음받은 후 한참 지나 왕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사울왕에게 쫓겨다니면서 고난을 받았습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이웃 나라로 도망가서 미친 척도 했습니다. 침을 질질 흘리는 것을 본 이웃나라 왕이 어디서 저런 자를 데려왔냐고 화를 냈습니다. 다윗은 그렇게 낮아짐을 경험하면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하나님 앞에 비천해져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고난이 닥쳐도 이겨냅니다.
반면에 사울은 인간적인 생각으로 왕권을 이해했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왕권을 목숨걸고 지키려 했습니다. 사실 그것이 맞습니다. 왕은 그렇게 하라고 뽑은 것입니다. 왕을 보호하다 보면 나라가 보호됩니다. 왕이 자기 보좌를 지키지 못하면 자기만 죽는 게 아니라 자식들이 다 죽습니다. 그래서 요나단이 다윗을 위하는 것을 보고 불같이 화를 내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눈치를 보았습니다. 핑계일 수 있지만 아말렉의 좋은 우양을 살린 것은 백성들의 말을 들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버리셨다는 사무엘의 선언을 듣고도 하나님 앞에 엎드리기보다 백성들의 보기에 좋지 않으니 일단 자기와 같이 경배하자고 했습니다.
다윗의 업적 중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법궤를 다윗성으로 가져온 것입니다. 십계명의 돌판이 담겨 있는 법궤는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그것이 여기저기 떠돌고 있었고, 심지어 적들에게 빼앗겼다고 돌아온 적도 있었습니다. 임시로 텐트에 보관 중이었는데, 다윗은 자기의 성이 생기자 즉시로 궤를 옮깁니다. 처음에는 수레에 실었다가 그것을 만진 사람이 죽는 등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궤를 어깨에 메게 해서 다윗성에 들이는데 어찌나 기뻐하는지 옷이 내려가라고 뛰며 춤을 추었습니다. 왕이 그렇게 하니 백성들도 기뻐하면서 나팔을 불고 춤을 추었습니다.이렇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에게 하나님은 그의 왕권이 그의 집안에 영원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다윗의 아들이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것이고, 영원히 버림받지 않을 것입니다. 다윗의 왕조가 영원할 것이라는 이 놀라운 언약을 다윗 언약 또는 시온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실제 다윗의 왕국은 400여년만에 멸망하지만, 많은 예언자들이 다윗처럼 목자의 마음으로 백성을 돌보고 하나님을 섬기면서 평화와 번영을 가져오는 다윗왕과 같은 인물의 재림을 예언하였습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그리고 아모스, 미가, 학개, 스가랴 등이 그랬습니다.
영원한 왕국이라는 것은 매우 놀라운 약속이고 사실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적인 왕국이 영원할 수 없는 이유는 먼저, 왕은 언젠가는 죽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왕이라도 영원히 살지 못합니다. 반드시 후계자를 두어야 하고 대개는 아들입니다. 그런데 아들들이 서로 왕이 되려고 싸웁니다. 그것은 죽느냐 죽이느냐의 문제입니다. 왕은 가장 행복해야 할텐데 반대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됩니다. 다윗도 자기 아들들이 서로 죽입니다. 세종대왕은 아들이 손자를 죽입니다. 또 왕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일 확률이 낮습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에 각각 약 20명의 왕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던 사람들은 다윗, 솔로몬 외에 히스기야, 요시야 등 극소수입니다. 그만큼 인간들 가운데는 하나님께서 믿고 맡기실 왕의 재목이 드뭅니다. 또 중요한 이유는, 인간의 세상은 원래 하나님의 정의와 뜻이 완전히 펼쳐질 수 없는 곳입니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결국 이방인의 제국의 침략을 받아서 멸망하게 됩니다.
왕이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치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제도입니다. 자기 나라에서는 전능하여서 모든 것을 소유하고 뜻대로 합니다. 그리고 인간적으로 가능한 한 영속성을 추구하여서 자손까지 대대로 왕위를 유지하려 합니다. 하나님의 속성인 전능과 영속을 추구하기에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한데 세상의 나라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인간적인 권세를 추구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핍박받는 사람들이 있고 불의가 있어서 멸망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영원한 왕으로 오신 것은 이 세상 나라들에 대한 심판입니다. 수많은 왕들이 있었지만 대부분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은 이 땅에 사는 동안 엄청난 권세를 부리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이사야 14장에 보면 그도 마침내 죽어서 음부로 내려가는데 수많은 죽은 영혼들이 그를 조롱하며 분풀이합니다. 이 땅에서 권세를 누리며 교만하고 핍박했던 모든 왕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 왕을 통해서는 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에 대해 마리아에게 천사는, 하나님이 그 조상 다윗의 보좌를 주시리니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이렇게 죄 많은 나라들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 나라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무기와 전쟁과 피흘림으로 세워지는 나라가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과 평화로 세워지는 나라입니다. 우리들은 그 나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 나라에 충성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사랑과 평화의 나라를 위해서 나의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마땅히 할 바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기 바라고 바울 왕이 그랬던 것처럼 내가 사람의 생각으로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는 그런 일이 혹 있었다면 되게 하고 주님 앞에 겸손한 사람,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사람이 되기 바랍니다.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 세상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들은 그 나라를 위해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의 모든 삶이 우리들의 학교와 일터와 가정이 하나님께 세팅되어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닮아서 그분의 사랑과 평화를 전하는 우리들이 되기 바랍니다. 그리고 좀 더 큰 스케일로이 세상의 수많은 나라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에서 돌이켜서 하나님을 향하기 바랍니다. 진정으로 사람을 위하는, 그래서 사람들이 진정으로 하나님 안에서 복을 누리는 그런 나라가 되기를 우리들은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허락해 주시는 나라를 바라보고 그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면서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사진은 희생의 십자가라는 조형물입니다. 알링톤 국립묘지에 있습니다. 칼과 십자가가 잘 어울립니다. 모양이 비슷해서일 것 같습니다. 해리 포터에 보면 얼핏 십자가 같이 보인 것이 칼이었던 장면도 있습니다. 칼과 십자가는 사실 반대 느낌입니다. 칼은 권력, 전쟁, 강함의 상징인데 십자가는 희생, 낮아지심, 겸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에서 칼과 십자가가 잘 조화롭게 이해된 적이 있었습니다. 중세의 기사도 정신은 자신을 아끼지 않고 용감하게 적을 물리치고 희생정신을 갖고 약자를 보호한다는 이미지입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죽이고 유명해졌습니다. 그러다가 사울 왕의 미움을 사고, 왕이 자기를 죽이려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에게서 몸을 피하는데, 갈 곳이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했을 것이고, 아마도 그래서 즉시 제사장의 도성인 놉으로 갔습니다. 우리도 때로는 사방이 다 막힌 것 같은 위기 상황을 만납니다. 오직 하늘을 바라보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야 합니다. 전능하신 주님께서 선하신 뜻에 따라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다윗이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가서 먹을 것이 있는지 물었더니, 하나님께 바친 거룩한 떡만 있었는데 그에게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장하여 안식일에 밀알을 먹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비난하자 예수님은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로 이 제사장이 한 일을 인용하십니다.
다윗은 또 무기가 없는지 물었습니다. 마침 그가 죽인 골리앗의 칼이 있어서 달라고 하였습니다. 왜 골리앗의 칼이 제사장, 즉 하나님의 전에 있었을까요? 다윗은 골리앗의 갑주를 자기 장막에 두었습니다 (삼상 17:54). 이 단어는 무기라는 뜻이므로, 골리앗의 칼도 자기 집에 가져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다윗이나 그 집의 누군가가 그 칼을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 제사장에게 주었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에봇 뒤에 있다는 말은 하나님께 봉헌했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과 제사장의 대화를 볼 때 부자연스럽습니다. 다윗은 그 사실을 모르고 그저 칼이 필요해서 물었는데 마침 거기 있었다는 느낌이 본문에 강합니다.
만일 다윗이 아니면 어떻게 이 칼이 제사장에게 왔을까요? 이 칼을 사울왕에게 바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다윗의 공적인 이 칼을 들고 다니기를 꺼려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 칼을 보는 사람마다 골리앗과 다윗을 떠올릴 것입니다. 다윗이 사용했다면 가장 자연스럽지만, 다윗이 무기를 그렇게 중요시했는지 의문이고, 왕의 사위자 신하로서 더 좋은 칼을 사용하는 것도 부담스러웠을 수 있습니다. 만일 다윗이 챙기지 않았다면 군인들 중 누군가 그 칼을 집어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투의 혼란, 또는 갑작스런 승리로 인한 희열에서 정신없던 차에 누군가 칼을 집어들었고, 이것을 어떻게 하지 고민하다가 그냥 제사장에게 갖다바쳤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실 제사장은 칼을 다루는 사람입니다. 제사 드릴 때 소나 양을 잡고 살과 내장, 지방, 껍질과 뼈를 다 칼로 처리해야 합니다. 물론 이 칼은 다른 단어입니다. Hereb 이 아니라 maachelet 인데 이상하게 성경에서 이 단어가 별로 안나옵니다. 헤렙은 413회, 마아켈레트는 4회 나옵니다. 제사를 지내는 다른 기구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들이 있는데 칼만 안 나옵니다. 일부러 그런가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예는 아브라함과 이삭, 또 사사기에서 남편과 불행한 아내 이야기처럼 사람에 대해서만 나옵니다. 왜 그런지 연구해 보면 흥미로울 것입니다. 아히멜렉 제사장의 입장에서는 엉뚱하게 아주 귀한 무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나는 이런 것 취급하지 않는다고 거부하기도 어렵습니다. 나는 제사 드리고 기도하는 일만 한다고요. 그러나 참된 목자라면, 자기의 종교적 의무만 다할 뿐 아니라 자기가 돌보는 백성들의 안위를 염려해야 합니다. 이 칼은 결국 백성들의 목숨에 관계되는 물건이고 잘 다루어야 하기에, 거부하기 어렵습니다.
