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3월 16일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16을 외어보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제 요한일서 3:16을 읽어보겠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말씀도 우리가 꼭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요한복음 3:16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받는 영생에 대해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주님, 하나님의 아들로 믿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목되고, 우리는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믿음은 소망과 사랑과 함께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이 같이 갑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참 소망을 갖게 됩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 우리는 연약하고 넘어지지만, 주님 앞에 서면 우리는 완전해지고 영화로와질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죄악으로 인해 고난과 슬픔이 있지만, 그 날에는 모든 눈물이 씻기고 영원한 복락이 있을 것입니다. 믿는 성도들은 그렇게 산 소망을 갖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듯이, 소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8:24는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니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한편, 믿음은 사랑과 함께 갑니다. 예수님은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으면 그 계명을 따라 서로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으로 구원받는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요한일서 3:14는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갔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는 것으로 인해 구원받았습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어떻게 알게 됩니까? 16절에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것을 통해 우리가 사랑을 안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 주님의 사랑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사람이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면 그보다 더한 사랑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목숨을 버린다고 할 때 목숨은 프쉬케, 즉 영혼이라고도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이 흙으로 아담을 지으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 즉 살아있는 영혼이 되었다고 하는 대목에서 나옵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이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주셨기에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사람이 대단한 것 같아도, 이 호흡이 잠시 끊어지면 살 수 없습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 삶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 앞에서 인생은 그렇게 연약합니다. 하나님이 늘 우리의 생명을 붙들고 계셔야 합니다. 사무엘상 25:29에는 여호와께서 다윗의 생명을 생명싸개 속에 싸 두신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귀하게 싸서 지켜 주시기에 우리의 생명이 보존됩니다. 그러나 이 호흡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때가 되면 주님은 이 숨을 거두어 가실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의 삶은 끝날 것입니다. 이사야 40:7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풀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아는 백성이 복됩니다. 교만하지 않고 주님 앞에 겸손한 백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다고 하는 말씀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렇게 호흡에 의지하는 육신으로 오신 분임을 상기시킵니다.
요한복음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확실히 증거합니다. 그는 영원부터 아버지 하나님의 품에 계신 독생자 말씀이십니다. 그런데 때가 차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잠시 겉옷을 걸치듯이 육신을 입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 신화에는 신들이 필요에 따라 인간의 육신의 모습을 잠시 입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볼일 끝나면 다시 신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것은 그런 외형만이 아니라, 실제로 인간의 몸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갓난 아기로 태어나시고 먹고 자고 자라시고, 30년의 세월이 걸려서 청년이 되신 것입니다. 참된 인간의 육신을 가지신 참 인간이십니다. 그런데 육신은 몸과 의미가 좀 다릅니다. 고린도전서 15:44 몸body은 육의 몸이 있고 영적인 몸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몸은 영화로운 몸입니다. 그 몸으로 제자들에게 오셨고 지금도 아버지 우편에 앉아계시며 다시 오실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 오실 때에는 신령한 몸을 입을 것입니다. 그런데 육신flesh은, 인간의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있는 존재입니다. 율법의 정죄 아래 있고 심판을 받을 육신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르고 육체는 성령을 거스른다고 하십니다. 