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하나님의 말씀은 이사야 64장 1절에서 4절, 그리고 8절에서 12절입니다. 오늘 설교의 핵심 주제는 구약 예언서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대한 주제 중 하나인 ‘여호와의 날’입니다.
성경은 이 날을 ‘크고 두려운 날’이라고도 부르고, 때로는 아주 간결하게 ‘그 날’이라고 칭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성경에서 ‘그 날’이라는 표현을 마주하게 되신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임하시는 ‘여호와의 날’을 가리킨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 근본적인 진리를 분명히 선포하고자 합니다. 이는 오늘 말씀의 주춧돌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날이란 바로 우리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땅으로 강림하시는 날입니다. 온 세상 모든 사람이 피할 수 없이 하나님의 임재를 목도하게 되는, 역사의 마지막을 고하는 바로 그 날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담긴 이사야의 기도는 평온한 때에 드리는 감사의 기도가 아닙니다. 이는 앞으로 닥쳐올 민족의 참혹한 파멸을 영의 눈으로 내다본 선지자가, 그 깊은 고뇌와 절망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터뜨리는 처절한 절규입니다. 이 기도가 어떤 배경에서 나왔는지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본문 10절의 비극적인 장면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주의 거룩한 성읍들이 광야가 되었으며 시온이 광야가 되었으며 예루살렘이 황폐하였나이다 우리 조상들이 주를 찬송하던 우리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전이 불에 탔으며 우리가 즐거워하던 곳이 다 황폐하였나이다” (사 64:10-11)
하나님의 도성 시온, 곧 예루살렘이 폐허가 되었습니다. 조상 대대로 하나님을 찬양하던 영광의 중심지,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전이 불길에 휩싸여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저도 90년대에 뉴욕에 살 때, 크고 아름답던 한인 교회가 가스 폭발로 불타버린 현장을 직접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아침에 소식을 듣고 달려가 보니, 십자가 탑만 덩그러니 남은 채 건물이 처참하게 파괴되어 있었습니다. 그 광경 앞에서 얼마나 가슴이 아프고 할 말을 잃었던지 모릅니다.
하물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전의 파괴는 단순히 건물이 무너진 것을 넘어, 그들의 신앙과 정체성,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믿음 자체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재앙이었습니다. 활활 타오르는 성전의 불길을 보면서 백성들은 ‘이것이 바로 지옥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이 끔찍하고 가시적인 경험을 통해, 막연하게만 느껴졌던 하나님의 최종 심판이라는 개념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섭고도 실질적인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온 세상을 불로 심판하시는 크고 두려운 날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과거 히스기야 왕 시대(기원전 약 700년), 앗수르의 막강한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기적적으로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시온 신앙’, 즉 ‘하나님께서 시온성만큼은 결코 멸망시키지 않으신다’는 굳건한 믿음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이 믿음은 변질되었습니다. 후대의 백성들은 계속해서 죄를 지으면서도 ‘그래도 성전이 있는 시온은 안전하다’는 거짓된 안도감에 빠졌습니다. 바로 그때, 예레미야와 같은 참된 선지자들은 “하나님을 떠난 시온은 망한다”고 외쳤지만, 거짓 선지자들은 백성들의 귀에 달콤한 말, 즉 “시온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며 인간의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처럼 포장하여 전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긴 백성들은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바벨론의 침공(기원전 586년)에 의해 처참하게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이 모든 비극을 내다보며 이사야는 12절에서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여호와여 일이 이러하거늘 주께서 아직도 가만히 계시려 하시나이까 주께서 아직도 잠잠하시고 우리에게 심한 괴로움을 받게 하시려나이까”
이 탄원은 단순히 고통에 대한 불평이 아닙니다. 이것은 과거 모세가 금송아지를 섬긴 백성을 위해 중보했던 기도와 같은 차원의 호소입니다. ‘주님, 이대로 주님의 백성과 성전이 버려진다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이 모독받지 않겠습니까?’라는 안타까운 외침인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무너진 절망의 잿더미 위에서, 이사야의 기도는 이제 인간의 힘을 넘어선 하나님의 파괴적이면서 동시에 구원적인 개입, 즉 ‘여호와의 날’을 요청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민족의 참상에 대한 이사야의 해결책은 인간적인 회복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온 세상의 질서를 뒤흔드는 하나님의 직접적이고 강력한 현현, 즉 ‘여호와의 날’의 강림을 간구합니다.
“원하건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 앞에서 산들이 진동하기를 불이 섶을 사르며 불이 물을 끓임 같게 하사 주의 원수들이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로 주 앞에서 떨게 하옵소서” (사 64:1-2)
이사야의 기도를 상상해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께서 하늘을 ‘가르고(찢고)’ 내려오시길 기도합니다. 여기서 사용된 히브리어 단어는 부드럽게 여는 것이 아니라, 폭력적으로 ‘찢어내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야곱이 아들 요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극심한 슬픔에 자기 옷을 찢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하늘을 찢고 오시는 것은 온 세상의 죄악을 심판하시려는 거룩한 비통함과 최종적인 개입을 담은, 세상을 뒤흔드는 행위입니다.