제사장은 칼을 들고 싸우는 사람은 아닙니다. 세상적인 권력을 탐하거나 추구한다면 제사장에게 어울리지 않을 듯합니다. 그러나 사실 제사장들이 칼을 갖지 말라는 금지명령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칼 두 자루를 갖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알게 되셨을 때에도 왜 이런 걸 갖고 다녔느냐고 뭐라고 하시는 분위기가 아닙니다. 제자들이 어떻게 칼을 갖게 되었을까요? 이전에 열심당이던 제자가 계속 갖고 있었을까요? 아니면 누군가 헌물을 하는데 가진 게 칼이라서 칼을 제자들에게 드렸을까요? 아니면 실제로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칼을 구입했을까요? 어쨌든 예수님의 제자들이 칼을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제자들이 갖고 있던 칼 두 자루라는 말씀에 근거한 교황의 교서가 우남 상탐(unam sanctam)입니다. 보니파스 8세가 1302년에 발표한 교서인데 교회는 두 자루의 칼을 갖고 있습니다. 영적인 권세, 세속적인 권세이며 전자가 우월합니다. 교회가 이렇게 영적인 권세 뿐 아니라 세상적 권세도 갖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좋은 일일까요? 만일 사람들의 신앙을 공권력으로 강제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때로는 사람들을 미혹하는 이단이나 이교가 있을 때 다 가두거나 벌을 준다면 그것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좋은 일일까요? 그러나 교회가 영적이 아니라 세상적인 권력을 갖게 된다면 예수님의 정신에서 멀어질 것입니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제국이 되었을 때, 세상적으로는 더 높을 수 없는 권세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접한 사산조 페르시아에게는 기독교를 믿는 것이 로마의 편에 서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로마에 속한 사람에게는 복음의 큰 문이 열렸지만, 페르시아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복음의 장벽이 생겼습니다. 나중에 로마가 권력으로 삼위일체 등의 교리 수호에 나섰습니다. 예수님의 한 위격 두 본성이라는 칼세돈 기독론을 강요하였는데, 단성론이 강하던 이집트 등은 결국 이슬람으로 넘어갔습니다. 교회가 칼, 즉 세상 권세를 갖는다는 것은 이렇게 위험하고 예수님에게서 멀어지며 결국 많은 사람들을 복음을 믿지 못하게 가로막는 큰 장벽이 될 수 있습니다.
본문의 아히멜렉 제사장은 본의 아니게 칼을 맡게 되었고, 정치적인 선택을 강요받게 되었습니다. 사울 왕을 피해 도망친 다윗을 돕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반역자가 되는 위험을 무릅쓴 것입니다. 제사장이 별 생각 없이, 칼을 달라니까 주었을까요? 나중에 사울왕에게 변명할 때 제사장은 그런 식으로 말합니다. 다른 의도가 없이, 다윗이 왕의 사위이고, 큰 장수이니까 그랬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아히멜렉 제사장은 홀로 나타난 다윗을 보고 떨며 맞이했습니다. (1절) 왜 당신 혼자입니까? 다윗이 거짓으로 둘러댑니다. 왕이 급한 일로 보내어서 경황이 없어서 무기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아닐까요? 나중에 사울왕과의 대화에 보면 제사장은 다윗을 위해서 기도도 해 주었습니다. 아마도, 제사장은 영적으로 하나님의 선한 뜻이 사울을 떠나 다윗에게 옮겨갔음을 간파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그가 다윗을 도운 것은 우연이나 실수나 우발적 행동이 아니고, 의도적인 결단으로 그리 한 것입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사울의 미움을 받아서 그 도성의 모든 제사장들과 가족이 몰살을 당하는 끔찍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제사장의 입장에서는 참 억울하다고 할 것입니다. 공연히 사울 왕과 다윗의 싸움에 연루되어서, 애매하게 다윗을 도와주었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아들 한 사람만 살아남았는데 아비아달입니다. 그는 다윗에게 피했고 나중에 다윗왕 때 제사장이 되었지만, 솔로몬 왕의 미움을 사서 아나돗으로 쫓겨납니다. 아마도 예레미야는 그 자손들 중 한 명일 것입니다.
아히멜렉 제사장이 처음부터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나는 개입하지 않겠다고 했으면 어찌 되었을까요? 나는 이런 정치 싸움에 말려들지 않겠다, 나는 예배 인도하고 기도만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다윗에게 칼을 주기를 거부했더라도, 그것 역시 정치적인 행동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 행동도 안하고, 말도 안하고, 침묵하고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중립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제사장이 다윗을 외면했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마 사울과 함께 멸망했을 것입니다.
어떤 의미로 다윗의 생명이 아히멜렉의 생명과 얽히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죽을 운명이었으나 그에게 음식과 무기를 주고 아히멜렉이 죽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몸값을 자기 생명으로 치른 셈입니다. 이렇게 몸값을 치르는 것을 구속(redemption)이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두 가지 몸값이 있는데 노예와 죄수의 몸값입니다. 우리는 죄와 사탄의 노예와 죄수였는데 예수님이 값을 치르시고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이렇게 몸값을 치르기 위해서는 상황에 의해 두 목숨이 얽히든지, 사랑의 관계에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생명이 매였다고 표현된 사람들은 다윗과 요나단, 그리고 야곱과 베냐민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되셔서 우리와 같은 처지에 자신을 두시고,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자기 목숨을 우리 것과 묶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값을 치르셔서 우리를 살리시고 해방하셨습니다.
교회가 해야 할 일, 사람들을 영적으로 돌본다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영적인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큰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 세상은 우리에게 칼을 맡깁니다. 이 칼을 좀 맡아 달라고 합니다. 이것을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가? 이 칼로 사람들이 다칠 것입니다.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싫어도 때로 칼을 맡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 칼을 어떻게 할 것입니까? 가만히 보관만 해 둔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때로는 선택을 요구받을 수 있습니다. 원치 않지만 애매하게 갈등 상황에 얽매일 수도 있습니다. 성도들의 영적인 삶 뿐 아니라, 때로는 세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 문제들에 판단을 요구받습니다. 공연히 그런 일에 얽매였다가 곤란해 진다고 그저 외면만 하겠습니까? 교회는 때로 세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내고, 하나님의 판단과 선악의 기준을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공의로 판단하시며, 고아와 과부, 가난한 자들과 나그네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피조물이니, 서로 존귀하게 여기기를 원하십니다. 이 말씀에 어긋나는 세상의 권세에 비판하는 것이 교회가 할 일입니다. 이런 일이 없기를 바라서는 안되겠습니다. 물론 그런 세상적인 칼을 떠맡아야 되는 상황이 없으면 좋겠지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고 미리 예비해야 할 것입니다. 왜 이런 곤란한 일이 생겨서 나에게 고난이 닥치는가 하고 하나님을 원망할 일이 아닐 것입니다. 도리어 이런 일은 당연히 언젠가는 일어나기 마련이라고 생각해야겠습니다.
그러다가 고난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의 제사장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만일 그런 일을 겪을 때, 아무도 원망하지 맙시다. 하나님 내가 잘 살고 있었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서 환란이 오게 하십니까 하고 원망할 일이 아닙니다. 성도의 삶을 살다 보면 당연히 언젠가는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겸손히 받아들입시다. 그리고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합시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고난받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오셨습니다. 번영 신학의 교과서인 로마 제국의 불의를 온세상에 드러내시고 유대인과 이방인이 모두 멸망할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드러내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을 원망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을 본받아서, 이 세상에서 주님께만 충성하면서 성도들의 영혼을 돌보다가,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람을 원망하지 맙시다.
십자가냐 칼이냐? “칼을 가지는 칼로 망하느니라” (마 26:52) 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고 십자가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우리는 주중에 사무엘상과 사무엘하의 말씀을 읽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그 분의 나라를 세우시고 백성들을 다스리시는 역사를 통해, 한때 인간세상에서 시도되었던 하나님의 왕국의 한계는 무엇이었는지, 그것들이 결국 왜 실패했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넘어서 오시는 예수님의 나라는 무엇이 특별하고 달랐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가운데 매우 특별한 사건을 다룹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왕국의 첫 왕은 사울이었는데, 그는 처음에는 겸손했지만 날이 갈수록 왕이라는 책무를 감당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질투와 욕심에 빠져서 파멸의 길로 갑니다. 그렇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의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사울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아말렉은 이스라엘의 남부에 살았던 에서의 후예들인데,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 전쟁을 일으켜서 고난을 끼친 적이 있습니다. 이제 약 400년이 지났는데 하나님은 그들을 벌하기로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울에게 주신 명령은, 모든 사람들, 남녀와 어린이와 젖먹이까지, 그리고 짐승들, 소와 양, 낙타와 나귀까지 죽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사울은 남녀노소는 죽였으나 보기에 좋은 소와 양은 살렸습니다. 나중에 그는 그 동물들을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 살렸다고 하지만 핑계일 뿐입니다. 죽이기에 아까와 살린 것입니다. 그의 그러한 불순종에 하나님은 사울을 왕으로 삼은 것을 후회하신다고 사무엘에게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제기하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왜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하셨는가? 아이까지 모두 죽이는 것은 너무한 것이 아니냐는 비기독교인의 물음에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요? 아무리 죄인이라지만, 아이들도 죽이신 것은 너무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이 바로 그렇게 합니다. 2차대전이 끝난 직후인 1945년 6월 18일, 프레로프 (Prerov) 학살이 났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 군인들이 기차로 독일로 운송되던 265명의 독일인들을 학살했습니다. 74명이 아이들이었습니다. 왜 그랬냐는 질문에 군인들은 부모를 죽였는데 어떻게 했어야 했냐고 말했습니다.