요한복음이 말씀이 단지 몸이 된 것이 아니라, 육신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신 것은 아담으로 인한 온 인류의 죄와 형벌, 고난, 심판을 받을 육신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 육신 가운에 연약한 호흡으로 매 순간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연은 필연의 반대입니다. 필연은 반드시 일어나야 되는 일입니다. 우연은 일어날 수도 있고 안 일어날 수도 있는 일입니다. 지금 우리가 미국에 사는 것은 우연입니다. 우리는 한국이나 다른 나라에 살 수도 있는데 미국에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었는데,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육신이 되신 것일까요? 예수님이 내려다보시며, 어디 보자, 아담이 선악과를 먹나 안먹나 … 아이고 먹었네 내가 육신으로 가야 되겠네 … 이게 아닙니다. 만일 그랬다면 예수님이 입으신 육신은 예수님 자신의 인격 자체가 아니라 단지 상황에 따라 입으신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추우면 입는 겉옷에 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이 단지 겉옷이었다면, 예수님이 육신으로 십자가를 지신 것은 마치 겉옷이 못에 걸려 약간 찢어진 것과 같을 것입니다. 우리의 겉옷이 상하면 속은 상하지만, 우리 자신이 상처를 입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입으신 육신은 그런 겉옷이 아니라, 그 육신을 통해 참으로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시고, 그 육신과 함께 살고 죽는 참된 자신의 인격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영원하신 참 하나님이시기에, 육신을 입는 이 사건은 영원부터 결정된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영원 속에서 자신을 육신을 입고 인간이 되실 성자 하나님으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도 영원 속의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결정된 사건입니다. 요한계시록 13:8에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된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 문장은 어순이 애매해서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창세 전부터 죽임을 당하시는가? 아담이 죄를 짓고, 그 후에 예수님이 성육신하시고, 그 다음에 죽으시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것이 영원하신 아들 하나님께 일어나기에, 시간적인 순서가 먼저가 아니라 예수님의 희생이 먼저이고 인간의 죄는 부수적입니다. 죄가 먼저이고 은혜가 부차적으로 따라오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가 먼저 있고 죄는 그림자로 따라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창세로부터 죽임당하신 어린양이시며, 그 손과 발의 못자국은 영원히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에 가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너무 기뻐하면서, 예수님 물 위를 걸으시는 모습을 꼭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오케이 하시고 물 위를 걸어셨습니다. 그리고 빠지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발에 못자국 때문에 물이 새서.
그러므로 예수님이 육신을 입으신 것은 분명한 목적이 있으셨습니다. 십자가에 죽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인간은 죽을 존재들입니다. 영어로 mortal 이라고 합니다. 반드시 죽을 존재, 그것이 인간의 존재를 규정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을 존재인 육신으로 오셨을 뿐 아니라, 죽기 위해 오셨습니다. 세상에 죽는 것을 목적으로 태어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전쟁에 나가는 군인은 죽을 각오를 하고 갑니다.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죽는 것을 임무로 전쟁에 나가는 군인이 있겠습니까? 만일 포로로 잡혔다가 나오면 국민적 영웅이 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포로로 잡히는 것을 목표로 하고 전쟁에 나가는 군인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려고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먼저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마치 유월절 저녁에 죽임을 당함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출하는 어린양처럼, 우리를 위해 죽임당하십니다. 히브리서에는 예수님이 자신을 제사로 드리신 것이 나옵니다.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또한 자신을 완전하고 영원한 제물로 드리셨습니다. 완전한 제사이기에 더이상의 제사가 필요없고 완전히 효력이 있어서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심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의 육신이 죄의 법에 붙잡혀 연약하여서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으니, 예수님은 죄 있는 육신으로 오셔서 육신으로 죄의 법을 멸하셨습니다. 육신이 죽으면 죄의 법에서 해방되듯이, 우리 육신이 예수님과 하나되어 함께 십자가에 죽으면 죄와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어 새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바울에게는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세례받고 죽은 것이 중요합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을 강조하며, 내가 날마다 죽노라 라고 합니다. 이렇게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아나는 것을 통해 새 사람이 되도록 하신다는 뜻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의 의미를 다양하게 알려주십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것을 또 다르게 설명합니다. 요한은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특별히 예수님이 목숨을 버리셨다고 표현합니다. 그것은 요한에게 특유합니다. 이 표현이 처음 나오는 곳은 요한복음 10장입니다. 예수님이, 나는 선한 목자라 나의 양들을 위해 내 목숨을 버리노라 라고 하십니다. 