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많은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그들의 병을 고쳐 주시고, 마음을 위로해 주시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 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많은 도시들을 다니셨는데, 하루는 두로에 가시게 되었습니다. 두로는 유대를 벗어나야 갈 수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모처럼 외국여행을 하신 셈입니다. 두로에도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어서 그들을 만나 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왔던 사람들 중에 한 헬라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가 온 이유는 어린 딸이 있는데 악한 영이 들려서 고생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딸을 고쳐 달라고 부탁드리러 왔습니다. 우리가 아는 예수님은 친절하시고 자상하시고 모든 사람을 맞아주십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의 부탁도 선뜻 들어주셨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상하게도 이 부탁을 거절하십니다. 그리고 자녀가 떡을 먹고 있는데 뺏아서 개에게 줄 수는 없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비유인데 의미는 분명합니다. 자녀는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 빵은 하나님의 은혜, 능력, 사랑, 그리고 개는 이방인 헬라인을 말합니다. 이 여인을 개에게 비유하신 것이니, 듣는 우리도 민망하고 당사자는 얼마나 큰 수치를 느꼈는지 모릅니다.
물론 우리는 이 이야기의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해피엔딩입니다. 예수님은 결국 그 여인의 딸을 고쳐주십니다. 주님은 사람의 마음을 아시기 때문에, 그 여인이 비록 그렇게 거절당해도 가지 않고 계속 간청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꼭 주님처럼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지 못해도 우리도 그 여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모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병에 걸려 고통받고 있다면 이 병을 낫게 할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차라리 내가 대신 아픈 것이 낫습니다. 내가 아프다면 참든지 싸우든지 할 수 있는데, 눈앞에서 아이가 고통받는데 볼수밖에 없으면 마음이 찢어집니다. 우리는 아무리 사랑하는 자녀라 해도, 육신의 고통을 함께 느껴줄 수는 없습니다. 마음으로 함께 아파할 수는 있겠지만, 실제로 그 고통을 느끼거나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이 딸은 영적인 정신적인 병에 걸렸습니다. 나중에 그 어머니가 집에 가보니 침대에 얌전히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증세가 심할 떄에는 아마 난폭하고 폭력적이고 달려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어린 딸이 이렇게 병에 걸려 제대로 살지 못하고 비참하게 살아가니 얼마나 어머니의 마음이 아팠을까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셨다는 말을 듣고 딸을 낫게 해 달라는 부탁을 하려고 달려 온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좀 냉정한 말씀 하셨다고 해서 섭섭하다고 기분나쁘다고 가버리지 않습니다. 예수님, 너무 심하게 말씀하시네요! 용하다는 소문을 듣고 왔는데 아닌 가 봐요! 나는 갈랍니다. 리뷰 엉망, 벌점 테러할 테니 기대하세요! 라고 하지 않습니다. 여인이 그렇게 가 버리지는 않을 것을 우리도 알 수 있지만, 여전히 의문입니다. 예수님은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두로는 유대에서 북쪽에 있는 고대로부터 유명한 항구도시였습니다. 무역이 성했고 부가 몰렸고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습니다. 에스겔 27장을 보면 두로가 고대 여러 나라들과 얼마나 많은 무역을 해서 풍요롭게 살았는지 짐작할 수 수 있습니다. 두로가 헬라 문화권에 결정적으로 편입된 것은 본문부터 약 360년전인 알렉산더 대왕 때입니다. 알렉산더는 성경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이름으로는 아니지만 구약성경에도 나옵니다. 그는 마케도니아의 왕이었고, 그리스를 다 평정한 다음 페르시아를 정복하기 위해 원정을 떠났습니다. 이 당시 페르시아는 두 말할 필요가 없는 그야말로 초강대국이었습니다. 세계사에 유래없는 큰 영토를 지배했는데, 오늘날 터키 팔레스타인 이집트 이라크 이란 중앙아시아 그리고 인도까지 강력한 중앙집권제로 다스렸습니다. 그에 비하면 그리스는 변방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알렉산더는 이 페르시아 제국으로 쳐들어가 소아시아에서 일차전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내륙으로 진격하지 않고 이집트를 정복하러 갔습니다. 그 이유는 너무 성급하게 내륙으로 들어갔다가 뒤에서 역습을 당하거나 본국과의 보급로가 끊어지면 큰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나 지금이나 유럽에서 아시아를 치려면 이집트를 먼저 정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알렉산더가 이집트로 내려가기 위해 지중해 동부해안을 따라 진군하는 데 그 길목에 두로가 있습니다. 사신을 보내서 항복하고 길을 열라고 요구했더니 두로인들은 웃기시네 하며 그 사신을 바다에 던져버렸습니다. 알렉산더의 혈압이 바짝 올랐습니다. 이 때 그의 나이가 불과 23살인데 성질을 제대로 건드렸습니다.