본문은 매우 분명하게 말합니다. 아말렉의 죄 때문에 진멸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본문을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너무 당연한 듯이 받아들이면 안됩니다. 우리는 죄와 상관없고 죄인들과 분리된 의인들인 것처럼 생각하면 안됩니다. 루터는 우리가 죄인이면서 의인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미 의인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전히 죄의 본성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겸손해야 하고, 그러한 죄인들의 운명이 남의 일이 아니라 나에게도 일어나야 할 것을 고백하고 주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모든 생명은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지만, 또 때가 되면 가져가십니다. 이사야 40:7 에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기로 풀과 꽃이 피어나지만, 그의 기운이 또 불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듭니다.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 죽음 위에서도 주님이신 것은 얼마나 큰 위로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죽고 나면 우리를 지으신 그 분을 대면할 것입니다. 만약에 죽었는데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만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살리시고 죽이시며, 죽임을 통해 살리십니다. 사나 죽으나 하나님이 주님이시며, 우리는 사나 죽으나 그 분만을 섬깁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생명의 주님이시지만, 온 민족을 아이까지 죽이시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때 뿐 아니라 다른 때에도 대규모의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노아 때의 홍수, 소돔과 고모라에 내린 불의 심판 등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아말렉 뿐 아니라 세상 모든 민족을 멸하실 것입니다. 그의 심판 앞에서 인정받을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아래 모두 멸망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유다는 이 심판을 먼저 받아서 성전이 파괴되고 수많은 죽임을 당하고 바벨론으로 포로고 끌려갔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도 이 심판은 피해 가지 않고 정면으로 내려졌습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의 예언서, 특히 종말론은 일관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이 심판의 도구가 된 이방민족에게는 더 심한 심판이 내려질 것입니다. 세상 모든 민족들이 철저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불의와 폭력, 거짓, 그리고 잘못된 종교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아말렉을 진멸하셨던 것을 생각하기 전에, 하나님이 나에게도 심판을 내리실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심판에서 구원받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구약성경에서 우리같은 이방인이 구원받는 방법 또는 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좋아하든 안 하든, 유대인들에게 친절하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편이 되고, 예루살렘 또는 시온을 가까이 하면 이방인도 구원의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사야 60장,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모두 졸아하고 그 가사로 된 찬양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60장을 잘 읽어 보면, 그 빛을 발하는 것은 유대인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임하는 것도 유대인들에게입니다. 이방인들은 단지 그들을 섬기는 종으로 나옵니다. 60:12 “너를 섬기지 아니하는 백성과 나라는 파멸하리니 그 백성들은 반드시 진멸되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세상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시편 149:6-9에는 “그들의 손에는 두 날 가진 칼이 있도다. 이것으로 뭇 나라에 보수하며 민족들을 벌하며 그들의 왕들은 사슬로, 그들의 귀인은 철고랑으로 결박하고 기록한 판결대로 그들에게 시행할지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칼로 세상을 심판하고 보수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구약의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아까 사울왕에게 명령하셨던,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것은 도리어 약과입니다. 모든 민족이 그렇게 진멸될 것이고 오직 유대인을 섬겨야 살아남습니다. 만약에 신약 시대인 지금에도 그 말씀을 그대로 이해해서, 우리와 다른 민족들은 모두 멸절될 것이라고 믿거나, 우리가 그러한 심판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유대교의 그러한 정서를 그대로 가져오면서 유대인의 선민 사상을 버리고 모든 민족이 신앙으로 형제가 될 수 있으며 모든 민족에게 그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는 선교 사상으로 대치하면 이슬람이 됩니다.
구약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는 신약의 성도들에게 중요한 과제입니다.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유대인이었기에, 어려움이 적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으면서, 유대인의 율법을 따라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안식일도 지키고, 할례도 받아야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정체성에 대한 중요한 문제였기에 예루살렘에서 공의회가 열렸고 바울, 베드로, 야고보 등 주요 지도자들이 의견을 냈습니다. 결론은,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구약의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를 통해서이기에,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올바른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제 본문의 아말렉에 대한 말씀도 신약 시대에는 다르게 해석해야 합니다.
신약의 예수님의 메시지는 그것을 완전히 변화시킵니다. 온 세상에 임해야 할 심판은 예수님께 내려졌습니다. 우리를 심판하셔야 할 심판자가 우리 대신 심판을 당하셨습니다. 종말에 온 세상에 내려져야 할 피와 불과 연기의 심판이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온전히 내려졌습니다. 그것이 방패가 되어서 우리는 안전할 것이며, 우리의 죄는 예수님의 의로 인해 소멸되었습니다.
이것이 너무나 구약과 달라 보이는 메시지이기 때문에, 초기 기독교 시대에는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다르다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율법과 심판과 파괴의 하나님이고,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과 용서와 평화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을 완전히 오해한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은 동일하시며,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이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라고 부르신 그 분입니다. 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극단적인 사랑과 극단적인 진노를 내리십니다. 결국 예수님의 사랑도 구약의 여호와의 진노의 다른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하나이십니다. 그 말은 하나님이 둘 셋 여럿이 아닌 하나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 되고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을 섬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나라고 할 때에는 또 하나님이 2 분의 1, 3분의 1이 아닌 하나라는 뜻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2분의 1, 3분의 1로 나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반으로 딱 잘라서 반은 사랑이고 반은 진노고 그렇게 나눌 수 없습니다. 반은 천국 반은 지옥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곳에서 온전하십니다. 천국은 당연히 하나님이 온전히 계시는 곳입니다. 그런데 지옥도 하나님을 떠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옥에서도 다스리십니다. 지옥은 하나님의 진노의 장소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사랑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하면 그저 온유하고 친절하고 품어주는 것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진노가 함께 갈 수 있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심은 온전히 그의 주권이며 은혜이고 인간은 오직 그것을 믿고 따르며 그것을 위해 쓰임받도록 헌신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합니다.
구약의 종말론은 하나님이 모든 나라들과 민족들을 심판하시며 그의 백성들을 심판의 도구로 쓰신다고 합니다. 신약시대에도 우리는 세상을 심판합니다. 고린도전서 6:2-3에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라고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9:28에는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그러나 그것은 더이상 복수나 미움이 아닙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예수님과 같은 심정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의 열쇠가 있습니다. 이것으로 사람들을 막는 것이 아니라 열어주라고, 한 명이라도 더 천국에 들이라고 열쇠를 주셨습니다. 로마서 12: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아말렉에 내려졌던 완전한 심판은 모든 인간에게 내려질 심판을 예표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께서 다 받으셨습니다. 아말렉을 직접 칼로 쳤던 이스라엘의 행동은 신약 성도들에게는 원수도 사랑하고 그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신약 성도들의 사랑의 표현이 됩니다. 다시금, 순종이 제사보다 낫습니다. 우리는 이 사랑과 평화와 소망의 복음을 받았고 이것을 세상 모든 민족에게 전할 미션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참된 순종입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주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또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리고 지난주에 성령 강림을 통해서 하나님의 삼위일체에 대한 온전한 계시를 이미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삼위 일체이시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일체라는 말은 당연히 하나님은 하나이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둘이나 셋이나 여럿이 아니십니다. 만약에 신들이 여럿이라면 우리는 그중에 누구를 섬겨야 할지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그 신들은 아마도 자기들끼리 영역을 나누어서 다스릴 것입니다. 그리스 신화가 그렇습니다. 거기에는 하늘은 제우스, 바다는 포세이돈, 지하세계는 하데스가 다스립니다. 그래서 사람이 하늘에서 번개가 치면 제우스에게 기도하고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면 호세이돈에게 기도합니다. 만약에 어떤 한 신이랑 관계가 틀어지면 됐다고 버리고 다른 신에게로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하나이십니다. 한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그는 창조주이시요 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을 떠나서 어디 숨을 데가 없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을 피해서 배를 타고 바다로 갔습니다. 그러나 바다도 하나님이 다스리시기에 풍랑이 임했습니다. 풍랑을 피해서 바다속 깊숙이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지만 거기도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저 하나님을 피해 달아날 곳이 없고, 결국은 하나님께 돌아오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돌아오라 돌아오라라고 여러 차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혹시라도 하나님과 좀 관계가 좀 틀어졌다고 하더라도 더 멀리 도망가도 소용이 없습니다. 돌아가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돌아오면 탕자를 맞아 주시는 아버지처럼 환영하시고 다시 받아 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이시다. 그것이 일체가 되겠습니다.
3위는 세 위격 person입니다. 세 인격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단순히 능력이나 현상이나 원리가 아니라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생각하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 판단하십니다. 하나님은 감정이 있으십니다. 주님은 기뻐하시고 슬퍼하시고 때로는 화를 내십니다. 하나님은 또 의지가 있으십니다. 뜻을 세우시고 그 뜻대로 행하시고 우리들을 이끌어 가십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는 세 위격이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그 세 분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하나이시라고 말을 하는데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고 하면 그것은 조금 오해받을 수도 있고 설명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고 하면은 마치 한 인격인 것처럼 느껴지기가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야고보서에서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 네가 아느냐 그런 대목이 있는데 사실은 하나님은 하나이시라는 것이 더 좋은 번역입니다. 하나님은 세 인격으로 영원히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창조하시기 전에도 고독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혹시 그런 얘기 들어보셨습니까? 하나님은 창조하시기 전에는 홀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고독하셨다, 외로우셔서 우리를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그건 사실 맞지 않는 얘기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시기 전에도 하나님은 세 분이 영원한 사랑과 교제와 연합 가운데에 계십니다. 뭐가 부족해서 우리를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디.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서 이 사실을 여러 차례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시고 나는 아버지 안에 있다. 세 위격의 관계가 그러합니다. 아버지는 아들 안에, 아들은 아버지 안에 온전히 하나로 계시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묶는 띠가 성령님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세 위격은 서로서로 완전한 사랑과 연합 안에 있으십니다. 우리는 사실 그것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아무리 사랑해도 그것은 다른 인격입니다. 내가 내 자식을 아무리 사랑해도 그 아이가 아프다고 하면 내가 같이 마음은 아프겠지만 그 몸이 아픈 걸 내가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격은 완전히 하나되는 완전한 사랑과 연합의 교통하심이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이신 것입니다.
