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행하신 수많은 기적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한적한 광야로 가셨고, 그곳에서 광야 집회가 열렸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의 물고기로 남자만 5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식사를 마친 후, 예수님은 제자들을 배에 태워 먼저 보내시고, 혼자 남아 사람들을 돌려보낸 후 산으로 올라가 밤새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왕으로 추대되는 분위기에 당황했지만, 주님의 명령에 따라 호수 가운데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배가 한 척뿐이었기에 예수님은 어떻게 오실지 의문이었습니다. 한편, 밤이 깊어지고 거센 바람이 불어 파도가 심하게 치기 시작해, 제자들은 배를 조종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습니다.
새벽 4시쯤, 제자들 중 누군가가 멀리서 하얀 형체를 발견했습니다. 물 위에서 다가오는 모습에 모두가 유령이라 생각해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안심하라. 나다.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기적 가운데 이 물 위를 걸으신 사건은 특별했습니다. 이전에는 병자를 고치고 많은 사람을 먹이시는 주님의 기적을 보며, 제자들이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 기적을 통해서는 단순히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이 고백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순간이 바로 이 기적에서 나타납니다.
어두운 밤, 강하게 몰아치는 바람과 파도가 이는 바다 위로 한 사람이 걸어오는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 모습은 창세기 1장과 비슷한 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창조 이전, 땅은 형체가 없고 흑암이 깊은 물 위에 있었으며,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를 운행하셨습니다. 이는 완전한 어둠 속, 아무런 빛이 없는 가운데 거대한 물과 폭풍이 일렁이는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기 직전의 혼돈과 흑암, 물과 바람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신 장면과 연결됩니다. 제자들은 마치 창조의 순간으로 돌아간 듯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후 다시 한 번 기적을 목격합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으로, 태초에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하셨던 그분이 강풍 속에서 바다 위로 걸어오셨습니다. 이 장면은 천지 창조를 떠올리게 하며, 예수님이 창조주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임을 보여줍니다.
성경에서 물은 생명과 심판의 상징으로 나타납니다. 물은 생명의 원천이지만, 물에 빠지면 죽음에 이르듯이 심판의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노아의 홍수와 홍해에서의 심판은 물을 통한 하나님의 경고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 물 가운데서 땅을 나오게 하셨으며, 하늘 위의 물과 아래의 물로 나누셨습니다. 이처럼 물이 창조와 심판의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그것을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세상이 물에서 나와 성립되었다고 말하며, 우리가 믿고 서 있는 이 세상이 영원하지 않음을 상기시킵니다. 하나님께서 물을 바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숨쉬며 살아갈 수 있지만, 그분이 손을 거두시면 우리는 물로 인한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한 번 있었던 노아의 홍수처럼,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으며 우리의 궁극적 소망은 이 세상이 아닌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오늘 제자들은 주님을 따라가다가 예상치 못한 위험을 맞닥뜨렸습니다. 주님은 일부러 그들을 위험 속으로 내보내셨고, 그들이 이를 통해 배우기를 원하셨던 듯합니다. 제자들이 주님 없이 배를 타고 나섰을 때, 큰 파도가 몰아쳐 생명의 위협을 느꼈지만, 그 가운데서 중요한 교훈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태초에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영원한 분이며, 이 세상은 그분과 달리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를 떠올려 보면, 물로 멸망한 세상은 주님이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성경은 이 땅이 불로 멸망할 때를 위해 보존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오시는 모습을 본 베드로는 주님이 맞다면 자신도 걷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베드로는 성미가 급하고 실수도 많은 성격이지만, 그만큼 대담한 믿음을 보인 사람입니다. 물 위를 걷다가 바람을 보고 두려워 빠지긴 했지만, 저는 그를 탓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베드로는 예수님 외의 인간 중 물 위를 걸었던 유일한 사람으로, 믿음이 대단합니다. 물론 주님만 바라보았으면 빠지지 않았을 거라고 할 수 있지만, 인간으로서는 바람을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자연스럽게 두려움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본다고 해도, 온전히 주님만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은 1분도 되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는 언제나 다시 자신을 의식하게 되고, 그 순간 물에 빠질 위험에 처합니다. 그러나 물에 빠진다 해도, 주님이 건져주신다는 사실이 더 중요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물 위를 걷기 시작했고, 그 순간은 매우 큰 의미를 지닙니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살려는 믿음과 순간적인 순종이야말로 우리에게 큰 도전과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 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두려워 말라"고 하실 때, 우리가 그 말씀을 얼마나 지킬 수 있겠습니까? 두려움을 억누르겠다고 다짐한다고 정말 두려움이 사라집니까? 물 위를 걷는 것은 단단하고 안정된 기반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안정과 안전을 원합니다. 가족을 부양하고, 자녀를 교육하며, 미래를 준비하려면 안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 어떻게 부모로서 마음이 편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직업이 필요하고, 매일매일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육신의 생각이 성령을 거스른다고 말합니다. 우리 삶의 모든 계획과 염려 속에서 주님 말씀대로 살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고, 그저 "두려워 말라"는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최소한의 안전과 재산, 자녀의 미래를 위해 계속 염려하고, 계획하며 삽니다. 주님은 부자 청년에게 가진 것을 다 버리고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청년은 염려하며 떠났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예수님은 새와 꽃처럼 염려 없이 아버지께서 입히고 먹이실 것을 믿고 살라고 하셨지만, 우리는 여전히 염려합니다.
이 시간에 다짐해 봅시다. 기도하며 "주님, 내가 염려하지 않겠습니다"라고 결심해 봅시다. 그러나 그 다짐이 얼마나 오래 갑니까? 하루도 가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염려하고, 불안 속에 살아갑니다. 세상의 염려와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은퇴 후에 평화가 올까요? 아닙니다. 세상에서 수고하며 사는 한 우리는 여전히 불안 속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시지만, 우리가 말씀대로 살 수 있습니까? "예"라고 한다면 그것은 교만이 됩니다. "아니요"라고 한다면 그것은 불순종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를 찔러 쪼개어, 우리의 살과 골수를 쪼개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면 우리의 육신은 파괴됩니다. 주님을 만나면 우리는 죽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주님을 죽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 육신의 생각으로 따를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가 그 은혜 없이는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이유입니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우리가 육신의 약함으로 율법을 지킬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아시고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이루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육신의 연약함 가운데 그 아들을 보내셔서 죄 가운데 있는 우리 육신 속에서 죄를 정하시고, 성령을 통해 우리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사는 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때, 자신의 힘이 아닌 주님만을 바라보며 주님께 의지했습니다. 그 순간 성령님께서 베드로를 붙드셨고, 바람 가운데서도 물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향한 순종의 그 한 순간이 얼마나 귀중한지 모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의 모든 순간마다 주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느냐고 물으면, 우리는 매번 자신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주님께 염려를 내려놓고, 오직 그분만을 의지하겠다고 다짐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우리가 순간순간 주님께 나아갈 때마다 원수는 우리를 정죄하고 넘어뜨리려 합니다. 또 실패했다고, 또 죄에 넘어졌다고 끊임없이 정죄하지만, 그것은 귀담아들을 필요가 없는 마귀의 속임수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주님께서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시고, 그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탓하지 않으십니다.
비록 우리가 1년 뒤, 10년 뒤를 염려할지라도, 지금 이 순간에 주님을 의지하며, 순간적인 순종을 드릴 때 주님께서 우리를 붙드십니다. 우리가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같이 주님의 날개 아래로 올라가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이 시간 주님께 순종하는 이 순간마다 주님께서 주시는 힘을 믿으며 함께 기도하겠습니다.