두로인들이 큰소리를 친 이유는 육지에서 반마일 떨어진 섬에 견고한 성을 쌓아놓았기 때문이었다. 성벽의 높이가 60m였다고 한다. 그런데 알렉산더는 바다를 메워 도로를 만드는 대공사를 시작한다. 돌과 흙으로 엄청난 공사였다. 두로인들이 성에 숨어서 내려다 보니 바다 위로 도로가 점점 다가온다. 가슴이 서늘하고 경악하여 반격을 한다. 불화살을 쏘고 돌을 굴리고 배에 불을 붙여 보내고 했지만 결국 7개월만에 함락되었다. 분노한 알렉산더는 그들을 죽이고 불태우고 다 파괴시켰다. 그리고 자기에게 저항하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 2000명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해변을 따라 몇마일을 십자가가 섰으니 정말 끔찍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우리에게 십자가는 거룩하고 은혜롭다. 그러나 원래는 가장 사람을 가장 잔인하게 죽이는 형틀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험악, 흉칙, 혐오, 비참. 사람이 사람을 이렇게 미워할 수 있음을 극명히 보이는 증거이다.
알렉산더의 마음은 이미 사람이 아닌 짐승. 나에게 저항하는 자들을 이렇게 한다는 그는 이미 신이 되어 있다
사람을 죽이면 안되는 이유 (6계명) 질문 살인하면 안되는 이유는? 창세기 9장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었으므로. 사람을 죽이면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죽는다. 하나님의 형상이 못박힌다. 알렉스가 그런 폭력과 살인은 사람에게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정의를 땅에 짓밟았다. 피가 흘러 땅을 더럽힐 때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졌다. 하나님의 정의 못박히고 모욕당한 영광을 어떻게 ? 다 지옥불? 마지막 때 그리하신다 그러나 다 멸망시키는 보복하는 심판은… 사실 헬라인들이 로마인들에게 그렇게 보복을 당했다.
보복만 하면 끝나나? 보복과 심판으로만 하나님의 정의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아니다. 하늘과 땅에 큰 죄를 지은 알렉산더와 헬라인들의 죄를 용서, 치유, 화해받을 수 있는가? 헬라인들이 통회하며 회개하고 울면서 주님 잘못했습니다 라고 하는 길밖에 없다. 가슴을 찢으며 울며 용서하옵소서. 자기들이 죽였던 사람들에게 영혼에게라도 미안하다 용서하라고 비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누가 그렇게 용서를 빌 수 있단 말인가? 구원받고자 하는 자는 세상 것을 움켜쥐고 있어서는 안된다. 알렉산더는 33살에 죽었다. 자손들은 그런 조상을 둔 죄밖에 없지만 그로 인한 지배자로 군림하며 온갖 혜택을 누리며 살았다. 특권을 누리며 다른 민족을 멸시하거나 최소한 외면했다. 그들의 죄에 동참했다. 권세와 재물. 이 세상 것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손에서 놓지 않는 한 회개가 없다. 양심이 안다. 죄악의 열매을 누리며 산다. 나로 인해 고생하는 다른 민족들을 멸시하거나 외면했는데 그 특권을 놓지 않으면 회개가 없다.
나에게 오고자 하는 자 재산을 버리고 오라 하셨는데 과연 누가 그리할 수 있단 말인가? 단 한명이라도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나의 가진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라도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본문의 여인이다. 왜냐면 이 여인의 마음은 사랑이기 때문에.
결국 문제의 해결은 사랑이다. 물론 혈육에 대한 사랑이지만 이 사랑이 세상 것을 버릴 수 있게 한다. 자존심 상해도 좋아요. 멸시 당해도 좋아요. 주님의 은혜만 필요해요 하고 다가오는 사람이 단 한명이라도 있다면!