세 위격으로 온전한 하나로 계시는 그런 신비로운 신성의 깊은 신비를 우리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셨기에 우리가 그것을 알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3위일체로는 사람들이 어떻게 책상머리에 앉아서 토론하거나 연구해서 만들어낸 이론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은 삼위일체라고 하자, 그러면 멋있을거야! 이렇게 만들어낼 생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를 주시니까 우리가 이해할 수 없지만 그 계시에 합당하게 인간의 언어로 최선으로 표현한 단어가 삼위일체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제일 중요한 단계는 예수님의 신성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저 어떤 특별한 사람일뿐만 아니라 영원부터 계시는 하나님이셨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당연히 예수님을 굉장히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훌륭하신 선생님, 예언자. 그러다가 제자들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을 하기 시작합니다. 중요한 계기는 예수님이 물위를 걸으신 사건입니다. 베드로를 손잡고 배에 오르실 때 제자들이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할 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고백했으며, 그들이 산에 올라갔을 때 예수님이 영화롭게 변화되셨고 구름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저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이렇게 제자들은 점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직까지는 예수님이 정말로 신적인 분이다, 하나님이시다 하는 고백에까지 이르렀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왜냐면 성경 시대에는 아주 특별한 사람, 대표적으로 왕에게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만큼 특별한 사람이라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정말로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고백을 한 것인가는 아직 확실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예수님이 신성한 분, 하나님이라고 고백을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정말로 예수님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1장 4절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다. 이것은 정말로 주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이 되겠습니다. 이렇게 점점 더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이 신약 성경에서 계속 나오게 되는데 몇 군데를 살펴보겠습니다. 로마서 9장 5절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이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의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 빌립보서 2장 6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본체이신데 겸손하여 낮아지셨습니다. 그 다음에 골로새서 1장 15절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이시니" 그 다음 2장 9절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무나 멋있는 표현이지 않습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과 같은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십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장 3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이렇게 신약 성경에서 사도들은 점점 더 예수님을 믿고 알아가고 예배하면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나님, 신적인 분이시라는 것을 고백한 것도 그들이 연구하거나 토론해서 나온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하자, 멋있잖아! 이게 아니에요 어떻게 그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고 고백을 하게 되었는가? 우리가 한 2주 전에 했던 것을 복습하겠습니다. 이건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에 반복해야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본 사람들은 그저 예수님이 살아나셨구나 하고 고백한 것만이 아니라 내 죄가 용서받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어떻게든 내 죄 용서와 완전히 결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내 죄를 위함이고 그분이 살아나신 것은 내 죄를 용서하신 것입니다. 살아나신 예수님을 보고 그분 앞에 엎드려서 주님 내 죄가 용서받았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논리적으로 연결은 안 되거든요. 그러나 그것은 성령님의 역사하심이기 때문에 살아나신 예수님의 그 영광을 보면서 주님 내 죄를 용서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고백이 계속 되면서 신약 시대에 교회가 세워지고 신약 성경이 완성이 되는 것인데 오늘은 한 발짝 더 나가겠습니다. 사람들이 그러면 내 죄를 용서해 주신 부활하신 예수님이 누구시냐고 질문을 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이 과연 어떤 특별한 인간일 뿐이었겠습니까? 예수님이 만약에 그냥 어떤 훌륭한 사람일 뿐이었다면, 하나님이 보내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주의 능력을 행하시는 특별한 사람일 뿐이라면 그 사람이 어떻게 내 죄를 대신 진단 말입니까? 그분은 죄가 없으시니까 자기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지 모르겠지만 어떻게 그분이 우리 모든 사람의 죄,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와 지금까지 모든 인간들의 죄를 그분이 홀로 십자가에서 질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어떻게 그 모든 죄를 그분 혼자서 용서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 그분이 보통 사람이라면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하나님 외에 누가 죄를 사하겠느냐?" 사실 그건 맞는 말이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은 네 죄를 사하노라 말씀하십니다. 그 말은 예수님이 신적인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기에 우리 모든 죄를 대신 지실 수 있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이 용서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을 한 것은 사람들이 그냥 머리로 생각하는게 아니고 정말로 하나님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내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그 깊은 본질적인 신앙 고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배드리면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숭배하게 된 것입니다.
초대 기독교 시대에 어떤 로마의 관리가 황제에게 보고서를 드린게 있습니다. 젊은 플리니라는 사람인데 그 보고서에는 크리스천이라는 사람들이 우리 로마 제국에 나타났는데 너무 이상합니다. 이렇게 보고서를 썼습니다. 왜 이상하냐면 그들은 십자가에 죽은 청년 예수를 하나님으로 섬긴다는 것입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예수님을 섬기고 그에게 예배드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그게 뭔가 멋있어서 그런게 아니라 그분만이 내 죄를 용서하실 수 있기 때문에, 내 죄 용서와, 내가 하나님께 구원받았다는게 너무나 분명하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너무 당연한 일이 되었거든요. 어떻게 이게 가능했느냐? 예수님은 누구신가? 결국 이 질문이고 그 답은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는 그냥 딱딱한 교리나 지루하고 재미없는 그런게 아니라 초대 성도들의 가장 진실한 신앙 고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나의 구주 예수님에 대해서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성령님은 누구신가? 세 번째 위격 성령님입니다. 구약 성경에도 성령님이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능력으로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님을 소망하고 간구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령 충만, 성령의 부으심 그렇게만 생각하면 성령님을 마치 어떤 대상인 것처럼, 받을 수 있는 능력인 것처럼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달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주시면 우리가 받는 그것만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능력이 나에게 임하면 그게 내 능력이 되는게 아니라 인격적인 성령님 그분이 오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인격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습니다. 성령님이 내 속에 계셔서 나와 함께 사시는 것입니다. 나와 동행하시고 나와 대화하시고 나에게 계속해서 조언과 지혜의 말씀을 주십니다. 성령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는 또 구별되는 인격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성령님은 지금 나에게 오시는 하나님이시며 내 속에 계십니다. 내 속에 보좌를 두셔서 내가 성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인격이 내 속에 들어오셔서 나와 함께 사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인 요한계시록 5장 6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다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요한계시록에는 여러 장면에서 삼위일체를 보여주는데 5장 6절도 그렇습니다. 보좌에 하나님 아버지가 앉아 계십니다. 그 가운데 어린 양이 오십니다.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 양, 그에게는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습니다. 일곱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 이것이 성령님입니다. 여기서 일곱은 숫자 일곱이 아니라 완전수가 되겠습니다. 온 세상에 온전히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영은 지금도 우리 각 사람에게 오시고 전 세계 모든 시대에 주님의 자녀들에게 그리고 모든 피조물에게 친히 오셔서 역사하시는 영입니다. 피조물과 교통하시는 하나님이 성령님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이 아니면 예수를 주로 고백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신성의 비밀입니다. 하나님이 계시해 주셔서 우리가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속한 이 비밀을 우리가 인간의 지혜로, 인간의 이성으로 알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아는 것은 이미 성령님이 내 속에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를 주로 고백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 죄를 용서하셨다, 그분이 부활하셔서 내가 하나님 자녀가 되었다는 놀라운 고백을 하는 것은 이미 내 속에서 성령님이 역사하신다는 증거가 되겠습니다. 성령님은 각 사람에게 맞춰서 눈높이 맞춤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고백하게 하십니다. 이 사람은 이것을 알고 저것을 모르니까 이에 맞추어서 예수님을 알려 주시는 분이 우리에게 임하시는 성령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찬양할 때에도 그냥 내 생각으로 찬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은 이미 내 속에 성령님이 오셔서 나의 영이 깨어나서 하나님을 사모하고 주님께 내 음성을 드려서 입술의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내 속에서 이미 능력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께 찬양하는 것은 내 속에 계시는 성령님이 나의 위에 계시는 하나님께 찬양하도록 나의 안팎해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그분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을 늘 마음속에 모시고 예수 예수님을 고백하는 삶! 인격적인 분이시며 내 속에 늘 계셔서 나와 대화하시고 나를 기도하게 하시고 어려움이 있을 때 나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직접 전달해 주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하나님 삼위일체의 한 위격이십니다.
오늘 귀한 삼위일체 주일에 신성의 가장 깊은 비밀을 우리는 나누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 주셔서 우리가 이 놀라운 내용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다시금 삼위일체는 딱딱한 교리가 아닙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진실된 신앙의 고백을 했을 때 자연스럽게 따라온 것이 삼위일체론입니다. 예수님, 나의 구주이시며 온 세상 죄를 지고 용서해 주신 아들 하나님, 그리고 그분을 나에게 알려 주시고 참된 계시를 주시는 성령님께서 나와 동행하셔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십니다. 오늘 이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고 우리 자신의 진실된 고백을 하면서 기도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신성의 비밀을 깊이 묵상하기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아들 예수님, 성령님을 부르고 우리를 위해 하신 그 놀라운 일을 생각하면서 감사하는 시간이 되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은혜를 통해서 늘 성령님과 동행함으로 복된 성도의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은 부활절 후 50일째인 오순절이며 성령강림 주일 입니다. 제자들이 한 곳에 모여서 기도하고 있었는데 성령님이 오십니다. 그 집을 가득 채워서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소리가 들렸고 불의 혀와 같이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의 머리 위에 임하였습니다. 그들이 성령님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서 각기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오순절 명절이었기 때문에 세계 각처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이 자기 지역의 언어로 말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이 갈릴리 사람들이 내가 쓰는 언어를 말할 수 있는가 깜짝 놀랐고 어떤 사람들은 술 취했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각 언어로 말하는 내용은 하나님의 크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며, 하나님이 구원해 주시는 놀라운 일들을 제자들은 각기 다른 언어로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일어나서 소리를 높여서 말합니다. 때가 제 3시, 아침 9시니 술 취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선지자 요엘을 인용합니다. 성령님이 지혜를 주셔서 예언서의 내용을 알게 하시고, 그것을 담대히 전할 수 있는 믿음과 용기도 주십니다.
17절에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마지막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이때가 2000년 전인데 어떻게 벌써 마지막 때라고 하는 것입니까?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종말은 모든 인간의 역사, 심지어 우주와 모든 피조물의 역사가 끝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피조물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에는 시작이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나는 때도 있습니다. 그것이 종말의 때입니다. 사람들은 종말에 관심이 많아서, 마지막 떄를 다룬 영화들도 많습니다. 인류 문명이 언젠가 어떤 이유로 끝날 것이다. 그것은 엄청난 재앙의 날이 될 터인데 그런 것을 영화로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재앙의 원인도 다양합니다. 옛날에는 가장 많았던 것이 핵전쟁이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하늘에서 소행성이 떨어져서 모든 생물이 멸망하는 시나리오도 있습니다. 바이러스가 퍼져서 인류가 멸종하기도 하고 기후변화로 환경이 변해서 지구에 더이상 살 수 없게 되기도 합니다. AI가 발전해서 모든 인류는 다 멸망하고 컴퓨터와 로봇만 살아남는 그런 미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이 종말에 대해서 생각하기를 좋아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종말은 하나님께서 가져오시는 날입니다. 그 날은 하나님의 모든 계획과 구원과 심판이 완성되는 날입니다. 하나님의세상을 향하신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고 계시되며,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심판과 상급을 받는 날입니다. 그 마지막 때는 인간의 시간으로 예상할 수 없습니다.우리의 달력으로는 오늘 본문은 2000년 전의 일이기 때문에 마지막 때가 아니라고 하겠지만, 성경의 종말은 인간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에서 일어납니다. 하나님께는 1000년이 하루 같아서, 인간의 시간에 얽매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시간을 초월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달력의 시간으로는 2000년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이미 그때가 마지막 때입니다.