늑대가 양을 해치기 위해 오면, 선한 목자는 목숨을 걸고 싸웁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는 양떼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은 문자 그대로 악한 세력의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시기 위해 죽으심을 말합니다. 똑같은 표현을 베드로가 쓰게 됩니다. 예수님이 곧 제자들을 떠나가신다고 하자 베드로는 내가 주를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예언처럼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번 부인하게 됩니다. 이것은 밤에 예수님을 잡으러 온 군병들이 예수님의 일행과 부딪치는 장면입니다. 군인들은 무기를 들었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칼을 적어도 두 자루 가졌습니다. 충돌하면 많이 다치거나 죽을 수 있는 상황입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은 직접 군인들을 대하시고 잡혀 가십니다. 그런데 오직 요한복음만이, 예수님이 직접 제자들을 보호하시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군인들에게, 너희들이 찾는 나사렛 예수가 나이니, 이 사람들은 가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그 위험한 상황에서 제자들을 물리적으로 보호하시고 그 대신 예수님 자신이 잡혀 가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일이고, 또 우리를 위해 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대신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셨습니다. 지금 우리들도, 당시 제자들에게 닥쳤던 생명의 위협 앞에 있습니다. 그 때 제자들과 군인들의 충돌은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의 충돌이었고, 예수님 당시에도 그것은 언제 위험한 일이 닥쳐도 이상하지 않은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 이후 한 세대가 지난 주후 70년에, 로마군은 예루살렘을 완전히 파괴하고 유대인들을 죽이고 흩을 것입니다. 서로 다른 민족들이 미워하고 싸우고 해치는 이러한 인간의 죄악은 그 때 이후 한번도 그치지 않고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지난 2차대전의 피해가 너무나 커서 한동안은 인간들이 자제하면서 우리 세대가 지나갔습니다. 이제는 2차대전을 친히 겪은 세대가 지나면서, 그 비극을 잊어버린 인간들은 다시 서로를 위협하고 자기 이득만 취하면서 서로 돌보지 않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죄악을 요한은 마귀의 일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시기 위함입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입니다. 우리도 형제를 미워하면 살인자가 됩니다. 여기서 살인자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요한만 쓰는 특이한 형태인데 말 그대로 사람을 죽이는 자입니다. 마귀가 처음부터 살인했다는 것은 가인을 가리킵니다. 가인은 아담과 하와의 아들이면서 인류 첫 살인자로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자 가인은 내가 알지 못합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하고 반문합니다. 원어에서는 “내가” 가 강조됩니다. 내 형제를 지키는 자입니까, 내가? 라는 느낌입니다. 너무나 당당히 말하기에 속을 지경입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다 형제자매를 지키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에서는 원래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는 분입니다. 시편 121편에 우리를 지키시며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 분의 형상으로 지으신 것은, 하나님처럼 우리도 형제자매를 지키는 자가 되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지금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라마다 자기 이익만 내세우며 다른 민족과 국민의 고통은 외면합니다. 나라들마다 자기 이익만 챙기느라 세상에서 고통받는 백성들을 돌보지 않습니다.
바로 이러한 죄악과 위험의 세상에서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위협에 맞서 혼자 당하심으로 제자들을 살려 주시고 보호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너무 어렵게 느껴집니다. 도대체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상황이란 어떤 것입니까? 먼저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사랑의 모습임을 고백합니다. 우리가 서로 나누어야 할 사랑은 단지 일상적인 것만이 아니라, 이 정도까지 되는 것을 바라보는 그런 사랑입니다. 물론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은혜 주시고 능력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다만 그 능력이 무엇인지는 우리가 배웁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사랑으로 군인들을, 자기를 해치려는 악한 무리들을 담대히 맞서셨습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고 참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마귀의 세력에 맞서 이기는 것, 형제자매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결국 사랑입니다.
교회에는 워낙 다양한 성격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는다는 공통점 외에는 하나도 같은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오해하거나 얼굴을 붉히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럴 때 먼저 이해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소한 일로 오해가 일어나더라도, 저 사람은 아닐거야 라고 일단 믿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 신뢰합니다. 혹시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 와도 일단 믿어주고 시작합니다. 그리고 내가 오해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주님처럼 목숨을 바치지는 못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순종하면서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