만약 예수님이 이 여인의 부탁을 바로 들어주셨다면 혼자만의 은혜로 끝이다. 그러나 이 여인으로 하여금 너는 헬라인임을 상기시키신다. 다른 죄가 없다. 오직 헬라인이라는 이유뿐이다. 여인으로 하여금 수세기의 큰 죄 가운데 살았던 헬라인을 대신해서 주님께 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이것은 놀라운 사랑이다. 모질게 대하신 것이 아니라 놀라운 사랑의 표현.
왜냐면 주님은 이 여인이 주님의 은혜만 붙들것을 아셨다. 맞습니다. 마치 주인 집 자녀들이 식탁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같은 그런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나는 너무 큰 죄인이기 때문에 감히 그런 은혜를 바랄 수 없다. 자녀들이 당연히 먹듯. 나는 한마리 개 식탁 밑에 쪼그리고 앉아 눈치보다가 부스러기 떨어지면 핥아먹듯이.
프랑스의 소설가 알렉산드르 뒤마가 쓴 몽테크리스토 백작 어릴 때 읽었다. 주인공이 에드몽 당테스 19살에 선장이 되고 약혼을 하고 인생의 최고를 맞이하지만 시기한 친구들의 모함으로 약혼식 파티장에서 경찰에 끌려간다 외딴 섬 감옥에 갖혀 평생을 살게 되었다. 늙은 아버지가 있었는데 자식이 그렇게 되니까 충격을 받고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아 절망하고 음식을 거부하다가 굶어 죽는다. 14년만에 기적적으로 탈출하고 보물을 찾아 부자가 된 후 아버지가 어떻게 되었는가 물어보러 다닌다. 어떤 사람에게 아버지가 충격과 절망과 걱정 가운데 굶어서 그렇게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탄식한다. 어찌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인가. 그 존귀한 분이 한마리의 개가 주인에게 버림받고 사람에게 멸시받고 쫒겨나서 굶주리고 병들고 사람들이 다 미워하는 개라 하더라도 그래서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다 침뱉고 돌던지고 막대기로 때리며 쫓아내도 많은 사람들 중에 단 한명이라고 불쌍하다 할 수 있다. 자비를 베풀어 빵 조각 던져주면 그걸 먹고 사는 법인데 어찌 그리 돌아가셨단 말입니까 하고 탄식하는 대목이 나온다.
본문에서 개는 천한 동물이다. 본문은 분명 그런 의미이다. 그러나 이 여인은 개가 아무리 천하고 더럽고 혐오스러워도 많은 사람들 중에 한 명이라도 빵조각 던져주면 먹고 살겠다. 주님은 감동하셨다. 도와주리라!
우리도 대단한 것을 구하기 보다, 이미 많은 것을 받아 누리고 있는데 더 달라고 하기 보다 한번쯤 모든 것을 내려놓고 겸손하게 처음 마음으로 기도하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다. 하나님이 그만큼 사랑하신다. 그러나 당연시해서는 안된다. 가졌는데 더 달라고 하는 것은 민망하다. 혹시 기도하지만 마음이 시원하지 않거나 요즘 힘들다면 은혜를 당연시한 때문일 수 있다. 여인의 마음을 갖자 다른 것 필요없고 주님의 은혜만 족하다. 주님의 은혜는 크고 작은 것이 없다. 아무리 작아도 진짜가 중요하다. 헬라민족을 살리기 위해 온 민족이 회개하겠습니다 가 아니라 단 한 명 이 여인의 한 방울의 눈물을 원하셨다. 하나님의 일은 그렇게 된다. 크고 작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작아도 진짜냐가 문제다.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자. 그런 마음으로 구할 때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나로 인해 살아나는 사람이 있다. 나로 인해 이 시간 은혜의 문이 열리는 구원의 빛으로 들어오는 다른 사람이 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고통받는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주님 지금도 우리 모두는 주님의 은혜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저희들이 오직 주님의 은혜와 사랑만을 바라보도록 도와 주소서. 오늘 본문의 헬라 여인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만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이 세상은 하나님을 떠나고 욕심이 사로잡혀 커다란 죄악 가운데 있습니다. 그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울고 있습니다. 저희가 주님의 교회로서 주님의 사랑과 구원을 세상에 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죄악의 권세가 강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더욱 크다는 것을 세상에 널리 드러낼 수 있는 교회가 되도록 성령이여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 각자와 가정에 은혜를 베푸시고 주님을 증거하는 삶이 되도록 날마다 함께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