종말론은 성경의 핵심적인 주제입니다. 2000년 전이 아니라 사실은 창세기 6장에서 이미 마지막 때입니다. 창세기 6장은 노아의 홍수에 대한 말씀인데, 성경의 창세기에서 불과 몇 페이지 넘기지 않아서 이미 하나님은 6:13에서 “끝날이 이르렀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노아의 때가 마지막 때인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의 죄악이 가득 찼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노아 때에 있었던 죄는 “포악함”이라고 불립니다. 폭력, violence 라고 되어 있습니다. 폭력으로 서로를 죽이고 헤치고 빼앗는 죄악이 너무나 이 땅에 가득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땅을 정결하게 하기 위해서 거의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멸하십니다. 그러므로 이미 저 옛날 노아 때부터 하나님은 피조물의 마지막 때를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베드로는 지금이 마지막 때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서도, 베드로 전후서도 예수님이 오신 그 때가 마지막 때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때가 이미 마지막 때입니다.
왜 그것이 마지막 때이고 종말입니까?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대면하면 그것이 마지막 때입니다. 완전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 그분의 전능하심 앞에서 부족하고 죄 많은 우리 인간은 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태양도 지으셨습니다. 우리는 태양도 너무나 눈부시고 강렬해서 똑바로 쳐다보지 못합니다. 하물며 그 태양을 만드신 하나님은 얼마나 능력이 많고 강력하시겠습니까? 만약에 우리가 그분의 영광 앞에 선다면 즉시로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바로 앞에 서서 그분의 능력에 직접 노출된다면 그것이 우리의 종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마지막 날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시간으로 언제인가에 관계없습니다. 하나님의 현존에 직접 들어가는 것이 바로 마지막 날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선다면 더 이상 시간의 흐름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에 요셉이 마리아와 가는데 신기한 경험을 합니다. 예수님을 가진 마리아와 함께 어떤 마을에 들어가는데 갑자기 모든 시간이 정지해 버립니다. 그래서 밥을 먹던 사람은 그 자세로 가만히 있고 동물들도 물을 마시다가 가만히 있습니다. 시간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태아로서 그 마을에 들어갔을 때 시간마저 그분 앞에 정지해버린다고 하는 그런 신기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처럼 우리들이 흘러가는 인간의 시간과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 선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신다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영광으로 침투해서 들어오신다면, 그 시간이 곧 모든 피조물의 종말입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의 은혜가 완전히 드러나는 날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 앞에 모든 피조물이 무력하게 노출됩니다. 그분 앞에서 인간의 시간은 정지되어 버립니다. 모든 인간에게 그것은 마지막 종말의 때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 바로 그러한 날입니다.
그 마지막 날에 하나님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자녀들은 예언하고 젊은이는 환상을 보고 늙은이는 꿈을 꾸리라. 자녀들이 예언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하고 들을 것입니다. 그리고 청년들은 환상을 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위대한 일에 대해서 눈으로 볼 것입니다. 그리고 꿈도 꿀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서 꿈꿀 것입니다. 여기에서 누가 뭘 하냐? 자녀들은 예언하고. 젊은이는 환상을 보고 늙은이는 꿈을 꾸고 이렇게 꼭 매치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결국 모든 세대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할 것이고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예언도 하고 환상도 보고 꿈도 꿀 것입니다.
19절에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 즉 표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sign 이 되겠습니다. 그와 같은 기사와 징조가 베풀어지는데 피와 불과 연기입니다. 뭔가 무서운 그리고 엄청난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피와 불과 연기에 해당되는 장면이 3개 있습니다 첫번째 번제입니다. 저 옛날 구약 시대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제사 드릴 때 번제는 소를 자릅니다. 피가 흐르죠 그것을 모두 완전히 하나님께 불태워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러므로 불이 있고 연기가 있습니다. 그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면서 온전히 하나님께 바친다고 하는 아주 특별한 제사입니다. 왜 그런 제사를 드립니까? 인간은 죄가 많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그 바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죄의 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래서 피를 흘려야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리고 육체의 생명은 피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피를 흘림으로 그 생명을 하나님께 값으로 드림으로 죄의 삯을 그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동물의 제사를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번제입니다. 번제를 라틴어로 holocaustum이라고 말합니다. 2차 대전 때 유대인들 대학살을 holocaust라고 말합니다. Museum 이 바로 옆에 DC에도 있습니다. 본래 뜻이 번제입니다.
피와 불과 연기 여기에 대한 성경의 장면의 두 번째는 예루살렘의 멸망입니다. 예루살렘에 바벨론 군대가 쳐들어와서 많이 죽이고 포로로 사로잡았습니다. 그 궁전과 성전을 다 파괴하고 불태웠습니다. 끔찍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해방시키시고 나라를 세우셔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만들어 주셨는데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의 신들과 이방의 불의를 쫓았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사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이 세상의 물질과 돈과 쾌락을 사랑해서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이 여러 차례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경고하시고 말씀하셔서 돌아오라 회개하라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수없이 말씀하셨습니다. 그 귀한 기록들이 우리의 예언서에 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수백 년 동안 기다리셨습니다. 그러나 그 죄가 점점 더해갑니다. 그래도 그들은 우리는 괜찮을 거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고 우리 성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의 성전이 있다. 전 세계에 단 하나밖에 없는 성전입니다. 그 성전에서만 온전히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이 성전이 우리 도시에 있는 한 우리 도시는 무사할 거야, 적들이 아무리 쳐들어와도 우리는. 괜찮을 거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은 그 도시도 버리시고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건축물에 계시지 않습니다. 아무리 웅장한 성전이라도 하나님은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바벨론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그 모든 성전과 도시를 불태워버렸습니다. 그래서 피와 불과 연기 기둥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그것은 엄청난 트라우마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섬기는 성전, 그들의 사랑이요 정체성이었던 성전이 불타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그야말로 지옥과 같은 반경이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유대인들의 믿음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은 손으로 지금 성전에 계시지 않는다. 인간의 죄악은 너무나 커서 하나님께서 완전히 그분의 한 집도 불태워 없애고 있을 만큼 인간의 죄악은 엄청난 것이다. 이 주위에서 용서받고 구원받을 길은 오로직 하나님의 은혜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그들은 철저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피와 불과 연기의 기사와 징조에 대해 성경에 나오는 세 번째 장면은 바로 이 불타는 도시에서 배우고 영감을 받은 것입니다. 바로 다름 아닌 지옥입니다. 지옥이야말로 불과 피와 불과 연기의 끝판왕입니다. 사람들은 지옥을 싫어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지옥 얘기는 싫어합니다. 지옥은 그야말로 모든 것이 영원히 불타는, 말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곳입니다. 그래서 지옥에 가라는 것이 가장 큰 욕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옥을 선입견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지옥 어떤 공간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그 공간은 하나님도 안 계시고, 영원한 고통과 치욕과 불타오르는 것만 있는 끔찍한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 그런 곳을 만드실 수 있느냐고 하면서 그런 하나님은 믿지 않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지옥이라는 말은 일단 신약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구약에는 그렇게 많이 나오지 않다가 신약에 있어서 갑자기 나온 많이 나오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중요한 단어들입니다. 예를 들어서 성령이라는 단어가 그렇습니다. 부활이라는 단어도 신약에 갑자기 많이 나옵니다. 마귀 귀신 이런 단어들도 신약에 갑자기 많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오시자 그런 영적인 악한 세력들도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신약에서 갑자기 많이 나오는 단어가 지옥입니다 사람들은 지옥을 싫어합니다. 버트런트 러셀 같은 유명한 무신론 철학자는 예수님이 지옥을 말씀하시기 때문에 기독교를 못 믿겠다고 합니다.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안 믿겠다고 하니 교만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실 지옥에게 대해서 가장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지옥은 그저 영원히 불타오르는 고통만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지옥도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뜨거운 마음이 있는 곳이 지옥입니다.
하나님은 하나이십니다. 그 말은 하나님이 둘 셋 여럿이 아닌 하나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 되고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을 섬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나라고 할 때에는 또 하나님이 2 분의 1, 3분의 1이 아닌 하나라는 뜻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2분의 1, 3분의 1로 나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반으로 딱 잘라서 반은 사랑이고 반은 진노고 그렇게 나눌 수 없습니다. 반은 천국 반은 지옥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곳에서 온전하십니다. 천국은 당연히 하나님이 온전히 계시는 곳입니다. 그런데 지옥도 하나님을 떠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옥에서도 다스리십니다. 지옥은 하나님의 진노의 장소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사랑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하면 그저 온유하고 친절하고 품어주는 것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진노가 함께 갈 수 있습니다.
혹성탈출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Planet of Apes 입니다. 옛날 버전도 있고 2011년에 reboot 된 버전에는 침팬지가 인간과 같은 지능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침팬지가 좋은 사람들과 같이 집에서 가족으로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가족의 할아버지가 치매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깥에 나갔다가 실수를 해서 이웃집이랑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이웃집의 아저씨가 그 할아버지를 막 밀칩니다. 그런데 그 집안에서 창밖으로 내다보고 있던 그 침팬지가, 사랑하는 할아버지가 폭력을 당하는 것을 보고 갑자기 진노하면서 집 밖으로 튀어나갑니다. 그래서 그 이웃을 공격하고 결국 수용소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저는 사랑과 진노가 함께 갈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사랑은 물론 온유하고 친절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 해를 당한다면 진노로 바뀝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하나님의 진노와 같이 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에 대해서 진노하십니다. 진노하시지만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결과가 하나님의. 불타오르는 질투입니다. 아가 8:6,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불타오르는 진노와 사랑이 지옥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지옥은 하나님이 안 계시는 곳이 아닙니다. 지옥도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심장 한복판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지옥은 하나님의 사랑에 불타오르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정결하게 됩니다. 그렇게 불타오르는 것이 하나님께는 홀로코스트, 번제입니다. 비록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끔찍한 광경이지만 그것은 하나님께 바쳐지는 번제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십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진 번제를 하나님은 다시 살리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죽어야만 살아납니다 하나님 앞에서 대충 살아나려고 도망가는 것이 죽음의 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우리의 생명까지도 주님께 드려서 주님께 모든 것을 바치는 번제물로 드릴 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고 부활시키시므로 새 생명을 주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노와 지옥불의 본래 의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하늘의 기사와 땅의 징조인 피와 불과 연기입니다.