그 권능 앞에서 견고한 산들이 진동하고, 마른 나뭇가지(섶)가 순식간에 불타듯, 심지어 바닷물조차 끓어오를 것입니다. 이는 그 어떤 피조물도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압도적인 임재를 상징합니다.
이처럼 ‘여호와의 날’은 두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 심판의 날: 주님을 믿지 않던 원수들과 이방 나라들에게 그 날은 주의 이름을 비로소 깨닫고 두려움에 떠는 통곡과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찬송가의 가사처럼, “주 믿지 않던 영혼들은 큰 소리 외쳐 울어도” 소용없는 돌이킬 수 없는 날입니다.
- 영광의 날: 반면, 주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그 날은 가장 복되고 영광스러운 날입니다. 이 땅에서 믿음 때문에 받았던 모든 고난과 슬픔의 눈물을 주님께서 친히 닦아주시고, 예비하신 상급과 면류관으로 기뻐하는 최고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 영광의 날을 맞이할 수 있습니까? 4절은 그 답을 ‘자기를 앙망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앙망’이란 간절히 바라고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자세는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사람들은 뉴스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지, 세상 사람들이 무어라 말하는지에 따라 마음이 이리저리 흔들립니다. 세상을 의지하고 세상에 미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앙망하는 자는 다릅니다. 그는 세상 소식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오직 다시 오실 주님만을 바라보며 오늘을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이들을 위해 예비하시고 역사하십니다.
이처럼 두렵고도 영광스러운 그 날을 기다리는 성도와 하나님 사이에는 과연 어떤 근본적인 관계가 존재하는 것일까요?
모든 것이 파괴된 극한의 고통 속에서, 이사야는 비로소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가장 본질적이고 놀라운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사 64:8a)
구약 시대에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매우 파격적이고 놀라운 고백이었습니다. 이사야는 눈에 보이는 성전이 불타버린 후에야, 외적인 종교 행위가 아닌 우리의 마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가 신앙의 본질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 고백은 이사야 63장 16절에서도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고 반복되며, 훗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에서 완성됩니다. 주기도문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합니다. 놀랍게도 원어에서 ‘우리 아버지’는 분리된 두 단어가 아니라, ‘아버지’라는 단어에 ‘우리의’라는 의미가 결합된 하나의 단어입니다. 이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공동체적이고 영원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언약 백성의 관계는 천지가 무너져도 결코 끊어질 수 없는 아버지와 자녀의 약속으로 묶여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어서 이사야는 두 번째 핵심 비유를 제시합니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 (사 64:8b)
예레미야 선지자가 토기장이의 집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보았듯이, 이 비유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주권적인 뜻에 따라 우리를 빚어 가시는 창조주이심을 선포합니다. 우리는 연약한 진흙이지만, 그냥 버려진 진흙이 아니라 위대한 토기장이의 손에 들린 진흙입니다.
이 강력한 비유는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에 세 가지 중요한 영적 원리를 가르쳐 줍니다.
우리 자신을 토기장이의 손에 들린 진흙으로 인식할 때, 삶의 모든 경험, 특히 고난의 의미는 완전히 새롭게 변화합니다.
- 우리는 언제나 주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성공할 때나 실패할 때나,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선하시고 따뜻한 사랑의 손길 안에 붙들려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단순히 들고 계신 것이 아니라, 최고의 작품을 만드시기 위해 계속해서 만지시고 다듬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믿을 때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안정감을 누릴 수 있습니다.
- 고난을 통해 우리를 빚으십니다. 때로 삶의 고난과 힘든 일은 우리를 아프게 합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우리를 빚어 가시는 토기장이의 손길입니다. 토기장이가 그릇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깨뜨려서라도 더 좋은 그릇으로 새롭게 만들 듯, 고난은 우리를 부수어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일 수 있습니다. 그 손길을 통해 우리는 더욱 주님의 뜻에 합한 모습으로 다듬어집니다.
- 그 결과 주님을 더욱 닮아갑니다. 토기장이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만지고 빚으실수록, 우리의 영혼에는 그분의 ‘손자국’이 남게 됩니다. 이 ‘손자국’은 우리가 점점 더 예수님처럼 성숙하고, 겸손하며, 사랑이 많은 사람으로 변화되는 흔적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는 우리가 그분의 형상, 즉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토기장이의 손길 안에서 빚어지는 과정의 끝에, 우리는 마침내 어떤 모습으로 최종 목적지에 이르게 될까요?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의 절망적인 현실에서 시작하여, 하나님의 권능적인 개입을 부르짖는 기도를 거쳐, 마침내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와 ‘토기장이’로 고백하는 이사야의 깊은 신앙 여정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다시 ‘여호와의 날’이라는 주제로 돌아가 봅시다.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의 손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그분의 빚으심에 순종하는 성도들에게 ‘그 날’은 더 이상 두려운 심판의 날이 아닙니다. 그 날은 바로, 위대한 토기장이의 손에서 완성된 가장 귀하고 영광스러운 작품으로 주님 앞에 당당히 서는 날입니다.
우리가 부를 찬양의 가사처럼, "주는 토기장이 나는 진흙"임을 고백하며, 날마다 우리를 빚으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감사와 순종으로 반응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여호와의 날’에 주님의 가장 귀한 작품으로 주님 앞에 서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