20절에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나옵니다. 주의 날, 여호와의 날입니다.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중요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오는 날이 언제입니까? 구약에서는 그날을 여호와의 날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신약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해당되는 구약의 표현이 여호와의 날입니다. 여호와의 날 때로는 그냥 그 날이라고 말씀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날은 크고 영화로운 날이 됩니다. 그런데 그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됩니다. 땅에서 불과 연기 기둥이 하늘로 오르면 그것이 하늘을 가리어서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이 될 수 있습니다. 또는 심지어 하나님께서 직접 그 천체들을 치셔서 해와 달이 어두워지고 피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하늘의 권능이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인간 세계만 종말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저 하늘과 우주 모든 피조물이 모든 권세가 땅에 떨어집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이 새롭게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새하늘과 새 땅이 올 것입니다.
21절이 가장 중요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누구든지”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메시지입니다. 자녀들은 예언하고 젊은이는 환상을 보고 늙은이는 꿈을 꾸리라. 무엇을 예언하고 무엇을 보며 무슨 꿈을 꿉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이 환란과 심판과 진노 가운데서도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주의 이름이 구약에서는 여호와의 이름입니다. 신약에서는 예수의 이름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진노, 피와 불과 연기에서 구원받는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비교적 경건하게 의롭게 정의롭게 산다고 노력해도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은 온전히 은혜로만 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상대적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대충 비교해서 내가 저 사람보다는 낫지, 저 사람보다는 내가 의롭고 선하지 하는 식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친노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고 심판을 받아 멸망합니다. 그러므로 그 안에서 구원받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방법은. 오직 하나입니다 주의 이름,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 끔찍한 심판과 환란과 진노를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당하셨습니다 우리가 당해야 할 것들을 예수님께서 대신 당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을 그것에서 풀어주십니다. 그래서 예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을 어디로부터 받습니까? 죄, 죽음, 마귀, 지옥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그러나 가장 본질적으로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우리는 구원받아야 합니다. 우리를 가장 무섭게 멸망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마귀나 지옥보다 더 두려운 분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진노 앞에 서면 우리들은 즉시 불 앞에 있는 지푸라기처럼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멸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넉넉히 구원하실 수 있고 우리를 구원하기 원하십니다. 그 방법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입니다. 예수 이름을 불러서,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무엇으로부터 구원받습니까?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한 맞습니다. 왜 하나님의 진노인가? 인간의 죄악 때문입니다. 인간은 서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죽이고 파괴하고 전쟁하는 것이 일상입니다. 지금까지의 인간 역사가 다 그렸습니다. 문명의 옷을 입고 있어도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 인간의 죄성은 하나님 앞에 멸망당해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피와 불과 연기가 있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살아날 길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외에는 없습니다. 오직 추의 이름을 부르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습니다.
로마사 10:13에서 이 말씀을 다시 인용합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고, 주님은 모든 사람을 위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오늘 성령님이 임할 때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이것이 예언이요 환상이요 꿈의 내용입니다. 베드로가 전하는 소식이 이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쁜 구원이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이루어졌고 이제는 성령님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 전해질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구원의 소식을 믿고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기 바랍니다. 이 세상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습니다. 거기에서 오직 주의 이름, 예수 이름을 부르는 자만이 받을 수 있는 이 구원을 세상에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부활절 후 6째 주일입니다. 다음 주가 오순절, 성령강림 주일입니다. 지난 목요일이 예수님이 승천하신 날이 됩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마지막 제자들과 나누신 대화를 살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1장 1 절 입니다. “데오빌로여”라고 시작합니다. 데오빌로 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 입니다. 사도행전은 데오빌로에게 보낸 편지의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데오빌로라는 이름을 라틴어로 그대로 옮기면 아마데우스입니다. 모차르트의 미들 네임입니다. 모차르트의 원래 세례명이 볼프강구스. 데오필루스 모짜르투스입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이것은 누가 복음입니다. 누가복음도 데오빌로에게 보낸 편지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과 사도 행자는 둘 다 누가의 저작이고 두 편이 이어져서 하나의 왕 작품으로 완성되는 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행하시고 가르치시는 것을 시작하심부터 보도합니다.
2 절에는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셨습니다. 사도라는 말이 사도행전에서 매우 많이 나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단 한 번씩만 나오는데 누가복음 그리고 사도행전에는 사도라는 말이 갑자기 매우 많이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라는 말은 보내심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가서 아이스크림을 사와라 하면 그 사람은 아이스크림 사기 위해서 보냄 받은 사람입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12 제자라고 많이 불렸습니다. 제자들은 배우는 사람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는 그들은 사도가 됩니다.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나 바울은 어느 곳에 갈 때 자기들의 이름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 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고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원래 교육을 많이 받은 엘리트입니다. 자기 유대 사회에서 높은 지위로 잘 살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나는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그가 미쳤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후서 5:13에서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위한 삶, 나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서 사는 삶을 주위 사람들은 미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헌신하는 삶의 올바른 모습입니다.
3절에는 예수님이 고난받으신 후에 확실한 많은 증거로 살아계심을 나타내서 40일 동안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 예수님께서 복음을 통해서 전하신 가장 귀한 소식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사도행전의 맨 마지막 부분인 28:31에 바울이 생의 마지막을 로마에서 보내고 곧 순교하게 될 것인데 그가 한 것도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사도행전의 맨 첫 부분부터 끝 부분까지가 모두 하나님의 나라로 시작하고 끝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 복음의 중심이고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도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한 것입니다. 이것은 킹덤, 하나님의 왕국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왕으로서 다스리시는 나라를 전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왕으로서 다스리실 때 하나님은 그분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다스리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결국 예수님이 왕이신.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도 40일 동안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실 때 그것은 하나님이 왕이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으로서 다스리시는 나라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4절에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말이 매우 중요합니다. 누가 복음 끝부분에서도 예수님은 이 성에 머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마태, 마가, 그리고 요한복음과 차이가 있는 부분입니다. 다른 세 복음서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자들이 갈릴리에서 뵙습니다. 그들은 갈릴리로 일단 돌아갑니다. 예루살렘으로 큰 꿈을 가지고 예수님의 왕이 되시는 것을 보기 위해서 왔다가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크게 실망하고 혼돈에 빠졌고 일단 그들의 본래 출신지인 갈릴리로 돌아갑니다. 갈릴리는 그들이 처음 예수님을 만났던 곳입니다. 처음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 나라에 대해 듣고 가슴이 뛰었던 곳입니다. 처음 예수님께 제자로서 헌신했던 곳입니다. 그 곳으로 돌아가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곳에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우리에게 예루살렘을 강조해줍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누가는 수많은 성경의 저자들 가운데 거의 유일한 이방인입니다. 유대인이 아닙니다 이방인의 입장에서 유대인들이 전해주는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믿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누가에게는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전 세계로 전파되는 복음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사도 행전은 처음에 예루살렘에서 유대인 중심으로 교회가 시작되었다가 점차 모든 헬라 지역으로 복음에 전파되면서 이방인에게로 차츰 교회의 무게 중심이 옮겨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전반부는 예루살렘 중심, 유대인 중심이었다면 후반부에서는 이방 헬라 문화권 중심이 됩니다 그러나 이방인의 사도였던 바울도 마음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 마음은 늘 예루살렘을 향해 있고 결국 그 생의 마지막에 예루살렘을 찾아갔다가 거기에서 붙잡혀서 로마로 이동하게 됩니다.
이방인 지역에서 예수님을 받은 이방인들도 예루살렘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결정은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예를 들어서 처음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은 모두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유대인의 율법과 전통을 지켰습니다. 안식일을 지켰고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면서 이방인들도 안식일을 지켜야 하나? 음식 율법을 지켜야 하나? 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하나? 하는 이런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구체적으로 이방인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나 하는 실용적인 문제일 뿐 아니라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란 과연 율법을 지키는 공동체인가 아니면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가 하는 아주 근본적인 문제를 담고 있었습니다.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서 모였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기둥 같았던 야고보 베드로 이런 분들이 주도가 되어서 결국 교회는 율법이 아니라 은혜 중심이라고 하는 중요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승천하신 후에 한 세대, 사십 년 동안은 예루살렘이 세계 교회의 중심이었고 거기서 중요한 결정이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전 세계 교회가 하나였을 때를 보여줍니다. 지금 생각하면 꿈 같은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교회들이 너무나 갈라져 있고 교단들도 많고 각 개교회도 사실상 자기들 위주로만 움직이기 때문에 우리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교회가 한 몸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교회 원래는 원래 교회는 예수님의 한 몸입니다. 그래서 전 세계 교회가 하나로 마음을 모으고 하나가 되어 하나 메시지를 전파하는 이것이 사실은 본래 본래의 교회입니다. 이 첫 세대 교회 초대 교회는 이것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전 세계의 교회가 하나가 되어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어 마음을 모았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꿈 같은 일이지만 이것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5절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이 중요한 시점,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이제는 교회가 시작되어야 하는 이 시점에 예수님께서 다시금 강조하십니다. 이 모든 것의 시작에 요한이 있다 세례 요한이 모든 복음서를 시작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도 되는데 굳이 꼭 요한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푼 사람입니다. 이 물은 죄의 사함을 상징합니다. 물에 들어갔다가 나올 때 물이 죄를 씻기는 것을 상징하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사람이 죄사함을 받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죄사함의 복음입니다. 부활은 죄사함에 부활입니다. 누가복음 24:47에 그의 이름으로 최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은 죄사함과 관계가 있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예수님의 부활을 본 사람들은 자기의 죄가 사함받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예수님의 부활과 나의 죄사함은 논리적으로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님의 계시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는다면 그 안에서 와, 대단하다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나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복음의 신비입니다. 요한은 처음에 물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예고요 상징이었을 뿐 실제로 죄사함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그리고 살아나심으로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참으로 내 죄를 대신 지셨고 또 살아나심으로 내 죄가 용서받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이것이 요한이 준 물 세례의 완성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입니다. 이것은 죄사함을 받은 사람들이 예수님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되기 위해 하늘로부터 능력을 받는 것입니다. 구약에는 별로 나오지 않는데 신약에서 갑자기 나오는 많이 나오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당연히 중요한 단어들입니다. 예를 들어서 부활이라는 단어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스도, 메시아라는 단어도 중요합니다. 신약에서 갑자기 나옵니다.세례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성령이라는 단어는 구약에 별로 많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보다 여호와의 영이라는 표현이 많습니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영이 사람에게 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드문 일이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왕이 되는 사람에게 성령이 임합니다. 사울왕에게 여호와의 영이 임할 때 그가 예언을 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구약에서는 몇몇 택한 사람들에게 임했습니다. 그런데 신약 시대에는 성령으로 우리에게 세례를 주십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상위일체의 세 위격 가운데 한 분이십니다. 영어로는 person인데 우리말로 인격이라고 하지만 하나님에게 인격이라고 하면 이상하기 때문에 위격이라고 번역합니다. 하나님은 세 person이 계십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십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한 위격으로서 예수님 승천하신 후에 우리에게 오십니다. 성령님이 하시는 모든 것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은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셔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시고 성령을 세계 모든 곳에 보내셔서 각 사람에게 친히 예수님의 은혜를 친밀하게 주십니다. 사도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입니다.
6절, 그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입니까? 여기서 이스라엘 나라는 킹덤, 즉 왕국입니다. 이스라엘 왕국을 회복하신다는 말은 결국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심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질문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시는 날이 지금입니까라고 물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셨는데 이 하나님의 나라는 결국 예수님이 왕이 되시는 나라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이 왕이 되실 것이냐고 묻지 않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다만 지금이 그 때이냐고 물은 것입니다. 사도들의 이 질문은 이상한 질문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뭐 그런 걸 묻냐고 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예수님은 그 때는 아버지의 권한이니 너희는 알 바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하 너희가 권능을 받고” 권능은 뒤나미스입니다. 다이나마이트 할 때 그 단어입니다. 너희가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여기서도 예루살렘에서 시작합니다.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점점 크레센도처럼 범위가 커져나서 땅끝까지 이를 것입니다. “내 증인이 되리라” 말씀하십니다. 증인은 헬라어로는 martyr, 순교자입니다. 순교의 원래 의미가 증인입니다. 순교하는 이유는 내가 목숨을 버려도 내가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을 부인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증인이 하는 일은 간단합니다. 증인은 설득시킬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해야 되는지 궁리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기가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을 그대로 말하면 됩니다, 예수님의 증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내가 그분을 보았고 대화하였고, 함께 식사하였고 그분을 만졌습니다. 그것이 나의 부활의 체험입니다. 그대로 전하면 됩니다 그것이 증인입니다. 만약에 사람들이 나를 위협한다고 해서 나의 체험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너희가 예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한다. 그러자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말했습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떻게 내 체험이 있는데 양심적으로 내가 체험한 것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말합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증인이 되는 것은 그러므로 사실 매우 쉽습니다. 그러나 아무나 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했어도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증인은 오직 그 자리 그때에 그 일을 경험한 사람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법정에서도 어 증언을 하는 사람은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우리도 예수의 증인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을 육신으로 보진 않았습니다. 다만 믿고 복음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것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이 체험이 애매하다면 다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나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기한 경험이고 사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제가 설명을 잘하고 설득을 한다고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일대일 관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 꿇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그리고 살아나신 예수님을 바라본다면, 말로는 설명되지 않아도 그 예수님이 나를 한없이 사랑하신다는 것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내 죄가 용서받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을 바꾸는 경험입니다. 이 고백이 있어야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이 체험이 없이 교회만 들락거리면 문제가 생깁니다. 여러 사람이 힘들어집니다 우리들은 참된 예수님의 부활에 체험이 있기에, 내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확신하기에 예수의 증인이 됩니다. 나가서 증언할 수 있습니다.
9절 이 말씀을 마치시고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구름이 그분을 가리었습니다. 우리가 이날의 정확한 날짜는 모르지만 이날의 날씨는 알고 있습니다. 하늘에 구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납니다. 천사였을 것입니다. 천사들의 때로는 이렇게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납니다.
11절에 갈릴리 사람들이라 부릅니다. 누가는 사도들이 갈릴리로 돌아가는 것은 얘기하지 않았지만, 그들을 갈릴리 사람이라 부르면서 그들이 본래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처음 만났던 것을 이렇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지금은 하늘을 쳐다볼때가 아니라 복음을 전할 때 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예수님이 그대로 오십니다. 하늘로 올라가셨던 것처럼 하늘에서 다시 내려오십니다. 구름이 그분을 가리었습니다. 다시 오실 때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구름은 매우 중요합니다. 구약성경에서 구름은 하나님의 인재를 상징합니다. 출애굽 때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지키시고 인도하셨습니다. 성막이 완성되면 거기에 구름이 내려갔습니다. 솔로몬 성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구름은 하나님의 인재를 상징합니다. 다니엘 7장에서 인자가 구름을 타고 하나님 앞으로 인도되십니다. 그것처럼 예수님이 구름 타고 오십니다. 예수님에 대한 영화들이 있는데, 마지막에는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가시는 모습이 반드시 나와야 합니다. 이게 멋있다는 차원이 아니라 성경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구름을 타고 오실 것입니다. 예수님 재림하시는 날짜도 우리는 모르지만 그날의 날씨는 구름이 낄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체험하고 그의 증인이 되리라는 말을 들은 사도들에게 이제 곧 성령님이 임하시면 능력 있게, 진실되게 예수님을 전함으로써 첫 번째 교회가 세워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새찬송가 머리말에는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찬송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최고의 선물이며 은혜이다.” 참으로 맞습니다. 찬송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신앙을 고백하며, 믿음을 더 굳게 세우고 서로를 축복하며 복음을 전합니다. 찬양의 가사도 중요하지만 음악이 있어서 더 큰 감동과 능력을 경험합니다. 저도 예수님을 처음 믿었을 때 찬양을 부르는 것이 너무 좋았고 찬양을 통해 믿음이 삶에 깊이 뿌리내리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오늘은 찬송가의 가사를 따라서 말씀을 생각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라는 찬송의 1절 가사에 보시면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자 그 맘에 평강이 찾아옴은"입니다. 우리 주님의 마음을 가장 잘 말씀해 주시는 본문 중 하나는 빌립보서 2:5-8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의 마음은 우리를 위하여 낮아지신 마음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되시고 참으로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우리 주님의 마음을 생각하면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하셨습니다. 우리들도 그와 같이 우리 주님처럼 낮아지고 겸손한 마음을 품으면 주님께서 주시는 그 평강이 임하게 됩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마음 속이 평강이 아닐 때가 있습니다. 마음 속에 여러 가지 감정이 요동칠 때도 있고 힘들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 주님의 마음, 정말로 모든 것을 다 내어 주신 주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평강을 주십니다.
그렇게 될 때에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우리들이 주님처럼 겸손해지려고 아무리 인간의 노력으로 해도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그렇게 해도 되지 않고 정말 우리들이 낮아지고 겸손해질 수 있는 비결은 사실은 우리들이 얼마나 존귀한가를 깨닫는 데 있습니다. 결국 우리들의 본 모습 참 모습이 얼마나 존귀한가를 생각하면 우리들이 진정 겸손해질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우주의 왕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가장 큰 영광 중에 계시는 왕중의 왕이시기 때문에 도리어 모든 것을 내어 주시는 낮은 종의 모습으로 십자가까지 순종을 하셨습니다. 우리들도 이 세상에서 세상적인 것을 가지고 내가 높다 낮다 이렇게 생각하면 겸손해져도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정말 우리 하나님의 자녀다, 그렇게 내가 존귀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알아 주신다는 믿음이 있으면 이 세상에서 우리들을 어떻게 하더라도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정말로 종 취급을 하더라도 우리들이 마음속에 전혀 요동하지 않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는 남을 섬기고 종노릇하는 걸 누가 정말 좋아하겠습니까? 다른 사람이 나를 무시한다 할 때 어떻게 마음 속이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세상이 우리들을 어떻게 하더라도, 내가 어떤 존재인데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귀하게 보시는데 내가 이 정도에 요동하지 않는다는 굳은 믿음이 있을 때에 참으로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잘 아시는 왕자와 거지 이야기에 보면 어떤 왕자가 어떻게 하다보니까 거지 행색을 하게 되었지만 전혀 마음속에 정말로 비굴해 지지 않고 당당합니다. 자기 자신의 정체성이 확실하니까, 나는 왕자다 우리 아버지가 왕이다 하니까 비록 겉으로는 후줄근한 옷을 입고 사람들이 자기를 몰라보고 뭐라뭐라 해도 전혀 슬퍼하지 않습니다. 좌절하지 않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 사는가 하고 실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내가 정말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마음이 있을때 도리어 이렇게 낮아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요한일서 3:1입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NIV 로는 lavish라고 했습니다. 완전히 사랑을 쏟아부어 주셨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그런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놀라운 사랑을 쏟아 부어 주셔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주님의 아들 딸로 삼아 주셨습니다. 이런 존귀한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이 세상에서 낮아져도 전혀 비굴해질 필요가 없고 슬퍼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럴 때 우리들에게 하늘로부터 오시는 힘이 임하게 됩니다.
영어 가사를 잠시 보시면 약간 의미가 다릅니다. 영어로는 첫 마디가 "We shall be like Him," 이 첫 문장이 이 찬송 전체의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와 같이 될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다고 하지만 이 세상에서 육신으로 사는 동안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주님을 본받으려고 하지만 안 됩니다. 그래도 소망이 있는 것은 결국은 그와 같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됩니다. 비록 지금 내 모습을 볼 때는 아닌것 같아도, 주님의 약속의 말씀은 확실합니다. 우리들은 주님과 같이 될 것입니다. "We shall be like him O wonderful thought" 정말로 놀랍고 감격적인 말씀입니다.
"Blessed the hope the assurance hath wrought" 우리에게 확신이 있으므로 이 복된 소망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복된 소망은 디도서 2:13의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즉 복된 소망은 예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소망을 가져다주는 것은 결국 우리의 확신입니다. 우리들의 믿음의 확신, 구원의 확신, 천국의 확신입니다. 이 확신은 누가 보여줘서 아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우리의 주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천지는 다 없어질지언정 주님의 말씀은 전혀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확실한 주님의 말씀의 약속을 해 주셨으니 우리는 그 약속을 믿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 천국과 거룩함의 확신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이런 확신이 있기 때문에 복된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소망이라 할 때 천국에 가고 예수님을 만나는 것도 있지만, 특별히 나 같은 사람도 주님처럼 될 수 있다는 놀라운 소망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세번째 줄 "Changed from the sorrow and trials of years" 이 세상 살면서 슬픔도 있고, 또 세월이 주는 여러가지 시험도 있습니다. 여러 어려움이 있는 것이 인생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아 정말로 어렵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나만 겪는 괴로움이다 하는 경험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슬픔과 시험들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들은 그것들로 인해 변화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런 모든 슬픔과 고난들도 예수님께서 다 지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변화된다는 이 말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서 온 것입니다. 우리가 다 변화하리라. 예수님 다시 오시는 그날에는 우리들이 주님처럼 거룩하게 변합니다. 이 세상에서 인생을 살면서 여러가지 일들이 있을지라도 결국은 변화가 될 것이다. 이것이 복된 소망입니다.
마지막 줄 "We shall be like Him, when Jesus appears!"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예수님이 저 하늘에서 나타나시는 그날에는 주님과 같이 될 것입니다. 오늘 요한일서 3:2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라" 예수님이 나타나시면 우리들이 그와 같이 될 것입니다. 오늘 약속의 말씀이 확실하게 증거해 주십니다.
2절의 가사입니다 "주 모습 내 눈에 안 보이며 그 음성 내 귀에 안 들려도"입니다. 우리들이 주님의 얼굴을 직접 보지는 못했고, 음성을 듣지는 못했습니다. 우리는 사실 주님이 어떻게 생기셨는지 모릅니다. 천국에 가면 예수님을 실제로 볼 것이고, 너무나 기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할 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우리 주님의 마음입니다 우리 주님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시고 주님의 뜻이 뭐라는 걸 우리들이 알고 따르는 것이 진짜입니다. 우리 주님의 속마음을 우리들이 닮아야 되는데,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우리가 갖고 있는 성경책에 다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마음은 성경 책만 보면 다 압니다. 그래서 "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라고 합니다. 어떻게 우리들이 날마다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신령한 말씀 늘 배우도다." 우리에게 주시는 성경 말씀을 매일 매일 읽을 때에 그 속에서 우리 주님의 마음을, 주님이 무엇을 원하셨는지 알게 됩니다. 우리 주님이 이 세상에서 오셔서 그렇게 3년 반 동안 뜨겁게 일하셨을 때 도대체 무엇을 원하셨길래 우리를 이렇게 불러 주셨는지 다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신령한 말씀을 늘 배울 때 주님의 마음을 닮아 갑니다.
영어로 보시면 "Eye hath not seen, nor hath ear ever heard." 눈으로 보지도 못하였고 귀로 듣지도 못하였다. 이사야 64:4 "주 외에는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을 옛부터 들은 자도 없고 귀로 들은 자도 없고 눈으로 본 자도 없었나이다." 그 당시 유대의 그 주변 나라들은 우상들을 만들어서 신은 이렇게 생겼다 하면서 눈으로 본다고 했지만 눈으로 보이는 그런 우상이 아니라 참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앙망하는 백성을 이렇게 구원해 주시는 놀라우신 이런 하나님은 눈으로도 보지 못했고 귀로도 듣지도 못했다고, 놀라우신 하나님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오늘 가사에는 눈으로 보지 못했고 귀로 듣지도 못했다, "What we shall be"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나 자신도 상상을 못합니다. 내가 곧 눈이나 귀로 보고 듣지 못할 뿐 아니라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습니다.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but a voice from his word whispers" 우리 주님께서 속삭여 주신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나와 같이 될 거야 하고 속삭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왜 속삭인다고 했을까요? 아마도 속삭여 주시니까 귀를 기울여야 들릴 것입니다. 우리들이 분주하거나 이런저런 생각으로 사로잡혀 있으면 이런 생각들이 잘 안 납니다. 조금 우리들의 마음을 집중하고 주님 앞에 겸손하게 나아가서 잠잠하게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 속삭이는 음성이 들립니다. 주님께서 속삭여 주시는 음성이 무엇입니까? 비록 지금은 여러 가지 고난도 있고 너 자신에게 실망할 때도 많이 있지만, 불평하고 화낼 때도 있지만 그러나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분처럼 될거라고 속삭여 주십니다. "whispers a message that charms all our fears"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두려움 있을지라도 그런 것들을 다 몰아내 주시는 속삭임을 이 시간에도 듣기 바랍니다. "We shall be like him when Jesus appears" 주님 나타나실 때 그처럼 될 것입니다
3절 가사를 보시겠습니다 "가는길 거칠고 험하여도 내맘에 불평이 없어짐은"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들의 가는 길이 거칠고 험합니다. 그러나 내 마음의 불평이 없어진다고 했습니다. 어떨 떄는 불평도 나오고 할 때가 있을지라도 그러나 이런 불평이 없어진다고 했습니다. 왜냐 하면 십자가 고난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살면서 정말 불평 정도가 아니라 너무 힘들다, 아무리 인생이지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할 때에도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 이길 수가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의 말씀처럼 종처럼 되신 주님, 그래서 십자가 죽기까지 날 위해서 순종하신 그 죽음의 고난을 생각하고 그 종의 마음을 본받으면 불평이 없어집니다.
영어로는 "Why then repine when the roadway is rough?" 길이 험하더라도 왜 불평하십니까? 아주 강하게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왜 불평하느냐? 둘째 줄 "Are not his words and promise enough" 그분의 말씀과 그분의 약속이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은 우리들이 세상을 이기는 데 겨우겨우 이기는 게 아닙니다. 이 세상 살다 보면 기가 막힌 일들이 많이 있어서 매일매일 살아 가는 것이 믿음의 경주이고 싸움이지만, 우리들이 겨우 이기는 것이 아니라 넉넉히 이긴다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시는 자들을 이 세상에서 넉넉하게 이기게 해 주십니다. 주님은 하늘의 권세를 갖고 계십니다. 아무리 땅의 권세가 우리들을 힘들게 한다 할지라도 주님의 하늘의 권세가 있으시면 그걸 넉넉히 이깁니다. 우리들이 살 때 이 세상을 바라보면 지금 당면한 문제가 너무 커서 골리앗 거인 같을지라도, 그 분의 말씀과 약속을 생각해보면 충분하지 않느냐, 넉넉히 이길 수 있지 않느냐고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믿음을 더 크게 가져야 합니다.
세째줄 가사는 "Rainbows of love span the valley of tears" 눈물 골짜기를 더듬으면서 간다는 표현이 있지요. 가는 길이 높은데가 아니라 저 밑에 밑바닥에 골짜기, 뱀이나 전갈이 나오는 그런 눈물의 골짜기를 울면서 간다 할지라도,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면 그 위에는 사랑의 무지개가 있습니다. 하늘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놀라운 무지개입니다. 성경에서 무지개는 약속의 상징입니다. 노아 홍수가 끝나고 나서 주님께서 하늘의 무지개를 보여주시면서 약속하십니다.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에게 약속하시기를 다시는 물로 세상을 변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무지개가 있을 때마다 주님께서 무지개를 보시고 그 언약을 기억하십니다. 주님께서 잊으실 리는 없고, 우리 인간이 기억하도록 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무지개를 볼 때마다, 옛날 노아 때 주셨던 주님의 변치 않는 약속을 지금도 잊지 않고 약속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1절에서 확신이 소망을 준다고 했던 것처럼 우리들에게 확신이 있고 예수님처럼 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이 있을 때 무지개를 바라보면서 힘들지라도 불평 없이 가게 됩니다 We shall be like him
끝으로 4절의 가사를 보시면 "주 예수 세상에 다시 오실 그날엔 뭇 성도 변화하여" 이것이 주제입니다.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 또는 우리들이 그 전에 이제 천국에 가는 그 날입니다. 이 세상 사는 동안은 우리가 아무리 해도 주님처럼 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래서 또 넘어진다 할지라도, 결국은 우리 주님 세상에 다시 오시는 그 날에는 변화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변화하여서 1절 가사에서 changed 라고 했던 것처럼 우리들이 다 변화할 것입니다.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을 이룰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하신 그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하는 것처럼 우리들이 변화하여 "주님의 빛나는 그 형상을 다 함께 보며 주 찬양하리" 이것이 인생의 최종 목표입니다.
영어로는 "We shall be like Him, the hope of the soul" 우리 영혼의 소망입니다. 우리 영혼이 아무리 어떤 고난과 시험이 있을지라도 우리 영혼의 소망은 주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We shall be like him made perfectly whole" 우리는 완전해질 것입니다. 주님 만나서 주님처럼 되면 우리 영혼이 완전해집니다. 그리고 평강이 찾아온다고 했는데 히브리 말로 살롬이라는 말은 온전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 주시는 온전해진, 조금도 손상되지 않은 그런 영혼의 모습으로 다시 변화되면 마음 속에 평강과 주님 닮은 그런 거룩한 모습이 될 것입니다. 3절의 말씀입니다 요한일서 3: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크리스천들의 소망 가운데에 거룩함에 대한 소망이 뜨거워야 합니다. 거룩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예수님을 믿고 주님 만나는 그날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지만 우리들의 마음 속에 성결에 대한 뜨거운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어떻게 주님처럼 거룩해지나? 인간적으로는 절대로 안됩니다. 그러나 십자가 옆에 있던 강도가 인간적으로 볼 때는 강도고 죄인이고 사형수이지만 주님 곁에 동산에 같이 들어갈 때 거룩해지고 온전해졌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님 곁에 붙어 있으면 온전해집니다. 거룩함이 우리의 소망이 되기 바랍니다. 이 세상 살면서 주님의 마음을 본받아서 오늘 하루라도 나의 삶과 주위 사람들에게 이 주님의 성품을 보여주고 싶다는 소망은 교만이 아니라 진정한 마음 속에 주님 주시는 소망, 내가 주님처럼 정말 거룩해 지고 싶다는 뜨거운 마음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셋째 줄 "Caught up with saints, as the firmament clears" 이것은 데살로니가전서 1장 5절입니다 주님 오실 때 주님 안에서 축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주님 앞에 끌어올려져서 구름 속에서 주님을 영접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구름 타고 오십니다. 주님 오실 때 그 날이 언젠지 우리들은 알지 못하지만 주님 오시는 날 날씨는 압니다. 그 날은 구름이 있습니다. 구름타고 우리 주님 오실 때 우리 성도들이 만일 살아있다면 그렇게 될 것이고, 만일 무덤 속에 있으면 더 빨리 올라갈 것입니다. "Caught up," 주님께서 우리를 다 잡아서 하늘로 올리셔서 구름 속에서 만나십니다. "firmament clears," 하늘이 열리면서 그 모든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구름 속으로 올라가서 주님 뵈면 구름은 다 아래에 있고 파란 하늘이 열리는 광경입니다. 이 깨끗하게 맑은 하늘이 열리고 우리 주님의 영광을 완전하게 보는 그 광경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we shall be like him when Jesus appears." 우리는 그와 같아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